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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神父의 - 외줄위를 걷는 人生
4. 성공회 교회를 만나다
누가 내 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저 옆방에 사는데 이백원만 빌려 주실래요?
간장에 국수 좀 말아먹게요. 배가 너무 고파서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얼른 문을 닫았다.
산발한 머리에 처참하게 멍든 얼굴이 너무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을 잠시 진정시키고 돈을 주려고 다시 방문을 열어 보았더니 마루에는 이미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책을 펴고 앉았는데 계속 그 슬픈 눈빛이 떠올라 영어단어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군대 갔다 와서 대학 삼학년 이학기. 오래간 만에 만난 친구들과 자주 술자리를 하다 보니 하숙비가 이내 거덜 나고 고심 끝에 자취방으로 얻은 이방은 보증금 없이 월세 오천원. 흑석동 아니 서울에서도 가장 싼 방이다.
방은 한평이 채 못되는 좁은 공간이지만 마루에 석유곤로를 놓고 솥단지만 얹으면 먹고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일층에는 채소가게와 생선가게가 자리잡고 있고 캄캄하고 좁은 계단을 타고 이층에 오르면 방 두 칸 정도의 마루를 중심으로 방 열 칸이 빙 둘러 말굽형으로 포진해 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엉뚱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자고 있는 방주인의 얼굴을 밟을 염려가 있다.
그 중 방 하나만 가족이 살고 나머지 방은 거의 여관이나 술집에서 몸을 파는 아가씨들이 살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녀는 장씨 아저씨 부인이다.
새벽녘에 시끄러웠던 이유가 장씨 부부의 거친 대화 때문인 줄만 알았더니 피차 주먹질 좀 한 모양이다.
시장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생활하기에는 편리한 반면 귀찮은 일도 많이 생긴다.
지정학상 연극반 아지트역할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지면 주모의 거친 손길에 등이 떠밀린 술 취한 연극반 후배들이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술자리는 밤이 새도록 계속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방이 길쭉하고 좁아 모두들 앉아서 자거나 아니면 벽에 다리를 걸쳐놓고 칼잠을 잔다.
잠버릇 나쁜 녀석이 벽쪽으로 아무렇게 쌓아올린 책이라도 잘못 건드릴라 치면 쏟아지며 얼굴을 때리는 책과 씨름하느라 잠을 설치기 일쑤다.
간혹 이불 위에 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후배가 나타나면 잠자는 것은 아예 포기하는 게 차라리 낫다.
다행히 이런 불청객들의 행패가 잦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이 집에 서식하고 사는 빈대의 공이 크다.
한번은 후배들이 떼로 와서 잠을 자는데 누군가 한 녀석이 쏴아 하고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난다며 형광등을 켰다.
그 때 벽을 타고 내려오는 빈대군단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녀석들은 모두들 기겁을 했다.
이미 빈대에 피를 빨린 녀석들은 피부가 겁나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고 손님들은 빈대퇴치를 위해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나의 제안에 의해 벽 중간쯤에 치약을 짜서 바리케이트를 치는 것처럼 빙 둘렀다.
빈대가 더 이상 못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불을 끄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한참 단잠을 자고 있는데 또 어느 놈이 비가 오는 것 같다며 불을 켰다.
잠이 깊이 들었던 나는 결국 화를 냈다.
방이 작긴 하지만 비가 새는 방은 아니라고 소리 지르며.
그런데 상황이 그게 아니었다.
치약을 피해 천장으로 몰린 빈대놈들이 이불 위로 공수부대의 낙하시범을 보여주듯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빈대를 우습게보다간 큰 코 다친다. 다행히도 내 피는 걸쭉하고 쓴지 빈대를 타지 않는다.
장씨 아저씨는 축농증 수술을 하다 의사의 실수로 마취가 수술 중간에 풀리는 바람에 등 근육이 엉켜버리도록 몸부림을 쳤고 그 이후부터는 아편을 맞지 않고는 잠시도 견딜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흑석동 성당을 짓는데 필요한 부지와 함께 엄청난 액수의 건축비를 내놓을 정도의 부호였다는데 그는 아편중독 때문에 집안의 그 많은 재산을 다 날렸다고 했다.
지금의 아내도 마지막 남은 재산으로 차린 방석집이 망하면서 유일하게 남은 작부아가씨였다고 한다.
그는 살인적인 의지로 아편 양을 조금씩 줄여 지금은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자랑하였다.
그는 이 집에서 인생 상담에서부터 돌팔이 성병치료까지 모든 분야에 나름대로 정통한 해결사였다.
직업은 도배 기술자이지만 벌이는 시원찮은지 간혹 끼니를 거르는 모양이었다.
이런 집에 살다보면 엉뚱한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 집에 원래 가족이 사는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얼굴 인상이 방금 시합 끝낸 투견처럼 험상궂은 오형이란 사람이 주인인데 빚지고 도망간 술집아가씨 잡아다 주는 일로 먹고사는 인간말종 중에 말종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늘 향수 어린 걸직한 무용담으로 막걸리판을 흥겹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하루는 형님 방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하도 요란하게 흘러나와 오형의 방문 앞에는 이웃사람들이 모여들어 오씨가 오늘 자기마누라를 아주 죽일 작정인 모양이라며 웅성대고 서 있었다.
나는 드라이버와 식칼을 사용해 문의 잠금쇠를 간신히 뜯고 방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그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오형은 머리에서부터 얼굴에 이르기까지 흥건하게 피를 뒤집어쓰고는 신음소리 한번 안내고 쏟아지는 능멸을 견디고 있었고 몸집이 비대한 형수는 그 큰 후라이팬으로 사정없이 형님을 내리치고 있는 중이었다.
입으로는 연신 금방 죽을 듯이 애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 사건 이후 오형은 일단 집을 나갔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다.
그 형님이 왜 맞고 사는지 그 깊은 속사정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나는 멋모르고 방에 뛰어 들어 갔다가 오형이 무안해 할까봐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뒷걸음치며 그 방에서 나왔다.
처음에 이 집을 소개한 동네 형이 말한 그대로 여기서 만난 인물들의 면면과 사연은 하나 하나가 소설처럼 다채롭고 박진감이 넘친다.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다.
부산은 데모 때문에 거의 치안부재 상황이니 꼼짝 말고 집에 가만히 들어 박혀 있으라고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나는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부산행 야간열차를 타고 내려갔다.
불구경하는 기분으로 남포동 극장거리에 나가니 시민들이 골목마다 빽빽이 들어차서 도대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자갈치와 남포동 사이의 대로 한가운데 중앙선 위에 올라서서 몇 발자국 걸어갔다.
언뜻 보면 빨리 길을 건너려고 지하도로 가지 않고 큰 길을 가로지르려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사람들이 몇 명 더 중앙선으로 건너왔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방파제를 넘어 큰 파도가 덮치듯 엄청난 함성과 함께 시민들이 대로변은 물론 모든 도로를 점령해 버렸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소장으로 근무하는 남포동파출소로 발길을 돌렸다.
파출소는 텅 비어 있었다.
술 먹고 붙들려 왔을 때는 그렇게도 서슬이 시퍼렇고 당당하던 순경들이 모두 피신하고 없고 파출소 안은 인적 없는 암자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나중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경찰들이 웃통을 몽땅 벗고 꼭 파출소에서 탈출하는 사람 시늉을 내며 도망을 쳤다고 했다.
나중에 우연히 만난 친구 아버지는 4.19혁명 때도 이와 똑 같은 경험을 했다며 한국사람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한탄을 하였다.
사람을 잡아 가두는 입장과 잡혀가야 하는 사람의 처지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일곱 살 때 4.19 혁명이 터졌다.
어머니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데모대를 따라 다녔다.
40 년이 지난 지금에도 선명히 기억나는 것은 부산 동광동 사십계단 근처 언덕에 서서 무얼 태우는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부경찰서를 내려다보던 광경이다.
아버지는 내 손을 아프도록 꼭 잡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중부경찰서 건물 내부에는 경찰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는데 넝마주이들 몇 명이 한가롭게 서류뭉텅이들을 큰 자루에 집어넣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지역도 그러하겠지만 부산 사람들은 바다를 겨드랑이에 끼고 사는 탓인지 마음이 넘실거리는 파도를 닮은 것 같다.
역사의 거센 바람이 불면 언제든지 격랑에 실려 버린다.
호외가 시민들의 바짓가랑이에 걸쳐져서 떨어진 깃발처럼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표현을 최대한 부드럽게 다듬긴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신임하던 최측근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는 내용의 대국민 성명을 김성진 문공부장관이 비통한 그리고 겁에 질린 기색이 완연한 목소리로 발표하자 세상은 하루아침에 딴 세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연극반 후배들을 데리고 역사의 현장을 느껴보자고 광화문 거리로 나갔다.
다방에 들어가도 술집에 들어가도 장송곡외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온 국민을 협박하며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던 대통령도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 가며 초조한 빛이 역력하더니 결국 별수 없이 허망하게 피를 뿌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역사의식이 별로 없는 우리 연극반에도 정권말기의 신경질적인 권력 히스테리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축제기념공연으로 흥행을 의식해 당시 대표적 방송작가인 박양원씨의 ‘축견’이라는 코메디물을 공연했는데 뜬금없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의 상징인 중앙정보부원이 찾아 온 것이다.
당시 연극반 회장에서부터 연출 기획 등 중요 멤버들은 모조리 대학본관 학생처 어느 큰방에서 수사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일개 중앙정보부원을 총장이 직접 뛰어나와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학생처 직원들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허둥대는 모습이 웃음이 나올 정도로 호들갑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공연작품인 ‘축견’의 내용이었다.
독립유공자로 알려진 고관의 개가 죽어 장례를 치르는데 그의 일제시절 주구노릇을 잘 아는 진짜 독립유공자가 죽은 개의 관을 메는 상여꾼으로 나타나서 이를 본 가짜 유공자가 쇼크로 죽어 실제상황 장례식이 되어버리는 해프닝을 담았는데, 작품의 위험성을 감지하지 못한 우리 극단이 이 작품을 전방부대 위문공연으로 선정, 무대에 올렸었다는 사실에 중앙정보부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작품이 공연금지 작품목록에 오른 정치적으로 아주 예민한 작품인지는 연극반 내의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우리가 딱 그런 셈이 되었다.
하기야 누가 특별히 아르켜 주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겠는가?
이십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이 나라를 통치해 온 대통령이 일제치하에서 출세를 위해 일본 육사를 나온 일제의 개였다는 것을.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나로서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조서를 쓰면서도 나는 이유 없이 싱글싱글 웃음이 나왔다.
학교측의 당황해하는 모습이 아까부터 그렇게 우스웠던 것이다.
나의 나쁜 버릇 중의 하나가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면 웃음이 나와 버리는 아주 위험하고 고약한 버릇이다.
너무 겁에 질리면 그렇게 되기도 한다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일단 웃음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칠 수가 없는 게 나의 또 다른 큰 병이다.
깜깜한 곳에서 실수로 호랑이 콧구멍을 쑤신 심정으로 수사를 받던 연극반 친구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나에게 계속 눈총을 주는데 나는 실실 새나오는 웃음을 도무지 멈출 방법이 없었다.
결국 상황을 눈치챈 정보부원이 눈알이 빠질 것처럼 나를 째려보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조서작성은 아직 끝마치지도 않았는데 기록을 몽땅 걷어서 가방에 쓸어 담고는 가버리는 것이었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땅이 꺼지라고 쉬었다.
순수하고 고지식한 성격의 나이가 형님뻘인 연극반회장은 진지하지 못한 나의 태도에 대해 정색을 하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어쨌든 야수의 그것처럼 무지막지한 권력의 쇠발톱은 용케 피할 수 있었던 셈이다.
연출을 맡고 있는 연극반 후배가 인도에서 왔다는 요기를 데리고 나타났다.
마치 성화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선량한 눈빛과 반듯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그는 후배의 방에서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자신이 신처럼 숭배하고 존경하는 스승을 사진으로 소개하며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그 영정 앞에 엎드려 절하면 자신의 제자로 삼고 요가를 가르쳐 주겠노라고 우리에게 제안했다.
후배의 말에 의하면 그는 하루에 두어 시간 정도 정(靜)에 들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 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하루 종일 사과든 귤이든 과일 하나만 먹으면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후배는 절을 하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나는 아직 그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그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만남의 기념으로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말하기를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는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파장으로 만든 언어라며 내 몸에서 나오는 파장과 일치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내 후배에게는 ‘화살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는 인도에서 10년 정도 요가수련을 하였다고 하며 국적은 미국이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다 요가의 세계에 빠져 인도에 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기회만 되면 명상과 요가를 가르쳤다.
후배는 미국유학을 준비하는 중이라 본토발음을 익히느라 원어민인 그와 늘 함께 있다시피 했는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그의 주된 수입원이 미CIA에 한국학생들의 동향과 정치적 상황변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받는 돈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그의 정신세계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면 약소국가에 와서 비밀정보원 노릇이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도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해 실망한 듯 비아냥거리는 투였다.
요가의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과 약소국가의 인민을 배려하는 따뜻하고 균형 잡힌 사회의식과는 무관한 것일까?
오글목사는 한국의 독재정치와 싸우다 추방당하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대학연극연합회에서 연락이 왔다.
정기모임이니 참석하라는 것이다.
잊어 먹을 만하면 엽서가 날라 오는 것이 별 의미를 느낄 수 없었으나, 긴박한 정치적 상황도 있고 해서 어떤 변화가 있으려니 싶어 참석했더니 서울대 총연극회에서 처음으로 대표가 참석했다.
연극연합회의 탈정치적 성향 때문인지 서울대는 좀처럼 얼굴을 비치지 않았었다.
동호인 친목모임 특유의 뒤풀이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데 서울대 대표가 나를 불러 세웠다.
같이 갈 데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가회동 어느 골목으로 데려가면서 현 시국의 불투명한 상황과 위급함을 느릿느릿 그러나 눈에 힘을 줘가며 설명했다.
오래되어 쇠락해 보이는 큰 기와집 앞에 당도하니 문 앞에 서 있던 몇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며 대문을 열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해맑은 얼굴의 삼십 전후의 남자가 현직 중학교선생이라고 자기소개를 하였고 내 나이 또래의 대학원생이라고 밝힌 여학생은 남민전사건과 관련하여 취조를 받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중병을 앓는 환자의 얼굴로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한사람은 총연극회 소속이라고만 말하고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소주잔이 어지럽게 돌고 돌지만 모두들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고개를 아예 무릎 사이에 박고 있던 여학생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팔과 어깨의 인대가 수사과정에서 많이 늘어났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그제야 좌중은 연이은 너털웃음으로 여유와 활기가 넘치는 술판 분위기가 되었다.
안주로 나온 두부부침을 찍어 먹던 간장의 깊은 맛에 내가 감탄하자 ‘우리 집 간장 맛은 백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며 아버지가 사상범으로 감옥에서 오랜 수형생활 끝에 집에 돌아오셔서 하신 첫마디가 ‘간장 맛은 아직 그대로군’ 이었다는 것이다.
그 날은 그저 그렇게 별 말없이 헤어졌다.
나는 마음이 무거워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귓속으로 벌이 들어온 것처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공식적인 합격자발표를 참고 기다리기 힘들어 법대 교수님을 통해 전화를 연결하니 ‘합격! 축하해요.’라고 조교가 밝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해 주었다.
걱정만 하지 공부는 하지 않는 나의 오랜 생활패턴이 쉽게 변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긴장과 초조로 임한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합격의 관건이랄 수 있는 영어시험지를 받아들고 나는 무심결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엉터리 졸업논문이지만 참고자료로 인용했던 내용이 그대로 출제되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어른들은 시험운 운운하는 모양이다.
나는 춤을 추며 신문방송학과 과사무실로 찾아갔다.
넙죽 허리를 굽혀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렸다.
이미 구면인 광고학과 교수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광고학과가 학교 사정에 의해 이번에 대학원 개설이 어렵게 되어버렸지만 신문학과대학원에서 광고를 공부할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였다.
지도교수는 물론 자료가 무엇이든 얼마든지 도움을 주겠다는 거다.
마침 광고음악을 작곡하는 꽤 알려진 여류작곡가가 찾아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최근 작곡하는 곡마다 히트가 되면서 통장에 돈 들어오는 소리가 사락사락 들린다며 요즘 정말 살 맛 난다고 신이 나서 떠들었다.
사무실 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을 반짝이며 그대의 그 음악적 재능이 정말 부럽다는 식으로 노골적인 찬사를 늘어놓았다.
법대의 무겁고 점잖은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의 시장판 분위기에 나는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확실히 생소한 분위기다.
신방과 교수님들과 대화하면서도 이런 느낌은 피할 수 없다.
학문의 대상이 사회현실을 다루는 신문 방송이라 그런 것일까?
그렇게 마음 조리던 대학원에 합격했는데도 시간이 지나니 다시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광고학과 교수님의 충고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광고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교수라 그런지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썼다.
‘어쭙잖은 학생의 실력으로 큰 뜻이니 이상이니 함부로 떠들지 마라.
실력을 갖추기 전엔 입 꼭 다물고 눈 내리 깔고 공부만 해라.
도덕, 선, 양심 다 필요 없다.
오직 능력 있는 인간이 되라. 무조건 성공해라. 그리고 네가 성공한 뒤에 남을 도와주라.’
내용과 관계없이 그의 살기등등한 독특한 표정과 언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만 벗어나면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저항감과 부정적인 판단이 속으로부터 끓어 올랐다.
광고공부는 하고 싶은데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성경공부를 통해 마음을 다잡으려고 다시 대학생선교회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도착하니 연극반후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처음 보는 여학생을 데리고 내 앞을 막아선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술상 앞에 마주 앉았다.
자주 바뀌는 그의 새 여자 친구는 덕성여대 학생이며 광화문에 있는 성공회성당에 다닌다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나는 성공회교파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더니 수줍음을 타는지 대답도 제대로 못한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 후배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나 혼자 대학생선교회를 찾아갔다.
건물 앞에 당도하니 모임에 늦기도 했지만 지난번 기도내용에 대한 시비로 마음이 언짢아 선뜻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건물 주위를 탑돌이 하듯 싱겁게 몇 번이고 빙빙 돌다가 나는 참석을 포기하고 다시 후배가 기다리는 그 술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그 술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길바닥을 헤매다 비슷하게 생긴 골목을 발견하고 그리로 향하던 중 부산의 세관건물을 닮은 빨간 벽돌건물 창안으로 젊은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 의자에 않아 있었다.
호기심이 나서 속을 들여다보니 안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술김에 나는 용감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곱
고 환한 표정의 여성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맞아주었고 사제의 복장을 한 신부님이 앉으라고 의자를 끌어다 주었다.
알고 보니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교리공부 시간이었고 분위기가 밝은 이유는 대성당에서의 결혼식을 앞두고 세례를 받으려는 희망찬 처녀 총각들이 그 구성원의 상당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신부님의 말씀 중에 내 마음 속에 콱 들어와 박힌 말씀은 ‘안식일이 돈 많고 권세 있는 가진 자를 쉬게 하려는데 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하인이나 종 가축을 쉬게 하려는데 원래의 취지가 있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가르침에 흥분이 되어 집에 돌아와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 날 만난 후배의 새 애인은 성공회에 나와 본 적이 없었던 여학생이었다.
그녀가 왜 성공회에 다닌다고 자기소개를 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여튼 그 여학생을 술자리에서 먼저 만나 역사책에서나 본 적 있는 성공회교회가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덕에 성공회교회에 그 날 처음 발을 들여놓았지만 별 거부감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