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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3강
주석서의 형성과정과 배경
부처님 말씀을 열심히 공부를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 부처님의 말씀이 널리 전승되리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명상할 때 대상을 꿰뚫어 보는 것이 있는데 경전도 꿰뚫어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경전의 배경, 사상, 가르침 등을 주석서의 도움을 받으면서 꿰뚫어 보는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주석서의 형성배경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주석서를 말할 때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佛敎)의 핵심적인 나라가 스리랑카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주석서의 90%는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이후 미얀마, 태국 등으로 주석서가 건너갔고 이 주석서를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주석서를 썼던 원어가 빨리어(Pāli語) 인데 빨리어는 마가다어(Māgadhī語)입니다. 주석서는 암송시작 때부터 제 1. 2. 3차 결집 때까지 니까야(Nikāya)와 더불어 암송으로 내려왔습니다. 어떻게 암송으로 주석서가 내려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스리랑카의 모국어인 싱할라어(Sinhalese語)로 된 주석서를 봤는데 거기에 신기한 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스님법문 내용을 패엽경에 기록을 한 것으로 2~3시간 한 법문입니다. 초전법륜경에 대한 법문을 그대로 따라(tala 多羅)나무의 잎에 쓴 패엽경(貝葉經)에 기록한 것입니다. 법문 그대로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그 시대에는 암송은 기본이었습니다. 지금 시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지금은 외우는 습관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암송이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암송을 많이 했습니다. 10살에 출가해서 나이가 비슷한 사미 스님들이 한 방에 18명 있었습니다. 이때 모두가 같이 암송합니다. 누가 먼저 외우는지 경쟁도 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외우고 저녁에 큰스님께 암송한 것을 알려드려야 했습니다. 저녁때 까지 외우고 있는 것이 힘든 문제였습니다. 암송의 한 예로서, 출가하여 스님들 머리 깎을 때 께사(kesā 머리털), 로마(lomā 몸털), 나카(nakhā 손발톱), 단따(dantā 이빨), 따쪼(taco 피부) 이렇게 5가지를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순서대로 외우고 또 거꾸로도 외워야합니다. 사념처 수행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을 할 때 우리 몸에 대한 32가지 물질 이름을 순서대로 외우고 다시 거꾸로도 외워야합니다. 거꾸로도 외우는 사람만 합격을 합니다. 외우기는 다 외우는데 거꾸로 외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법구경의 게송 목차를 외울 때 순서대로 외우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여기저기에서 물어봅니다. 예를 들면 1장 5번째 게송의 3번째 문장을 큰스님이 물어 보시면 이것을 알아듣고 그 부분을 독송해야하는데 이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런 전통이 스리랑카에 있었는데 지금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빨리어는 암송위주로 되어 있어서 무조건 외워야합니다. 암송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습니다. 말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을 보기위해서는 외워야 합니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에서 지금도 말로 소통합니다. 그런데 빨리어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스리랑카에는 빨리어 대회가 있는데 앞으로 한국에서도 빨리어로 세미나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스리랑카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빨리어가 사라지는 경우는 암송이 사라질 때라고 생각합니다.
주석서는 처음에 싱할라어(Sinhalese語)로 되어있었습니다. 마힌다장로가 빨리어 경전을 인도에서 스리랑카에 암송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니까야는 빨리어 그대로 있었고 빨리어로 된 주석서는 스리랑카어로 번역했습니다. 주석서는 스리랑카에서 5세기까지 싱할라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700년간 주석서가 스리랑카어로 되어 있었는데 주석서를 다시 빨리어로 만들기 위해 인도에서 붓다고사스님이 스리랑카에 오셨습니다. 그때 당시 인도에서는 빨리어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인도에 18개의 부파불교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상좌부 등 4개 부파는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佛敎) 전통과 비슷한 부파였고, 나머지는 대승불교 부파였습니다. 이때 대승불교(大乘佛敎 Mahāyāna Buddhism)의 영향과 힌두교 영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인도 남쪽에는 상좌부 불교가 강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대승불교의 창시자 격인 나가르주나(Nāgārjuna) 스님은 인도의 남쪽 분입니다. 원래 인도의 남쪽은 상좌부 쪽이었지만 힌두교와 대승전통이 강해지면서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가 사라지게 되는 과정을 붓다고사 스님이 보셨습니다.
주석서의 전승은 세 과정으로 나눕니다. 첫 번째 기원전 1세기까지 암송으로 이어오다가 주석서와 경전이 기록될 때까지입니다. 두 번째는 기원전 1세기 패엽경에 기록 후 5세기까지 싱할라어 전통의 불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5세기이후 지금까지 빨리어 전통이 다시 있게 되었습니다. 스리랑카에 싱할라어로 된 주석서가 28개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만 있고 2개의 원문만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빨리어로 기록되면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주석서는 마하앗타(MahāAṭṭha)인데, 마하(Mahā)는 크다는 뜻이고 앗타(Aṭṭha)는 주석이라는 말입니다. 경전인 디가니까야에 나와 있고 율장과 앙굿따라 니까야에도 나와 있습니다. 앗타까타(Aṭṭhakathā)도 주석서를 뜻합니다.
주석서에는 경전을 중심으로 주석서를 만들었다고 나옵니다. 마하빠짜리앗타까타 2개는 율장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싱할라어 주석서에서 빨리어로 다시 만들어졌고 이 때 까지 싱할라어로 주석서가 이어져 왔습니다.
싱할라 문자로 옳긴 경전들을 왜 빨리어로 다시 옮겼는가?
주석서는 약 700년간 스리랑카어인 싱할라(Sinhalese) 문자로 기록되어 내려왔습니다. 싱할라 문자로 된 주석서를 왜 빨리어로 바꿨냐는 얘기가 있습니다. 5세기경 인도에서는 종파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주석서에 있는 붓다고사 스님의 설명을 보면 부처님 당시부터 주석서를 만들었던 분들에 의하여 내려왔던 불교전통을 내부 종파들의 생각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빨리어로 다시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석서를 빨리어로 만들지 않으면 중간에 없어질 수도 있고, 왜곡될 수도 있고 해서 그랬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빨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경전을 이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빨리어로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또 하나는 모든 부처님 말씀을 이 땅에 오래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 주석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붓다고사(Buddhaghosa)스님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주석서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붓다고사(Buddhaghosa) 스님의 붓다(Buddha)는 부처님이라는 뜻이고, 고사(ghosa)는 목소리라는 뜻인데 시끄럽다는 뜻도 있습니다. 부처님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고사(ghosa)를 성으로 썼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때 상좌부인 데라와따(Theravāda) 스님이 붓다고사 스님에게 스리랑카로 가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남인도에는 상좌부불교가 약해지고 부처님전통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설일체유부 등이 경전을 산스크리어로 만들면서 힌두교의 전통이 많이 스며들었습니다. 그 시대에 아비담마 불교가 강해지고 니까야가 약해진 시대였습니다. 각 종파마다 아비담마가 나오게 되면서 아비담마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부처님의 전통적 가르침이 무시되고 스리랑카 상좌부 전통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불교가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상좌부 쪽 스님들이 생각한 것입니다.
인도의 여향을 많이 받다보니 스리랑카에서도 대승불교가 강해졌습니다. 무외산사와 아비야기리가 있었는데 상좌부는 대사파전통의 마하위하라가 있었습니다. 스리랑카 불교계에서는 중유(中有)에 대한 문제와 간땁바(gantabba)에 대한 문제가 경전에 있다거나 없다는 것으로 서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상좌부 쪽 마하위하라 사람들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유가 있다고 하면 부처님이 분명히 밝히셨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당신들은 왜 인도의 설일체유부의 말을 자꾸 주장하는가 하는 등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때 스리랑카는 12년간 힌두교의 식민지였는데 당시 왕이 12년간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왕이 당시 아비야 왕입니다. 아비야 왕은 자신을 도와준 종파를 도와주고 싶어서 처음으로 승가의 허락 없이 왕이 다사라는 스님에게 사원을 지어 보시했습니다. 승가에서는 개인적으로 재산을 받으면 안 되는데 개인에게 올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외산사파인 아비야기기(Abhayagiri)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비야 왕이 인도 왕에게 쫒기면서 도망가는 상황에 있었는데 자이나교 수행자가 ‘시커먼 놈이 도망간다’고 하면서 약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 일로 왕이 마음의 상처가 깊었습니다. 12년 후 디사스님 등의 도움으로 왕이 되면서 자이나교 사원을 없애버리고 아비야기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무외산사파 전통이 생긴 것입니다. 마하위하라에 있을 때는 은밀하게 인도와 교류했는데 여기 와서는 대놓고 교류를 하면서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됩니다. 또 이들 속에서도 대승적인 입장을 강하게 받아들이고 관세음보살, 지상보살 등을 모셔 오면서 내부 갈등이 생겨 이들에게 ‘너희들은 가라 우리와 같이 있지 말고 가라’고 하면서 제따와나가 생깁니다. 제따와나는 대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하위하라, 무외산사, 제따와나 등 세 사찰은 다 대학이었는데 규모가 500에이커입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왕궁의 주변에 3개의 대학이 있었던 것인데 1개가 500에이커로 총 1500에이커에 불교전통을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무외산사파는 왕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강해졌으며 대중적 인기도 많아졌고 대승적 보살행위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해탈도론이라는 위뭇띠 막가(Vimutti magga)라는 책을 씁니다. 위뭇띠(Vimutti)는 해탈이고 막가(magga)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무외산사파 전통은 빨리어로 공부하며 토론하고 논쟁하는 학승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위뭇띠 막가(Vimutti magga)의 원문은 사라지고 한문으로 번역된 해탈도론은 전해지고 있습니다, 붓다고사 스님이 쓰신 청정도론인 위수디 막가(Visudhi Magga)는 해탈도론인 위뭇띠 막가(Vimutti magga)를 뛰어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상좌부 전통에 위기가 왔습니다.
그 때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 스님들은 수행중심이어서 교학적인 부분이 약했습니다. 토론에 약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토론학승들이 무외산사파의 본거지인 아비야기리(Abhayagiri)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렇게 상좌부전통이 약해지면서 상좌부에서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훌륭한 전통을 지키면서 법을 잘 아는 학승을 찾고 있었는데 이때 붓다고사 스님이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 사원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스리랑카에서는 붓다고사 스님을 한 번에 받아주지는 않았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나오는 게송을 하나를 주고 책을 쓰라고 하면서 이 스님이 실력자인지 확인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 게송이 상윳따니까야에 있는 ‘엉킴 경’입니다.
상좌부 전통이 다시 일어나다.
엉킴 경(S1:23)
Jaṭā-suta
Sīle patiṭhāya naro sappañño,
Citaṃ paññañca bhāvayaṃ;
Ātāpī nipako bhikkhu,
so imaṃ vijayaye jaṭaṃ.
실레 빳띳타야(Sīle patiṭhāya)는 계에 굳건히 서 있는 것이고, 나로 삽빤뇨(naro sappañño)는 지혜로운 사람이, 찌땅(Citaṃ)은 마음인데 선정을 말할 때도 사용합니다. 찌땅 빤냐(Citaṃ pañña)는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명상하는 것을 빨리어로 바와나(bhāvanā)라고 합니다. 바와나(bhāvanā)는 닦는다는 뜻으로 선정과 지혜로써 닦는다는 뜻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닦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따삐 니빠꼬 빅쿠(Ātāpī nipako bhikkhu)의 니빠고 빅쿠는 부지런한 사람이며, 아따삐는 전진하는, 현명한의 뜻입니다. 소 이망 위자야예 자땅(so imaṃ vijayaye jaṭaṃ)에서 소 이망의 소는 비구를 뜻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뇌를 얘기한 것입니다. 번뇌적인 문제를 풀어낸다는 뜻입니다.
“계율에 굳건히 서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
전진하는 현명한 비구는
번뇌의 엉킴을 풀어낸다.”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을 주면서 계, 정, 혜를 중심으로 논문을 쓰라고 한 것입니다.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 스님께 ‘계, 정, 혜를 중심으로 책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당신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청정도론인 위수디 막가(Visudhi Magga)를 3번 썼다고 합니다. 3번을 써 왔는데 3번을 모두 똑같이 썼다고 합니다. 붓다고사 스님이 불교를 해(害)하려고 온 것인지 진짜 불교를 도와주러 온 것지를 점검한 것입니다. 위수디 막가에 대해 비평가들 일부는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사파 입장을 붓다고사 스님이 잘 반영했다는 것이 대부분의 입장이었습니다.
스리랑카는 논쟁하는 나라입니다. 이런 배경으로 보면 붓다고사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미얀마에서는 붓다고사스님을 아라한으로 보고 청정도론을 경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하나의 위대한 논문으로 봅니다.
붓다고사스님에 대한 비판은 전통문제였습니다. 만약에 서양 사람이라면 서양전통을 강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붓다고사스님은 인도사람이었기 때문에 인도사상이 일부 나타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카스트제도 의식과 형식이 일부 들어있습니다. 가끔씩 그런 형식들이 있습니다. 대사파인 마하위하라 전통은 붓다고사스님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고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싱할라어로 된 모든 주석서를 맡기고 빨리어로 번역하게 하였습니다.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서 번역
나눠드린 자료에 보시면 경장. 율장. 논장까지 번역한 것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명한 주석서는 위수디 막가입니다. 청정도론은 삼장을 중심으로 쓰여 졌습니다. 또 디가, 맛지마, 상윳따, 앙굿따라니까야의 주석서까지 붓다고사 스님께서 번역했습니다. 청정도론은 붓다고사 스님께서 만든 것이고 니까야 주석서는 붓다고사스님이 만들지 않고 번역한 것입니다. 본인이 글자 하나도 넣지 않았다고 합니다. 빠알리어 원문은 사라지고 스리랑카어로 되어 있던 주석서를 빠알리어로 붓다고사 스님께서 번역했습니다.
주석서 앗타까타(Aṭṭhakathā)를 ‘아짜리야와다(ācariyavāda)’라고 합니다. 아짜리야와다(ācariyavāda)는 스승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아짜리야(ācariya)는 스승이고, 와다(vāda)는 말씀입니다. 제1, 2, 3차 결집에서 합송한 말씀들이 암송으로 내려왔고 빨리어에서 스리랑카의 싱할라어로, 다시 5세기에 빨리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붓다고사 스님 이후 대사파는 나중에 산스크리트어 문헌의 영향도 많이 받게 되는데. 10세기에는 아비야기리(Abhayagiri)와 제따와나 전통을 없애고 마하위하라 전통으로 통합하였습니다. 빨리어 전통만 지켜야 된다고 하면서 설일체유부 등을 공부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만들고 마하위하라 전통 하나로 전파시켰습니다. 스리랑카는 항상 논쟁을 하는 나라입니다. 마하위하라는 경전과 수행만 신경 썼지만 불교계에서는 자꾸 논쟁을 일으키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좌부전통으로 통합된 데에는 대승불교의 영향을 우려한 스리랑카왕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따와나파는 대승불교의 관세음보살 사상 등을 도입하고 스님들이 일반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호수를 만들고 농사를 짓는 것을 도와주는가 하면 약사스님들도 생기고 사주 봐주는 스님들이 생겼습니다. 이런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기에 도움을 주는 스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스님들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때 왕이 나서서 ‘전통을 지키고 경전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고 왜 스님들이 이런 일을 하시는가?’ 하면서 10세기경에 다시 상좌부 전통으로 통합하게 되었습니다. 주석서를 공부하려면 이런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에는 주석서가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주석서는 붓다고사 스님이 만든 주석서 입니다. 그 주석서들을 부처님 성도 후 2500년에 싱할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 번역과정이 30년 걸렸는데 번역에 120명의 스님들이 참여했습니다.
제 1, 2, 3차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1차는 번역을 하고, 2차는 심사를 하고, 3차는 종정스님을 비롯한 원로스님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일이 모두 30년이나 걸렸습니다. 국가의 후원으로 번역했습니다. 거기에서 빨리어 단어들 몇 개는 번역하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예를 들면 닙바나(Nibbāna), 빠띳짜 사뭇빠다(paṭicca-samuppāda) 같은 단어들입니다. ‘이 들의 뜻을 알고 싶으면 빨리어를 공부해야 한다. 그 정도의 열의가 있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열반을 ‘소멸’이라고 번역하면 다음에 또 다른 말로 번역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닙바나(Nibbāna)로 놔두기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 사뭇빠다(paṭicca-samuppāda)도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번역하게 되면 개인의 생각이 들어갈 수 있어서 스리랑카에서는 2019년에 개인의 경전번역을 금지하였습니다.
스리랑카의 한 스님이 혼자 번역한 예가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한테는 반응이 좋았는데 경전을 공부한 사람들이 보니 소설같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 스님이 단어를 부드럽게 하려고 이런저런 단어를 붙였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는 ‘재가자’여 라고 하셨는데 이 스님은 ‘공덕을 지으신 재가자여’라고 하였습니다. ‘공덕을 지으신’이란 단어는 경전에 없습니다. 후에 보니 그 재가자가 안 좋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좋다가 나중에는 안 좋게 되었습니다. 앞뒤가 안 맞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혼자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생각을 넣게 됩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에서는 혼자 번역해서 볼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면 안 됩니다. 같이 공부할 수는 있지만 판매하거나 기부하는 것은 안 됩니다.
단체로 하는 번역이 한국에서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들이 시발점이 되어서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르침이라는 것은 번역에 따라서 잘 못 될 수도 있고 달라질 수도 있고 그런 문제가 많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석서 성립의 4가지 이유
1. 글자들이 제대로 구성되어 있는지 보기위해서, 예를 들면 삐와띠(pivati)는 ‘물마시다’라는 뜻입니다. 삐바띠(pibati)도 ‘물마시다’입니다. 삐바띠(pibati)는 사투리인데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릅니다. 제가 한국에 와보니 어떤 사람들은 위빠사나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비파사나라고 합니다. 주석서에는 이런 도움을 주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2.경을 설하신 배경, 예를 들면 사왓띠는 어떤 도시였고 어떤 상황에서 법문을 하셨는지 등이 주석서에 나와 있습니다.
3.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꼬살라왕이 부처님을 만나서 애기한 내용만 경전에 나와 있는데 코살라 왕이 누가 시켜서 갔는지 때려서 갔는지 등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또는 큰 스님이 미얀마에서 한국에 오셨는데 비행기를 타고 왔는지 버스타고 왔는지, 겨울에 오셨는데 신발을 신지 않으시고 오셨는지 등의 내용이 있습니다.
4.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서 가사를 구하러 가는 중에 ‘소한테 맞아서 죽었다’라고 소에 맞아서 죽었다는 이야기만 경전에 나옵니다. 경전에는 화장했다 뭐했다는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주석서에 나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석서는 경전보다 아름답게 화려하게 예쁜 옷을 입힌 것입니다. 꼭 필요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왜 오른손으로만 밥을 먹고 왼손으로 먹으면 안 되는지, 인도의 사상 등은 주석서를 통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주석서를 만들었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보시면 부처님 말씀이 사라지는 이유를 2가지로 말씀하십니다.
1. 잘못된 뜻을 가지는 것
2. 해석과 번역을 잘 못하는 것
이 두 가지로 인하여 불법이 사라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유행하는 단어나 가르침을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요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요가와 불교를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요가명상을 좋아한다고 해서 같이 연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연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앞으로 SNS 등을 통해 누구나 자기 생각 올릴 수 있고 나도 모르게 왜곡된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니까야와 주석서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에서 주석서에 나오는 중요한 게송이 있는데 다음 강의에 연결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미얀마에서는 해탈도론보다 청정도론을 인정하고 경전으로 받아들입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청정도론인 위수디 막가(Visudhi Magga)는 주석서입니다. 붓다고사 스님에 대한 심사논문입니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과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명상주제 몸의 32부분 | |||||
번호 | 빨리 | 발음 | 번호 | 한글 | 빨리 |
1 | kesā : 머리털 | 께사 | 17 | anta : 장간막(내장) | |
2 | lomā : 몸털 | 로마 | 18 | udariya : 위속에 소화되지 않은 음식 | 우다리야 |
3 | nakhā : 손발톱 | 나카 | 19 | karīsa : 똥 | 까리사 |
4 | dantā : 이빨 | 단따 | 20 | pitta : 쓸개즙 | 삣따 |
5 | taco : 살갗 | 따쪼 | 21 | semha : 가래 | 셈하 |
6 | maṃsa : 살 | 망사 | 22 | pubba : 고름 | 뿟바 |
7 | nhāru : 힘줄 | 나하루 | 23 | lohita : 피 | 로히따 |
8 | aṭṭhi : 뼈 | 앗티 | 24 | seda : 땀 | 세다 |
9 | aṭṭhimiñjā : 골수 | 앗티민자 | 25 | meda : 기름, 비계, 지방 | 메다 |
10 | vakkaṃ : 콩팥 | 왁깡 | 26 | assu : 눈물 | 앗수 |
11 | hadaya : 염통 | 하다야 | 27 | vasā : 비계, 액체지방. | 와사 |
12 | yakana : 간 | 야까나 | 28 | kheḷa : 침 | 켈라 |
13 | kilomaka : 근막(늑막) | 낄로마까 | 29 | siṅghāṇikā : 콧물 | 상가니까 |
14 | pihaka : 지라(비장) | 삐하까 | 30 | lasikā : 관절활액 | 라시까 |
15 | papphāsa: 허파 | 빱파-사 | 31 | mutta : 오줌 | 뭇따 |
16 | anta-guṇa: 창자 | 아따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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