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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經 / 正經學 / 말씀 스크랩 성경 읽기와 성경해석 / 오광만의 성경해석 4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28 14.07.22 14: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경 읽기와 성경해석

오광만의 성경해석 4
2001년 07월 01일 (일)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오광만  교수/ 장신 신학원

 


성경 해석은 성경 읽기를 잘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읽기와 성경 해석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 좀 의아해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시 낭송을 생각해보십시오. 시는 읽는 사람의 감정이나 끊어 읽기의 여부, 그리고 억양, 심지어 목소리의 색깔이나 배경 음악에 의해서도 전달되는 메시지가 달라집니다. 연애 편지를 읽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시를 낭송할 때든지 연애 편지를 읽을 때든지 우리는 문자를 읽지 않고 글 쓴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읽고 그것을 전하려고 합니다. 글은 어떤 자세로 하느냐에 따라 글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글로써 저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결국 바른 독서법의 문제이며,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적용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사실 많은 문제에 부닥치며, 대부분은 그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은 채 문제를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저자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경우 실제로 성경의 의미를 알기 위해 고민하기보다는 그 전에 습득한 의미의 지배를 받아, 같은 글을 열 번을 읽든지, 백 번을 읽든지 그의 이해에는 변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의 경우 그가 본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결과가 아니라 비전문적인 지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더더욱 바른 독서 습관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성경을 읽을 때 무슨 문제들이 발생하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요? 쉬운 본문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28~30을 읽고 그 뜻을 알려고 한다고 합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전체의 느낌이 어떻습니까? 어떤 장면이 머리에 떠오르십니까? 우리가 평상시 사용하지 않던 단어는 없습니까? 또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의미를 정확히 밝혀야 할 단어는 없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쉬게 한다는 말의 의미, 나의 멍에는 무엇인지, 멍에를 메고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의 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등 이런 문제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제 폭을 좀더 넓혀서, 왜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구체적인 상황이나 그분이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청중들이 지고 있었던 짐과 새롭게 지게 될 짐의 차이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글마다 그것을 쓰는 맥락이 있고, 말마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그 말을 하게 된 전, 후 상황이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래서 글이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 적은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글을 읽거나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1. 구문을 바르게 파악하기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끊어 읽기를 제대로 해봅시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주로 사용하고 있는 [한글 개역 성경]은 끊어 읽기에 도움을 주는 쉼표나 마침표 또는 의문 부호나 느낌표 그리고 따옴표 등의 문장부호가 없고, 앞, 뒤 말의 논리적인 연결을 위한 접속사 표시가 잘 나타나지 않는 곳이 많아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호에서 몇 번에 걸쳐 설명한 번역 성경 이용하는 문제를 활용하여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을 해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서 이 본문을 어떻게 표기했는지를 비교해봅시다. 문장 나누기의 표시(구두점)와 논리적 연결사에 중점을 두면서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진하게 표시해 놓은 곳(논리적 연결)과 밑줄을 그어놓은 곳(구두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표준새번역> “수고하여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전체 다섯 문장으로 분류하고 논리적 연결사는 두 개가 발견됨)

 

<공동번역>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전체 다섯 문장으로 분류하고 논리적 연결사는 두 개가 발견됨)

 

<현대인을 위한 성경>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아,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 (전체 여섯 문장으로 분류하고 논리적 연결사는 한 개가 발견됨)

 

<현대어 성경>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전체 다섯 문장으로 분류하고 논리적 연결사는 두 개가 발견됨)

 

<NIV 성경>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전체 세 문장으로 분류하고 논리적 연결사는 네 개가 발견됨-명령형에 이어지는 and를 조건에 대한 귀결로 볼 경우)

 

한국어 번역 성경은 거의 공통적으로 이 문장을 대, 여섯 개로 나누어 놓았고, 논리적인 연결사도 두 개 이하로 만들어 문장을 너무 분리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면, NIV 성경은 전체 구문을 셋으로 분리하면서 문장 간의 논리적인 연결을 중시하였습니다. 위의 번역성경의 도움을 받아 마태복음 11:28~30에 대해 이해한 것을 풀이해 놓으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지쳐 있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라고 초청하신다. 그런 사람들에게 쉼(안식)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기 때문에, (전에 메고 있던 짐을 벗는 대신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서 어떤 교훈을 받으라고 한다. 그러면 그 결과 그들은 쉼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육체의 피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이 ‘마음‘이라는 단어가 암시해 주는 것 같다. 그런데 왜 마음의 쉼을 위해 무겁다고 생각되는 멍에를 메라고 했을까? 그분의 멍에는 전에 메던 것과 달리 쉽고 그 짐은 가벼운 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2. 중요한 단어에 관심 갖기
이런 대략적인 구문 이해가 되었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이 말의 뜻을 찾는 데 관심을 가져봅시다. 이 말씀에서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단어는 “멍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멍에에 대한 현대 독자들의 생각은 성경적인 배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 주변에서 사용하는 의미들일 것입니다. “멍염에 대해 이희승의 [국어사전](민중서림 刊) ‘멍엶 항목에는 ① 마소의 목에 얹어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라는 물리적인 멍에 이외에 ② 전하여, 행동에 구속을 받거나 무거운 짐을 짐이라는 비유적 의미가 제시되었습니다. 이것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 또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도록 얽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밖에도 멍에에는 “행동에 구속을 받다,“ “어떤 고역을 치르게 되다“는 뜻이 있습니다.

 

3. 문맥과 배경에서 의미 찾기

본문을 이런 의미로 이해해도 문제는 없겠는지 다시 본문 읽기를 통해 알아봅시다. 우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이 본문에 도움이 될지를 알아보겠습니다. 가까운 문맥은 25~30절입니다. 예수님은 11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예수께서 선포하셨는데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복음의 내용은 지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것인 반면 지혜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계시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본문과 직접 연관된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 특히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문맥 이해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문맥은 본문에 등장하는 주요 단어가 등장하는 다른 문맥입니다. 마태복음 23:4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은 구약의 말씀의 본질은 망각하고 세칙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세칙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면서 예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내용을 잘 지키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어떤 계명에 대해 파생된 세칙을 백성들에게 부과한 것을 “무거운 짐“이라고 이해한 것이 분명하고, 사실 백성들은 그 짐을 즐겁게 지기보다는 “무거워“ 어깨가 내려앉을 정도였다는 것이 당대의 상황입니다.

 

처음 독자들이나 청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하였으며 마음에 어떤 상황을 연상했는지를 찾는 것도 글을 읽으면서, 특히 고대의 글을 읽으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입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알기가 힘든 배경 지식이지만 처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주전 1-3세기의 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시락의 집회서]라는 외경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지혜를 들어라“ (24:1), “나를 원하며 나의 열매를 먹기 원하는 모든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24:19). “나의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침이 필요한 모든 너희들은 나에게 오라“(51:23이하). 

 

“멍에를 메고 기꺼이 배우도록 하라“(51:26). “적절한 너의 의무를 다하고 주님께서 너를 생각하실 때 그 분께서 너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51:30). 이것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맥락 중에서 마태복음 11장의 맥락과 가장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락의 집회서]는 의인화된 지혜가 자기에게 배우기 위해 자기에게 올 것을 초청하고 있고, 그 배움은 멍에를 메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멍에를 멘다는 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붙여 놓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해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구약적 배경에서 이런 내용이 어떻게 표현되었고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찾읍시다. 다니엘 2:20, 21은 배움과 지혜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리고 멍에를 정복자가 패배자들에게 지워 힘들게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예도 성경에서 발견되는데, 예레미야 28:10~14에 언급된 “바벨론의 멍염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레미야 28:13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네가 나무의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이 두 예에서 보듯이 유대교에서는 지혜가 율법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랍비들은 율법을 인간이 감내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멍에라고 가르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23:4이 바로 이런 상황에 정확히 일치하는 본문입니다(cf. 행 15:10).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작업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교훈과 동일한 말씀인지 진일보한 말씀인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구약 성경이나 유대교, 심지어 예수께서 바로 이전에 하신 마태복음 11:25~27의 선언에서는 그분이 지혜의 선포자와 약속자라는 것이 강조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하겠다는 사실만을 예고하거나 선언하였던 반면에, 본문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지혜 그 자체가 되신다고 주장한다는 것이 큰 차이입니다. 그래서 지혜이신 그분은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안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은 실제로 나무로 만든 굴레가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그분이 주시는 안식을 가리킵니다. 어디서 안식을 준다는 것인지는 전후 상황을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기 힘든 멍에, 율법 지킴에서 쉼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단지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해방을 주는 것만 아니라, 진정한 쉼은 예수께서 주는 멍에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이 말은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는 예레미야 6:16에 비추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의 성취자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예레미야 본문의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말씀하셨고,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안식을 얻는 길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주장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한 구약성경이나 [시락의 집회서]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락의 집회서]에서 제안하는 안식을 얻는 방법은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연구하는 학자에게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느라 수고하고 있는 사람에게,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을 받는 것으로써 안식을 제안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25에 하나님께서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시겠다(31:22)고 약속하시고는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는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안식은 궁극적으로 구주 재림 때 성취될 것이지만(계 6:11, 14:13), 예수님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 중에 그것을 누릴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스스로 지키면서 안식을 얻으려고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예수님께 나오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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