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왜-양이에 의해 우리민족이 포위되게 된 역사.
글쓴이 :리역사 등록일 2011-1-10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 장담하건데,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려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 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국민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 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왜놈 총독부의 마지막 개, 아베 노부유키가 증언한 실로 위대하고 찬란했던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한번 분석하여 거짓된 역사를 벗겨내 보겠습니다.
현재의 왜-양일체세력에 의한 과거 100여년 간의 만행과, 세계질서 재편으로 오늘날의 인류에겐 쉽게 믿겨지지는 않겠지만 (옛)조선의 영역은 아시아 대륙 전체로써, 조선의 계승국인 고구려의 후예를 주장하는 민족과 국가가, 북아시아 전체에 근대까지 널리 분포하였으나 현재는 절멸, 코리아만이 조선과 고구려를 주장, 하나 더 사기치는 중공도 있군...
그나마 몽골-터키의 경우 식자층에서는 자신들의 선조가 고구려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
터키와 코리아는 아시아대륙의 극과 극, 우리는 모른대도 터키는 자꾸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우기고,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아제르바이잔-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 이 나라들 국어는 전부 투르크어인데 터키와는 통역 없이도 어느정도의 의사소통이 된다고 하지, 중공의 위구르인도 그렇고요.
재미있는건 터키에서는 이 중앙아국가들을 형제가 아닌 분신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과, 얼마전 미국의 중공에 대한 분열음모인가, 위구르인의 순수 분리독립 운동인가 하는 위구르 사태를, 터키가 왜 적극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지? 터키가 미국처럼 중공과 세계패권을 다툴 국가도 아닌데 왜 사서 그렇게 적극적일까, 내놓고 말못할 사정이 있겠지.
그리고 중공은 소수민족 문제에 왜 그렇게 항상 당황할까, 뭐 민족사적으로 크게 책잡힐 짓을 한건 아닐까, 다민족 국가 지구촌에 흔하디 흔한데, 중공얘네들은 미국의 음모란 식으로 항상 주장하면서도 당황한단 말이야, 그러니 북에서 중공을 내놓고 보호해주고 있다고해도 부정 못하겠지.
얼마전 재미있는 유적이 우즈벡 사마르칸트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대대로 동이와 연관된 지역이고, 이 곳에서 고구려 사신도의 유적이라나 뭐라나, 난 뭐 특별할게 없던데, 언론에서는 고구려의 사신이 외교활동을 한것 처럼 보도하더군,
터키는 우리를 형제라 주장하고 우즈벡을 분신처럼 여기고 또한 터키는 자신들이 고구려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라,
터키는 돌궐(흉노)의 후손으로 고구려제국 시절 주로 무사들을 많이 배출해냈던 용맹스러운 전투민족으로 유명했다. 우리를 제외하고 논하면, 터키만큼 세계 민족자결주의, 세계 민족자주화를 바라는 나라도 아마 없을 것, 그 시대가 도래하면 어버이를 어버이로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신세를 벗어날테고 말이야,
백여년전의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민족분열 책동의 범위와 뿌리는 과연 얼마나 깊을까? 유럽인들의 역사인식은 대부분 아전인수 그 자체다.
유럽애들의 역사적 뿌리와 정체성은 그리스로, 걔네들의 고대사는 오직 그리스밖에 없지. 몇년전 우리극장가에서 크게 히트한 미국영화 300보면 참으로 노골적이잖아,
그리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얼짱에 몸짱이고 반면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인간이 아닌 괴물의 형상으로 나오지, 아마 서구제국주의 국가들의 철학이 아닐까?
그들이 표면적 뿌리로 내세우고 있는 그리스는 현재의 그들 자신이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이들은 모두 괴물인 것, 참고로 페르시아 역시 옛조선과 연결된 국가라 보는데 이렇게 말하면 또 공상소설이란 댓글이 달릴테니 다음에 기회되면 말씀드리겠고요.
영화 한편을 봐도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 같지도 않은 철학을 심고 지네들 패권과 관련된 세뇌를 무의식적으로 심어 버리는 것 같아, 그런데 서구애들이 웃낀건, 고대 그리스랑 영-불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뿌리가,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지, 허나 어떡하겠어 지네들 역사가 없으니,
뭐 유럽사 중 고대사라곤 달랑 하나있는 그리스사 데려다 쓰야하지 않겠어, 근데 그 좋다던 그리스사는 전체 유라시아사를 놓고 보면 일개 아시아 제후국의 역사도 안된다는 것이 참 안쓰럽지.
지금 터키의 심장인 이스탄불이 어디있겠어, 바로 발칸반도 남부 그리스에 있지, 이 이스탄불이란게 터키에게도 중요하겠지만 사실은 유럽애들에게 더 중요한 곳일텐데, 지금 그게 터키에 있다 이것이지.
이스탄불이란 곳은 고대에는 그리스의 영적 도시인 비잔티움으로 불렸다가, 로마시절 유럽사회를 기독교화한 기독교의 아버지,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바꿨다가, 터키에서 이스탄불로 삼았는데,
참고로 터키의 수도를 보통 이스탄불로 아는데 터키의 수도는, 아시아대륙의 서쪽 끝 소아시아반도의 앙카라가 수도지, 한데 왜 이스탄불로 착각하거나 이스탄불만 그렇게 유명하냐고, 그건 터키 의도도 아니고 터키 탓도 아닌것이, 유럽애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지.
유럽 얘들은 그렇게 기독교 기독교 부르짖으면서도 기독교 황제의 정치적 고향과, 그리스-로마의 정신이 담긴 콘스탄티노플을 현대에도 끝끝내 수복하지 못했다다는 것, 이유는 무엇일까? 그 과정과 내용은 실로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역사시간에 배운대로,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어마어마한 영토를 지닌 대제국이었는데, 유럽의 절반을 먹고 들어와 7백여년간 동유럽 전부를 점령하였던, 그 실체를 전부 제거하는 작업이 그리 간단치 않았으리라.
참고로 그 연장선상인 10여년전의 세르비아 내전시, 잔인하게 학살된 이슬람교도들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손들이다.
옛 유럽의 사가들이 몽골리언을 총칭해서 무엇이라 칭했는지 아시는가, 타타르란 이름만 알면 근세근대의 유라시아사는 대부분 해석이 된다.
앞서 동이 조선-고구려인의 후예가, 우리 고려민족과 몽골, 터키, 중앙아의 각 국가라고 말했는데 그 종족 혹은 민족이 고려(조선), 여진(말갈, 몽골), 흉노(돌궐), 거란(스키타이) 등으로 상고시대를 이해하려면 현재의 지역적 색채의 편견을 잠시 접어둬야 이해가 가능하다.
위의 민족과 코리아, 몽골, 터키(시리아인, 그리스인, 아랍인 등과 크게 혼혈이 진행되었지만) 등의 국가를 우리는 모두 우랄-알타이 민족이라고 배웠고 이건 거짓이 아니지, 우랄과 알타이 사이의 지역은 중앙아시아고 그곳이 우리민족의 발원지이다.
타타르인이라 이름은 서구인이 봤을때 모든 우랄-알타이를 이르는 것과 같고 그것이 동이다. 물론 범동이계가 그렇다는 얘기이고 현재의 우리민족은 삼국시대를 기점으로 그들과 결별한 상태,
서양인들이 부르는 타타르는 칭기즈칸 같은 몽골리언 정복황조를 통칭하는 것으로, 그들에겐 몽골제국도 타타르제국이고 돌궐(흉노)계의 오스만투르크제국 역시 타타르제국인 것,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의 태조 오스만에 대해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오 스만 역시 전통적인 몽골리언 돌궐인이었다.
서양인들의 고지대엔 1천년 이상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이 타타르제국으로 표기되어 있음은 놀라운 일도, 신기한 일도 아닌데 길어야 2~3백여년간 양이들이 서세동점의 역사를 써 나가면서, 역사의 승리자 권한을 막무가내로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각설하고, 이렇듯 전체 유라시아사에서 몽골리언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기에 유럽내 다소 독립적인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 역시, 전체 세계사를 놓고 볼때는 주변사일 뿐이므로 과거의 역사를 진실로 보려면, 비교적 최근이나 현재의 국제정세적 편견은 접어둬야 제대로된 이해가 가능하다.
근현대 산업혁명 후의 자본착취형 제국주의 국가의 대표주자 영-불-독 역시 그 이전까지는 아시아대륙의 번국으로서 세계사적 상황 속에서는 주변사였을 뿐인데, 그 이유야 매우 복잡하겠지만 큰 개념에서 보면 지적역량의 미숙 때문이다.
서양사가들 역시 게르만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라고 밝히고 있지 않은가, 최초로 유럽인들에게 문명을 선물해준 이들은, 역사조작으로 인해 우리민족의 경멸의 대상이 된 고구려계의 흉노이다.
그 흉노의 흔적은 동유럽 민족 전부와 특히, 독일 등의 민족에 가장 많이 남겨졌으리라 생각되며, 프랑스와 영국 역시 몽골리언의 얼굴을 한 바이킹의 오랜 식민지배 끝에 자민족의 왕을 옹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동이족으로 추정되는 북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그들의 문명사가 새로 열렸고 역사의 반전을 위한 추동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우리역사를 잠깐 보면, 일제시대를 제외하면 피정복의 역사가 없고 대부분 계승-재통합된 역사가 전부로, 제도권 역사에서 말하는 작은 반도에서의 5천년 학설의 모순은, 작은 반도에서 타민족에 의한 정복-피정복 없이 역사를 살았다는 것인데, 이를 믿을 수 있다고 보는가,
제도권 역사대로 중국대륙이 우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역사라면 왜 반도에만 찌그러져 있던 힘없는 나라를 멸하지 못했던 것인가? 일제가 중요시 여기며 세뇌, 강요했던 것은 대부분이 큰 함정이며 조작일 확률이 높다.
일제는 우리가 타민족이나 타국가를 한번도 공략하지 못했다고 무수히 반복, 세뇌시켰다.
전투에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우리민족은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유목을 버리고 중원대륙 서북방에서부터 만주-반도에 정착했기에, 북방유목기마민족 특유의 공격성을 잃어 버렸고, 타타르인들에게 대륙의 역사를 대거 내어줘야했고, 여진인이 세운 조선 중 중국의 간섭을 받는 동국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물론 잃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얻은 것도 따라오기에 본격적인 농경생활을 하면서 지적능력이 축적되었고 그 결과, 원래 영민한 동이의 혈통인 우리가 문화적 변수의 영향 때문인지, 서양인들의 통계치에 IQ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
또 우리민족이 고려 이후로 기마민족의 특성을 대거 상실하긴 했지만 현대 스포츠 양궁종목을 보면 오랜기간 축적된 유전자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세상사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유럽애들 중에서 양궁을 좀 하는 나라가 현재 우크라이나로 우크라이나는 기마민족 타타르의 지배를 벗어난지 얼마 안되는 국가,
하여튼 영국-프랑스-독일의 지적역량 강화로 인한 세계사의 전환은 몽골리언의 유전자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현대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학자 토인비는 역사의 전제를 ‘도전과 응전’이라하였는데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본산은 저들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슬기로운 응전을 근대 이후에 해낸 것,
아무튼 이들의 응전사의 세부적인 사건들은 차후에 해석해보도록 하고, 큰 틀에서보면 유대인이라는 이방인이 개입하긴 했지만 극서(우리를 극동이라 말하지 말지어다, 그 말은 서세가 부른 일방적 호칭일 뿐, 세계의 중심은 우리다.)의 변방에서 놀던 이들이 유라시아 대륙을 제외한 대륙을 하나둘씩 강탈, 병합해오면서 아시아대륙을 포위하기 시작한다.
유럽 얘들은 인도항해를 잘못하여 아메리카를 병합한다고 하지만 매우 우스운 소리 아닌가?
제도역사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이미 고대 신라시대에 코리아반도로 항해해왔다고 한다.(물론 이 역시 내막은 진실과 크게 다르고, 반도사관의 역사조작 근거다.) 그런데 약 1천년이 지나서도 그까짓 인도항해길 하나 제대로 못 찾는다고? 지들 머리 둔한건 아는데 뭐 그렇게 자랑질 할 필요까진 있었니,
실제의 역사는 이러할 것이다. 유라시아의 주인 동이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아는 양이들은 스스로 엄청난 힘을 키우고도 아시아에 대해 질겁하고 있었기에 유라시아를 평정하기 위한 예행연습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초 저들만의 신대륙인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 병합하면서 자신들의 화력을 시험하고 제법 통한다 싶으니, 아시아대륙의 주변부 동남아시아를 집적여서 조선에 대한 반란을 유도한 후, 이 반란세력의 통이자 해적왕 풍신수길을 단련시켜 조선침략을 결행했으나, 조선대륙의 동국과 중국 호랑이의 우렁찬 포효에 또다시 질겁하며 후일을 기약하지.
1492년의 콜럼부스와 1592년의 임진왜란까지 정확히 100년이 걸렸는데 물론 아메리카 강탈과 임진왜란의 배후세력은 영-불이 아닌 스페인-포르투갈이다.
스페인-포르투갈을 잠깐 살펴보면 이들 제도역사의 개별사 시작은 별로 볼게 없는게, 뭐 대부분이 식민의 역사다. 이들의 주요 민족구성원인 이베리아인 자체가 상고시대에 대륙건너편의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해왔고, 이후 페니키아-카르타고의 식민지로 있다가, 로마의 식민지로 넘어갔다가, 이슬람혁명 세력인 북아프리카 사라센제후국의 식민지로 산 역사가 대부분이고 완전한 독립을 이룬것은 1492년이다.
혈통적으로 스페인과 가까워 분가된 국가처럼 보이는 포르투갈 역사 역시 중세이전의 역사는 스페인과 거의 같고, 12세기들어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스페인-포르투갈은 가장 카톨릭적 전통이 강한 지역임에도 동시에 동양(?)적인 이국적 문화색채가 물씬 풍기는 나라인데, 왜놈들의 개뼈다귀 같은 논리인 식민지선진화의 논리는 이런 곳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이슬람 지배를 거치며 이들은 일찍이 없던 급속도의 선진화(?)를 경험한 것 같다. 거기에 유대인도 크게 한 몫 거들었으리라.
유럽제국주의의 시초 스페인-포르투갈은, 저들만의 표현인 신대륙(?)을 먹고 자신감에 도취되어 아시아대륙 주변부인 동남아를 먹어보니, 문명의 어버이 아시아도 별것 아니다란 자만감을 가지게 되고, 아시아의 천자국인 조선대륙 강탈작전을 결행한 것,
코리아반도에서 전쟁을 시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유라시아의 역사는 대대로 동이의 천자국으로 시작되고 끝나니 ‘한놈만 패면 돼’ 작전을 결행하였고 그 결과, 천자국은 실로 천자국 다웠으니
영국-프랑스-독일은 스페인-포르투갈처럼 되지 말자고 다짐하며, 힘을 제대로 만들다보니 그 결과, 산업혁명이란 실로 전인류사적인 혁명적 결과를 가져왔고 이에따른 신무기로 3백년을 다지고 다진 응전의 역사를 시도하게 된다.
영국-프랑스는 임진왜란처럼 발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시금 전쟁연습을 시도하는데 그 지역은 현재의 인도다. 당시의 인도는 무굴제국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무굴제국이 1859년이 공식적으로 영국에 병합된 해인데, 이 시기에 중원대륙의 동부지역인 동국(고려조선)의 태평천국운동(동학운동의 전신)이 일기 시작한다. 이 연대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이 있다고 본다.
인도의 공식적인 병합일은 1859년이었지만, 영국제국주의-유대인자본가의 결탁으로 추정되는 동인도회사에 의해서, 인도는 이미 자주권을 심하게 훼손된 후였다.
당시의 인도 무굴제국을 한번 들여다보자, 미리 말하지만 인도는 황제국을 세운적이 없기에 무굴제국이란 국명도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아시아대륙의 황제는 역사내내 한명만 존재했고 인도지역은 전통적으로 동이의 제후국 지역인데, 가야의 태자 김수로의 왕비 허황옥을 생각하면 이 또한 이해가 쉽다.
제도역사에서도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인도출신의 공주로 설명되지만 코리아반도로 오게된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역사의 진실은 김수로왕은 동이출신의 인도지역 정복왕조이고 허황옥은 인도 토착번국 출신의 공주였으리라.
무굴제국에서 제국이란 국명도 양이들이 붙여줬을 확률이 높은데 이것에도 어떤 술수가 있을 것인데 양이들의 당시 고지대엔 인도지역에 무굴엠파이어란 국명은 없다.
단지 그 북쪽의 동쪽으로부터 거의 동유럽까지 길게 늘어선 타타르엠파이어(청나라)의 표기만 있을 뿐, 하여튼 유물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인도에서도 무굴의 유적은 무척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그 중 ‘후마윤의 묘’와 ‘타지마할’이 으뜸이다.
여기서도 역사적 진실을 추정할 수 있음이, 이 후마윤의 묘는, 후마윤이라는 무굴의 2대 황제(?)의 묘인데, 후마윤이란 이름은 여진인의 전통적인 이름으로 현재 인도인들에게선 찾기 힘든 이름이다.
타지마할 역시 현재 인도의 보물중 보물인데, 이 아름다운 유적은 인도의 5대 황제(?) 샤 자한의 전설적인, 애달픈 사랑이야기와 관련된 유적으로 여기서의 샤 자한 이란 이름 중, 자한이란 것도 주로 전통적인 여진인 황제나 왕들이 즐겨쓰던 이름이다.
양이들의 고지도엔 무굴엠파이어란 국가명은 존재하지 않고 초기 무굴의 황제(?)들은 여진식 이름을 사용하였던것 같다.
거듭 말하지만, 기억하라 100여년 전까지 역사내내 아시아대륙의 천자(황제)는 한명만 존재하였고 아시아대륙의 모든 역사는 천자국과 관련이 있다.
개인적으로 추정하기로는 무굴이란 나라는 명(여진인 이성계조선-중국)의 제후국이었을 확률이 높다. 참고로 임진왜란시 흑인부대가 조선군으로 참전하였다는 사료가 있는데, 이들은 전통적으로 동이의 제후국이었던 인도 출신의 아시아계 흑인이었으리라.
서구제국주의의 시초 스페인-포르투갈 세력은 왜구를 이용하여 아시아대륙 병합을 시도했건만 실패하였고, 영국-프랑스의 신제국주의 세력이 이를 교훈으로 삼은 것이 무역을 빙자한 점진적인 대륙 침공이다.
한편 무적함대라고 불리던 스페인은 어느순간 도태하기 시작하였고,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며 유럽패권은 편재되는데,
이는 시중에도 판매되는 많은 교양서적에서도 설명하듯 유대인자본가의 이동경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보이며, 그들의 이동경로가 유럽의 흥망성쇠와 거의 일치하는데 그 결과가 그 유명한 동인도회사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 영국과 프랑스의 동인도회사, 이들은 아시아대륙 병합에 열나게 경쟁하다가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와의 교역(?)에 성공하는데, 말이 좋아 무역이지 군대 달고온 조폭회사의 대륙침탈의 전초전이었다.
2세기에 가까운 기간동안 아시아대륙 침탈에의 공을 들인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서세동점의 기운에 한껏 도취되어 ‘두 번의 실수란 없다’를 외치며 그 우선적 작업으로 1859년 조선(명-여진조선)의 제후국인 무굴(남명-인도)을 완전 병합하기에 이르고, 거의 동시대적인 19세기 초중반에 걸쳐 본격적으로 아시아대륙 병합을 위해 중원대륙의 조선으로 들이닥친다.
여기서도 물론 전통적인 양이들의 개였던 왜구를 이용하는데, 좀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스페인-포르투갈제국 시절보다 더 강하게 지원한 결과로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졌으며, 대륙의 동쪽해안은 주로 이 일제 왜놈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식민지인 무굴을 통해 대륙으로 직접침투 하였던 것 같다.
영국 제국주의 세력은 사전에 아시아의 심장 동국-중국-청의 실력이 녹록치 않음을 간파하였기에, 아시아대륙 침탈 야욕을 못 삭히고 있던 유럽의 각 제국주의 국가에게 선심 쓰듯 대륙침략에 동참할 수 있는 권리를 허하고, 전투지원은 물론이고 각 국가의 카톨릭-프로테스탄트 선교사를 집중파견하여 민중을 향한 사상전을 시행한다.
기독교의 새로운 사상과 서구식 자유주의 이념이 침투되면서, 한번은 넘어야할 이념의 시대가, 하필이면 국가 위기시 민족말살적인 제국주의자에 의해 도래하고,
동국-중국-청의 황권과 왕권은 역사에 없던 위기감을 맞보게 되고, 국가의 안보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며 특히, 명분상 천자국의 부패한 중국(명-여진인조선) 기득권 여진족 층은, 동물적 감각으로 역사의 대세를 읽어내고 서구제국주의 세력에게 대거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서구제국주의 세력은 일제에게 직접적인 달콤한 유혹을 제시하는 한편, 대대손손 중원대륙에서 제후국-번국으로 살아온 역사의 패배자들로, 왜구와 친연성이 있는 중원남방 민족에게 또 다른 임무를 제시하는데, 그 임무의 대가는 일시적으로 대륙을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의 당근이었고, 그에 화답한 이가 있으니 그 유명한 ‘삼민주의’의 사상가 손문이다.
앞서 말한대로 제국주의연합은 명분상의 천자국인 중국(이성계 여진조선-명)의 기득권 층을 회유하는데 일제를 동원하고, 그에 회유된 중국(여진조선)의 여진인 매국노들은 일제에게 가증스런 웃음을 보였다.
곧이어 일제는 명(이성계 조선)을 친일 괴뢰국 대한제국으로 바꿀 것을 명령하며, 후에 그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세력들이 이완용을 위시로 한 을사오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동국(고려조선, 우리민족)은 병자호란 이후부터 이미 오랜기간 청의 간섭을 받아왔지만, 명분상으로는 사실 중국(여진조선)의 제후국으로 놓여있었기에, ‘한놈만 패면 된다는’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덜 압박당하고 있었지만,
만주-반도가 아닌 대륙동부 지역은 조금씩 기독교 사상전의 침투와 일제 왜군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제국주의세력은 중국의 일부 잔존 애국적 인사와 민중들이 쉽게 투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아편전쟁을 일으켜 강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라며 참극을 연출하고,
중원대륙 중부이북 지역에 있던 청나라에 대해서는 ‘전담마크’ 전략을 펴니, 그 주역이 차르 러시아로써 서구제국주의 세력은 자신의 힘을 덜 수 있어 좋고, 차르 러시아는 과거 자신의 주인국가인 타타르와의 응전을 시도할 수 있으니 서로 좋아서, 손뼉이 맞고 차르 러시아는 망설임 없이 유라시아의 대제국 청나라를 침공하고, 청은 저항하려하나 차르제국주의 러시아는 예전의 약체가 아니었으니 곧이어 이리조약, 카슈가르조약 등을 체결하며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의 동국 영역인 대륙 동부의 고려인들은 자신들에게 내정간섭을 일삼던 중국과 청나라가, 양이와 왜구들에겐 속수무책인 점을 허망하게 느끼고, 그들에게서 대륙의 천자국 고려를 찬탈하여 역성혁명이란 말로 고려민족을 회유하려들었던, 반역자 여진인 티무르(이성계)의 모습을 떠올린다.
500여년 동안 여진인 지배층에 포획되었었으나 동이의 전통과, 유교의 예절로써 여진인 황조와 왕조를 존중하려 들었건만, 강자에게 약하고 동국같은 약자에겐 강한, 중 국(명-여진조선)과 청나라(여진 타타르제국) 두 여진인 국가 역시, 양이나 왜구와 다름없는 외세의 얼굴로 똑똑히 확인되었고,
그에 대한 응전으로 동국의 대륙 동북부에서는, 상제회의 정통동학 고려인 홍수전 선생이 궐기한다.
구호는 ‘멸만흥한’ 두 만주족(여진족, 몽골족)국가는 고려민족의 동국에서 나가라고 외쳤으며 이 운동은 ‘반외세’ 기치를 내건 동학운동으로 이어져, 만주-반도지역으로 퍼져나가고 결사적인 동학과 깨어난 민중에 의해, 왜양일체 세력과 이빨 빠진 호랑이 중국-청 두나라로 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환희의 순간을 목전에 두고 위기를 느낀 비열한 중국이 끌어들인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며 학살당하고, 잔존 동학은 피눈물을 삼키고 훗날을 기약하며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왜-양제국주의 세력은 중국을 밟을만큼 밟고 회유할만큼 회유했으니, 청나라로 눈길을 돌리고 자신들과는 성향이 다르기에 슬라브 민족주의적 차르 러시아를 믿지 못하니, 직접적으로 청나라에 깃발 꽂을 생각을 하고, 이 역시 자신들의 개를 동원하니 청일전쟁(1894년)이 발발한다.
청나라는 당연히 동국에 출병요청을 하였고 청나라를 외세로 여기던 동국인(고려인)들은 잠시 고민하지만, 청나라가 죽으면 동국도 어찌할 수없는 미래가 보였기에, 또 죽도록 싫던 왜구나 그와 일체화된 양이보다는 청나라가 나아 보였기에 순간적인 동물적 피아식별로 최악의 경우는 피하자고 다짐하며 동학과 애국세력은 청일전쟁의 전장인 대륙 동북부 동국의 핵심지역 북경-천진-청도에 결집하여 청나라-동국의 연합군으로 일제군과 그들의 주인인 수개의 제국주의 연합군과 맞선다.
청나라-동국의 연합군은 결사항전을 벌이며 제국주의군과 팽팽히 맞선 듯 하나, 결국엔 패배하고 청나라는 사실상의 해체를 앞두게 되고, 동국의 애국군은 대량 학살된다.
양이들은 심부름 값으로 자신들의 개에게 동국을 선사하려한다. 이때 이미 서구제국주의 세력 측에 유럽제국주의 외에도 미국도 가담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제국주의 패권국가 영국에게 미국이 맞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키웠던 것 같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사실상 동국은 멸망하였기에 전후처리만 남겨졌고 우선적 권리를 보장받은 일제군이 코리아반도에 주둔한다.
그런데 한가지 변수가 있으니, 서구제국주의 세력과 다른 길을 걷던 차르제국주의 러시아가 걸림돌로 작용한다. 차르제국주의 러시아는 거의 패망에 가까웠던 청나라의 여러 영역중 자신들의 국경과 맞닿은 북-중앙아시아 지역을 선점하여 침을 발라두고서는, 제국주의 세력에게 멸망한 동국 지역 중 만주-반도 영역을 넘기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에 제국세력이 과격하게 대응하니 러일전쟁(1904년)이 발발한다. 슬라브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차르 러시아는 일제에겐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으니, 일제는 자신의 주인인 서구제국주의 세력에게 다시 한번 지원요청을 요구하며 그 거대한 서구제국주의에 의해 차르 러시아를 쫓아버리고, 확실하게 코리아반도를 깔고 앉는다.
이미 이때 서구제국주의 세력은 전쟁에 승리하긴 했지만, 슬라브 민족주의를 앞세운 차르러시아에 훗날의 위협을 느끼고, 차르러시아 해체 책동을 모의하여 결행하기로 생각했을 수도 있으리라.
곧이어 이를 문서화하는데 이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아마 이때쯤 서구제국주의의 권력 서열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듯 보이며, 미국은 성스러운 동이의 성지인 코리아반도를 넘겨 줄테니, 일제에게는 그들이 자손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이자, 놀이터마냥 해적질하던 필리핀을 요구하니 해적놈들인 왜구떼는 대륙의 감흥에 도취되어 얼씨구나하였다.
음흉하기로 그 유명한 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이 해가 1905년으로 치욕의 동국과 일제의 공공연한 비공식적(?) 병합일이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유래는 바로 이 을사년에 이뤄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인해 붙여진 말인 것 같다.
을사늑약은 1905년 맺어진 강제조약으로 주요내용은 통감부 설치와 외교권 박탈일 뿐인데,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1910년의 강제병합일 보다 오히려 더 깊고 비통하게 각인된 이유의 비밀이 을사늑약이 아닌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일 터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사실적인 국치, 그 해는 1905년 을사년, 이 해는 고려민족에겐 민족사적으로 최초 타민족에의 굴종을 경험하는 해였기에, 을씨년스럽다는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의 슬픔으로 가득찬 것으로 여겨지며, 이 의미를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민족 독립운동사를 보면, 제도역사에 나오는 공식적 국치일인 1910년 이전인 1900년대에도 이미,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활동하였는데 그 내용은 1896년의 청일전쟁 패배가 사실상의 동국 멸망을 의미했음을 의미하며, 그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1905년 문서화 된 것이다.
우리민족의 많은 독립운동가 선생님들 중 대표적으로, 숭고하신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시작일은 1906년이니, 어떤 연산작용이 되지 않는가?
안중근 의사의 주요행적은 민족과 국가를 지키기 위한 항일운동이 아닌 이미 빼앗긴 국가를 찾기위한 독립운동으로 설명이 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고려조선의 멸망일은 1910년이 아닌 1905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한편 중국(명-이성계 여진인조선)의 조정은 이미 친일파로 가득 메워졌고, 그들이 황실을 좌지우지하며 제국주의 세력과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는데, 요구조건으로 친일정권인 대한제국의 옹립, 괴뢰 만주국 건설 협력 등이 있었을 것이고,
더욱 결정적 요구조건은 중국(여진인조선-대한제국)의 멸망과 대륙내의 조선(중국과 동국)의 흔적 제거로써,
그 방법적 수단으로 동국의 코리아반도 지역에 중국의 역사 짜깁기, 덧씌우기를 계획한 것이다.
그 매국노들은 이행대가로 코리아반도 내에서의 기득권을 보장 받았을 것이며, 가증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즉각적으로 이를 이행하는데 1910년 한일병합 즉, 대한제국 멸망, 그 후속작업으로 이미 강탈해간 동국의 코리아반도로 대한제국 황실을 유배시킨 뒤,
매국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고려민족을 착취하며 일제가 준 권력을 누리고, 코리아반도에서 자생적으로 일제에 투항한 친일파들과 사이좋게, 고려민족에게 일제의 신민이 되길 강요한다.
동국과 청나라를 멸하고 중국(여진조선-대한제국)을 패망시켜 코리아반도로 유배보낸 뒤 제국주의 세력이 가장 집중한 작업은 괴뢰 만주국 건설이다.
괴뢰 만주국의 역사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는 베일에 가려져 있기에 확실한 추정은 불가능하나, 동이계 각 민족과 그 민족사를 말살하려는 의도가 가장 클 것이다.
지난 수천년간 아시아대륙의 문명사를 경영해 왔던 동이족, 일제총독 말한 조선민족의 참으로 위대하고 찬란한 역사, 그 역사가 살아나면 반드시 동이과 고려민족은 살아 날 수 있다고 판단 했으리라.
그 중의 핵심은 고려민족과 여진민족인데 괴뢰 만주국 건설로 고려민족 말살과 여진민족 말살이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을터, 그 선행조건으로 만주지역을 봉금지역으로 선포하여 접근을 금지시킨 후 대대로 이어온 동이의 유적을 파괴하거나 조작한 후, 만주국 건설에 착수한 것이다.
1900년~1920년대 사이에 코리아반도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데, 그 인구증가율은 자연증가율을 훨씬 뛰어넘었다.
북경-천진-청도 등과 현 동북삼성 지역 등 대륙의 동북지역에 살던 동국의 고려민족은 청일전쟁 패배 후, 가쓰라-태프트 밀약 후, 또 만주 봉금지역 선포 후, 지속적으로 코리아반도로 이주해 들어온 것이다.
지금 대륙 동북부 지방에서 중공의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은, 주지하시듯 독립군의 후손들도 존재하겠지만, 아마 그 분들은 이 시기에 코리아반도로 미처 이주하지 못한 분들이리라.
간도문제가 정치-외교적으로 안풀리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역사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이유 역시 만주 봉금지역 선포와 괴뢰만주국 건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 세력은, 일제 개들에게 코리아반도라는 심부름 값을 지급하였으니, 다음순서로 대륙남방 출신의 또 다른 왜족인 중공 개들에게 심부름을 할 차례였을 것,
앞에서 1910년 중국(명-여진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코리아반도로 유배되었다고 썼는데,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1911년, 또다른 남방왜족 손문 세력은 신해혁명을 시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다. 대한제국이 있던 그 곳에 말이다.
이런 거대한 역사 조작질을 위해, 양이들의 고지대에 의해 20세기까지 존립하였음이 확인되는 명(중국-여진조선-대한제국)을 병자호란 후 17세기에 멸한 것처럼 슬쩍 지워버린 것이다.
손문 세력은 이처럼 치밀하게 짜여진, 조작된 혁명 성공 후, 광대처럼 미온적인 항일운동을 펴며, 명(대한제국)의 주류 민족인 여진인과 남방 왜족 등의 소 수민족과의 동화정책을 폄과 동시에 역사교육을 철저히 통제하였던 것이고,
허구의 한족 역사를 창작하기 위해, 저희들의 남방왜족의 역사인 각 소수민족의 제후국-번국사를 마치 아시아대륙 천자국의 역사인 마냥 섞어쓰며 역사조작을 시작한다.
서로 친연성이 두 남방왜족 중화민국 세력과 일본제국 세력 상호간 모두 서구제국주의 세력과 결탁하였기 때문에, 서구제국주의 세력들의 중재 하에 엄밀하게 중국사를 동국으로 보내고 대륙에는 가상의 한족 역사를 입히는 치밀한 작업을 진행한다.
그로인해, 우리 동국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아주 교묘하게 짜깁기되어, 동국시대의 역사서인 동국통감, 동국사략 등의 사서를 아무리 바르게 해석하려고 해도, 부분부분의 절묘한 교열 때문에 그 진실된 역사를 알 수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실체는 없지만 의혹투성이인 제도역사를 두고 현재 이 땅의 많은 양심적 사학자들이 조선은 한일병합 직전까지 대륙에 있었다는 학설을 들고 나왔고, 실제 그 학설을 만족 시킬 수 있는 수많은 사료를 해석하여 제시하였던 것이다.
재야학인들의, 일제가 심어준 모순된 반도사관에 대한 궐기는 충분히 반길만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역사서술에도 큰 오류가 존재하니, 그것이 반도 역사백지론으로 이것 역시 전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면, 무척 위험한 역사서술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재야사학자들이 반도 역사백지론에 빠지게 되었을 딜레마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한다.
이조시대의 사료를 편견없이 해석하면 너무나도 명백하게, 조선이 대륙전체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일테고, 그들은 그 조선사를 우리역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 코리아반도의 민중 속에 뿌리내린 역사적 유전자를 너무나도 간과하였고, 또 이들의 학설은 국권피탈사와 해방전후사를 명쾌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대륙조선설의 일부 모순적 학설은 두 개의 조선을 가정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조선이 중국이란 빼도박지 못할 사료들도 무수히 넘치지만, 조선이 코리아반도에도 있었다는 실증적 사료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되리라.
이러한 오류의 배경에는 왜-양이들의 치밀함이 숨어있고, 다시는 우리민족이 역사적으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왜-양이들의 비열한 오만함이 녹아있는 것이다.
역사 왜곡의 핵심은 고려민족의 반도사관 완성으로, 우리민족이 100여년 전까지 대륙에 살았고 600여년 전에는 아시아대륙 전체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숨긴 것이다.
이조시대에는 두 개의 조선이 있었고 조선의 중심으로는,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중국과 그 여진인 집단의 중국에 포획된 고려민족의 동국이 있었다.
대륙에 이씨조선이 있었다는 학설은 사실이지만, 그 광활한 조선대륙을 경영하던 중국이 사실은 동국의 우리민족과는 상관이 없는 역사라는 것만 알면 대륙조선사의 미스테리는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성계는 서역의 역사에 나오는 몽골(여진)의 후예 티무르 황제로, 실로 위엄있는 성웅적 태황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대륙고려를 끌어내린 이방인 배신자-쿠데타 역적이었을 뿐으로, 이성계가 강조한 쿠데타의 다른이름 역성혁명이란 단어를 기억하라,
고려민족을 동으로 내몰고, 여진민족을 남하시킨 그들의 행각, 그렇기에 우리 코리아반도의 직계선조들은 이씨조선 전체와 이성계에 대해서 후한 평가를 내리지 않거나 적대적인 인식을 한 것이다.
이조의 대륙설은 사실이지만, 대륙에도 두 개의 조선이 존재하였고 만주와 대륙의 동쪽 끝만이 우리민족의 생활터전이었다.
역사조작의 가장 큰 피해자는 고려-동국의 후예인 우리민족일 것이고 자신들이 여진인인 줄도 모르고, 남방왜족과 다량 혼혈화되어 자신의 뿌리를 잊은채, 허구의 한족으로 둔갑된 중공민중 역시 피해자인 것은 마찬가지리라.
한편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차르 러시아를 끌어내리고 일어선 소비에트 러시아 역시 제국주의에 가담하여 응전을 하는데, 그 최대의 피해자 중 하나가 연해주의 동국고려인으로,
괴뢰 만주국 건설이 한창이던 1930년대에, 진 보사상의 본류처럼 보였던 소비에트 러시아가 동국고려인을 포함한 아시아 북방민족을 강제 이주하는 제국주의적 만행을 보이고, 그 피해자 중 한 집단인 우리 동국 고려민족은, 곧 죽어도 자신이 고려인이라고 하였고, 여전히 이러한 사건의 진실이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우리민족의 적은 전지구적이었고 현재의 코리아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당시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진보세력의 사상적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는 왜 진보와 반동을 오갈 수 밖에 없었을까? 그 진실이 곧 밝혀지리니, 아무튼 소비에트 러시아는 오로지 몽골리언에 의한 피식민화로 점철되었던 자신들의 역사를 400년의 단기간에 만회하려고 들었고, 그들의 주인이었던 청나라의 각 민족을 혁명의 이름으로 분할 점령하여 소비에트연방 내에서 스탄 형제국가(카자흐-우즈벡-투르크메니-키르기즈-타지크)들을 만들어주니 이들 역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슬라브인에 동화되는데, 이것은 민족말살정책 일환이었을까,
그 유명한 다문화정책이었을까, 아무튼 서구인들의 몽골리언 유전자 죽이기 정책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행되니 전통적 동이의 국가는 전부 멸망하게 되었다.
서아시아 범동이계로 눈을 돌려보면, 13세기에 성립하여 20세기까지 동유럽-북아프리카-서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세웠던, 범동이계 돌궐(흉노)인 오스만투르크 제국 역시 서세동점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며 소아시아반도와 이스탄불만을 지켜내기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영역이었던 아라비아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유럽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던져줄 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은 6백여년이 넘는 오랜 기간동안, 몽골리언 돌권인 술탄을 옹립하며 긴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뭘까?
우선 전통적으로 동이의 정복왕조는 피정복민이나 제후국-번국 등의 타문화를 존중하였다는데 있을 것이다. 이점은 자본착취적 서구제국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그래도 나름의 ‘황제의 도’가 담겼던 제국과 현재의 자본을 앞세운 민족말살적 제국주의를 구분하여 판단해야 할 것이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전신으로 이슬람혁명을 이끌었던 사라센제국 역시 신라와 연결이 되어 있는데(사라센-사로신라) 아직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고,
다만 사라센제국 이후 오스만투르크제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돌궐인 술탄과 지배세력은 피식민화된 민족의 문화를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았고, 그 어떤 말살적 정책도 시행하지 않는 타 민족문화 존중이 빚어낸 600여년의 역사이리라.
이런 피정복민족의 문화 존중은 동이계 민족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그 유명한 칭기즈칸과 티무르, 누르하치 역시 그러하였다.
동이계 민족의 선한 민족성은 발을 디디는 곳마다 대량학살과 인종청소, 문화파괴와 민족성 말살을 시도하였던 자본착취적 서구제국주의와는 그 성격을 크게 달리한 것이다.
인종청소와 대량학살 그것의 가장 큰 피해자로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인디언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인종명이 붙여진 남북아메리카 원주민일 것이다.
각 자료마다의 통계가 달라 사실적 숫자를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자료를 보더라도 학살의 숫자는 가공할 수치다. 인류사에서 이보다 큰 범죄는 없었으리라,
그들은 어느정도의 문명생활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 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문명생활의 수준이 중요할 수는 없겠지만, 섣부르게 해석하지 않겠지만, 그들이 남긴 문자와 유적은 왜 공개되지 못하는 것일까?
서구인들은 이들이 단지 인종적으로 몽골리언과 비슷한 계통이라고만 언급할 뿐이다.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서구인들에게 멸족 또는 생활과 문화, 모든 것을 빼앗겼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모두 빼앗긴 채로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자신들의 땅에서 주변인으로 전락하여, 아직까지 대부분 빈곤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아메리카대륙의 몇몇 민족도 거대한 피라미드를 남겼지,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와 잉카의 피라미드, 이들의 피라미드 양식이 먼 바다 건너의 이집트 피라미드와 흡사한데, 비슷하게 사진으로 확인하기에는 만주에 있는 동이의 피라미드와도 비슷한데 만주의 동이 피라미드가 가장 크다.
만주 봉금지역 선포와 그 속에 산으로 위장된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동이 샤머니즘의 상징이리라, 피라미드가 있는 곳은 동이의 이동 경로 이거나 최소, 문화 접변 경로라고 가정 아닌 가정을 해 볼 수 있으리라.
인류의 문명사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고 알려졌지만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수메르 문명, 세계의 양심적 학자들도 풀어내지 못하는 이 역사의 비밀, 아마 정치외교적 문제를 풀어내지 않으면 어버이를 어버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신세는 계속 이어지겠지.
지난 500여년의 역사, ‘도전과 응전’ 역사법칙으로 덮기에는 서구제국주의 세력의 잘못은 너무 크다.
지난 5천년 이상 이어오던 순리적인 세계사의 질서를, 반세기도 안되는 기간 동안 피와 학살로 모두 무너뜨린 그들, 그들이 온 지구를 백색문명으로 물들였고, 전 인류는 유러피언에게 포획되었다. 역사의 법칙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순간 다시금 ‘도전과 응전’이 시작된다.
우리는 다시금 400여년 전의 임진왜란과 100여년전의 국권 피탈사를 기억해야 한다. 현재의 국제정세는 임진왜란의 계속일 뿐이다. 지난번 글에서 리바이벌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해서 다시한번 정리해봤습니다.
오손도손
우리말에 "오손도손 잘살아 보세"라는 말이 있지... 구한말 때만 해도 대부분 근데 지금은 어디서 월족의 노예들이던 파키,아프칸,이런 개잡종들이 월지족의 상징인 달과 별을 국기로 사용하고 있지..
인도를 지배하던 이성계(티무르)의 마지막 후손들인 모굴제국(몽골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대륙을 장악하지... 아프칸쪽으로 치고 올라오면서 왜족들과 서양세력이 점령하고 들어왔지
히말라야란 "흰 말랭이"란 뜻이다. 높고 마른 땅에 집을 짓고 사는게 홍수로 부터 안전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기 쉬웠으므로 그런 곳에 부락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대부분은 사실 부여인의 후손들이다. 우리는 산 꼭대기 등성이를 "산 말랭이'라고 부른다.
양놈들이 "희말라야"라고 따라 부르며 발음을 변형시킨 것이다. "아시아"는 "앗"의 나라란 말이다. 고로 "아시아"란 모든 의 시작이되는 시원의 나라라는 말이다. 징기스칸은 러시아계와 약간 혼혈이 된 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로 징기스칸의 발원지는 지금의 몽골이 아니라..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_2&uid=21818 |
출처: 시나브로 원문보기 글쓴이: 시나브로
첫댓글 대륙에서 반도로 작아진 비밀의 야기 잘 보았습니다 대조선의 멸망에 과정이 너무 복잡 합니다 한번 보고 한번에 설명이 안되 여러번을 봐야 하지만 시간이 부족으로 이해력 차이를 보입니다 한번 더 정리를 하여 주시면 안 될 여런지,,,,,,,,,,
제머릿속으로 정리되지 않고 편린으로 기억되고 이해되던 것들이 이리도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다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나머지는 증명하는 길만 남은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