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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38
창세기 11:1-9
바벨 성과 탑
성경의 바벨탑에 대해 말하게 되면 ‘피터 브뤼겔’의 ‘바벨탑’(1563)을 생각하고 오늘날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지구라트’(Ziggurat)가 바벨탑의 흔적이라고 하면서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건을 강조한다. 그래서 물리적인 탑을 세운 것에 초점을 맞추어 오늘날 거대한 예배당을 짓는 것을 현대판 바벨탑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거대한 탑을 만든 인간들의 죄를 교만으로 정의하고 오늘날 다른 나라 언어를 배워야 하는 저주를 받은 것이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는 교훈의 설교가 넘쳐난다. 그래서 성화된 척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면 겸손한 것인가?
성경에서 교만이란 윤리 도덕적인 측면에서 상대를 대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는 죄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본문은 이미 10장에서 노아 아들들의 톨레도트에서 밝혀준 것처럼 ‘족속과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나뉘었다’라는 그 원인을 설명한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1절). 이 말씀은 단순히 같은 하나의 언어를 쓰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3절에서 “서로 말하되”, 4절에서 “또 말하되”라고 한 것을 보면 단순히 언어가 하나라는 의미로만 생각할 수 없다. 서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단순히 언어가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내고 하나님을 대적하자는 측면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언어”란 히브리어로 ‘사파’인데 ‘입술, 언어, 말’이라는 뜻이고 “말”이란 히브리어로 ‘다바르’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이는 그 단어이다. ‘말, 일, 사건’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들이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죄인들의 말은 오직 하나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2절)라는 말씀이다. “동방”이란 이미 우리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4:16)라는 말씀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을 떠난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동방, 동쪽이란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이 차단된 그곳이다(3:24). 이런 점에서 우리 성경에 “이에 그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들”이라는 표현이 없다. 우리는 10장과 연결해서 읽으니까 “그들”을 ‘욕단’에 의해 건설되는 것이 바벨탑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성경이 말씀하고자 한 본질은 ‘노아 아들들의 톨레도트’ 안에서 말씀한 것이다.
그래서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8-10절)라고 한 말씀에서 보면 함의 후손 니므롯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냥꾼이 되어 그 땅에 야벳과 셈의 후손들도 함께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노아 아들들의 역사이다. 이런 점에서 “만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차’인데 그들이 만나야 할 것을 만났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동쪽 거기서 바벨 성과 탑을 세운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이 만나야 할 것을 만났다는 의미이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3절). 여기서 “역청”이란 6:14에서 방주에 사용한 “역청”(히, ‘코페르’)과는 다른 단어로 ‘헤마르’로 쓰고 있다. 홍수를 경험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벽돌을 만들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홍수를 대비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기술을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덮어주시는 은혜를 자기들의 힘으로 막으려는 노력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벽돌로 하는 노역이었다(출 1:14, 5:7-8).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신 27:5-6)
돌을 다듬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가 들어간 것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이런 말씀을 통해 볼 때 “돌을 대신하며”라는 표현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인간들이 만든 것들이라는 의미가 담긴 표현이다. 바벨 성과 탑은 인간의 의가 들어가 인간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4절). “성읍”은 히브리어로 ‘이르’인데 ‘우르’(깨어 지키는 곳)에서 유래한 말로 ‘영구한 정주지’라는 뜻이다. “탑”은 히브리어로 ‘미그달’, ‘탑, 망루’라는 뜻인데 ‘자라다, 커지다’라는 ‘가달’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탑을 중심으로 바벨 성읍을 점점 더 자라고 크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불교에서 탑을 만든다는 것이나 돌탑을 쌓고 그 위에 돌 하나 더 얹어 자기 욕망을 나타내는 우리의 미신적인 종교 행위인 탑돌이 행사 등은 그들만의 우상숭배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행위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미그달)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에노스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6)라는 표현이 단순히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들어가 하나되는 의미라고 말씀드렸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표현은 자기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었다는 뜻이다. 탑, 망대는 “여호와의 이름”이다. 이런 점에서 바벨탑은 인간의 이름이고 인간의 자기 의다. 그래서 하나님의 망대로 달려가는 자가 의인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망대에서 안전함을 얻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피난처”란 율법에서 말씀한 도피성을 배경으로 한 표현이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미그달)이심이니이다(시 61:3)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 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민 35:11-12, 28)
부지중에 살인한 자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해방될 수 있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면 살인하는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8-20)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5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려 오셨더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죄인들의 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처절하게 무너지고 혼잡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인간의 말은 진리가 아닌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6-7절). 인간들이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절)라는 선언과 대조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을 표현하였다. 말씀이 임하면 인간의 말은 그칠 수밖에 없고 자기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행위가 중지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8-9절).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라는 말의 ‘발랄’은 ‘섞다, 혼합하다, 혼돈하다’라는 뜻인데 단순히 혼돈되게 하셨다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섞었다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한 말, 비진리의 말 안에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을 섞어 넣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니 인간의 말은 한 가지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 말씀을 온전히 이루신 것을 성령강림으로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 11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8, 11)
“하나님의 큰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십자가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한 말, 같은 진리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 한 가지 말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이 가지는 한 가지 말은 비진리이고 그 비진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인간의 의다. 그러므로 동쪽, 동방을 하나님을 떠나는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자기 의로 자기 이름을 내는 것으로 하늘에 자신을 옮겨 놓고자 하는 십자가의 원수 노릇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타났기에 인간의 의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2023043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