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190~1
효령대군 영정
1396(태조 5)~ 1486(성종 17).
우애 깊은 효령, 충령에게 흔쾌히 왕위를 헌사하다
처음에 양녕이 미친 체 하고 방랑하니 효령대군이 장차 그가 폐하게 될 것을 짐작하고, 깊이 들어앉아 삼가고 꿇어앉아 글을 읽었다.
대개 그 의사가 양녕이 폐함을 당하면 다음 차례로 세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양녕이 지내다가 들어와서
발로 차면서, “어리석다. 네가 충령(세종)이성덕(聖德)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하였더니, 효령이 크게 깨닫고
곧 뒷문으로 나가 절간으로 뛰어가서는 두 손으로 북 하나를 종일 두드리어
북 가죽이 부풀어 늘어났다. (중략)
잔치를 열자 효령대군이 술을 돌리매 임금(세종)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명나라)
사신이 황희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황희는 “군신의 도리가 진실로
엄하나 전하께서 일어서심은 ‘형제의’ 천륜을 위해서 입니다”하고 대답하였더니, 사신은 “전일 우리나라(명나라)에
촉왕 전하가 들어와 뵈올 제 황제께서
동궁에게 명하여 길을 비키게 하더니 이제 전하가 효령을 대우함이
이와 같소이다”하고 감탄하였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효령대군 보(補)가 부처를 좋아 하였는데, 일찍 불사(佛事)를 하고
양녕을 청하였더니 (중략) 그 때 효령이 부처에게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양녕은 고기를 씹고 술을 마시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하니,
효령이 정색하고 청하기를, “형님께서 오늘은 술과 고기를 그만 두시지요”하니
양녕이 웃으면서 답하기를, “나는 평생에 하늘이 복을 후하게 주시므로
고생을 아니한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다”하였다.
부처라는 말은 효령을 지목한 말이다.(『추강냉화(秋江冷話)』)
위 인용문을 통해 효령대군을 생각해본다. 무한한 절대 권력 앞에서 한 인간의
고뇌를 볼 수 있고, 통치자의 자질을 타고 난
아우에게 흔쾌히 왕위를 헌사하고왕이 된 아우를 도와 국정을 도움으로써 비록 군신 간이지만 돈독한 형제애를
조성하는 공로가 큰 바른 품성을 읽을 수 있다. 더불어,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통치하던 시대에 살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왕자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버리고 초탈한 삶을 살아 간 효령대군의 모습을 다시금 보게 된다.
청권사 안 주변이 거의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름은 보(補), 초명은 호(祜).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다.
1407년(태종 7) 효령군(孝寧君)에 봉해졌으며, 1412년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활쏘기에 능해 항상 태종을 따라 사냥터에 다녔으며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태종(太宗)대왕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과 예성부부인 해주정씨의 묘소
효령대군은 1486년(성종17) 5월 11일 91세로 하세하시어 이곳 壬坐원에 모셨고, 예성부부인은 1470년(성
종1) 77세로 하세하시어 양주(현: 포천군 내촌면)에 모셨다가, 1486년(성종17)에 현 묘소로 천장하였다.
묘소 앞에 놓여진 석물(石物)은 양녕대군 묘소의 석물과 함께 조선초기의 유규(遺構)로서 당시 대군묘의
제도와 규모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청권사 홈피자료에서...
불교를 숭상하여 회암사(檜巖寺)의 중수와 흥천사탑전(興天寺塔殿)의 수리,
원각법회(圓覺法會) 개최 등 많은 불사를 주관했다.
또한 〈반야바라밀다심경 般若波羅蜜多心經〉·〈원각경〉 등도 언해·간행했고
유신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불교의 보호와 진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문장에도 능했으며 성종대까지 왕실 어른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한다.
그리고 1865년(고종 2) 양녕대군과 함께 세종묘에 추가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효(靖孝)
특히 이들은 그 덕이 지극하여 내면적 처신이 깨끗함(淸道)에 가까우며,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함으로 인해 자연히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으므로 이는 양위(讓位)라는 목적달성에 해당하는 권도(權道)에 부합된다는
다소 어려운 고사인데 차남인 효령이 왕위를 양보한 것은 청도에 맞았고,
부처에 의탁한 것은 권도에 맞았다는 일화를 비유하여 ‘청권’이라 이름한 것이다.
즉 아우인 충령대군에게 성덕이 있음을 알고 학문과 재덕을 숨기면서 왕위를 겸손하게 양보한 미덕을 주나라 때 태백과
우중 형제의 행적에 비유하여 청권이라 한 것인데, 후일 영조(英祖)가 사당의 현판 이름을 ‘청권사’라 지어서 내려 보낸 까닭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청권사 홈피에서....
파고다 공원(탑골공원)안에 있는 유리관 속의 10층 석탑
어찌나 높던지!!! 사진찍는데 퍽이나 어려움이 따라 눈알이 떨어 질 뻔 했습니다.
효령대군은, 조선 초기의 시퍼런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도 불구하고 유불조화론(儒彿調和論)을 들고 나와 불교에 심취하였고,
효도를 도덕의 기본으로 삼아 부모 은혜에 보답하는 교화사업에 진력하였다.
탑골공원의 10층 석탑과 보신각 종의 주조에 장기간 직접 감독으로 헌신하고,
여러 사찰을 돌면서 시주하고 불사를 일으키고 하였다. 그는 예성부부인과 함께,
금과 은으로 쓴 화엄경과 법화경을 광덕사(廣德寺)에 시주하는 등 불교진흥에 한평생을 바쳤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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