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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시를 읽다(13)
- 지베르니와 퐁피두현대미술관
김철교(시인, 배재대 교수)
2013년 6월 16일
모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상라자르역(Gare St-Lazare)에서 10:36분에 기차를 타고 베르농(Vernon) 역에 도착하니 11:24분이었다. 베르농 역에서 11:30분에 편도 1인당 4유로를 주고 버스를 타고 11:50분에 지베르니(Giverny)에 도착하여 모네의 집을 방문하였다. 집안에는 살림살이 도구와 모네가 그린 유명한 그림들의 복사본이 걸려 있었는데 특히 일본 그림들이 참으로 많이 걸려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집 앞 널따란 정원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하였다. 모네는 “내가 유일하게 잘 하는 두 가지는 그림 그리는 일과 정원 일이다”라고 할 정도로 정원 가꾸기에 혼신을 다했다고 한다. 정원과 저택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모네의 무덤이 있는 교회를 찾아 무덤 앞에 헌화하고 귀가 길에 올랐다.
지베르니에서 돌아와서는 퐁피두 센타에 6시 30분에 도착하여 4층과 5층에서 현대미술 감상에 집중하다보니 저녁 9시가 다되었다고 나가라고 하여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퐁피두 현대 미술관이 저녁 늦게까지 개방하는 날이었다.
1. 지베르니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 연못> <Le Bassin aux Nympheas, harmonie verte, 1899,
캔버스에 유채, 92.5X89.5Cm, 오르세 미술관>
‘인상주의’하면 떠오르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인상주의를 시작했고, ‘영원한 인상주의자’로 자처하며 평생을 살다가, 인상주의 최후의 생존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네의 작품들은 파리의 마르모탕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장 많이 걸려 있다. 그 중에서도 오랑주리 미술관에 특별히 마련된 타원형의 두 개의 전시실에 있는 8점의 대형 수련연작이 모네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모네가 수련을 그렸던 곳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이며, 1890년에 정착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가까이 연못 위의 수련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모네는 직접 연못과 일본식 다리, 정원 등을 가꾸면서 자연광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하는 색채를 화폭에 담았다. 2백 50여 편에 이르는 수련을 그렸다고 한다.
모네 가족은 다섯 살 때 세느강이 대서양과 합쳐지는 곳 르아브르(Le Havre)로 이주하였으며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갔던 19살 때까지 살았다. 알제리에서 군복무를 하다 병으로 일년 만에 제대한 1861년 전후로 아카데미 스위스(Académie Suisse)와, 아카데미 회원인 화가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의 화실에 다니면서 피사로(Camille Pissarro), 바지유(Frédéric Bazille), 르느와르(Auguste Renoir), 시슬리(Alfred Sisley) 등과 사귀게 된다.
<지베르니 모네의 자택 실내, 벽에 일본 그림들이 걸려 있다>
당시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단점들이 부각되는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나 모네와 인상주의자들은 세상의 밝은 면을 그렸던 낙천주의자들이었다. 특히 “모네는 빛을 그림의 주제로 삼음으로써, 그 이전 회화의 주요 주제였던 서사를 미술에서 제거하고, 그림이 다룰 수 있는 주제의 폭을, 보이는 모든 것으로 넓혔다”는 평을 받고 있다.
1874년부터 열렸던 인상파 전시가 1886년 여덟번째이자 마지막회를 맞았을 때 쯤에는 인상주의 자체는 이미 과거의 미술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기간에 후기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구성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등이 실험되고 있었다.
모네는 1908년부터 증상이 심해진 백내장으로 가끔씩 작업을 쉬어야 했고, 1923년에는 눈 수술을 받았으며, 약해져가는 시력을 연못에 집중하였다. 우키요에를 보고 만들어 ‘일본식 다리’라고 부른 곳 위에서 물을 내려다보며 물의 표면에 떠 있는 수련과 나무, 하늘, 구름이 머금고 있는 빛을 그렸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유럽에서 모네를 현대회화의 선구자로 주목하는 ‘모네 부흥(Monet Revival)’이 일어났다. 샤갈은 모네를 ‘우리 시대의 미켈란젤로’라고 했고, 앙드레 마송은 오랑주리 미술관을 ‘인상주의의 시스틴 채플’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베르니 작업실과 정원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클로드 모네 미술관(Musée Claude Monet)으로 일반에 공개되었으나 그의 그림은 거의 없다. 모네 그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유족의 기증품을 소장한 파리의 마르모탕 미술관과, 8폭의 대작인 <수련 연작>이 걸려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이다.
모네는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동양 문화, 특히 일본 문화에 심취해 일본의 판화와 그림을 많이 수집했다.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정원도 역시 동양풍으로 만들었다.
지베르니는 강을 끼고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에 정원을 만든 모네는 주변을 흐르는 물길을 틀어 자신의 연못을 지나가게 만들었다. 다리 위에는 등나무가 가득차 있고, 그 옆으로 거대한 버드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산책(La Promenade)> 1875, 캔버스에 유채, 100x81cm,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카미유와 아들 장을 모델로 그렸다.
모네만큼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화폭에 자주 담은 화가도 드물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2050개의 그림 중에서 무려 56점의 작품에서 카미유 동슈(Camille Doncieux)를 볼 수 있다.
모네가 카미유를 처음 만난 것은 1865년께 몽마르트에서였다. 그는 친구 바지유와 함께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는데 카미유는 바지유가 모델로 고용하기 위해 데리고 온 18세의 처녀였다. 25세의 모네는 첫눈에 반해 낮에는 화가와 모델로, 밤에는 연인으로 만나 떨어질 줄 몰랐다.
이 결혼을 반대했던 모네 부모는 1870년 카미유와 혼례를 올린 다음부터 생활비를 주지 않아 궁핍하게 되었다. 절친한 친구인 바지유가 계속해서 그를 도와주었으며, 모네 못지않게 가난한 르누아르도 물심양면으로 모네를 도와주었다.
1870년 보불전쟁이 터지자 모네는 런던으로 피신했는데 그곳에서 피사로의 소개로 알게 된 화상 폴 뒤랑-뤼엘이 그림을 사주어 1872년에는 파리 서북쪽 세느 강변의 아르장퇴유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랑-뤼엘이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다시 어려워져, 카미유가 중병에 걸렸으나 가난 속에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였다.
모네는 베테이유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 오셰데 부인(Alice Hoschede)의 식구들과 한 지붕 아래 생활하게 되었다. 자애로운 오셰데부인의 간병에도 불구하고 카미유는 1879년 3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곁을 지키고 있던 모네가 카미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화폭에 담은 그림이 <임종을 맞은 카미유(Camille sur son lit de mort)>이다.
모네는 1881년부터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여 가장 부유한 화가가 되었고, 지베르니에 저택을 마련하고 일본식 정원을 가꾸며 ‘수련’ 연작을 그린다. 그 낙원의 안주인이 된 사람은 모네와 재혼한 오셰데부인이었다.
2. 퐁피두 현대미술관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는 건물 철골을 그대로 드러낸 외벽과 유리면으로 구성된 파격적인 외관을 가지고 있다. 설계는 49개국에서 681점이 출품된 국제 설계 공모전에서 뽑힌 이탈리아의 건축가 피아노와 영국의 로저스를 중심으로 한 외국인들이 맡았다. 1969년 당시의 대통령 퐁피두가 파리 중심부 재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1977년에 세운 것이다.
퐁피두 센터는 지상 7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곳은 4층과 5층에 위치한 국립 현대 미술관(Musee National d’Art Moderne)이다. 20세기의 미술 소장품들은 세계 최대 수준을 자랑한다. 회화, 조각, 사진, 영화, 뉴미디어, 건축, 디자인 등 장르도 다양하다. 5층에서는 '근대 컬렉션(1905-60)'을 전시하고 있는데, 마티스, 피카소, 칸딘스키, 미로, 자코메티 등 유명 미술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1960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된 4층은 주로 각종 설치미술, 그래픽아트 등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원래 국립현대미술관은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기획되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에 있다가, 퐁피두 센터가 오픈한 1977년에 옮겨온 것이다. 퐁피두현대미술관 개관 특별전이었던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을 비롯하여 그 동안 달리(Salvador Dali, 1904-89),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1973) 등의 특별전이 열렸다.
5층에서 전시되고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한 근대 미술 사조를 보면, (1) 밝고 강렬한 색채, 형태와 원근법의 왜곡, 거친 붓질 등이 특징인 마티스 중심의 야수주의, (2) 다양한 양식과 여러 각도에서 본 대상의 모습 등이 특징인 피카소 중심의 입체주의, (3) 우울과 질투, 고독 같은 강렬한 감정을 표현한 뭉크의 표현주의, (4) 똑바른 배열과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특징인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5) 그림의 내용과 상관없이 색채로 감정을 전달하는 비구상회화가 특징인 칸딘스키의 추상주의, (6) 레디메이드(ready made)를 특징으로 하는 뒤샹의 다다이즘, (7) 사실적인 기법으로 환각을 표현하는 달리와, 사물을 마치 생물처럼 독특한 모습으로 표현하는 미로의 초현실주의, (8) 추상을 통한 감정 표현과 뿌리기 회화가 특징인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등이다.
필자의 오른쪽: 마티스,
루마니아풍 부라우스를 입은 여인(La Blouse roumaine), 1940, 캔버스에 유채, 92X73Cm, 퐁피두 현대미술관
필자의 왼쪽: 마티스,
검은 배경의 독서하는 여인(Liseuse sur fond noir), 1939, 캔버스에 유채, 92X73.5Cm, 퐁피두 현대미술관
특히,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한결같이 자연을 긍정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던 인상파를 단호히 배격했다. 어떤 경우 그들의 작품은 ‘아름답지 않다’고도 할 수 있으며, 과거 예술이 지녔던 조화, 생동감이 넘치는 선의 움직임, 화려한 색조 등을 단념하기도 한다. 전쟁으로 인한 삶의 위기감, 시민사회와 자본주의의 동요, 현실에 대한 절망감은 급기야는 낭만주의적, 자연주의적 전통을 거부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특히,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이러한 거부감이 격하게 나타나게 된다.
(1) 다다이즘
다다이즘은 제1차대전 와중에서 꽃피웠던 예술운동으로 1916년 취리히에서 시작, 1922년까지 유럽전역을 휩쓸었던 문학과 예술운동이다. 다다 창시자는 화가 아르프(Jean Arp, 1886-1966)이며, 이들은 1916년 전쟁을 피해 중립국인 스위스 취리히 ‘카바레 볼테르’에 모여 활동하였는데, 이곳은 서양문화전체에 반발하는 행동과 작품의 집합소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화가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로 유명해진 후 계속해서 <샘, Fontaine, 1917>등의 레디메이드 오브제 작품을 발표하였다. 뒤샹의 작품들은 전통 미술의 기본 개념을 뒤흔들고 ‘反예술’의 개념을 만들어 냈으며 초현실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반예술이란 예술의 소재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반대해 혐오스럽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을 소재로 삼은 예술을 말한다. 반문명, 반합리적 예술운동으로 일어났던 다다이즘은 끝없는 부정과 파괴의 연속 속에서 창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현실모순과 대립을 종합하여 새로운 통합의 세계를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였는데 이것이 초현실주의 운동이다.
뒤샹, 샘, 1917 (1964), 63x48x35 cm, 퐁피두현대미술관
2004년 12월1일, 영국의 미술가 500명을 대상으로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가장 영향력을 크게 미친 작품”을 조사했는데, ‘색의 마술사’라는 앙리 마티스의 ‘붉은 작업실’(The Red Studio, 1911)가 5위,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 1937)가 4위,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2면화’(Marilyn Monroe diptych, 1962)가 3위,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이 2위, ‘마르셀 뒤샹’의 ‘샘(Fontaine)’이 1위를 차지했다.
뒤샹은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를 거꾸로 엎어놓고, 거기에다 ‘샘’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뒤샹은 이 작품을 1917년 뉴욕의 독립미술가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의 전시회에 출품했다. 소변기의 편편한 부분을 바닥에 대고 뉘어놓아 그것이 ‘발기(勃起)’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R. Mutt 1917'이라고 서명을 했다. Mutt는 'Mott Works'라는 위생도기 판매회사 이름에서 따다가 살짝 바꾼 것이다.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는 심사위원회도 없고, 상도 주지 않으며, 연회비로 6달러만 내면 누구나 두 점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회였다. 그러나 ‘샘’은 전시되지 않았고 도록에도 빠져 있었다. 아무도 이것을 미술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샹은 사진작가이자, 친구인 스티글리츠(Alfred Steiglitz)에게 ‘샘’을 사진 찍도록 하였는데, 오리지널 ‘샘’은 분실되어 버렸고 이 사진이 복제품을 위한 모델이 되었다. 샘은 1964년 이태리 밀라노에 위치한 슈바르쯔(Schwarz) 갤러리에 의해 뒤샹의 서명과 함께 1에서 8까지 일련번호가 쓰여진 8개가 복제되었다. 도록에 1917(1964)라고 쓰여진 것은 1917년 원본은 사라지고 1964년 복제본이라는 뜻이다.
(2)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Surréalisme)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였다. 그러나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무의식이론에 정통한 의학도 출신의 시인이자 비평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구체화되었다.
1925에는 파리 피에르 화랑에서 최초의 초현실주의 그룹전이 열렸다. 1936년 런던의 초현실주의 국제전, 1938년 파리의 초현실주의 국제전이 있기까지 형식과 내용에서 다양하고 충격적인 조형적 실험작업이 전개되었다. 이 기간에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시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이들 예술이념도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문명과 이성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자유롭고 총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려는데 있었다. 또한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융합하여 좀 더 확장된 통합적 세계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였다.
화가들은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원시미술을 재조명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공간에 위치시키려 했다. 무의식, 꿈, 환상의 세계를 탐색하고, 불가사의한 것, 비합리적인 것, 우연한 것 등을 현실공간에 공존시킴으로써,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상상을 종합하여 초현실세계를 구현시키려 했다.
이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론의 토대로 삼고, 새로운 표현기법(오토마티즘, 데페이즈망, 콜라주,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콜라주, 프로타주)을 사용하였다.
오토마티즘(automatisme)이란, 미리 어떤 의도를 품지 않고 외부의 자극을 차단한 채 내면에서 무의식적으로 연상되는 것, 내면에 떠오르는 빛깔이나 행태 등을 붓 가는대로 그리는 것이다.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와 같은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기법으로, 모순 대립되는 요소들을 동일한 화폭에서 결합시키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환경에 위치시켜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법이다.
데칼코마니(décalcomanie)는 유화물감을 어떤 면에 칠했다가 그것을 캔버스에 찍어 옮기는 것이다. 의도된 구도와는 별개로 드러나는 환상적 형상에 의해 무의식의 또 다른 형태가 표출될 수 있다.
콜라주(collage)는 큐비즘의 파피에 콜레(종이 붙이기)가 발전된 것으로, 본래 상관관계가 없는 별도의 영상을 최초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결합시켜 색다른 미(美)를 창출하려는 기법이다.
프로타주(frottage)는 탁본을 말하며, 동전위에 종이를 덮고 연필로 문질러 동전의 형태를 베끼는 것 같은 것이다.
(3) 추상표현주의
몬드리안, 뒤샹, 달리 등 유럽의 많은 주요 현대미술가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옮겨옴으로써 역사가 짧은 미국 화단은, 20세기 전후 유럽 미술의 엄청난 변화를 실감하게 되었다. 전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강력한 문화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한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 미국 미술계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였으나 작가들의 작품 성향은 다양하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평론가였던 로젠버그(Harold Rosenberg)는 폴록(Jackson Pollock, 1912-56)의 실험적인 작업을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 명명하며 높이 평가하였다. 1947년부터 폴록은 ‘드리핑 기법’을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캔버스를 세워놓고 붓으로 그리는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막대기나 팔레트 나이프를 이용하여 흩뿌리며 그리는 방식이다. 그의 작품은 완성된 작품으로의 의미뿐만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행위 자체로서 전위적 예술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제작 방식은 결과를 미리 예측하지 않고 우연성이 강조되기에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연상하게 한다.
액션 페인팅은 195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미국 추상회화, 조각> 전시가 열리면서 제2차 대전 후 미국화단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회화 형식으로 인식되었고, 미국 전역과 세계 각국에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폴록은 액션 페인팅을 통해 미국이 세계 미술계의 주도권을 쥐게 하는 핵심 역할을 하였다.
폴록, <검정색, 흰색, 노란색, 붉은색 위의 은빛>, 1948,
캔버스위에 부착된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Oil and enamel on paper laid on canvas),
61x80 cm, 퐁피두현대미술관
1950년대 들어 액션 페인팅이 결국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겠다거나 모호하고 주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시들해지자, 1960년대에는 가장 대중적이고 미국다운 소채를 찾아 <팝아트>를 만들어 내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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