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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성은 정(鄭)씨이고 본관은 전라도 광주이다.
그 이름은 외자 선(敾)이다.호는 겸재(謙齊)로 주역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겸손하게 처신하는 대인군자다운 성품을 갖겠다'는 바람에서 호를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1676년(숙종 2) 음력 1월 3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지금의 경복고 자리)에서
부친 정시익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2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여난다.
쇠락한 사대부 출신이다. 그가 14살 때 부친이 52세로 세상을 떠나자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
어린시절 같은 동네에 대를 이어 살고 있던 안동 김씨 주변 인물로부터
문학과 예술을 익히는데 큰 영향을 받았다.
영의정 김수항과 그의 여섯 아들은 정치 학문 예술 방면에서 뛰어난 활동을 했다.
그의 셋째 아들 삼연 김창흡은 조선 후기 문예에 큰 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겸재 정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김창흡은 금강산 설악산을 자주 드나들며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시로 읊었다.
그 중에서도 진경 시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과는 평생에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이병연은 169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금화현감, 배천군수,
사복시 주부를 거쳐 정3품인 삼척부사까지 올랐다.
훗날 큰 시인으로 성장하여 스승 삼연 김창흡의 뒤를 이어 동국진체 시단(東國眞體 詩壇)을 이끌면서
당대에 '시에서 이병연', '그림에서 정선'으로 병칭(竝稱)되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스승 삼연 김창흡의 집을 사이에 두고 자라나 동문수학한 이래,
서로를 격려하며 각각 시(시)와 그림 분야에서 한 시대의 문화를 선도한 인물들이다.
겸재 정선이 무수한 작품을 남긴 정력적인 화가이었던 것 처럼,
이병연 또한 무려 13,000수가 넘는 한시를 남긴 부지런한 시인이었다.
이병연이 겸재보다 5살 위였지만 늘 벗으로 자처했다
각각 81세와 84세의 장수를 누리면서
여느 사람의 한 평생이 넘는 60여 년 긴 세월 동안 시와 그림을 통하여 사귀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1740년 초 가을에 겸재가 한강을 건너 양천현감으로 부임해 갈 때
이병연이 쓴 다음의 전별시에 잘 나타나 있다.
두 사람은 지척간의 이별조차 안타까워했을 정도이었다.
爾我合爲王輞川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王輞川)이 될터인데 /
畵飛詩墜兩翩翩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
己遠猶堪望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누나 /
炒愴江西落照川 강서(江西)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소악루가 있던 양천은 파릉이라고도 불렀다.
1740년 이곳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겸재 정선(鄭敾)은
5년 동안 궁산에 매일 올라 그림을 그리며
<소악후월(小岳候月)> 등 진경산수를 그렸던 곳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이 당대 진경시(眞景詩)의 태두 이병연(李秉淵)과 그림과
시를 바꿔보자는 약조를 맺고 아름다운 이곳 주변의 풍경을 그렸다.
정선은 늘 궁산 소악루에 올라 맑은 한강과 그 깊은 수심(水深) 속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운 명승과 멀리 목멱산을 보며 화필을 움직였다.
이에 화답으로 이병연은 파릉(巴陵) 8경의 하나인 목멱산의 아침 해돋이 즉 <목멱조돈(木覓朝暾)>을 읊는다.
또 인왕산 서쪽 길마재의 봉화를 보고 있을 겸재 정선을 생각하며
<안현석봉(鞍峴夕烽)>이란 시를 지으니 이 또한 겸재 작품으로 그려진다.
겸재가 양천 현령에 제수된 것은 그의 나이 65세 때였다.
이제 겸재는 진경산수를 그리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멀리까지 힘든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었다.
양천현령은 지금으로 치면 강서구청장 쯤 된다.
비록 종 5품직이긴 했지만 그로서는 종6품 현감직
(첫 외관직은 하양河陽 현감)에 제수된 지 20년만의 승차였다.
겸재의 정치적 후원그룹이자 그의 그림 한 폭이라도
더 얻기를 간절히 원했던 노론 대신들의 지원에다
그의 진경산수를 좋아했던 영조의 특별한 배려도 한몫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영조가 우의정이나 도승지에게 말단 외관(外官)인 겸재의 안부와
근무 상황을 묻곤 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승정원일기>).
만년에 얻은 영예였으니 주위의 축하가 없을 수 없다.
그의 글벗이자 화벗(畵友)이었던 이병연도
겸재의 승진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은 전별시를 지어주었다.
마중 나온 아전과 양화 나루 건너니 迎吏楊花渡
나루 끝이 바로 고을 관아라네 津頭是縣衙
서울에서 삼십 리 去都三十里
집이라곤 모두 백여 채 闔境百餘家
정사엔 본래 옥사(獄事)가 없고 政事元無獄
누대엔 다만 차(茶)가 있을 뿐 樓臺但有茶
때때로 울긋불긋 관복이 찾아드는 건 時時覓團領
강화로 떠나는 사신들이라오 星蓋入江華
이어 두 사람은 떨어져 있는 동안 시와 그림을 주고받기로 약속했다.
이는 겸재가 양천현령에 부임한 이듬해 봄에 보낸 이병연의 시찰(詩札:시로 쓴 편지)에서 확인된다.
겸재 정선과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약속이 있어,
기약대로 가고 옴을 시작한다.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期爲往復之始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보세. 我詩君畵換相看
가볍고 무거움을 어찌 값으로 따지리오. 輕重何言論價問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니 詩出肝腸畵揮手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네. 不知誰易更誰難
겸재와 이병연은 북악산 기슭 개울가의 어느 노송(老松) 밑에 앉아 시전(詩箋·시 쓰는 종이)을 펼쳐놓고
시화를 논하며 시와 그림을 바꿔보자는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을 약속 했다.
겸재는 그 순간을 그림으로 남겨두었다.
“겸재의 이 그림은 흡사 詩와 같다. 예로부터 詩에 능한 자는 그림 또한 잘 그렸으니,
대개 시정(詩情)과 화의(畵意)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겸재는 품격이 순수하고 맑으며 뜻이 높은 자이니 역시 詩에도 능하리라.”
당대에 손꼽히는 회화 평론가였던 담헌 이하곤(澹軒 李夏坤)은
이겸재의 초기작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화첩에 있는
<용공사(龍貢寺)> 그림을 보고 쓴 글이다.
겸재가 그림을 그려 보내면 이병연이 그에 맞는 시를 전하고 이병연이 시를 지어 보내면
겸재가 그 시제(詩題)에 맞는 그림을 그려 보내 주었다.
겸재는 이병연이 보낸 시를 예쁜 꽃전지에 옮겨 적은 후 그림 옆에 나란히 붙여놓거나
시의 몇 구절을 따서 화제(畵題)로 쓰기도 했다.
<시화환상간>도 그림의 제목 대신 이병연의 시찰 중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問’이란 구절을 화제로 썼다.
또한 시찰 원본은 그림 뒤에 따로 장첩해 두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쌓여 <경교명승첩> 2권이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경교명승첩>을 <시화환상간첩>으로 별칭하기도 한다.
겸재는 이 화첩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던지 그림 상단에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千金勿傳)”는 인장(印章)까지 남겨 두었다.
영조는 신하인 정선을 부를 때 이름이 아닌 호로 부를 정도로 각별히 총애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그림을 배운 스승이었기에 겸재 정선을 늦은 나이에 양천현감으로 보냈다.
우리 고유문화의 우수성을 세우는 데 앞장섰던 영조는 겸재야말로 진경산수를 확립할 인물임을
간파하고 진경산수화를 완성하라는 배려로 양천현감을 제수한 것으로 보인다.
겸재 정선은 결국 종2품까지 올라 다복(多福)을 누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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