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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부흥운동의 특성과 열매[조남구 목사]-[1]|개혁과 부흥 컨퍼런스
19세기 부흥운동의 특성과 열매 -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스펄전, 무디를 중심으로 - 조남구 목사 [열린교회] * 목 차 * Ⅰ.들어가는 말 Ⅱ.가운데 말 1.19세기 하나님이 일하신 부흥의 현장 2.19세기 부흥운동 이전의 부흥의 역사 1)청교도 부흥운동과 경건주의 운동 2)18세기 영적각성운동 3)19세기 영.미 부흥운동 3.부흥운동의 확산 A.아일랜드 B.스코틀랜드 가)19세기 이전의 스코틀랜드의 부흥 나)19세기 스코틀랜드의 부흥 ①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Mheyne) ②찰머스 번스(Chalmers Burns) 4.영국의 부흥 A.영국의 찰스 스펄전 B.미국의 드와이트 무디(1871년10월 미국 뉴욕) 가) 영국에서의 부흥운동 나) 미국에서의 부흥운동 Ⅲ. 나가는 말 Ⅰ.들어가는 말 18세기 영적 거장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1703-58)는 그의 저서 “기도합주회” 서문에서「부흥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당신의 교회에 찾아오셔서 교회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급격히 회복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 이안 머레이(Ian H. Murray.1931-)는 그의 저서 “부흥관 바로 세우기”에서 “부흥은 성령의 부으심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교회의 삶을 새롭게 바꾸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불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는 은혜의 물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비상하신 교통하심이며, 성령의 형언할 수 없는 풍성한 역사하심이며, 그의 능력이 뚜렷하게 확장되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2) 이처럼 부흥이란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생활에서 체험되는 것으로 생명력을 잃고 활기 없이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역사(役事)이다. 즉 성도들이 영적으로 침체되었고, 영적으로 빈사상태(瀕死狀態)에 있는 교회를 소생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흥 가운데 옛적 것들을 새롭게 하시고, 영적각성을 주신다. 이 영적 부흥은 청교도들이 추구하고 있었으며, 개인의 부흥이 청교도 경건 문헌의 중심 주제였다. 청교도 시대에 부흥을 경험했던 목회자들은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청교도들의 영향력은 대서양 양쪽에 위치한 영국과 미국 두 나라에 영적 부흥을 가져왔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조지 윗필드, 요한 웨슬리, 다니엘 로우랜드, 하월 해리스를 통해 나타났으며,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드를 통하여 칼빈주의적 영적 부흥이 일어나 청교도주의가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부어 주심은 이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등에 부흥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19세기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힘을 얻게 되었다. 19세기인 1858년 북아일랜드와 웨일즈에서 부흥이 계속 일어났다. 1760년부터 1860년간에 웨일즈에서 15번 이상의 주요한 부흥이 있었다. 1824-35년까지 스코틀랜드 루이스 섬에는 앤드류 맥로드를 중심으로, 1830년 잉글랜드 미드랜즈에서 제임스 카우티를 통해, 1839.7.23일에는 로버트 머리 맥체인, 윌리엄 찰스 번즈가 부흥의 불길을 당겼다. |
1.19세기 하나님이 일하신 부흥의 현장 기독교 역사는 부흥의 역사다. 성령의 역사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계속되어 왔다. 교회의 최초 부흥인 오순절 성령강림으로부터 1995년 휘튼 부흥(Revival)까지 끊임없이 비상한 성령의 역사, 영적 각성운동이 발흥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더했다. 프랭크 비어즈리가 언급한 것처럼 ‘부흥운동의 역사는 곧 교회의 역사’였다. 마지막 청교도로 불리우는 로이드 존스는 ‘분명히 교회의 진행과 발전 역사는 주로 부흥의 역사였고, 성령의 강력하고 예외적인 부으심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셨던 19세기의 부흥의 현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 19세기 위대한 부흥의 현장들 *
2.19세기 부흥운동 이전의 부흥의 역사 루터, 츠빙글리, 칼빈, 낙스 등으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은 신앙을 재발견한 일종의 영적 각성운동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전통이 아닌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하박국이 언급하고, 바울이 재확인하였고, 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들이 확신했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재발견했다. 이들이 발견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는 잠자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우는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 이후 부흥이 일어난 곳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이 강도 높게 선포됐다. 1)청교도 부흥운동과 경건주의 운동 부흥운동은 미국 청교도와 경건주의 시대에 이르러 현대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청교도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었고,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인간의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확신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은 이들이 강조한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였다.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성경대로의 삶을 실천에 옮겼다. 양로원 고아원 학교 병원을 설립해 대 사회적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하였고, 교회에는 생명력을 더해주었다. 경건주의에서 강조하는 경건과 청교도에서 강조하는 영적인 실천은 서로 맥을 같이했다. 2)18세기 영적각성운동 17세기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좀 더 강력한 형태의 영적각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시대 일어난 가장 강력한 부흥운동 가운데 하나가 18세기 웨일즈 부흥운동과 1734∼1736,1740∼1742년 사이에 일어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일 것이다. 이 운동들은 이전의 크고 작은 부흥운동을 하나로 엮어 폭발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였다. 웨일즈 부흥운동은 1735년 ‘능력의 세례’를 받은 하월 해리스와 다니엘 로랜드에 의해 일어나 여러 해 동안 계속 됐다.2) 거의 같은 시대 조나단 에드워즈, 길버트 테넨트, 조지 윗필드, 프릴링 하이젠 등이 이끈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강하게 일어나 근대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1734년 미국의 1차 대각성 운동부터 웨슬리 부흥운동이 정리되는 1790년까지의 기간은 넓은 안목으로 보면 ‘부흥의 시대’였다. 3)19세기 영.미 부흥운동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에서의 부흥운동은 19세기로 이어졌다. 미국 버지니아의 조그만 두 장로교 대학인 햄프던 시드니 대학과 워싱톤 앤드 리 대학에서 1787년 영적 각성이 일어나 곧 동부 전역으로 확산됐다. 1802년에는 예일대학 학생 3분의1이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그 후 50년간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알려진 일련의 각성운동이 주기적으로 일어나 동부의 대학들과 교회들이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이 때에 찰스 피니를 통해 놀라운 부흥이 있었다. 한 때 중단되는 듯 했던 영적각성운동이 1857년 미국에서 또 다시 놀랍게 발흥했다. 1857년 9월23일 제레마이어 람피에르가 뉴욕 풀턴가에 소재한 북화란개혁교회 3층에서 가진 정오기도회는 불과 4개월 만에 보스턴 워싱톤 시카고를 비롯하여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수많은 도시에서 매일 정오기도회가 열렸다. 그 결과 1857∼1859년 미국 전체 인구 3000만명 중 200만명이 회심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곧 영국으로 확산됐다. 1858∼1859년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에서 로이드 존스가 참된 부흥이라고 말한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미 여러 차례 영적각성을 경험한 웨일즈는 1859년 험프리 존스와 데이비드 모건을 통해 또다시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1873∼1875년,1881∼1884년 두 번의 강력한 영적 파장을 동반한 무디 부흥운동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깊은 잠에서 깨웠다. 그의 메시지를 통해 형식적인 신앙인들, 술주정꾼들, 회의론자들, 탕자들 ,대학생들, 상인들, 부자와 가난한 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웨슬리와 조지 윗필드 이래 런던이 그렇게도 깊은 감화를 받은 때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무디 성경학교와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세계 선교를 꿈꾸며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전 세계로 흩어졌다. 이 시대 은둔의 나라 조선에 도착한 언더우드, 아펜셀러, 스크랜턴, 모페트, 게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19세기 영적각성운동의 산물이었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이 윗필드 풍의 회개와 웨슬리의 열정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잠에서 깨우며 부흥운동을 지폈던 것도 이 시대였다.3) |
3.부흥운동의 확산 그 후에 영국의 웨일즈에서는 부흥운동이 계속 일어났다(1859년, 1904년). 스코틀랜드의 킬싯과 던디의 부흥(1742년,1839년), 북아일랜드의 여러 외각 지역에서의 부흥(1857년,1859년). 그리고 수도 벨파스트의 대각성 운동(1859) 등… 실로 끌 수 없는 성령의 바람이 설교를 통하여 일어났다. 19세기 교회 부흥 전문 역사가인 에드윈 오르(E. Orr)는 당시 영국에서 발생한 교회 부흥이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영국의 술주정꾼들의 수가 절반으로 줄었고, 많은 선술집들이 파산했다. 범죄가 현저히 줄어들어 판사들에게 흰 장갑이 주어졌는데, 이는 살인, 폭행, 강간, 강도 같은 골치 아픈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많은 지역들에서 경찰들이 실직했다. 탄광에서는 폐업이 일어났는데, 노사간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입이 거친 광부들이 은혜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여 저질적인 말의 사용을 중단해서, 석탄 트럭을 끄는 말들이 광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A.아일랜드 아일랜드의 부흥의 불길은 1859년 장로교총회가 중심이 되어 얼스터(Alster)의 부흥을 포함하여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을 휩쓸었다.1) 1857년 9월, 훌튼가에서 기도회가 시작되었던 시기에 제임스 맥퀼킨(James McQuilkin)은 켈스(Kells)에서 얼마 멀지 않은 마을 학교에서 교사(校舍)에서 다른 세 명의 아일랜드 청년들과 주 1회 기도회를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얼스터에서 일어난 부흥의 시작이었다고 보여 진다. 그들이 드린 기도의 응답으로 허락되어진 첫 개종자는 1857년 10월에 생겼다. 1858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모임이 시작되었으며, 부흥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공통된 설교의 주제가 되었다. 1859년 3월 14일, 월요일 제임스 맥퀼킨과 그의 기도 그룹은 아호힐 장로교회(Ahoghhill Presbyterian Church)에서 커다란 기도회를 조직했다. 엄청난 무리가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빌딩의 베란다는 무너질 것만 같았다. 밖에서는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한 평신도가 엄청난 능력을 힘입어서 말씀을 선포했다. 그러자 수백 명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죄에 대한 수많은 대중적인 회개운동의 시작일 뿐이었다. 1859년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아일랜드 교회에 10만의 개종자를 이끌어 주었다. 하나님의 성령은 크고 작은 집회들 가운데 강하게 역사하고,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윤리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회개하면서 쓰러지는 현상은 쉽게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죄를 자각하며 회개하면서 여전히 쓰려져 있었으며, 일정 시간 동안 일어설 수 없었다. 1860년대에 이르자 범죄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어떤 때는 얼스터의 판사들에게 재판할 사건이 한 건도 없었던 적도 있었다. 어떤 시기의 카운티 안트림(County Antrim)에는 경찰에게 신고 된 범죄가 한 건도 없었다. 그리고 유치장에는 구류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페트릭(Patrick)이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소개한 이래로 이보다 더 큰 부흥의 불길이 이 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적이 없었다. 1860년 말 얼스터의 부흥의 효과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회로 몰려들어와 예배는 가득 메워지고, 양적 성장, 여러 기도 모임들, 가정예배의 활성화, 성경읽기 운동, 주일학교의 성장, 개종자들의 견고한 삶, 베풀고 나누는 것을 즐기는 삶, 악덕의 감소, 범죄의 급감 등”으로 기록되어졌다. 부흥의 불길은 엄청난 속도로 더욱 번져 갔다. 1859년 한 해에도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회심의 역사는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무수한 영혼들을 소생케 했다. 웨일즈의 부흥은 영광의 찬양과 웨일즈인들의 독특한 화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곳에서도 역시 십 만명(전체 인구의 1/10)에 개종자가 교회에 입교했고, 범죄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에도 부흥의 불길은 비슷하게 찾아왔다. 다시 한 번 기도의 불길은 높이 타올랐고, 다수의 기름부음 받은 전도자들이 설교할 때에 부흥의 불길이 번지면서 수천명의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설교의 황태자로 알려진 침례교 목사인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은 이미 영국의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 교회에서 5년 동안이나 엄청나게 축복된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는 1859년 부흥의 최고의 수위점으로 여겼다.2) B.스코틀랜드 가)19세기 이전의 스코틀랜드의 부흥 이미 1630년 스코틀랜드의 쇼츠에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젊은 목회자였던 존 리빙스턴이 설교를 부탁받았으나 너무나 두려워 달아나고 말았다. 그날 밤 그는 밀밭에 숨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를 찾은 교인들은 야외 강단을 만들어 그에게 설교를 부탁했고, 그리하여 한 집회에 500명가량이 회심했다. 1742년, 스코틀랜드의 캠버스랑에서 큰 부흥이 임했다. 윌리엄 매컬럭 목사는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부흥 사례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에도 방문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다. 캠버스랑에서 거행된 성찬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주님의 임재를 너무나 확연하게 느꼈으므로, 성만찬을 8월에 다시 거행하기로 합의하였다(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8월에 거행된 성찬식에 2만 여명이 참석했다. 성찬식에 참석한 이들은 불과 몇 천 명이었지만, 각성된 수많은 죄인들이 구원받고자 주님을 찾았으며, 또한 회심의 역사가 저들에게 임했다. 이 부흥의 시기에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는 스코틀랜드 캠버스랑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조지 휫필드가 이 부흥기간에 건장한 남자로부터 어린 아이에 이르기 까지 저마다 엎드려서 몸을 흔들며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은 두려운 율법으로 경고할 때 일어난다기 보다는 사려깊은 설교자가 구속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일어난다. …… 귀하신 구주에 대해 전할 때, 모두가 귀를 기울일 것이다.”3) 나)19세기 스코틀랜드의 부흥 ①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Mheyne) 비록 강도에 있어서는 19세기 아일랜드나 웨일즈에 비견할 수는 없지만 1839년 스코틀랜드에서도 부흥이 있었다. 1859년 아일랜드와 웨일즈 부흥이 미국의 기도 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부흥은 독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부흥의 시기도 1859년으로 대변되는 아일랜드와 웨일즈의 부흥보다 20년이나 앞선 1839년이었다. 스코틀랜드의 부흥은 성공적인 목회를 감당하는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성령의 부으심이 동반된 전형적인 부흥이었다. 킬싯과 던디, 퍼드에 집중된 이 부흥의 주역은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Mheyne)과 찰머스 번스(Chalmers Burns)였다. 맥체인이 사역했던 곳은 던디의 성 베드로교회이다. 맥체인은 23살의 약관에 부임하여 신구약을 균형있게 강해하며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놀라운 부흥을 주셨다.4) 이 놀라운 부흥의 비결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경건 생활에 있었다.5) 1839년 맥체인이 이스라엘로 성지 여행을 떠나면서 찰머스 번스(Chalmers Burns)6)에게 그동안 강단을 지켜 줄 것을 요청했다. 번즈의 사역으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맥체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버딘 노회에 부흥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939년 8월까지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거나 일반적인 움직임은 없었으나 칼싯에서 주의사역이 시작된 후 즉시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들 가운데 놀랍게 임했다. …1939년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활짝 여셨다. 우리는 가버나움에서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 그 이상으로 성령의 충만한 부으심을 경험했다. 나는 스코틀랜드가 경험했던 이 같은 방식으로 세계의 어느 나라가 부흥을 경험했는지 알 수 없다.” 지역 교회 성도들이 연합으로 참여하는 거대한 성찬식이 거행되었고, 그곳에서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했다. 이 부흥은 스코틀랜드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시작하였지만, 감리교와 독립교회도 동참했다. 1839년 시작된 이 부흥은 맥체인이 세상을 떠나던 1843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중심에 성 베드로교회가 있었다. 성 베드로 교회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영향은 던디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 이후 던디는 종교개혁자 칼빈이 제네바를 거룩한 도성으로 바꾼 것에 비견하여 북부의 제네바라 불렸다. 그리고 이후 맥체인과 번스는1939년 스코틀랜드 부흥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7) ②찰머스 번스(Chalmers Burns) 선교사역을 준비하던 번스에게 맥체인의 요청은 스코틀랜드의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도 같았다. 번스는 칼싯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성찬식을 돕기 위해 킬싯에 돌아와 시110:3을 가지고 설교했다. 이 때 회중이 눈물을 흘리고 통회하며 죽은 사람들처럼 바닥에 쓰러지는 역사가 나타났다. 번스는 성령의 강권하심 속에 3주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설교했다. 성령은 그들 가운데 강하게 임하셨다. 8월 8일 던디로 돌아온 번스는 킬싯에서 일어난 부흥이 던디에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 칼싯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킬싯에서의 부흥 소식은 이미 던디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전역에 퍼져 있었다. 번스는 성 베드로 교회에서 첫 예배가 끝난 후 킬싯에서 일어난 일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남으라고 하자 100여명이 그 자리에 남았다. “갑자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듯 통회하기 시작했다. 다음 저녁 교회에서 기도회가 있었다. …많은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흘러 내렸고 몇몇 사람은 절교하고 울부짖으며 은혜를 베풀어 달라면서 바닥에 엎드러졌다.” 이 같은 역사는 그 후에도 수 주간 번스가 인도하는 기도회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맥체인이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영적 각성은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부흥 현상은 인근 성 데이비드 교회와 힐 타운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이 같은 집단적인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
4.영국의 부흥 A. 영국의 찰스 스펄전 “그리스도인들은 ‘부흥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어떻게 부흥 을 일으키겠는가?“ - 찰스 스펄전 - 19세기초엽 영국의 기성 교회는 침체해 있었고 많은 성도들은 국교를 떠나 따로 모이고 있었다. 루터, 칼빈, 웨슬러를 통한 부흥이나 이와 유사한 개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엽 대다수의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금 냉냉한 형식주의에 빠져들어 갔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이 일으켰던 전쟁으로 성도들은 성경의 예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주님의 오심이 가깝다는 진리가 새롭게 주목을 끌게 되었다. 또한 고고학적 발견은 고등비평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점차로 성경의 권위를 회복시켜 갔다. 이에 따라 3대 각성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선교열의 고조, 성경의 대대적 보급, 그리고 이제 말씀드리려는 형제운동의 시작을 들 수 있다. 영국 교회는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과 함께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재위 기간 동안1), 조지 윗필드 이래로 가장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종교(기독교)는 백성에게 권위가 있었다. 사회는 백성들에게 엄격한 도덕과 윤리를 요구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주권은 높아지고, 성경 말씀의 권위는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행복을 보장했다. 바로 이러한 축복의 물결은 당시 영국의 교회가 전국적으로 부흥한 결과였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찰스 스펄전을 보내 주셨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교 때문에 보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17세의 어린나이에 워터비치에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부터 56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치기까지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목회를 했다. 어린 나이로 목사가 된 2년 후, 80명이 모이던 런던의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New Park Street Church)에 청빙을 받아 런던 목회를 시작했다. 그의 설교 때문에 불어나는 교인을 수용하기 위하여 예배당 창문을 헐어버리고 밖에까지 교인이 앉게 되었다. 얼마 후 교회는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런던의 엑시터 홀(Exeter Hall)을 임대했고, 다시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써레이 뮤직 홀(Surrey Music Hall)을 임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런던에서 한 주간에 5번 정도의 설교를 하다가 12번 이상의 설교를 해야만 했다. 그가 얼마나 설교 사역 때문에 전 인생을 바쳤는가함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읽을 수 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피곤한 군병이 그대의 팔에 기대면서 글을 쓸 때 큰 위안이 되는군. 이번 주에는 열한 번 집회를 인도했고, 다음 주에는 열세 번 집회가 약속되어 있다네. 교회 안에서 설교 횟수가 지난해 282번이었고, 올해도 지금까지 세달 동안 80회 이상이나 된다네. 다음 달에는 30회가 잡혀 있군. 지금 사탄이 활동하고 있지만 주님은 더욱 강하시니 든든한 마음뿐이네.…’ 송삼용 목사는 그의 책 ‘영성의 거장들’에서 스펄전의 부흥의 원동력은 먼저 설교자로서 스펄전의 영성으로 보았다. 스펄전의 영성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평생 죄와의 끊임없는 투쟁 (1)일생을 회개의 삶으로 일관함 (2)성결한 삶을 위해 분투함 둘째, 기도중심의 사역과 삶 (1)조지 뮬러식 기도목회(어린 아이처럼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사역) (2)기도를 일상적인 습관처럼 실천 셋째, 기도목회 기도는 부흥을 가져오는 원동력이다. 넷째,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삶. 다섯째, 철저한 말씀연구 스펄전에게 있어서 설교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였다. 청교들은 설교자의 첫 번째 의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청교도 사상과 일치한다. 여섯째, 청교도들로부터의 도전 (1)칼빈과 청교도 신학과 사상이 담긴 서적들을 수없이 탐독 (2)청교도 신학의 왕자인 존 오웬(John Owen)의 ‘하나님과 친교’가 그의 영성의 핵심이 되었다. 일곱째, 십자가 정신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순종, 수평적으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정신을 실천하는 소명감은 그가 보여준 사회적 봉사와 섬김은 십자가 정신을 실천하는 소명감으로부터 나왔다. 무엇보다도 스펄전의 강력한 설교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설교는 영적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영국을 살리는 촉진제와 같았다. 그의 설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함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가진 다음에 싱싱하게 나와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 사람들에게 말하라…그러면 하나님의 진리의 위엄에 압도되어 그의 음성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둘째로, 기도의 진액을 쏟음 그 자신이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고, 또한 성도들에게 기도에 관하여 끊임없이 가르쳤다. 셋째로, 말씀의 엑기스를 쏟아 부음 그는 “목회자 후보생들에게”에서 ‘여러분은 계속해서 청중 앞에 서서 설교하려면 더 위대한 성경학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지식에 관심을 가지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책을 밤낮으로 묵상하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고백처럼 청교도들의 설교관에 입각하여 피를 토하듯 뿜었던 설교가 청중을 살리는 원동력이었다. 다시는 설교할 수 없을 듯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설교하듯이2) 설교했다. B. 미국의 드와이트 무디(1871년10월 미국 뉴욕) 1855년 4월 21일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1837-1899)3)는 그가 출석하던 교회의 교회학교 교사 에드워트 킴볼이 전해주는 복음을 듣고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4) 그는 미국과 영국의 강력한 복음주의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 되었다. 무디가 섬기던 교회에는 무디를 위해서 기도하던 두 명의 여성도가 있었다. 그들은 무디가 성령에 충만하기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했다. 무디의 심령은 더욱더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는 1871년 10월에 발생한 시카고 대화제로 폐허가 된 교회와 고아원을 위한 구제헌금을 모금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했을 때에 하나님과 대면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 후에 그는 다음의 글을 남겼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나에게 충만케 하시기를 위해서 매 순간마다 울부짖었다. 음...! 내가 뉴욕시내에 체류하던 어떤 날이었다. 오, 그 날!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일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았었는데... 그것은 언급하기에는 너무 신성한 경험이다. 바울은 14년 동안이나 결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분을 나타내주셨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였기에 그분의 손길이 내 위에 머물기를 위해서 간구했다. 나는 다시 말씀을 증거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설교말씀들은 별다르지 않았다. 나는 어떠한 새로운 진리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백 명의 영혼들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온 세상을 위한 복된 경험을 등지고 내가 처했던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저울 위에 미세한 티끌일 뿐이다.” (Moody 1900,149) 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 헨리 발리(Henry Varley)로부터 “온 인류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헌신된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실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D.L 무디는 자신이 바로 그 인물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무디는 열정을 가지고 영미 청소년들을 구원하고 제자화하기 위해서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YMCA)를 설립하는 일을 진행했다. 영국의 침례교 목사였던 보이드(R.Boyd)는 무디가 말씀을 증거하고 있던 집회 장소에 가서 보고 느낀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런던의 YMCA 빅토리아홀에 들어갔을 때에 그 모임이 화염에 둘러싸인 것을 목격했습니다. 청소년들은 방언과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무디가 그 오후시간에 말씀을 선포한 일 외에 한 것이 없습니다.” (Hyatt 1997,141) 하나님의 성령은 무디의 사역 가운데서 회심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역설하도록 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했다. 무디의 사역은 그의 현숙한 아내 유그노 에마 레벨은 그의 사역에 동력을 제공했고, 1870년에 유명한 음악가 생키(Ira D.Sankey)를 만나 전도사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음성을 지닌 젊은 공무원 생키와의 만남은 무디의 사역을 완전히 바꾸었다. 생키의 찬양을 통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연 회중은 3R, 곧 죄로 인한 타락(Ruin by Sin),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mption by Christ), 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으로 대변되는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와 구원의 은총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무디의 사역으로 인해 회심한 무수한 영혼들 중에는 그 유명한 캠브리지 세븐이 있는데, 그들 중에는 캠브리지 대학교 학생들과 국가대표 운동 선수들과 국제적 크리켓 선수였던 C.T.스터드도 포함된다. 그들은 결국 해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5) 복음의 열정에 불타던 무디는 두 차례 영국에 전도 여행을 떠났다. 조직도, 자금도 준비되지 않은 채 영국 리버플에 도착한 무디와 생키는 은혜로운 찬양과 서민적이면서도 강력한 복음 메시지를 통해 리버풀, 요크, 뉴캐슬, 런던에 이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완전히 변화시켰다. 무디의 집회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했고 그의 설교는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 영국인이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알겠다는 매우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않고는 결코 무디의 설교를 들을 수 없었다” 무디와 생키로 인해 버밍엄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그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회중에게 옮아붙는 듯했다. 평이하면서도 결단을 촉구하는 무디의 메시지는 수많은 영혼을 깊은 잠에서 깨웠다. 무엇보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해외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82년 11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열린 무디의 집회는 학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수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세계 선교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7명의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이 화려한 장래를 뒤로 하고 중국 선교를 자원한 것도 이때였다. 무디 부흥의 영향은 참으로 놀라웠다. 무디는 무디성경학교와 마운트 헐몬 학교를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의 일꾼을 양성하고, 존 모트와 로버트 윌더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의 가슴에 해외 선교의 불을 지폈다.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역시 무디 부흥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설교를 듣고 해외 선교를 자원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미국은 영국을 앞지르고 해외 선교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900년 4000명에 불과했던 미국 선교사 수는 4반세기가 지난 1925년에는 1만4000명으로 급증,영국을 훨씬 앞질렀다. 무디의 부흥은 세계 근대 선교를 앞당겼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에 불타 5대양 6대주로 달려갔다. 그중에 아시아는 선망의 선교지였고, 조선은 가장 선호하는 나라였다. 돌이켜볼 때 무디 부흥의 가장 큰 수혜자는 조선이었다.6) 1967년 무디는 부인의 건강 때문에 영국을 여행하면서 스펄전, 뮐러, 무어 하우스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해에 시카고 Y.M.C.A 회관인 파웰 홀(Farwell Hall)을 봉헌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영국의 소년 설교가인 무어하우스와 함께 시카고에서 순회집회를 72회나 하였다. 무디는 1873년에서 1875년에 이르는 어간에 3차 영국 전도여행을 하면서 영국 교회에 커다란 부흥을 일으켰다. 또한 무디는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톤 등지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1879년 여자신학교를 세웠으며 그후 수양관 건립, 마운트헬몬 학교 건립, 1889년에는 무디성서학교를 세워 많은 전도자를 배출하였다. 무디는 수차례 영국 전도여행을 하였는데, 미국 부흥 운동에 박차를 가해 미국의 3차 부흥운동(1857-1915)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편찬 사업에도 열심을 내어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서와 찬송가 등 경건서적을 출판, 널리 배포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1899년 12월 22일 노스필드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였다.7) 19세기 부흥운동의 특성과 열매[5]|개혁과 부흥 컨퍼런스
19세기 부흥운동의 특성과 열매[끝]|개혁과 부흥 컨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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