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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철학으로 본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배제
서론: 난민 한나 아렌트의 경험과 네 가지 개념
유대계 독일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나치 정권을 피해 망명한 난민으로서 정치적 귀속의 상실을 절감했다. 독일 국적을 박탈당해 무국적 난민이 된 아렌트는 **“인간의 권리는 국가라는 공동체에 소속될 권리에 기반한다”**고 보았다
. 이는 그 유명한 “권리를 가질 권리” 개념으로, 어떤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 즉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기본 권리를 보장받을 자격을 뜻한다
. 아렌트는 국적을 상실한 난민들이 법적 권리의 주체에서 배제되는 현실을 보며, 추상적 인권만으로는 인간 존엄을 지킬 수 없고 권리를 가질 권리, 곧 어딘가에 속할 권리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임을 역설했다
. 난민이었던 그녀 자신의 체험이 이러한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아렌트는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나치 전범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새로운 모습을 통찰했다. 그는 악행의 가해자들이 특별히 사악한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소시민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 등의 전범들은 잔혹한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상부 명령에 복종”**하는 관료형 인간이었다
. 600만 명 유대인의 죽음 뒤에 서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부한 무능한 한 평범인이었으며, 엄청난 악은 뿔 달린 악마가 아닌 우리 속의 진부하고 사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렌트는 역설한다
. 실제로 **“끔찍한 절대악은 생각하지 못함(무사유)과 판단하지 못함에서 생겨난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 즉 일상의 무비판적 복종과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거대한 악을 가능케 하는 토양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렌트는 유대인 소수자로서 살아온 경험 속에서 **‘파리아(pariah)의 조건’**에 주목했다. 그는 기존 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의식적으로 주변인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의식적 파리아” 개념을 제시했는데
,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받는 사회적 억압에 저항하면서도 집단 정체성에 안주하지 않고, 그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 아렌트에게 의식적 파리아는 단순한 희생자나 동화주의자가 아닌, 주체적 행위 능력을 지닌 소수자로서, 정체성의 정치를 쇄신할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는 유대인 지식인들이 자기 소수자성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세상과 적극 교류했던 전통(예: 하인리히 하이네, 버나드 라자르 등)을 높이 평가하며, 주변인의 관점을 의식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보편적 해방정치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아렌트 정치철학의 핵심 조건은 “인간다움의 조건으로서의 다원성”, 즉 **복수성(plurality)**이다
. 인간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세상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정치가 성립하며, 이를 아렌트는 복수성이라고 불렀다. 복수성은 “사람들 사이에 (in-between) 공간이 있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하며
, 인간 사회는 동질적인 한 덩어리가 아니라 각기 다른 관점들이 소통을 통해 얽혀 다각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장이라고 보았다
. 서로 같지 않은 사람들이 말과 행동으로 공동 세계를 구축하는 것, 바로 여기에 인간의 자유와 정치의 가능성이 있다. 전체주의는 이러한 복수성을 파괴하고자 하나, 아렌트는 다양성 그 자체를 인간 존재의 조건이자 정치의 미덕으로 여겼다
.
이렇듯 권리를 가질 권리, 악의 평범성, 의식적 파리아, 복수성이라는 네 가지 개념은 아렌트 사상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개념들을 철학적 도구로 삼아 한국 사회에 내재한 구조적 모순과 배제의 현상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한나 아렌트의 시각을 통해 한국의 현실 – 난민·탈북민·이주노동자·결혼이주여성·청년·장애인 등 다양한 계층과 집단이 겪는 소외 – 을 성찰함으로써, 우리의 정치·사회 구조를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볼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 양극화, 관료주의적 정치와 책임 회피, 획일적 교육과 사유 부재, 문화적 동질성 강박과 외국인 혐오 등 여러 부문의 문제를 아렌트 철학과 연결 지어 고찰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필요한 “권리를 가질 권리”의 재구성과 다원적 공존의 방향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본론 1: 아렌트의 개념으로 보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1) 경제적 모순: 부동산 불평등과 노동 양극화 – 한국 사회에서 경제구조의 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자산 불평등 심화로 인해 주거 취득은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아닌 세습되는 특권이 되고 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은 웬만하면 10억 원을 훌쩍 넘겨 청년 세대는 내 집 마련은커녕 결혼조차 포기하는 실정이다
. 실제로 34세 이하 청년의 80% 이상이 미혼이며, 그 주된 이유로 **“결혼자금 등 경제적 여력 부족”**을 꼽았다
. 부동산을 통한 부의 축적은 상위 계층에 집중되고, 집 없는 다수 청년층은 “헬조선”을 자조하며 미래를 체념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원래 아렌트는 난민의 무권리 상태를 지적했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경제적 토대의 부재가 곧 정치적 주권 상실로 이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안정된 주거와 생계 기반 없이 법적으로 시민이라 한들, 실질적으로 정치 공동체에 평등한 구성원으로 참여할 여건을 갖추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이 세계를 갖는 조건으로서 경제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면, 명목상 시민권이 있어도 권리를 행사하기 힘들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거권과 생존권의 보장은 현대적 “권리를 가질 권리”의 핵심으로 대두된다. 한국 사회는 부동산 투기와 불로소득에 편중된 구조를 개혁하여, 모든 계층이 세계에 뿌리내릴 수 있는 기본 권리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아렌트라면 누구나 정치·사회에 나타나 발언하고 활동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의 삶의 터전이 보장되어야 함을 강조할 것이다.
노동시장의 양극화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비정규직, 정규 고용과 특수고용·플랫폼 노동 사이에 권리의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다. 정규직은 법과 단체협약으로 보호받지만,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는 해고와 산업재해에 취약한 2등 시민처럼 취급된다. 이주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하여, 고용허가제로 사업장 변경의 자유도 없이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E-9 비자 이주노동자 중 31.2%가 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할 정도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대우가 빈번하다
. 임금 체불, 장시간 노동, 폭염이나 한파 속의 열악한 숙소 등 인간 이하의 처우가 반복되고 있다. 2020년 겨울 경기도 포천에서는 한 캄보디아인 노동자가 비닐하우스 기숙사에서 한파를 견디다 숨진 사건이 발생했는데, 최근 법원은 해당 노동자 속헹 씨의 사망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며 “정부가 이주노동자의 기본권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판결하였다
. 이것은 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며, 농어촌과 산업현장에서 현대판 노예와 같은 착취가 구조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이러한 노동 양극화는 아렌트의 눈에 **현대 사회의 ‘무국적자’**를 양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법률상 시민권이 있더라도, 경제 권력과 제도적 보호의 공동체에서 배제되면 실질적으로 권리를 가질 권리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는 노동권의 보편적 보장과 사회안전망 확충을 통해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인간다운 삶과 정치 참여의 기반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권리를 가질 권리의 한국적 의미는 바로 경제적·사회적 약자도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으로 존중받는 권리로 확대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2) 정치 시스템의 모순: 관료주의와 책임 회피 – 한국의 정치·행정 문화에는 관료제적 형식주의와 책임 회피의 풍토가 뿌리박혀 있다. 정책 실패나 사회적 재난이 발생해도 누구도 진정한 책임을 지지 않고 “절차상 문제없음”을 강조하거나,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미루는 일이 다반사다. 이러한 행태는 아렌트가 경계한 **“악의 평범성”**과 맞닿아 있다. 악의 평범성이란 거대한 악이 사실은 특별히 악독한 개인이 아닌, 사유하지 않는 수동적 행태에서 발생함을 의미한다
. 한국 관료사회에서 자주 목격되는 탁상행정과 매뉴얼 신봉주의는 관료들을 **“아무 생각 없는 공무원”**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 각종 인허가 비리나 안전 규정 무시는 개인의 일탈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규정만 지키면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분위기, 일어난 결과에 대해 상부 지시와 절차를 핑계 대며 스스로 생각하길 포기하는 태도가 자리한다. 이는 아이히만이 “나는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기 행위를 합리화한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 관료주의 체제 하에서 각자 주어진 역할만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누구도 전체적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면, 시스템 자체가 악을 양산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 책임기관들의 조직적 무책임, 코로나19 방역 과정에서의 일부 비합리적 행정조치 등이 그런 사례로 거론될 수 있다. 아렌트 철학에서 정치란 공동 세계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고 함께 판단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한국의 닫힌 관료문화는 오히려 정치를 “무사유” 상태로 만들고 있다. 책임을 지는 주체가 부재한 구조에서는 잘못된 정책이 반복되고도 개선되지 않으며, 국민은 정치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이것은 결국 시민들이 **정치 공동체의 주인으로서 가지는 권리(주권)**를 잠식하는 결과를 낳는다. 진정한 민주공화국이라면 관료들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판단할 책무를 느끼도록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정치에는 양심과 성찰, 개인적 책임의 감각을 불어넣는 개혁이 절실하다. 관료제는 필요악일 수 있으나, 인간의 얼굴을 한 관료제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교육 체계의 모순: 획일성과 비판적 사고의 부재 – 한국의 교육은 세계 최상위권 학업 성취도를 자랑하지만, 그 이면에 획일주의와 주입식 문화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 일찍부터 정답이 정해진 시험공부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질문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받을 기회를 잃곤 한다
. 실제로 한 교육평론은 *“한국 교육은 정답 중심 교육이라는 구조적 한계가 뚜렷하며, 학생들은 창의적으로 질문하고 사고하기보다 정해진 답을 빠르고 정확히 찾는 데 길들여져 있다”*고 지적한다
. 아렌트가 보기에 이러한 교육은 ‘사유 불능의 인간’을 양산할 위험이 있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의 위험성을 역설했고
, 만년에 집필한 <정신의 삶>에서는 인간에게 **사유(생각함)**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교육은 새로운 세대에게 세계를 소개하는 일이자, 공동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길러주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실은 지나치게 획일적 규율과 암기 위주 학습에 치우쳐 비판적 판단력과 다원적 관점 형성能力을 억누르고 있다. 토론과 에세이보다 객관식 시험 점수가 중시되고, 교사의 권위에 이견 없이 따르는 풍조가 만연하다. 이는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정치의식 수준과 사회문제에 대한 창의적 접근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관점의 공존을 가르치고 복수성의 가치를 내면화해야 할 학교가 오히려 동질적인 사고방식만을 주입한다면, 졸업 후 사회에 나온 세대가 다름을 인정하고 토론하는 민주 시민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아렌트의 정치철학에서 교육은 민주시민 양성과 직결된다. 교육 현장이 소극적 복종이나 경쟁적 개인주의만 가르친다면, 이는 사회 전체의 사유 빈곤으로 이어져 결국 악의 평범성이 나타날 토양이 될 수 있다. 반면 비판적 사고와 자기 판단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은 악의 예방접종과도 같다. 따라서 한국 교육 체계는 획일성을 벗어나 학생 개개인이 질문하고 사고하도록 장려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지식 암기 위주의 ‘정답 교육’에서 **문제 제기와 토론 중심의 ‘질문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바꿈으로써, 미래 세대가 생각할 줄 아는 시민,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시민으로 거듭나게 해야 할 것이다.
4) 문화적 모순: 동질성 강박과 외국인에 대한 배제 – “단일민족” 신화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동질성에 대한 강박은 이주민과 소수자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이어져왔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다문화 사회로 급속히 진입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은 ‘우리’와 ‘외부자’를 구분 짓는 경계의식을 강하게 지닌다. 2018년 예멘 난민의 제주도 입국 때 쏟아진 거센 반대 여론, 코로나 시기 일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희생양 취급 등은 이러한 **외국인 혐오(xenophobia)**의 단면을 드러낸다.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과반 이상이 일상생활에서 외국인 이민자와 섞여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다고 말했으나 정작 **“외국인 이민자가 늘어나면 사회문제가 증가할 것이다”**라는 문항에는 63%가 동의하는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 겉으론 포용적인 듯해도 속으로는 두려움과 편견이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내 자녀가 이민자와 결혼하는 것에는 상당수가 꺼림칙해하여, ‘가까이 두지는 않았으면’ 하는 심리가 드러났다. 이러한 태도는 아렌트의 “복수성” 개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아렌트는 인간 세계의 본질이 다양한 출신과 관점을 지닌 이들의 공존에 있다고 보았지만
,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획일적 국민형을 이상화해 왔다. 그 결과 다문화 가정, 외국인 노동자, 난민 등에 대한 제도적 지원은 늘었어도 문화적 포용성과 상호 존중의 수준은 여전히 부족하다. 예컨대 한국인 배우자와 결혼한 결혼이주여성 10명 중 4명은 가정폭력을 겪었음에도 체류자격이 남편에게 달려 있어 쉽게 신고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 “남편 동의 없이는 국적 취득이 어려운 현실” 때문에 폭력에 노출돼도 참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 이는 법적·제도적으로 여성 이민자들이 남편에게 종속됨으로써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외국인 주민이 4%를 넘어서고 다문화 가정 자녀가 증가하는 현실에서, 여전히 이방인을 잠재적 위험요소로 취급하거나 동등한 이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회 통합은 요원하다. 아렌트 철학은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한국의 ‘공동 세계’는 얼마나 열려 있는가? 단일한 정체성만을 고집하는 사회는 복수성의 부정이며, 이는 전체주의적 경향의 씨앗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는 문화적으로 타자에 대한 환대와 이해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다양성에 대한 공포를 넘어 다양성에서 오는 풍요를 깨닫는 성찰이 필요하다. 난민과 이주민, 소수자도 같은 세계를 함께 만드는 동료 시민임을 인정하고, 서로 말을 건네고 이야기를 공유하는 다원적 공론장을 키워야 할 것이다.
본론 2: 배제와 차별의 일상화, 그리고 정치적 무사유
앞서 살핀 구조적 모순들은 결국 현실에서 소외와 배제의 일상화로 나타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조리한 현상이 대다수 국민에게 “평범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이는 다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개념과 연결된다. 악의 평범성은 거창한 악당보다, 주변의 보통 사람이 무감각하게 가담하는 일상 속의 악을 지칭한다
.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차별과 혐오의 실천들을 보면, 많은 경우 특별히 악의적인 “악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중이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분위기에 편승함으로써 지속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냉소와 혐오를 보자. 2018년 제주에 온 예멘 난민 500여 명을 두고 터져 나온 격렬한 반대 여론은, 상당수 국민이 난민을 잠재적 테러범이나 범죄자 취급하며 수용을 거부한 사건이었다. 이는 난민 각각의 사연이나 인간적 권리에 대해 성찰해보려는 시도 없이, 막연한 공포와 편견에 따라 **“우리 사회를 어지럽힐 타자”**로 낙인찍은 집단적 행동이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70만 명 넘게 서명하며 난민 수용 반대를 외친 것은, 일종의 민주적 참여처럼 보였지만 사실 타인의 권리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이 대중적으로 표출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누적 2.7%에 불과해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며
, 수많은 난민 신청자들이 사실상 무권리 상태로 장기간 방치되고 있다. 이들은 생계 활동도 교육·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반쯤 존재를 지워진 인간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다수 시민에게 난민 문제는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쉽게 잊혀지곤 한다. 이러한 사회적 무관심과 망각이야말로 아렌트가 경고한 악의 평범성의 표징이다. 우리가 난민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그저 숫자로만 대할 때, 권리를 가질 권리에서 배제된 자들의 고통은 은폐된다. 적극적인 가해는 아니더라도, 주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방관과 침묵 역시 악의 회로에 참여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
탈북민에 대한 시선에서도 일상의 배제를 엿볼 수 있다. 북한이탈주민은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현실에서는 취업, 인간관계 등 여러 면에서 편견의 장벽을 마주한다. 일부 남한 주민들은 탈북민을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거리 두거나, 정치적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한다. 탈북민 고용률은 60% 남짓으로 일반 국민 평균보다 낮고, 실업률은 7% 안팎으로 전 국민의 두 배 수준이라는 조사도 있다
. 월평균 임금도 남한 주민 평균 대비 훨씬 적은 약 178만원 선으로 나타나, 경제적 응집도에서도 이들은 주변화되어 있다
. 이런 현실 속에서 상당수 탈북민들은 자신이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간다. 직장에서나 이웃 관계에서 정체성 드러내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둔감하다. 탈북민에 대한 냉소적 인터넷 댓글이나 근거 없는 낙인(“간첩이 아니냐”는 식의 음모론)이 지속되는 한, 이들에 대한 구조적 배제는 해소되기 어렵다. 평범한 시민들이 이런 편견에 가담하거나 침묵으로 묵인한다면, 그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의 한 양상이다. 아렌트라면 “생각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웃을 타자화하는 도덕적 실패를 지적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탈북민을 동등한 인간과 시민으로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무심코 차별적 농담에 웃고 넘기며 그들을 투명 인간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사회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업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처참한 처우를 받는다는 보도가 잇따르지만, 대중의 관심은 순간적인 분노에 그치고 곧 식어버린다. 가령 앞서 언급한 캄보디아 노동자 비닐하우스 숙소 사망 사건 이후에도 비슷한 주거 환경의 이주노동자들이 여전히 많음에도,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처지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농촌 인력 부족하니 어쩔 수 없다”, *“힘든 일 안 하려는 한국인 대신해주니 고맙다”*는 식의 막연한 인식 뒤편에, 그들이 겪는 인권 침해에 대한 구체적 상상력과 연대의 노력은 부족하다. 많은 국민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경제에 필요하니 받아들이는 존재 정도로만 여기고, 그들이 우리와 동등한 권리를 지닌 노동 주체라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러한 도구적·시혜적 시각은 결국 일상의 차별을 당연시하게 만든다. 이주노동자들이 산업재해에 더 많이 노출되고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거나, 임금 체불과 폭언에 시달려도 호소할 데 없는 현실이 반복된다
. 이는 구조적 폭력이자, 다수의 묵인 하에 이뤄지는 “평범한” 악행이다.
결혼이주여성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남성과 가정을 꾸린 수만 명의 결혼이주여성들이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가정폭력, 경제적 착취, 고립 등을 겪고 있다
. 앞서 인용한 통계처럼 10명 중 4명은 가정 내 폭력 피해를 경험했으며, 그럼에도 남편의 신원보증 없이는 체류자격 유지가 어려워 폭력을 참는 경우가 많다
. 이런 현실은 충격적이지만,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수면 아래 두려는 경향이 있다. 몇 년 전 전남 영암에서 베트남 출신 아내를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 영상으로 공개되어 파문이 일었을 때에야 비로소 대책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 그 후로도 근본적 구조—결혼이주여성의 체류권을 남편에게 종속시키는 제도—에는 큰 변화가 없다. 이는 다수 사회 구성원이 이들의 고통을 나와 무관한 일로 방치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 *“억울하면,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내뱉으며 피해 여성들을 궁지로 모는 현실을 떠올려 보라
.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타인의 인권에 대한 성찰 없이 굳어진 편견이 그러한 말과 행동을 낳는 것이다.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생각의 부족이 악을 평범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더 나아가 청년 세대와 장애인에 대한 배제도 눈여겨봐야 한다. 청년층은 앞서 본 대로 경제적·사회적 어려움 속에 N포세대(여러 가지를 포기한 세대)라는 이름까지 얻으며 좌절하고 있지만, 기성 사회는 때때로 이들을 게으르다, 정신 나약하다는 식으로 몰아세운다. 연공서열 중심의 조직문화나 기득권 구조에 반발하면 *“요즘 애들은 노력 부족”*이라며 개인 탓으로 돌리는 담론이 여전하다. 이는 기성세대의 상상력 부족, 공감 능력의 결여에서 오는 제도적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사회 곳곳에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낼 자리를 얻지 못하고 결정 과정에서 배제될 때, 그 침묵의 강요 자체가 일상의 배제가 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일자리에서 밀려난 수십만 명의 청년들이 번아웃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일각 통계로는 청년 NEET/은둔자가 10만 명을 넘는다), 이를 사회 구조 문제가 아닌 개인 취업 능력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시선이 대표적이다. 아렌트는 **“모두가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물론 청년 문제는 범죄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이 경고의 핵심은 타인의 어려움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곧 공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청년 세대의 절망에 둔감한 사회는 스스로 미래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무사유로 인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배제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장애인 단체들이 지하철 승강장 설치와 이동권 예산 확대를 촉구하며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벌였을 때, 일부 시민들은 “불편을 끼친다”며 격렬히 항의했다. 심지어 폭언과 막말을 쏟아내며 장애인들을 이기적인 존재로 매도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는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한 능력주의와 비장애 중심주의의 민낯일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런 반응의 밑바닥에도 **“생각하지 않음”**이 깔려 있다. 왜 그들이 그런 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지, 그동안 이동권 보장을 외치며 얼마나 절박하게 싸워왔는지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가 곧 공감의 부재로 이어진 것이다. 일상에서 장애인은 시설과 제도의 장벽으로 배제되기 일쑤지만, 다수의 비장애인은 이를 별문제로 여기지 않고 살아왔다. 휠체어 탄 이가 탈 수 없는 버스, 점자 안내가 없는 공공시설 등은 그저 장애인들의 “개인적 불편”으로 치부되어왔다. 그런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권리를 요구하면, 그것을 특권 요구로 오인하며 분노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러한 비판적 성찰의 결핍은 악의 단초다. 장애인에게 이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일할 권리는 ‘권리를 가질 권리’의 당연한 내용임에도, 이를 부정하거나 지연시키는 것은 인간다움의 부정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부정은 일상의 작은 무관심과 편견들이 켜켜이 쌓여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여러 배제와 차별은 구조적인 동시에 일상적인 문제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속되는 데에는 우리의 집단적 무사유(無思惟), 곧 정치적·도덕적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한몫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통해 “생각 없음”의 위험을 일깨웠다
. 우리의 현실에 이 경고를 비추어 보면, 난민의 눈물을 외면하는 무관심, 다문화 이웃을 향한 막연한 혐오, 탈북민·장애인·청년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 등은 모두 사유 부재로 인한 악의 씨앗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악인’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선의의 사람들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출 때 악의 구조가 유지됨을 직시해야 한다. 정녕 민주사회란 모든 구성원이 서로의 권리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회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일상의 무심함과 무사유를 스스로 성찰하는 일이 시급하다.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자각
이 퍼질 때, 비로소 일상 속 배제의 사슬을 끊어낼 첫 단추가 채워질 것이다.
본론 3: 아렌트의 제안과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은 비판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공존과 자유의 정치를 위한 제언을 담고 있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배제를 진단한 지금, 우리는 아렌트가 제시하는 방향에서 해법의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사상을 토대로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변화의 방향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권리를 가질 권리”의 구현: 포괄적 시민성 확립 – 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 개념은 오늘날 한국에서 포괄적 시민권 또는 보편적 인권 보장의 과제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이는 법적 국적 여부를 넘어,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기본적 권리를 향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현재 난민·이주민·무국적 체류자 등 법·제도 밖에 방치된 사람들을 공동체의 권리 주체로 포섭하는 노력이 시급하다. 예컨대 난민 심사에 탈락했지만 인도적 체류 중인 수천 명에게 생계권·교육권 등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제도 개선, 장기 불법체류 아동에게 합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조치 등이 그러한 노력일 것이다. 또한 북한이탈주민, 귀화자, 장애인 등 법적으로는 국민이지만 실질적으로 차별받는 집단에 대해서도 실효성 있는 권리 구제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과 같은 제도 개선이 필수적이다. 현재 한국에는 성별·장애 등 일부 영역별 차별금지법만 있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여러 차례 입법이 좌절된 상태다. 하지만 아렌트적 관점에서 **“어떤 인간도 권리의 밖에 남겨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구현하려면, 인종·출신국가·신분 등에 상관없이 동등한 권리 보장을 명문화한 법 체계가 요구된다. 더 나아가, 시민권 제도의 개선 역시 논의되어야 한다. 정주 외국인에게 지방선거 투표권 부여와 같이 공동체에 기여하고 생활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목소리를 줄 수 있는 방안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의 시민성(citizenship) 개념을 혈통과 국적 중심에서 거주와 참여 중심으로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아렌트가 말한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권리”를 21세기적으로 해석하면, 공동체가 그 구성원을 선별적으로 배제하지 않을 의무로 읽을 수 있다
. 한국 사회가 향후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나아갈 것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포괄적 시민성 확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배제 없는 시민권, 모든 사람의 권리를 가질 권리가 보장되는 나라야말로 아렌트적 공화국의 이상에 부합할 것이다.
둘째, 의식적 파리아의 연대: 주변인의 목소리와 주체화 –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집단들이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고 연대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아렌트가 강조한 **“의식적 파리아”**의 정신에 부응하는 길이다. 의식적 파리아란 자기 집단이 겪는 억압을 인식하고 거기에 맞서 싸우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고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가는 능동적 존재였다
. 우리의 현실에서 난민, 탈북민,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등은 각자 다른 맥락의 주변인이지만, 모두 다수사회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서로 연대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발언할 수 있게 될 때, 한국 사회의 정치 공간은 보다 다원화될 것이다. 예컨대 현재 난민인권단체나 이주민센터 등에서 당사자 모임과 활동가 육성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를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확대할 필요가 있다. 탈북민들도 과거에는 주로 수동적 수혜자 위치에 머물렀으나, 최근 일부 탈북민들은 유튜브나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적극 내고 한국 사회에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변화로, 더 많은 탈북민들이 의식적 파리아로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정책 담론에 참여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장애인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지하철 시위를 주도한 전장연 등 단체들은 오랫동안 **“우리도 시민”**임을 외치며 목소리를 높여왔다. 사회는 불편함을 이유로 이들을 침묵시키려 해선 안 되며, 오히려 그 불편함을 통해 드러난 구조적 문제를 경청하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결혼이주여성들의 경우, 언어 장벽과 고립으로 스스로 목소리 내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지역 다문화센터 등을 통해 당사자 간 네트워크와 자조 모임을 활성화하면 의식화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의 의식적 파리아 사상은 궁극적으로 소수자의 정치 참여를 옹호하는데, 이는 다수의 시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가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 한국 사회도 이제 배제된 이들을 불쌍한 타자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치적 동반자로 나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야 한다. 각종 공론장, 미디어, 문화 영역에서 주변인의 이야기를 정당한 담론으로 받아들이고 경청하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이들이 자신만의 새로운 정체성과 서사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렌트는 소수자가 자기 역사와 전통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새로운 개별성을 획득한다고 보았는데
, 오늘날 우리의 주변인 집단들도 그렇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축적해갈 때 한국 사회 전체의 정치적 상상력도 풍부해질 것이다. 의식적 파리아들의 연대와 등장은 곧 정치 공간의 확대와 활력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건강한 다원사회로 가는 필수 경로다.
셋째, 다원성의 수용: 동질성의 허구를 넘어 다양성의 정치로 – 아렌트 정치철학의 요체는 **“복수성(plurality)의 회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인간들이 각자 다른 존재로서 공통 세계를 구성할 때만 자유와 정치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 그러므로 정치의 목표는 인위적 통일성이 아니라 공존 속의 다름이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도 바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동질성 신화는 더 이상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인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이미 다원화가 진행 중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다름을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우선 법과 제도 차원에서 다양성을 보호해야 한다. 이를테면 노동현장에서 외국인·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한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며, 학교 교육에서도 다문화·다종교·다양한 가족 형태 등에 대한 존중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정치 대표성 측면에서도 사회적 소수집단의 목소리가 배제되지 않도록 선거제도와 공천 관행을 개선할 수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 중에도 여성·장애인·소수민족 출신 등이 더 늘어나도록 할당제나 목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만하다. 동시에 문화적 노력도 중요하다. 대중매체와 대중문화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편견 없이 조명하고 그들의 삶을 서사화함으로써,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아직도 결혼이주여성이나 이주노동자는 주변부 캐릭터로, 탈북민은 희화화되거나 일방적 피해자로 그려지기 십상이다. 이제는 이들을 우리 사회의 주역 중 하나로 그려내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다수와 소수,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흐리며 모든 사람이 각자의 고유함을 지닌 채 공동체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국민들도 마음을 열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원성의 정치”**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는 서로 다른 견해와 이익을 가진 집단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통의 세계를 꾸려가는 정치다. 현재 한국 정치 문화는 진영 간 극단적 대립과 승자독식 구조로 인해 다원성의 미덕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소수자나 새로운 목소리가 설 자리도 좁다. 그러므로 숙의 민주주의 실험 등을 통해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공론의 장을 넓혀야 한다. 시민배심원단, 공론화 위원회 등 무작위로 선택된 다양한 시민들이 사회 현안을 숙의하여 해법을 모색하는 모델을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에 주변부의 목소리도 포함된다면, 정책 결정이 보다 포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도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여, 이주민과 원주민, 청년과 노인 등이 함께 지역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작은 정치 단위에서부터 다원성의 경험을 쌓아갈 때, 사회 전체의 정치문화도 성숙해질 것이다. 아렌트가 동경했던 고대 폴리스의 공론장은 현대에 그대로 재현할 수 없겠지만, 그 정신 – 서로 다른 자들이 한데 모여 말하고 경청하며 새롭게 시작하는 능력 – 만큼은 우리 시대에도 유효하다. 한국이 지향해야 할 것은 획일적 국민개조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상호 이해에 기반한 연대 사회다. 이것이 복수성에 기초한 정치이며, 장기적으로 볼 때 사회갈등을 치유하고 공동체 유대를 강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넷째, 사고하는 정치: 무사유와 관료적 폭주의 방지 – 끝으로, 아렌트의 가르침 중 핵심은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 정치 공동체 전체의 문화로써의 ‘사유하는 풍토’를 일컫는다. 앞서 한국 사회의 문제로 지적된 정치적 무사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에서부터 언론, 정치 제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숙고와 토론을 촉진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교육 측면에서는 이미 언급했듯이 비판적 사고 함양이 중요하다. 학교뿐 아니라 대학, 성인교육에서도 토론문화 정착과 시민교육 강화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는 시민을 길러야 한다. 언론 역시 선정적 이슈몰이나 당파적 선동을 자제하고, 복잡한 사회 문제를 맥락과 쟁점을 짚어가며 다루는 심층 보도와 해설 기능을 충실히 해야 한다. 국민들이 사안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언론문화가 필요하다. 정치제도적으로는 숙고를 가능케 하는 제도 장치들이 고려될 수 있다. 가령 국회에서 쟁점 법안 처리 시 시민공청회를 의무화한다든지, 중요한 공공사업 결정에 시민투표 전에 숙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방안 등이 있다. 이런 절차들이 단순한 형식에 그치지 않고 실제 운영되려면, 무엇보다 시민들의 정치 의식과 참여의식이 높아져야 한다.
아렌트는 *“인간은 생각하기를 멈출 때 악이 승리한다”*고 보았다
. 이 가르침은 우리 사회가 반복되는 참사와 부조리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시사한다. 과거 대형 참사들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근본 원인을 성찰하기보다 몇몇 개인의 일탈이나 운 나쁜 사고로 치부하며 넘어간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회피는 다음번 더 큰 재앙을 불러왔음을 여러 번 경험했다. 이제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 사회 구조의 어떤 결함이 그것을 키웠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따져보는 문화를 가져야만 한다. 행정 관료들은 규정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책임의식을 활용해야 하고, 시민들도 정치적 사안에 대해 무조건적인 진영논리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정보를 찾아 생각한 뒤 의견을 형성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교육과 미디어, 정치 지도층의 노력으로 충분히 변화를 일굴 수 있는 부분이다.
또 한 가지, 용서와 약속의 정치라는 아렌트의 통찰도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렌트는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으므로 용서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함께 대응하기 위해 *약속(서로에 대한 신뢰)*을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매장하는 데 급급하거나, 서로 불신하여 협약을 깨는 일들을 자주 본다. 세대 간, 집단 간 극단적 갈등 속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뚜렷하다. 그러나 갈등을 넘어서려면 때로 과거를 묻어두고 미래를 향한 약속을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컨대 과거사 문제나 집단갈등의 치유에 있어, 진실규명과 함께 화해와 용서의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또 사회적 대타협(노사정 대타협 등)을 통해 서로 약속을 지키며 신뢰를 쌓아가는 정치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실효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아렌트가 그린 이상적 공론장에서는 시민들이 약속을 통해 공통의 세계를 건설한다. 한국 사회도 극단적 불신과 증오의 정치에서 탈피하여,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 구할 줄 아는 지도력, 상대 진영이라도 합의한 약속은 지키는 신뢰의 문화를 키워가야 한다.
요컨대 아렌트의 사상에서 길어올린 제언들은 인권의 포괄적 보장, 소수자의 주체적 참여, 사회 다양성의 존중, 사유하는 정치 문화로 집약된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한국 사회는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 보다 인간다운 공동체에 가까워질 수 있다.
결론: “권리를 가질 권리”의 한국적 재구성과 성찰
한나 아렌트의 난민 경험에서 비롯된 “권리를 가질 권리” 개념은 오늘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은 단순한 법률적 권리 이상으로, 인간이 정치공동체의 일부로서 존엄을 인정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 한국 사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보이지 않는 경계 밖에 서 있다. 국적 없는 난민은 물론이고, 국적을 가졌더라도 빈곤과 편견으로 유령 시민처럼 취급받는 이들이 있다. 이는 우리 공동체 전체의 결함이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정치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아렌트 철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존의 틀을 철학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성찰을 계속해야 한다. 경제 성장을 최우선시하며 발생한 극심한 불평등을 정치의 관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효율과 형식에 매몰된 관료 행정을 인간의 삶의 관점에서 반성해야 한다. 경쟁과 정답만 강요한 교육을 민주 시민의 자질 함양 관점에서 바꾸어야 한다. 단일성만 숭상한 문화를 복수성과 공존의 관점에서 변혁해야 한다. 이러한 거시적 성찰과 전환 없이는 부분적인 정책 개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악”**이라고 단언했다
.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 또한 우리가 깊이 성찰하기를 멈추고 관성에 안주할 때 유지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도 보인다. 과거에 비해 난민이나 이주민 인권에 연대하는 시민들이 늘고, MZ세대를 중심으로 다양성의 가치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공감하는 여론도 차츰 확대되고, 페미니즘이나 소수자 인권 담론도 공론장에서 활발해졌다. 이는 복수성의 꽃이 피는 징후일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러한 움직임들이 결국 한국적 공동체의 경계를 확장하고 배제 없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리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아렌트는 인간에게 **새롭게 시작할 능력(natality)**이 있음을 강조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은 행위를 통해 예측 못 한 새로운 국면을 열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도 우리가 정치적 행위를 통해 바꾸어나갈 수 있다. 시민 한 명 한 명이 사유하는 존재로 깨어나 목소리를 내고 책임 있게 행동할 때, 비로소 권리를 가질 권리가 모두에게 현실이 되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권리를 가질 권리의 한국적 재구성이란 거창한 말이 결국 의미하는 바는, 모든 사람이 정치 공동체의 동등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나라일 것이다. 그것은 곧 아렌트가 꿈꾸던 자유인의 공화국이자, 우리가 후대에 물려줘야 할 더 나은 한국의 모습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나 아렌트의 사상은 한국 사회의 자기반성과 변화를 위한 소중한 거울을 제공한다. 배제의 일상을 깨뜨리고 다원적 공존의 미래를 여는 일 –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아렌트가 던지는 과제이다. 우리는 그 물음에 응답하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며 생각하고 또 행동해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화국, 권리를 가질 권리가 보편화된 공동체를 향한 여정에, 아렌트의 통찰이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참고문헌 및 출처: 한나 아렌트 저/이진우 외 역,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2006); 진태원, “권리들을 가질 권리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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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한나 아렌트의 ‘의식적 파리아’와 정체성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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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런치 매거진 「쉽게 읽는 철학 –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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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리서치 여론조사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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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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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전히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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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판적 복종과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거대한 악을 가능케 하는 토양'' 이라는 말에 너무 공감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잘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맞고 틀림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이 첫 걸음이네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지사지의 마음 침묵하지 않는 인간으로 생각하기 위해 독서가 꼭 필요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