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김씨(原州金氏)의 시조이다. |
원주 김씨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가 시조인 경주김씨(慶州金氏)로 부터 분파 되었다. 처음 이름은 자표(子彪), 봉호는 원성백(原城伯)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제 15대 숙종(肅宗) 원년(1096, 丙子年) 3월 3일에 개성(開城)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 김주(金疇)의 6남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
한림학사 김미연이 조부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여덟 번째 아들 일선군 김추(金錘)가 7대조가 된다. |
천품과 자질이 영명하고 시서(詩書)에 능통 하였으며 천문지리에 통달하여 축리에 선발 되어 출사 하였다. |
서리는 나라의 길흉화복을 미리 예상하는 직책으로 추정된다. |
예종(睿宗) 9년 (1114)에 여진(女眞)부족에서 아구타(阿骨打)라는 영걸이 나와 거란족의 요(遼)나라를 격파하고 다음해에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금나라는 건국 10년만인(1125, 인종 3년)에 송(宋)나라의 수도 개봉(開封)을 공격하여 휘종(?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았다. |
이로서 북송(北宋)은 멸망하고 송나라 황족 일부가 항주(杭州)로 내려가 남송(南宋)을 세웠다. |
이처럼 국제 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고려 조정은 정리정략(政利政略)에 눈이 먼 정상배들로 제대로 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물론 사치풍조의 만연으로 나라의 장래가 몹시 위태로웠다. 이때 김거공은 이 난국을 넘기기 위해서는 새로 흉기 한 금나라와의 국교 수립이 가장 시급한 사항이라고 강조 하였다. 조정에서는 김거공의 건의를 묵살하다가 사태가 초 위급 상태에 이르자 금나라와의 교섭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
그러나 금나라는 고려에서 보낸 국서에 표(表: 황제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가 없고 말미에 신(臣)자를 거(巨)자로 가서(假書) 하였다 하여 이를 받지 않았다. |
이렇게 되자 조정은 혼란 상태에 빠져 버렸다. |
결국 고려 조정은 실권자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의 주도로 중신회의를 연 끝에 김거공을 사신으로 파견하기로 결정 하였다. |
고려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진 김거공은 결연히 금나라로 들어가 고려 존망에 관한 어려운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
이에 인종(仁宗)은 직접 금대(金帶)를 하사 하였다. |
대외적 위기가 가까스로 수습되자 상하 불목과 정권투쟁이 또 다시 재연 되었다. |
외척 이자겸의 발호가 왕권을 능멸하기에 이르자 왕은 이자겸을 제거 하려 하였다. 이를 미리 알게 된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인종의 의도를 좌절 시켰다. 이자겸은 그러나 얼마 못가 심복인 척준경과 반목하여 결국 그에 의해 축출됐고 척준경 역시 탄핵을 받아 쫓겨나는 등 내정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
김거공은 이러한 와중에 이부시랑중강(吏部侍郞中講), 학사 겸 합문(學士 兼 閤門, 좌우상시(左右常侍), 참지정사(參知政事), 등 요직을 차근차근 역임한 끝에 인종 23년(1145)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
의종(毅宗) 15년(1161년)에는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가 이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자리를 옮겼다가 추밀원 판사삼사사(樞密院 判事三司事)에 올랐다. 그 후에 금청광록대부(金淸光錄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
의종은 김거공의 수십 년에 걸친 충절공훈(忠節功勳)을 기리어 원성(原城 : 원주)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하였다. |
이를 계기로 김거공의 후손은 원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
의종 17년(1163년) 5월 5일에 타계하니 향년 68세였다. |
김거공은 풍채가 뛰어나고 말을 조리정연하게 잘하여 오늘날의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에 해당하는 합문(閤門)을 항상 겸직 하였다. |
김거공이 타계한지 7년 뒤인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주도로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신들을 무시하던 문신들이 대거 죽임을 당했다. |
이후 사람들이 김거공이 일찍 재보(宰輔 : 재상)가 되었다면 이자겸의 난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정중부의 난도 벌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
개성 봉명산(開城 鳳鳴山)에 장사 지냈고 배위는 혜화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의종 24년(1170년) 12월 18일에 타계하니 합폄 하였다. |
아들 윤간(允侃)도 금청광록대부 문하시중(金淸光錄大夫 門下侍中)에 올랐다. |
묘소는 오랜 세월이 지난 데다 남북분단으로 애석하게도 실전하여 2000년에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초리 세곡(津東面 哨里 細谷)에 설단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