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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3번) |
편지(4번) |
50-52년 |
1년 반, 고린도 교회 개척(2차 개척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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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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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에 대한 편지(고전 5:9-11현재 남아 있지 않음,) |
54, 5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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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
55년 |
짦은 “근심(고통)”의 방문(2:1,12:21,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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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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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편지 (고후 2:3-4:9, 7:8-12): 남아 있지 않음, |
56 혹은 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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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
56 횩은 57년 |
3개월 방문(행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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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후서를 쓴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여행 한 다음(50-52년, 고린도 교회에 음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망하는 편지를 썼습니다(고전 5:9-11). 그 편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뒤,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인은 침실생활’문제(고전 7:1), 은사에 대한 문제(고전 12:1) 등에 대해 질문하는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스데바나 등이 편지를 가져 옴, 고전 16:17). 또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음행, 분쟁, 사도 바울에 대한 비난 등의 소문을 들었습니다(고전 1:11, 글로에 집 사람 편으로). 그래서 그 분은고린도 전서를 써서 보냅니다(스데바나 등을 통해서. 54년 경).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 에배소에 있을 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쓰서 보내기 전에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냈습니다(고전 4:17, 16:10-11,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 편지를 받은 후에 디모데가 도칙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 디모데가 바울에게 와서 고린도 교회에 분쟁, 성적 문제가 여전히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급히 고린도를 방문합니다(55년). 그것은 근심의 방문이었습니다(고후 2:1). 그러나 서로 상처만 남기고 바울은 에베소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다시 에베소에서 그는 고린도 교회에 눈물로 편지를 써서 디도의 편으로 보냈습니다(고후 2:4. 이 편지는 남아 있지 않음).
디도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좋은 소식을 가져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습니다. 또한 에베소에서는 사도 바울을 죽이려는 시민 폭동이 일어 났습니다(행 19:23-41). 그래서 사도 바울은 55, 56년경에 급히 에베소를 떠나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로 갑니다.(행 20:1) 그 곳에서 남쪽으로 고린도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고린도로부터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마침내 디도가 왔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사도 바울을 비난하던 교인을 고린도 교회 전체가 권징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고후 2:12-13, ,7:6).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변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게 기뻐하며서 고린도 후서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 후서의 내용
1. 그간의 일을 바울의 입장에서 설명하면서 자신의 사도의 직분과 복음을 가르칩니다1-7장).
2. 예루살램 교회로 보낼 구제 헌금을 존비하라고 하면서, 구제 헌금의 의미에 대해 가르칩니다(8-9장)
3. 바울 자신은 정당한 사도임을 변호하고 고린도교인이 자신들을 점검하고 회개하라고 권면합니다(10-13장)
우리도 이 편지를 읽으며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을 다짐하기 바랍니다.
1. 환난 중의 위로 (1-11절)
사도가 받은 환난은 큰 유익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도를 큰 환난을 당하게 하셨지만, 환난 중에서 더 넘치는 위로를 주셨습니다(3절).
둘째, 사도의 환난은 개인적인 고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5절).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닮아 갔습니다. 그 환란이 얼마나 컸던지 사형선고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9절).
셋째, 환난 가운데 위로를 받을 때, 우리 주위 사람에게 위로를 줍니다. 그래서 환란은 큰 은사입니다. 그 가운데 위로를 받는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 가운데 받은 위로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오늘도 환난 가운데서 어떻게 위로해 주실지를 기대합시다.
넷째, 환난은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음을 성장하게 합니다(6절). 우리는 고난받아도 자신을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분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고난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10절).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크게 만듭니다. 우리의 재산이나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 때문에 큰 위로 누리기 바랍니다.
다섯째, 성도는 환난 받는 성도에게 하나님이 도우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또 그 기도 응답으로 위로해 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11절).
우리의 삶에서도 고난이 극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이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위로를 주실까?’ 기대합시다. 어떤 날은 부담이 크고 두려운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풀어 주실까?’를 기대하며 나갑시다. 거의 죽을 듯한 그런 큰 환난을 주실 때에는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교회와 성도들의 환난 가운데 공동체적으로 기도합시다. 또 주신 위로에 대해 공동체적으로 감사합시다.
2. 성도들 향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한 사도 (12-14절)
바울의 여행계획의 변경과 고린도 교인들의 비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계획은 변경했지만 신실하게 행했다고 변호합니다.
바울의 원래 에베소, 마케도니아, 고린도, 예루살렘 순서로 여행의 일정을 잡았습니다(A안, 고전 16:1-6). 그 후, 에베소에서 바울은 급히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근심.고통의 방문), 변경된 계획을 말해 준 듯 합니다. 에배소, 고린도, 마케도니아, 고린도, 예루살렘 순서로 일정을 변경했다고 말합니다(B안, 고후 1:15-16).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할 계획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의 방문으로 인해 너무 큰 갈등과 고통을 겪었기에, 그는 다시 고린도 교회를 한 번만 방문하는 것으로 다시 변경했습니다(A안, 고후1:23). 아마 눈물로 쓴 편지에서 그 변경된 계획을 말한 듯합니다. 이것을 두고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에서는 자신의 여행계획 변경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성도를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변호합니다.
성도를 향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한 사도(12-14절)
‘내가 너희를 대할 때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순수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12절) 은혜는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편지를 쓰고 가르칠 때 육체의 지혜,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말씀으로 행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에는 책망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책망을 비난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인간의 지혜로 하지 말고 말씀으로 합시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여행 계획 변경을 두고서 신실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를 알아 주고 신뢰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도는 자신이 신실하게 행했음을 양심적으로 말합니다(12절).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의 진정성이 나타날 것을 확신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14절에, ‘우리 주 예수의 날’ 즉 재림의 날에 모든 감추어진 것이 다 드러날 것을 확신합니다. 그 때에는 이 오해도 풀리고 성도들과 사도가 서로를 진실한 모습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 확신에서 평화를 누렸습니다.
우리도 사람들 사이에 힘든 일이 있을 때, 우리 믿음의 양심에서 올바르다면, 분명히 변호하는 용기를 가집시다. 그러나 다 이 땅에서 당하는 억울한 오해가 다 풀리지 않아도 평화를 누립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풀어주실 것을 소망하며 안정된 삶을 살아갑시다.
3. 사도 바울의 계획의 변경 가운데서의 신실함과 삼위 일체 하나님의 신실함 (15-22절)
15절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려는 것을 한 번 방문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해 17절에서 변호합니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경영은 계획을 말합니다. 육체는 ‘육체의 지혜’(12절)를 말합니다. ‘예’는 신실함을 말합니다. ‘예’ 했다가 ‘아니오’ 라고 왔다 갔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처음의 계획(A안), 두 번째 계획(B안)을 한 것에 대해 으므로 ‘예, 아니오’라고 동시에 말하는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계획을 인간적 지혜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그리스도안에서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행했습니다.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입니다. 즉 하나님이 구약 성도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셔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언약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사도가 신실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그 신실함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힘든 것이 생겼을 때도 이 확신이 있습니다. ‘나는 쓰러질 수 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신실할 수 있습니다.’(22절) 하나님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님 때문에 신실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의지하여 신실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함 때문에 신실하지 못할 때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신실하게 나갑시다.
4. 사도의 사명: 성도의 믿음의 주관자가 아니라 돕는 자 (23,24절)
23,24절은 사도가 여행계획을 한 번으로 축소한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울 자신의 편리 때문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였다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도의 반복적인 권면(방문과 편지를 통해)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에 대한 불신을 더 깊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또 방문하여 강하게 책망하면 실제적 변화는 일으키지 않으면서 관계만 악화 될 수 있습니다.
혹은 그들을 강제적으로 협박하여 변화를 일으키려 하는 무리수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는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는(퀴리오오)가 됩니다. 양심을 주관하는 것은 오직 주님(퀴리오스)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는 그들이 양심의 평화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사도의 권면에 따라 믿음을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믿음과 기쁨을 돕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조용히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째 방문계획을 취소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말씀 사역자는 성도를 지배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가 겸손하게 지혜롭게 성도들을 영적으로 섬기며 돕도록 기도합시다.
믿고 복종할 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환난을 주십니다. 환난으로 인해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인내 가운데 연단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게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순간 순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로서 다른 성도를 위롷파게 하신 것을 감사합시다.
사람들로부터 오해 받을 때 우리는 바르게 변호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밝혀 주실 것을 믿으면서 평화를 누립시다. 흔들리지 말고 우리의 직분에 집중합시다. 목사와 다른 성도들의 삶에 대해 쉽게 비난하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행하고 있을 것이다.’는 후한 마음으로 잘 봐 줍시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나는 신실한 자다’하면서 자신을 의지하지 맙시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참고>
경영(16절, 헬라어-불레, 히브리어-에차)
계획이라는 뜻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2에서는 협의(counsel, consilium ) 라고 번역했습니다하나님의 작정들은 “자기 뜻의 협의를 .. 정하시는 행위”라고 합니다. “자기 뜻의 협의”는 에배소서1:11의 “마음의 원함”을 그대로 인용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계획에 따라 작정(결정)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성도를 구원하시고, 섭리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분별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살아갔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계획도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비록 그의 계획에 변화가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목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 분의 백성을 심판한다고 경고하시고도 당장 심판을 집행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분의 백성이 회개하도록 심판의 날을 미루십니다(벧후 2:9).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준엄하게 선언하신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면서도, 다시 그 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구원하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원래 말하신 것과 다르게 행하는 것 처럼 보인다고 누가 그 분은 일관성이 없는 분이라고 비난하겠습니까? 신실하지 않은 하나님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이 창조하신 사람들은, 심지어 그분이 구원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 선택된 백성들이 비난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않고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지 않은 그 분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십니다. 그 신실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받으심을 통해서 구원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심판이라는 원래의 계획을 어기는 듯합니다. 사랑 때문에 신실하지 않은 듯 합니다. 합리적인 생각에 빠진 사람들의 눈에는 신실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야 말로 참으로 신실합니다. 사랑 때문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의 신비한 구원의 은혜 앞에 “당신은 영광스럽습니다.”(롬 11:33)고 엎드려 경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신실함 때문에 비난을 받으면서도, 교회의 가장 유익을 위해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변덕스러움 속에 가장 일관성 있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