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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회 동학농민혁명기념제
황토현 학생축전 녹두골든벨 대회 자료
2006 골든벨 자료
[1] 갑오농민혁명 전개과정
1. 다시 살아오는 역사의 불길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농민봉기를 시발점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최초로 민중의 자각에 의한 전국적 농민항쟁으로서 근대사회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1차 농민항쟁은 자유민권을 위한 반봉건 항쟁이었으며, 2차 농민항쟁은 일본침략군을 이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존의 반외세항쟁이었다. 지배,예속 관계에 기초한 봉건적 사회경제체제를 무너뜨리고 평등, 자유, 자치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한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보수 양반계층의 연합세력(민보군), 그리고 이들이 끌어들인 외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맥은 이후 활빈당 운동, 영학당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항일 의병항쟁 및 13도창의군, 독립군, 3.1운동, 광복군 등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419, 518, 6월시민항쟁을 거쳐 오늘의 붉은악마에 이르고 있다.
2. 동학혁명의 발자취
1) 배경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간에 걸친 나이어린 왕들이 즉위하자 안동김씨, 풍양조씨로 이어지는 세도 정치(외척세력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비정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앙정치 기강의 문란을 가져왔다. 중앙정치의 문란은 탐관오리의 득세를 가져왔으며 그로 인하여 사회는 동요되고 삼정의 문란을 초래하였다. 삼정이란 봉건적 수취체제의 기본이 되는 전정(토지세), 군정(16-60세에 해당하는 성인 남자들이 군대에 안 가는 대신 내는 세금), 환곡(춘궁기 때 관곡을 빌려주고 추수때 갚도록 한 제도)을 말하는데 이것이 지방관 들의 농간으로 수탈의 수단으로 변하여 농촌사회의 파탄을 가져왔다. 뿐만아니라 조선 후기 이래의 지주제의 확대 발전과 농법의 발달은 농촌 사회의 계층을 변화시켰으며 봉건적 수취체제는 군현단위로 세금을 징수하는 총액제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양반 토호들은 빠져버리고 그 몫까지 농민들이 부담하게 되었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거지떼가 되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고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으며 이러한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주인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안으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모순이 표출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를 앞세운 서양열강의 침략이 노골화 되어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무너뜨리며 새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전환기였다. 특히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이 청,일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조선에서의 주도권은 청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서의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경제적 침략에 주력하게 되어 조선은 일본의 식량 공급지가 되어 버렸다. 값싼 생필품을 미끼로 한 일본의 쌀 수입이 늘어나게 되자 국내 쌀값은 폭등하게 되어 조선 민중은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부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거둬 민중을 수탈하였으며 관직을 직접 매매하는 매관매직도 여전히 성행하였다.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은 그 동안 들인 비용을 충당하고 더욱 축재하기 위해 각종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민중을 수탈하는 방법도 다양해 졌다. 이러한 봉건적인 사회 경제관계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봉건통치 계급의 횡포한 착취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중이 저항의식으로 발전되어갔다. 이와같이 봉건체제의 모순이 깊어가는 가운데 1862년 이후 삼남의 70여 고을에서 농민봉기 가 발생하여 1892년경에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농민항쟁의 조직과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동학이었다. 동학은 경주출신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자본주의 열강이 점차 침략의 야욕을 뻗쳐오던 1960년 서학(천주교)에 대립하여 창시한 민족종교였다. 동학사상의핵심내용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수 있다. 당시 봉건 지배계급은 민중을 오로지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동학은 이에 대항하여 평등사상을 제시하였다. 이는 봉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때 유교적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민중 계층의 요구를 반영한 이념이었기에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동학 사상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외세 침략과 봉건체제의 모진 굴레 속에서 "보국안민"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론이 결여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민중의 실천속에서 극복되어졌다.
2)교조신원에서 척왜양창의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964년 봉건정부에 체포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홀리는 망령된 설을 퍼뜨렸으며 평상시에 난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무리를 모았다"는 죄명으로 대구장대에서 처형당하였다. 물론 동학은 일체 금지되어 탄압을 받았고 이를 빌미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교세가 더욱 확장하게 되자 동학의 합법성을 요구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교조신원운동이다.
[1] 삼례집회
1892년 10월 공주집회가 별 소득없이 해산되자 1892년 11월 3일 전라도 삼례에 수천명의 민중이 모여 10여일간 집회가 계속되었다. 이에 전라감사 이경직의 "동학의 인정여부는 권한 밖이며 동학을 빌미로 한 관할 지방수령들의 수탈을 금하겠다."는 답신을 받고 집회를 해산하였다.
[2] 한양의 복합상소와 척왜양 운동
1892년 12월 초 민중의 재집회 요구에 충청도 보은장내리에 수천명이 모여들었다. 이에 당황한 동학의 북접 상층부는 하층농민 대중의 집단력을 피하고 소수인의 대표에 의한 상소의 방법을 제시하여 1893년 2월 8일 40여명의 대표단이 광화문 앞에서 3일밤낮으로 엎드려 상소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 가 생업에 힘쓰고 있어라, 그러면 이에 소원에 따라 시행하리라."는 답신을 내렸다. 이에 북접계 쪽에서서는 복합상소를 중지하고 곧장 해산해 버렸다. 한편 복합상소가 진행되고 있을때 이미 한양에서는 남접계 농민들이 상경하여 외국 공사관 및 교회에 강경한 내용으로 외세배격의 벽보를 붙이고 다녔다.
[3] 보은과 원평집회
1893년 3월 11일 전라경상충청경기강원등 각지에서 끝도없는 군중의 대열이 충청도 보은으로 몰려들었다. 수만명이 모인 이 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라는 외세배격의 정치적 구호가 등장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임명하여 토벌토록하였다. 어윤중은 4월 1일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계지도부와 만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말을 전하였고 이에 북접계 지도부는 감격하여 해산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북접계 지도부의 투항적 태도는 농민대중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최시형 손병희 등은 그 날 밤을 틈타 빠져나가 버리게 되었다. 보은 집회가 이렇게 진행되어 갈때 전라도 원평에서는 전봉준 등이 주도한 원평집회가 뜨거운 열기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은집회가 흐지부지 해산하게 되자 운동의 강력한 구심점을 원평집회에 두면서 보은집회의 열기를 끌어모아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던 계획이 무산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3)사발통문 거사계획
고부지경은 호남제일의 쌀 생산지이며 농산물 집결지였다. 뿐만아니라 서해안을 끼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 하였다.그런만큼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봉건적 수탈과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극심한 곳이었다. 이러한 때 부패한 봉건 정부의 하수인인 고부군수 조병갑은 당시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삼정의 문란을 이용한 수탈외에도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수탈을 일삼았다. 그 한가지로 만석보 축조를 빌미로 수세를 받았다. 마침 1893년 극심한 흉년이 들어 그해 11월 40여명이 농민들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만석보의 수세 감면을 진정하였으나 조병갑은 오히려 양민을 선동하는 난민이라 하여 그 가운데 대표자 몇 사람을 구금하였다. 이로 인하여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지고 전봉준 등 20여명은 송두호의 집(고부 신중리 죽산마을)에 모여 고부군수 조병갑 외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거사 계획을 결의하였다. (사발통문 거사계획) 그러나 이는 실행에 올겨지지 못하였다. 11월 30일 고부 농민들이 1차 공격 목표인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 발령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후 5명의 인물이 고부군수로 발령이 났으나 조병갑의 치열한 재취임 공작에 밀려 부임하지 못하게 되자 급기야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취임하게 되어 결국 고부농민봉기를 자초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4) 고부에서 혁명의 불꽃이
1894년 1월 10일 밤 배들평야(이평)주변의 10여부락의 농악대에 이끌려 농민들이 예동마을(말목장터)에 모여 들었다. 이날 밤 일장 연설을 마친 전봉준은 모인 농민들을 두패로 나누어 고부관아를 향해 진격하였다. 농민들은 인근 대밭에서 죽창을 만들어 쥐고 1월 11일 새벽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때 조병갑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수천의 분노한 농민들은 옥을 부소고 무고한 양민을 석방하였으며 창고문을 열어 강탈당했던 곡식을 인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원한의 대상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리고 말목장터에 진을 치는 한편 백산에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즈음 새로 부임해온 군수 박원명은 적극적인 회우책을 세우고 폐단의 시정을 약속하며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함열 조창을 점령코자 하였으나 조병갑 타도에 뜻을 이룬 농민들은 더 이상의 사태 진전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부득불 해산을 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제서야 안핵사 이용태는 역졸 800여명을 이끌고 고부로 들어와 모든 책임은 동학도에 있다하여 무고한 농민들까지 마구 잡아 가두고 학살하며 재물 약탈에 혈안이 되었다. 농민들이 원성은 하늘dmf 찌를듯 하였고 무장으로 간 전봉준은 당시 동학 조직의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손화중을 설득하여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5)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1894년 3월 21일(25일 설도 있음) 정읍 고창 무장 태인 금구 김제 부안 영광 등지에서 몰려든 농민들은 고부의 백산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손화중 김개남을 부대장격인 총령관으로 추대하고 오시영 최경선 등을 영졸장으로 하였다. 전봉준 등은 총사령부로서 백산에 호남창의 대장소를 두고 각지에 창의 문과 격문을 발하여 민중의 총궐기를 호소하였다. 아울러 농민군의 행동강령을 발표하였다. 그내용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백성의 가축을 행하지 않는다.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한케 한다. 세째, 일본놈을 쫓아내고 성인의 도를 깨끗이 한다. 네째 서울로 진격하여 나라를 망치는 간신배를 처단한다. 는 4개항으로 반봉건, 반외세의 목표를 명확히 하였다
6) 황토재에서 첫승리의 함성
이에 정부에서는 4월 2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중아군을 파견키로 하고 이보다 앞서 전라 감영에 서는 감영군과 보부상으로 구성된 2.400여명의 연합 부대를 4월 3일 백산으로 출동시켰다. 4월 7일 황토재 에서 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정읍을 점령하고 4월 8일 흥덕과 고창을 4월 9일에는 무장을 점령하였다. 4월 12일 영광을 점령한 후 함평 나주를 거쳐 장성으로 향했다
7) 장성에서 경군 격파 ----- 전주입성
4월 7일 전라감영군이 대패한 날 훙계훈이 이끈 경군이 군산에 들어와 전주에 도착하였다. 사기가 저하된 홍계훈은 조정에 증원군을 요청한 후 4월 27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초토사 홍계훈은 뒤를 쫓아 완산에 진을 치고 수차례 공방전을 전개하는 동시에 조정에 외세를 끌여들여 진압하자는 내용의 보고문을 보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여 5월 5일 청군이 상륙하였으며 일본군이 천진 조약가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5월 7일 인천항에 상륙하게 되었다. 동족을 처단하기 위해 외세를 끌여들여 이제 조선은 청.일 각축 장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에 접한 농민군은 5월 8일 정부가 요청한 유전 제의에 각종 폐단을 시정하는 내용의 개혁 안을 제시한 후 수락의 뜻을 밝히자 군군과 화약을 맺고 농민군들은 전라도 일대에 농민군 자치기구 인 집 강소를 설치하여 농민군이 주체가 되어 지방자치를 하였다.
8) 척왜의 깃발아래 다시 서는 농민군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정부는 청일 양국에 동시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서양제국주의 열강의 지지를 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주력하면서 일본군의 계속 주둔과 청국과의 전쟁구실을 만들기에 힘섰다. 마침내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입하여 고종을 연금시키고 친일정권을 수립케 한 후 아산만에 정박해 있던 청국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봉준 등이 그토록 우려했던 청일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의 강토는 외적들의 싸움장이 되고 말았다. 집강소 활동에 매진하면서도 정국을 주시하고 있던 전봉준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고자 9월 14일 전라도 삼례에서 재차 일어섰다. 이제껏 동학이라는 조직의 안전에만 중점을 두고 관망을 했던 북접도 논산에서 호응하여 합세하였다.
9) 통한의 우금티고개
10월 16일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이인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고 공주를 향하여 북상하였다. 그러나 이 미 일본군과 관군은 공주영의 요처에 병력을 배치하여 농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8일 공주로 진격 하여 우금치 고개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근대적 무기에 맞서 농민군은 4-50여차례 공방전을 펼쳤으나 농민 군의 주력부대가 끝내 참패하고 말았다. 공주전투에서 패한 농민군들은 논산 금구 태인 등 각지에서 일본 과 완강히 싸웠으나 또 다시 패하였다. 공주패전 이후 농민군들은 일본군의 가혹한 토벌전에 의해 삼남 일대에서 약 30만명 이상이 학살 당하였다. 전봉준등은 재기를 노리며 순창 쌍치 피노리를 들렀다가 변절자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 어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2005 골든벨 자료 [2] 고부농민봉기(古阜農民蜂起)
제1절 고부농민의 진정(陳情)
고부(古阜)
고부군은 백제의 고사부리군이며 백제 오방성 중의 하나인 중방고사성으로 백제 남방경영의 중심 역할을 하였고, 고려시대 초 영주관찰사를 두었으며, 한때 안남으로 개칭하여 도호부를 두었으며 현종 때 현재의 고부리로 고을터를 옮겼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역시 인군의 수읍으로 정치, 군사의 중심지이며 서해안의 요진으로 내려오다 1913년 일본 적치하에 정읍군으로 폐합되어 백산, 거마 두 면을 부안(扶安)군으로, 부안(富安)은 고창군으로 각각 편입시켰다.
고부는 동과 서북으로 끼고 있는 비옥한 농토, 여기에 서해안의 부안관(富安串)을 관할하고 있어 해류의 물산이 자뭇 풍부할 뿐 아니라 인문의 발달 또한 다른 고을에 선진하고 있으니, 가히 천부의 낙토로 일컫는 고장이요, 전라도 53군현 가운데 수위로 꼽히는 고을이다.
고부 고을은 다른 어느 고을보다도 가렴주구가 우심했다. 균전사나 전운사의 수탈이야 이 지방에만 있는 일이 아니지만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의 민재수탈이 또한 다른 고을의 수령들 보다 정도가 우심하고 방법이 더욱 잔인했던 것이다.
전봉준은 그의 공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민보 아래에 다시 보를 쌓고 보세를 징수하는데 일 두락에 상답은 두 말 하답 은 한 말씩을 받아 도합 7백여 석이 되었고,
1. 농민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5년간 무세 경작키로 허가해 주고 가을에는 세 금을 받았고, *균전사에 해당되는 업무이나 군아에서 취급하였음.
1. 부요한 농민들에게는 불효, 불목, 음행, 잡기 등의 애매한 죄목을 만들어 2만여 량의 재산을 늑탈했고, *죄를 모면하기 위하여 뇌물을 받쳤음.
1. 일찌기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의 비각을 세운다고 천여냥을 거두었고,
1. 대동미(국세로 납부하는 쌀)를 민간에서는 정백미로 징수하고, 국고로 보낼 때 에는 하등미로 납부하여 그 이윤을 독식하였고, *전운사의 소관 업무에 해당 함.
1. 보를 쌓는데 산주의 승낙도 없이 수백년 된 거목을 마구 베어다 썼으며, 노역 을 시킨 농민에게 임금 한푼도 주지 않았고, 또 이밖에 헤아릴 수 없는 수탈행 위가 있었다고 하였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그해 겨울 만석보의 아래에….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되는 지점 부근에…. 보를 높이 새로 막는 역사를 시작했다.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을 시키고 또 공사에 쓰이는 말구목은 아무데서나 수백년된 거목을 마구 베어다 썼다…. 명문의 선산도 아랑곳없이…. 이에 농민들과 산주들의 원한은 컸다. 뿐만 아니라 새 보를 높이 막음으로써 홍수가 지면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라 하여 매 두락에 보의 상답은 두 말, 하답은 한 말씩을 징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받아들인 보세를 예동․두전과 백산 세곳에 7백여석을 쌓아 놓으니 농민들의 원성이 비등했다.
1893년 가을에 이르러 고부고을 그 가운데도 「배들평」 농민들은 이 억울함을 고부군수에게 소장을 올려 진정키로 했다. 그리하여 11월, 40여명이 고부군아로 몰려가 만석보의 보세감면을 진정했으나 군수 조병갑은 오히려 양민을 선동하는 난민이라하여 그 가운데 장두 몇 사람을 구금했다.
대표자 세 사람은 다시 고부로 돌아와 중장을 맞고 옥중에 갇히었던 바 총 책임자 전창혁은 마침내 옥중에서 매맞아 죽고 말았다. (「東學史」)
제2절 고부군아의 점령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대표 20인은 계사년 11월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모여 숙의한 끝에 봉기의 거사 계획을 정하고 다음과 같은 사발통문을 각 마을의 집강들에게 보냈다.(별지 사발통문 참조)
사발통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고부농민봉기는 일시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원대한 혁명적인 거사 계획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부성을 격파한 후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로 향한다는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고부농민봉기를 민란으로 규정하려는 종래의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장계를 올려 「고부 전 군수 조병갑은 포흠이 많이 점차 청산하고 있으며, 때마침 세를 받아들이는 중인데 타읍으로 옮기게 되면 착오가 안될지 모르겠다」고 유임요청을 하자 정월 9일 이조에서는 전라감사의 장청대로 특위잉임(特爲仍任)을 주청하여 마침내 고부군수로 다시 유임하게 된 것이다.
사발통문을 돌린 전봉준은, 군수 조병갑이 11월 30일 익산군수로 발령되고 12월 한 달 동안에 다섯 사람의 군수가 발령되었으나 계속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사를 미루어 오다가 정월에 와서 조병갑이 다시 유임되자 마침내 고부군아를 습격하여 군수 조병갑과 향리들을 징치키로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 정월 10일 밤 「배들평」을 중심으로 한 10여 부락의 농악을 동원하여 그 중심지가 되는 예동에 걸군을 소집하니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이 모여 들었다.
이때 전봉중은 군중들의 자유를 제지해 놓고 호령했다.
「아녀와 노약외에 이곳을 탈출하는 자는 처참하리라.」
선언하고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들어 설명한후 제폭구민을 역설하니, 원에 사무친 군중들은 환성을 지르며 이에 호응하였다. 이날 밤 전봉준은 군중을 두 대로 나누어 고부읍내로 향했다.
제3절 안핵사 이용태
2월 15일 의정부가 전라감사 김문현의 고부민란 보고를 왕에게 주한 것을 보면, 전라감사는 난민을 잡지 못하고 명백한 조사도 못한 채 다만 군민들의 진정 조목을 들어 군수 조병갑을 파직시키고 잡아다 다스릴 것이며 고부군아의 관속배들을 취초할 것을 요청했다고 하였다.
고부민란의 책임을 물어 전라감사 김문현을 월봉삼등지전(越俸三等之典)에 처하며, 고부군수 조병갑은 치요범장의 죄로 나문정죄키로 하고,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민요가 재기한다는 풍설이 낭자하여 장흥부사 이용태를 고부군 안핵사로 임명하여 민란을 조사 보고케 하고 읍폐의 교정책을 강구할 것이며 수창 외에는 일일이 효유시켜 생업에 안정토록 하여 조정의 너그러운 뜻을 백성들에게 보이라 하였다.
고부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장두들과 만나 지금까지의 모든 비정을 시정키로 약속하고, 성의를 다하여 그들을 설득한 나머지 군중들은 마침내 해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안핵사 이용태는 이보다 며칠 늦게 역졸 8백명을 거느리고 고부에 내려와 주모자를 찾아내라고 닥치는대로 체포 투옥하고 그들의 가옥을 불지르며 처자들을 살상하고 심지어는 부녀자를 강음하는 등 가진 폭행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전봉준이 그 공초에서 말했듯이 2차 거사는 이용태의 만행으로 말미암아 다시 유발되었던 것이다.
정부의 이러한 방침에도 불구하고 이용태는 고부에 내려와 잦은 폭정을 자행했을 뿐 아니라 상황 보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신들간에는 고부의 난은 조필영, 조병갑으로 말미암아 발단이 되었고 이용태는 이를 확대시킨 과오를 저질렀다고 규탄하기도 했다.
2005 골든벨 자료 [3] 용어해설
◆안핵사 (按覈使) 지방에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하던 임시관직. 예를 들면 동학농민혁명 때는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에 임명하였다.
◆균전사 (均田使) 조선시대의 관직. 백성의 부담을 공평히 할 목적으로 실정을 살피고 혹은 토지의 등급을 다시 사정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하던 어사.
◆전운사 (轉運使) 조선 말기의 관리. 충청․전라․경상 각 도의 세미를 서울로 실어오는 일을 맡아보던 사람. 폐해가 심했다.
2005 골든벨 자료 [5]
정읍지역 유적지 소개[ 정읍지역 유적지 소개 ]
■사발통문
1893년 11월 고부군 죽산리( 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등 20여명이 모여 농민항쟁을 계획하고 그 결의 내용과 아울러 사발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서명하여 각리의 집강에게 돌렸다 하여 일명 사발통문이라 한다.
본문과 뒷부분이 떨어져 나가 그 전부를 밝힐 수는 없지만 1968년 12월 세상에 공개되면서 고부농민봉기가 우발적 감정의 폭발이 아닌 철저한 혁명적 거사 계획에서 치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글씨의 필체가 한사람에 의해 씌여진 점과 제작에 사용된 종이와 먹이 비교적 후대의 것으로 사용된 것으로 감정되어진 점 등을 들어 원본이 아닌 사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고부관아터
현재 전북 정읍군 고부면 소재지 내에 위치한 고부초등학교가 고부관아가 있었던 곳이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고부는 지리적으로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리는 두승산이 있고 고창 방장산에서 발원하는 눌지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눌지, 팔왕, 백산평야와 배들, 수금, 달천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당시 서해안의 부안 땅을 관할하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한 천혜의 낙토라 이를만한 고을이었다.
그리하여 백제때부터 남방경영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늘날 이름인 고부로 일컬어진 것은 신라통일 후 경덕왕 때(767)부터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전라도 서부지역의 정치, 군사의 중심지이자 서해안의 요진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일제시대때 정읍군으로 폐합되어 백산면은 부안군으로 부안면은 고창군으로 각기 편입되어 동학농민혁명 이후 농민군과 함께 쇠락을 같이한 고을이다.
■전봉준 장군 단비
전북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전봉준 고택에서 500여미터 떨어져 있는 소나무 숲에 위치한 이 비는 천안전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비문 앞면에는 태극문양과 갑오 민주 창의 통수 천안 전공 봉준 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이라 새겨져 있다.
■전봉준 고택
녹두장군 전봉준의 유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집은 1894년 고부농민봉기 이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버렸으나 다시 보수하여 사적 제283호로 지정하여 보존되어 오고 있다.
오늘날의 지명은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이지만 당시에는 고부군 궁동면이었다. 죽창문의 방 3개와 부엌이 딸린 본채가 있고 마당가에는 변소와 헛간으로 쓰이는 아래채가 따로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집으로 전봉준 장군이 고부농민봉기가 있기 5-6년 전에 이사와 훈장생활을 하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킬때까지 거주하였던 집이다.
■말목장터
1894년 1월 10일 밤 농민군이(고부농민봉기) 예동마을에 최초로 집결하여 고부관아로 진격한 곳으로 고부 점령 후 농민군의 진지로 되었다. 만석보에서 서쪽으로 약 2km가량 떨어져 있으며 오늘날 지명으로는 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이다. 당시에 군내의 중심지로 전라도 일대에서는 손꼽히는 농산물 거래장이 섰다고 하는데 일제시대까지 내려오다가 없어졌다고 함.
지금의 면사무소 앞에 전봉준 장군이 집결한 농민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고 기대어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아름드리 감나무가 있었으나 3년전 태풍 "매미"에 의해 쓰러진것을 방부처리하여 황토재 기념관내에 전시하고있다.
■만석보와 배들평야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위치한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쌓았다. 주변에는 배들평(이평)이라는 비옥한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어느 지역보다도 넓은 들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굶주리고 착취당한 당시의 농민들의 분노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의 작용을 하였다. 즉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새보를 막고 보의 윗논은 1마지기에 2말, 아랫논은 1말씩 징수하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1893년 11월, 12월 두 차례나 수십명의 농민들이 보세감면을 요청했다가 도리어 체포 구금되어 격분한 농민들에 의해 고부농민봉기를 촉발시켰으며 보는 당시에 파괴되어 현재는 보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1973년에 세운 유지비만 남아 있다.
■백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고부군 백산면이었지만 1914년 부안군으로 편입되어 현재 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로 불리고 있다. 백산은 해발 47미터 정도의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부안, 정읍, 신태인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주변 일대가 모두 넓은 평야로 이루어져 주위가 한눈에 들어오며 뒤편으로는 동진강이 흘러 천연의 요새이다.
1894년 3월 21일(25일 설도 있음)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들로써 본격적인 농민군 부대를 편성하고 호남창의 대장소의 이름으로 격문과 농민군 행동강령을 발표했던 곳이다. 원래는 휜뫼산(심미산)으로 불리웠으나 당시 온 산이 흰옷에 죽창을 든 농민군들로 뒤덮여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현재 백산의 정상에는 1989년 11월에 건립한 ‘동학혁명백산창의비’가 서 있다.
■격문
‘우리가 의(義)을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갑오동학혁명기념탑
현재 황토재 마루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 이란 농민군이 내걸었던 구호를 새겨놓은 최초의 기념탑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는데 뒷면에는 ‘새야새야 파랑새야’ 라는 노래와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라는 노래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갑오년(1894년), 을미년(1895년), 병신년(1896년)으로 이어지는 당시의 민중들의 염원(이 때를 놓치면 영영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을 보여주는 구전민요이다. 황토재 주변에는 전봉준 장군 부인의 묘지가 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태인
원평전투에서 패한 전봉준 등은 태인으로 후퇴하여 김문행, 문행민 등과 함께 농민군 5천여명을 거느리고 1894년 11월 27일 태인의 성황산, 한가산, 도이산에 진을 쳤다. 이에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이 한가산과 도이산을 공격하자 농민군은 성황산에 집결하여 대적하였으나 우세한 화력앞에 무릎을 꿇은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격전지이다.
오탈자 교정 : 남궁일주 2006.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