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2:39-44 무게감
9월 10일에 제109회 총회가 있었습니다. 총회 전 공기가 혼란스럽고 위태로웠습니다. 총회를 위해 기도하며 당일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7시 3분 기차로 올라가기 위해 역으로 자가용으로 이동했습니다. 택시를 타도 기본요금이라 평상시는 택시로 움직였습니다만 그날은 자가용으로 움직였습니다.
교회 들어오는 입구 쪽에서 좌회전을 신호를 받기 위해 대기 중에 횡단보도에 비상 깜빡이를 켠 파란색 자가용을 보았습니다. 좌회전하니 또 다른 파란색 자가용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연동 육교 못 가서 또 다른 파란색 자가용을 보았습니다. 짧은 거리에서 움직이는 파란색 자가용 3대를 보며 ‘이게 뭐지?’ 하며 휴대전화로 파란색의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평화와 안정’ ‘신뢰와 신용’이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동행한 목사님들께 “총회가 평화롭고 안전하게 끝날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총회 후 어떤 목사님께 이 이야기 했더니 본인도 총회 장소까지 이동하는데 777 차 번호판을 3대를 보아 ‘총회가 나뉘지 않고 하나 되어 가겠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총회를 사랑하고 총회를 위해 기도하는 종들에게 총회 전에 여러모로 알려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총회나 노회나 교회나 모두 하나님께서 주인 되어 주관, 주장하심을 믿습니다.
지난주일 말씀 되새김질 한번 하고 가겠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 조그마한 땅에서 긴 도피 생활로 인한 불안, 회의, 피로감이 덮쳐오자 다윗은 블레셋 망명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묻는 기도를 그렇게 잘하는 다윗이었지만 이 건으로는 하나님께 묻지를 않았습니다. 블레셋 왕으로부터 환영을 받은 다윗은 시글락 성을 요청했고 받아 자기와 함께 한 600명과 시글락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한편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가드로 망명한 사실을 알고 추격을 멈추었습니다.
잘 생각하고 선택한 것 같았지만 어느 날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윗도 600명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블레셋 편이 되어 동족과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참여하여 전쟁을 치렀다면 훗날 왕이 되려고 할 때 동족에게 칼을 겨루고 전쟁한 자가 어떻게 우리 왕이 되겠냐고 반대하면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인데 이 일에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셨습니다.
다윗을 본 블레셋 방백들이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닙니까? 전장에서 돌아서서 우리의 적이 되어 우리를 공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다윗은 백성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사람입니다. 절대 불가합니다. 돌려보내소서!”
다윗은 다행히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600명과 함께 사흘 길을 걸어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 그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침략하여 불태우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모든 짐승까지 약탈해 갔습니다. 처자식과 재산 다 잃고 시글락 성은 불타버렸습니다. 그들은 울 기력이 없을 정도까지 울었습니다. 울면서 생각해보니 지도자 다윗의 무능, 잘못이라 생각하고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 30:6)
크게 다급한 다윗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용기는 내 쪽에서 내는 것입니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힘을 내자.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하자!’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용기를 냈습니다. 용기의 근원, 힘이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다윗은 용기를 얻어 다시 도전하고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용기를 얻은 다윗은 먼저 무엇을 했습니까?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삼상 30:8)
길을 물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쫓아가라!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을 것이다.” 길은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길입니다. 믿음으로 이 길을 갈 때 순탄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가라 한 이 길에서 어떤 일을 만나고, 이 길의 끝에는 어떤 결과가 준비되어 있을까요?
먼저, 이 길에서 만난 일은?
①응답 믿고 출발한 그 길에서 다윗과 600명이 만난 첫 번째 일은 피곤해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겠다는 낙오자 200명이 발생했습니다. 군사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데 3분의 1을 두고 가야 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브솔 시내에 두고 400명만 데리고 갔습니다.
②주님 말씀 믿고 믿음으로 가는 그 길에서 두 번째로 만난 일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 그래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 출신인데 아말렉 종이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병이 들어 버림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시간이 지체되지만, 먹이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후에 이 사람이 길잡이가 되어 아말렉을 쉽게 추격할 수 있었습니다. 돕는 자가 되었습니다. 귀한 사람을 길에서 만난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길의 끝은?
승리에 도취해 광란의 술판을 벌이고 있는 아말렉을 쳐서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대로 모두 되찾았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고 무슨 일을 만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끝은 더더욱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응답받아 그 길을 믿음으로 가야 가장 안전합니다. 길을 알고 믿음으로 갔지만 여러 가지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흉년을, 다윗처럼 낙오자 200명을, 바삐 가던 길을 멈춰서게 하는 병든 군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고 허락한 일이니 두려워 말고 그 길을 계속 걸으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가다 보면 그 길의 끝이 있을 것이고 그 길에 끝에는 도로 찾는 좋은 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처럼 다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의 끝은 항상 해피엔딩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선으로 끝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브솔 시내에서 쉬고 있는 낙오자 200명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그들과 전리품을, 축복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고 이김도, 되찾음도 주셨으니 나누고 선교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승리의 전리품을, 축복의 열매를 나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빚진자
목포에서 목회하시다 은퇴하신 목사님의 초대로 압해도 집으로 가서 식사했습니다. 식사 후 물었습니다. “목사님! 은퇴하니까 뭐가 좋습니까?”
“목회를 안 한다는 것이 그렇게 홀가분하네.” 30년 넘게 했는데 목회가 늘 눌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것이 그렇게 은혜롭고 좋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목회와 설교의 무게감이 컸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공감하고 동감이 되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가 갈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설교 준비의 부담감이 큰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감정적, 정서적, 책임의 무게감이 있습니다. 가장의 무게감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먹여 살리고 교육하기 위해 긴 세월 다 참고 견디며 속 시원하게 말도 못 하고 속에 담고 고독하게 때론 혼자서 눈물을 닦아야 했던 가장의 무게감을 아십니까?
어머니의 무게감도 너무 큽니다. 우리 어머니 애창곡 18번 ‘여자의 일생’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견딜 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 가며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진성 씨가 부른 ‘보릿 고개’에서도 어머니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 고갯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 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아이야 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 고갯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 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통곡이었소
남편 먼저 보내고 혼자 되어 남겨둔 자식들 다 키우실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가난과 싸우고 유혹과 싸우고 세월과 싸우고 무시와 괄시 참아내며 자식들 다 키워 시집과 장가 보내신 어머니의 무게감을 우리가 어찌 다 알겠습니까? 손자까지 키우신 분들도 있던데 훌륭하고 대단하십니다. 이런 분들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는데 배운 자들이 나라를 망쳤습니다.
예수님의 무게감을 아십니까? 나를 위해,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려고 하실 때, 피하고 싶을 만큼 크게 느껴졌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39-44)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메시아 예수님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위함입니다. 이유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막 10:45)
대신 벌을 받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0~11)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때가 오자 구원자 예수님의 무게감은 너무 컸습니다. 크다고 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끝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믿고 맡긴 직분입니다. 직분과 자리의 무게감이 크게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그런 무게감을 서로 알아주고 위해 서로 기도하며 협력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 예수님만 바라보고 밀알 정신으로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종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