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598 (지번)
원성왕(元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신(敬信)이며, 내물왕(奈勿王)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다. 왕비는 김씨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처음 혜공왕(惠恭王)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날뛰었는데, 선덕(宣德)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의 측근 중 나쁜 무리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경신이 그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바로 상대등으로 삼았다.
선덕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후에 왕의 족자(族子, 친족) 주원(周元)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경신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 임금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봉하고, 증조부 이찬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조부 이찬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아버지 일길찬 효양(孝讓)을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仁謙)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의 두 묘당을 헐고, 시조대왕(始祖大王)과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 및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을 5묘로 정하였다.
문무백관에게 작위를 한 계급씩 올려주었다. 이찬 병부령 충렴(忠廉)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으로 삼았다가, 제공이 사직하자, 이찬 세강(世强)을 시중으로 삼았다.
3월, 전 왕비 구족왕후(具足王后)를 외궁으로 내보내고, 벼 3만4천 섬을 주었다.
패강진(浿江鎭)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총관(摠管)을 고쳐 도독(都督)이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성왕 [元聖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8.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사적 제26호. 원형의 봉토분으로 앞에 석상(石床)을 놓았고, 아랫부분의 주위에는 다듬은 석재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그리고 호석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정도의 판석(板石)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갑석(甲石)을 얹었고, 각 판석 사이에는 호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시키는 탱석(撑石)을 끼워 넣었으며 12지신상을 2개의 판석마다 하나씩 배치했다. 또한 호석의 바깥쪽 바닥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정연하게 돌려 깔았으며, 봉토 주변을 둘러 석주(石柱)를 세우고 석주와 석주 사이에 2개씩 돌난간을 끼웠다.
2년(서기 786) 여름 4월, 동쪽 지방에 우박이 떨어져 뽕과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김원전(金元全)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당나라 덕종(德宗)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신라왕 김경신에게 말한다. 김원전이 도착하여 바친 표문과 진상한 물건을 살펴보니, 그대 나라의 풍속은 신의를 돈독히 하고 지조는 바르며, 일찍부터 중국의 번방으로써 교화를 잘 받들었다. 또한 변방에 속한 백성들을 훌륭하게 살폈으며, 모두 유교의 풍습을 받들어 예법이 성행하고 나라가 평안하게 다스려졌으며, 황제에게 정성을 다하고 황제에게 직무를 보고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과 진상을 계속하였고, 비록 바닷길이 멀고 육로로도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폐백의 왕래가 옛 법도를 따르고, 충성은 더욱 드러나니 진실로 가상하고 감탄할 일이다. 내가 만방에 군림하여 사람들의 부모가 되었으니, 안에서 밖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맞게 하며 문화를 공유하고, 태평과 화락을 이루어서 모두와 함께 안락장수의 길에 오르고자 한다. 경은 마땅히 국내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보호하며, 오래도록 이 번방의 신하가 되어 바다 건너 변방의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라.
지금 그대에게 비단ㆍ능직ㆍ채단 등 30필과 옷 한 벌, 은합 한 개를 주노니 도착하면 받을 것이며, 왕비에게 비단ㆍ채단ㆍ능직 등 20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과 은쟁반 한 개를, 가장 높은 재상 한 사람에게 옷 한 벌과 은합 한 개를, 다음 직위의 재상 두 사람에게는 각각 옷 한 벌과 은쟁반 한 개를 준다. 그대는 이를 받아서 나누어주길 바란다. 여름이 깊어 날씨가 더워지는데 내내 평안하기 바라며, 재상 이하 모두에게도 안부를 묻는다. 글로는 나의 뜻을 다 싣지 못하노라.”
가을 7월, 가뭄이 들었다.
9월, 서울에 기근이 들어 곡식 3만3천2백40섬을 내어 구제하였고, 겨울 10월에도 곡식 3만3천 석을 나누어 주었다.
대사 무오(武烏)가 『병법(兵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현령(屈岬縣令)으로 삼았다.
七年 春正月 王太子卒 諡曰惠忠 伊飡悌恭叛 伏誅 熊川州向省大舍妻 一産三男 冬十月 京都雪三尺 人有凍死 侍中宗基免 大阿飡俊邕爲侍中 十一月 京都地震 內省侍郞金言爲三重阿飡
8년(서기 792) 가을 7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미녀 김정란(金井蘭)을 바쳤다. 그녀는 나라의 제일 미녀로 몸에서 향기가 났다.
8월, 왕자 의영(義英)을 태자에 책봉하였다.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숭빈(崇斌)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초하루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秋七月 遣使入唐 獻美女金井蘭 其女國色身香 八月 封王子義英爲太子 上大等忠廉卒 伊飡世强爲上大等 侍中俊邕病免 伊飡崇斌爲侍中 冬十一月壬子朔 日有食之
9년(서기 793) 가을 8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나마 김뇌(金惱)가 흰 꿩을 바쳤다.
九年 秋八月 大風折木偃禾 奈麻金惱獻白雉
10년(서기 794) 봄 2월, 지진이 났다.
태자 의영이 죽었다. 시호를 헌평(憲平)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사직하자, 잡찬 언승(彦昇)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망은루(望恩樓)를 대궐 서쪽에 세웠다.
十年 春二月 地震 太子義英卒 諡曰憲平 侍中崇斌免 以迊飡彦昇爲侍中 秋七月 始創奉恩寺 漢山州進白烏 起望恩樓於宮西
11년(서기 795) 봄 정월, 혜충태자(惠忠太子)의 아들 준옹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자 임금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였더니, 6월에 마침내 비가 내렸다.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十一年 春正月 封惠忠太子之子俊邕爲太子 夏四月 旱 親錄囚 至六月乃雨 秋八月 隕霜害穀
12년(서기 796) 봄,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임금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시중 언승을 병부령으로 삼고, 이찬 지원(智原)을 시중으로 삼았다.
十二年 春 京都飢疫 王發倉廩賑恤之 夏四月 侍中彦昇爲兵部令 伊飡智原爲侍中
13년(서기 797) 가을 9월, 나라의 동쪽 지방에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치고, 홍수가 발생하여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아찬 김삼조(金三朝)를 시중으로 삼았다.
十三年 秋九月 國東 蝗害穀 大水山崩 侍中智原免 阿飡金三朝爲侍中
14년(서기 798) 봄 3월, 궁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다.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었다.
굴자군(屈自郡)의 석남오(石南烏) 대사의 아내가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겨울 12월 29일,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성왕 [元聖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8.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