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한담漢詩閑談
학고鶴皐 김이만金履萬과 제천
조영임(중국 광서사범대학 교수)
도덕은 경전에 있고,
치란은 역사에 남는 법.
천지에 만상이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은 오직 시뿐.
道德在於經, 治亂存乎史.
乾坤有萬象, 傳者唯詩爾. 「두보의 시를 읽고(讀杜甫)」
위의 시는, 도덕은 경전을 통해 알 수 있고, 치란의 흔적은 역사에 남듯이, 천지 만상은 시를 통해서만이 전해진다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시詩가 지닌 가치를 매우 긍정적이면서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다. 위의 시를 쓴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시를 배운 이래로 일흔여섯 살이 되기까지 만여 편이 넘는 시를 창작하였다고 자술自述하였다. 평생에 걸쳐 만여 편의 작품을 창작하였다니, 그는 분명 다작의 시인이었다. 또한 진정으로 시를 애호하였던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김이만(金履萬
1683~1758)이다.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문인으로 자는 중수仲綏, 호는 학고鶴皐이다. 제천 단곡檀谷에서 출생하였다.
김이만은 세종 때의 명신 김담金淡의 팔세 손이다. 본래 김이만의 고조 때부터 예천에서 세거하였는데, 부친인 김해일金海一이 성주목사로 있던 중 파직된 후 울울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호서 일대를 유람하다가 제천의 풍광을 몹시 사랑하여 이곳에 복거하기 시작하였다. 김이만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성격이 침착하였으며 총명하여 암기를 잘 했다고 한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난 뒤로는 어머니 여주 이씨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았다. 어머니 여주 이씨의 외조부는 이판을 지낸 동리 정세규鄭世規이다.
김이만은 31세가 되는 1713년에 사마시와 증광문과에 잇달아 합격한 이래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전조, 병조좌랑, 사예, 장령 등의 내직을 역임하였고 평안도사, 무안현감, 양산군수, 서암군수 등의 외직을 거쳤다. 위와 같은 환로宦路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중앙정계에서 화려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기보다는 외직을 전전하거나 한직을 담당하며 일생을 보낸 관료였다. 따라서 관료로서의 김이만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이력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인으로서의 김이만은 특기할 만하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스스로 평생에 지은 시가 만여 편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왕성하게 문학 활동을 한 것만 보아도,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시가 3천 여 편이 된다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이제 김이만의 시세계를 조망하기 위해 몇 편을 소개하여 보기로 한다.
새벽 일찍 소를 몰고 가서
돌아올 땐 해가 뉘엿뉘엿.
밭갈 때는 정신없어 몰랐는데
돌아보니 아, 구름을 갈았구나.
淸早驅牛去, 歸來日欲曛.
耕是渾不覺, 回望始知雲. ― 「구름을 갈다(耕雲)」
위의 시는 밭을 가는 농부의 평범한 일상을 시화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시가 돋보일 수 있는 것은 기·승·전구에서 보이는 평이함이 결구에 이르러 반전된 데 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여 해가 저물 때까지 정신없이 밭을 갈고 돌아보니, 농부가 간 것이 밭이 아니고 구름이라고 한다. ‘구름을 갈다’는 표현은 농부의 고단함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릴 만큼 낭만적으로 처리되었다. 결구의 참신한 발상과 표현이 이 시를 살리고 있다.
남쪽 마을과 북쪽 마을에
눈 쌓인 시냇길은 하나뿐이네.
다리 끊어졌다고 시름하지 말게나
누운 버들로도 건널 수 있네.
南村復北村, 雪澗一條路.
橋斷不須愁, 臥柳亦堪渡. ― 「눈 쌓인 시내에 다리가 끊어지다(雪澗橋斷)」
시골 마을이 하얀 눈으로 온통 뒤덮였다. 아랫마을도 윗마을도, 그리고 하나뿐인 시냇길도 눈에 덮여 버렸다. 그리하여 다리마저 끊어진 것이다. 눈길을 뚫고 가야 하는 행인이 있다하여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누운 버들을 다리 삼아 건너면 될 터이니 말이다. 남촌, 북촌, 시냇길, 끊어진 다리, 누운 버들이 하얗게 눈에 덮여 있는 정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래서 위의 시는 「설간교단雪澗橋斷」이라는 그림에 쓴 제화시처럼 느껴진다. 매우 회화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이만의 시는 매우 간결하고 평담하다. 그가 일상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시가 되었다. 까다롭고 복잡한 용사를 쓴다거나 난삽한 운자를 쓰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일찍이 김이만은 자신의 ‘시도詩道’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시도詩道에 있어서는 모두 전심전력하였다. 산수와 누관樓觀,
봄바람 불 때의 꽃과 눈 내릴 때의 달빛, 그리고 기뻐하고 놀라고
근심하고 슬퍼한 일들을 하나하나 시로 적어 드러내었다.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었으니 왕왕 미묘한
경지에 들어간 것도 있다. 절구는 당시를 법 삼았고, 율시는
당, 송, 명에서 취하되 두보의 시법을 따랐다. 고시는 <문선>을
따르지도 않고 당시唐詩를 따르지도 않으며 송시宋詩를 따르지도 않았다. 흉중의 생각을 그대로 적어내려 갔으니 감식안을 갖춘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지 못하겠다.
다작의 시인 김이만은 자신만의 확고한 시작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시를 쓰는데 있어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산수가 아름다운 어느 곳이든 시를 지었고, 좋은 때라 생각되면 어느 때고 시를 지었다. 심중의 희로애락은 모두 시구로 형상화하였다. 그러니 다작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김이만은 당시의 절구와 두보의 율시를 시의 전범으로 여겼다. 그는 두보뿐만 아니라 소동파의 시도 상당히 애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 동파의 시를 읽노라면 동파와 더불어 말을 나누는 듯하네. 구구절절 기이한 기운이 나오고 편마다 호탕한 자태를 더하였네.(我讀東坡詩, 如與東坡語. 句句出奇氣, 篇篇盡豪擧)”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김이만은 고시에 있어서 당시도, 송시도 아닌 흉중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을 지향하였다.
김이만의 시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시화되었다.
흉년이 겨우 지나도 보리를 추수할 것 없는데
온 집이 유리걸식하여 행길 가에서 울부짖네.
凶年纔縷度麥無秋, 瑣尾全家泣道周.
─ 「곤궁하여 스스로 살 수가 없어 그 아내와 딸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옮겨간 어떤 객이 있어 이를 보고 불쌍하여 장구의 시를 짓다.(客有窮不自存與其妻女轉徙他鄕者見而悶之賦得長句)」
내게 양식 없어 네 배를 채울 수 없고,
내게 비단 없거니 네 몸을 따스하게 할 수 없네.
我無粟兮果爾腹, 我無繒兮煖爾軀. ─
「거지를 슬퍼하며(哀丐者)」
위의 첫 번째 시에서는 흉년에 처자식을 데리고 유리걸식하는 백성의 모습을 그렸고, 두 번째 시에서는 거지를 슬퍼하며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시인의 마음이 표현되었다. 이밖에도 농촌에서 모내기 하는 모습, 농부들의 휴식, 농사의 괴로움 등 실로 다양한 소재가 시화되었다. 또한 그의 시에 대한 열정 역시 늘그막까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120일 동안 330수를 창작하였다.(一百二十日, 三百三十詩)”는 글이 증명하고 있다.
김이만 시에 있어서, 그가 태어나고 머물렀던 제천은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는 1719년 모친의 삼년상을 치른 뒤 제천의 청전淸田에 약 3년 간 은거하였다. 청전은 그가 태어난 단곡과는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김이만의 자호인 학고鶴皐 역시 청전과 연관된다. 청전들에 울려 퍼지는 학의 울음소리를 표상한 것이 바로 학고이기 때문이다. 1730년 무안군수에서 파직되었을 때도 고향인 제천으로 돌아와 초당을 짓고 기거하였다. 그리고 1746년 서산군수로 나갔다가 파직되었을 때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시집에 보이는 「학명헌팔영鶴鳴軒八詠」, 「청전이십영淸田二十詠」 등의 시는 모두 청전을 노래한 것이다. 「청전이십영淸田二十詠」에서 노래한 소재는 학고초당鶴皐草當, 백학봉白鶴峰, 능허대凌虛臺, 칠송정七松亭, 괴단槐檀, 도오桃塢, 백록栢麓, 율원栗園, 유돈楡墩, 유당柳塘, 학교鶴橋, 북평北坪, 월악月岳, 남산사南山寺, 임호林湖, 우륵당于勒堂, 후선각候仙閣, 연자암燕子巖, 용두산龍頭山 등이다. 이러한 시편들은 18세기 초 제천의 풍광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아래의 시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이다.
중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니
작은 집이 앞 들판을 굽어보네.
학을 길러 그저 벗으로 삼고
책 뒤적뒤적 절로 둥지로 삼네.
산승이 산나물 한 줌을 보내주고
개울가 노인이 생선 한 포 주었네.
이 풍미에 내가 자못 만족하니
어찌 화려한 음식을 부러워하랴.
中年還舊隱, 小築俯前郊.
養鶴聊成友, 攤書自作巢.
山僧分菜把, 溪叟送魚包.
風味吾差足, 何曾羨綺庖.
― 「마음을 적다(書情)」
위의 시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제천으로 돌아와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는 시인의 모습이 잘 그려졌다. 시인의 집은 청전 들이 마주 보이는 백학봉白鶴峰 근처에 있다. 그러니 시인이 학을 벗삼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치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하여 서호에 은거하였던 북송의 시인 임포林逋가 떠오른다. 은연중에 자신을 임포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평생 문인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니 책과 떨어질 리 없다. 한적하게 책을 뒤적이는 그의 집은 둥지나 마찬가지다. 산승이 산나물을 보내주고, 노인이 생선을 준다하니 이웃과도 허물없이 지냈는가 보다. 김이만은 관직에 있을 때 고향을 떠나있었지만, 그 외 많은 시간을 고향에 머물렀기에 대부분의 인사가 구식舊識일 것이다. 그들이 건네주는 산나물 한 줌, 생선 한 포가 비록 소박하지만 이 속에 깃든 풍미야말로 시인이 진정 원하는 것이다. 소박함에 진정이 깃들어 있음을 알기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니 관직에 몸담으며 맛본 산해진미를 부러워할 이유가 있겠는가. 담담한 시정을 평담한 풍격으로 시화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김이만은 1752년 70세의 나이에 집의에 제수되고, 이듬해에는 다시 사간원 집의에 임명되었다. 1756년에는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고, 겸하여 지중추부사가 주어졌다. 이후 고향에 있던 김이만은 76세의 나이에 타계하여, 그의 부인의 묘소가 있는 단곡에 안장되었다.
김이만은 한국한시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학계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은 시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문집 『학고집鶴皐集』을 통해 18세기 조선 사회의 풍정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천 지역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수천 편의 한시를 남긴 타고난 시인이었다. 삶의 희로애락 일체를 시화하려 하였던 18세기 시인의 유작을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로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그리하여 그의 시를 통해 삼라만상을 읽어내는 지혜를 얻는다면 또 얼마나 큰 기쁨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