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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건축
16.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 육신으로 성전이 되신 예수
[요한복음 2:12~22]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오늘은 생명의 건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처음에는 혼인 잔치에 대해서 말씀 드렸다. 인생의 마지막, 정점, 결론 그것은 결혼이다. 요한복음은 특이하게 딱 결혼부터 시작했다.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낳아서 왜 젖을 먹습니까? 크려고 먹는다. 왜 먹을 먹습니까? 어른이 되려고 먹는다.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되나? 결혼하는 것이다. 그 이상 없는 것이다. 인생이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하다. 낳아서 자라 가지고 결혼하려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성경(聖經)도 마찬가지다.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하고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둘이 결혼했다 그 말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마지막 결론 그 많은 사건들이 지나갔는데 마지막 결론에 가면 어린양과 교회의 결혼 잔치! 그렇게 끝을 맺는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맨 처음에 등장시켰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결혼하려 가는 것이다. 합당한 결혼을 위해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A.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
두 번째는 생명의 건축(建築)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아주 의도적으로 쓰인 책이다. 역사적으로 쓴 것이 아니고 아주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가지고 쓴 책이기 때문에 우리가 읽으면 훨씬 더 읽어지기가 쉬운 책이다. 그래서 성전을 깨끗한 사건이 있다.
-. 유대인의 유월절이 다가오자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장사꾼들은 때를 보기 위하여 제물로 드릴 물건들을 성전에서 팔고 있었다.
유월절이 돌아오면 유대인들은 사방에서 모여든다. 왜냐하면 유월절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방 기념일이고 독립일이고 우리 같으면 8.15 해방 같은 그런 날이다. 우리는 8.15 해방이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만 이 사람들의 유월절은 알고 보면 자기들의 역사의 시작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굽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자기들 민족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만큼 중요하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전부 모여 온다. 왜? 이렇게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이 생겼냐하면 올 때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다 자기대로 제물을 가지고 와야 된다. 성전에 올 때는 그냥 빈손으로 오면 안 된다. 그래서 가지고 오는데 이것을 집에서 다 키워서 가지고 오려니까 어렵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해서 부패한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무엇을 했냐하면 키워 가지고 오면 불합격시켜 버린다. 트집을 잡아서 이것은 털이 하나 검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불합격을 시킨다. 그러면 난감하다. 일 년 내 키워 가지고 왔는데 할 수 없이 자기들이 파는 것을 사서 제물로 쓴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더러 있다. 관공서에 일하려고 하면 이것이 틀렸니 저것이 틀렸니 트집을 잡는다. 그런데 대소서나 사법소서나 이런 데서 써 가지고 가면 군소리 않고 받아준다. 그래서 같이 해먹고 사는 것이다. 이때 성전에도 그런 식이다. 거기 가서 사는 것은 무조건 다 합격이고 내 집에서 키워 가지고 간 것은 불합격 맞기가 쉽다. 그러니까 자연히 장사가 잘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모여 든다.
-. 예수께서는 이런 일들을 보시면서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혹은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막11;17) 하시고 그 모든 물건들을 뒤집어엎으시고 사람들을 쫓아내셨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혹은 마가복음에서는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막11;17). 이렇게 말씀하시고 다 뒤집어엎어서 청소를 했다. 이런 내용이다.
-. 제자들은 이 일을 보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시69;9) 하신 말씀을 기억 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시편69:9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시69;9) 하더니 바로 이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았다는 뜻이다. 메시야가 오면 그 하나님 아들은 주의 전을 열심히 사모 할 것이다. 그래서 나를 삼킬 만큼 그렇게 사모할 것이다 했는데 이분을 보니까 그렇구나! 이렇게 인식을 했다는 뜻이다.
-. 성전의 역사는 광야의 성막에서 시작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로는 몇몇 곳을 거쳐 실로에 세워졌다가(삿18;32, 삼상3;3), 왕국이 세워진 후에는 솔로몬에 의해 세워졌으나(B.C958~965)
예루살렘을 침략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파괴되었다.(B.C587)
여기서 우리는 성전의 역사를 보면 아주 기구하고 복잡하고 그렇다. 광야에서 맨 처음에 성막이 시작했다. 그래서 광야에 있는 동안 성막생활을 합니다.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장소를 만들어 놨는데 그것이 성막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으니까 만날 수 없다. 지역적으로도 서로 못 만나고 또 지역 뿐 아니라 하늘과 땅은 천지 차이라는 말을 우리가 한다. 그러니까 관념적으로도 만날 수 없으므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어떤 것을 사람은 찾고 있다. 이것은 모든 민족마다 다 있다. 제사나 제단이나 이런 것들이 다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막이라는 특수한 건물을 만들게 되었다. 모세를 통해서 계시된 바라고 했는데 아주 독특한 것이다. 이렇게 이어 오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사시대가 되었는데 그때는 성막이 일정한 자리가 없고 여기 저기 옮겨 다녔다. 그리고 혼란기에는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했다. 이렇게 하다가 뒤로는 왕국이 확정되고 건설된 후에야 비로소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 바벨론이 망하고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면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성전재건을 시작해서(B.C약537~520) 다리오 왕 6년에 건축을 마쳤는데 이것을 제2의 성전이라 칭한다.
이것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BC. 587년경에 완전히 파괴가 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다 포로로 잡혀갔다. 그랬다가 90년 후에 성경에 바사 왕이라고 하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나라를 얻어서 칙령을 발표해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고 ‘나가서 너희 성전을 건축해라.’ 이렇게 했다. 그래서 도와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협조를 했다. 그래서 이것을 몇 년간에 걸쳐서 다시 복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2의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포로 후에 다시 중수한 성전, 제2의 성전이다. 고레스 왕에서부터 시작해서 다리오 왕 6년까지라고 하니까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건축을 했다. 이랬던 것이 그 뒤로 유대가 또 다시 망하게 된다. 완전하게 망하면서 이 성전은 없어지고 만 성전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정략적으로 건축하고 있었던 것으로서(B.C20~A.D64), 그 의미와 역사가 기구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근본적인 의미를 신성하게 여기신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 당시의 이 성전은 그 때 그 성전이 아니고 유대를 통치하고 있던 헤롯이 민심을 사기 위해서, 유태인들의 민심을 사려면 성전을 짓는 것이 제일 좋겠다. 이런 판단을 해서 정략적으로 성전을 건축했다. 이것이 BC. 60년부터 24년까지라고 한다. 오랜 시간동안 건축하고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90년 동안 건축했다고 한다. 알고 보면 오래할수록 좋은 것이다. 긴 시간 동안 할수록 환심을 계속 살 게 아닌가? 이렇게 해서 된 성전이다.
이 성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무엇을 팔고 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전부 제사장들이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다. 비둘기를 팔고, 양을 팔고 돈도 바꾸고... 이런 것들이 모두 성전에 내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었다. 여기서 이익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분노해서 정리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보더라도 사실 헤롯이 지은 성전은 성전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계시를 주어서 모세에게 세우게 하신 성막이나, 다윗이나 솔로몬에게 계시를 해서 지었던 성전이나, 아니면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세워졌던 제 2의 성전이나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성전이지만 헤롯이 지은 성전은 순전하게 로마 정치인에 의해서 정략적으로 세워진 성전이니까 말만 성전이지 사실상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성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분노하시고 청결케 하셨다. 그리고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헤롯이 지은 성전의 의미보다는 성전의 근본적인 의미를 더 신성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우리는 봐야 된다.
-. 성전은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교통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시겠다는 약속의 표적이고 형상이었다. 따라서 여호와는 거기서(성전에서) 그 백성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며 기도에 응답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백성의 배신과 완고함에 의해 성전은 그 영을 상실하고, 단지 손으로 지은 건축물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강대국들에 의해 짓밟힘으로써 당시에는 정략적인 이용물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성전은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교통하기 위해서 땅으로 내려오겠다는 하나의 약속이다. 내가 여기서 너와 만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약속의 표준이고 형상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거기서 백성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말씀도 하시고 축복도 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이렇게 했던 장소다.
그런데 이런 신성한 장소가 백성의 배신과 완고함에 의해서 영원히 파괴되고 말았다. 물질적으로만 파괴된 것이 아니고 완전히 그 영을 상실하고 생명을 상실한 그런 것이 되어서 단지 ‘손으로만 지은 집’이라는 의미만 가지게 되었다. 거기다 강대국에 의해서 짓밟히고 당시에는 정략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그런 형편이었다.
-. 그러나 그것이 의미를 잃은 전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은 거기 모여 여호와를 경배하고 찬양하였기 때문에 이 전은 땅에 있어서 유일한 하나님의 전(殿)으로서 그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전은 깨끗해야 했고 그런대로 참 성전이 올 때까지 보존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해진 모든 것들은 그 안에 있는 영이 실제화 될 때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
그럴지라도 여기서는 중요한 것이,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유대인들은 여기서 모이고, 여기서 여호와께 경배하고, 여기서 찬양하고 했기 때문에 유태인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정략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성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에 모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백성을 위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꼭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성전의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모인 것이지 성전이 잘 지어졌기 때문에 모인 것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도 가끔 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이렇게 형식적이고 그런 경우도 있는데 그럴지라도 그것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지금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교회는 가보면 ‘성전’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 그런 곳도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맞지 않는 것이지만 자기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지금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성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만일 실제적인 성전을 보지 못했다면, 어떤 종류의 형상이든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든지 실재가 올 때까지 이것은 보존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볼 때 저건 아닌데... 이런 것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을 내가 무시해 버리면 안 된다. 그 사람에게는 이게 중요한 것이니까 그렇다. 아직은 실재를 보지 못했으니까 그것밖에 없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데 기차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많이 있다. 우리가 보면 그것은 기차도 아니고 자동차도 아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기차고 자동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이들을 대할 때는 이것은 확실히 기차라는 생각을 가지고 대해야지 기차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대하면 안 된다. 이 애에게는 그것이 기차니까 그렇다. 우리 영관이도 보니까 어찌나 자동차를 좋아하는 지 온갖 자동차가 다 있다. 얼마 안 되고 하니까 모두들 사 주고 해서 많이 갖다 놓았는데 상자로 하나 가득이다. 그런데 그것을 다 전시해 놓고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볼 때는 그게 우습지만 저에게는, 그 연령대에는 그게 아주 소중한 것이다. 큰 다음에는 안 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 모양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이 실재가 될 때까지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 형상이 없으면 어떻게 실재를 알겠는가?
옛날 어린아이들은 소를 먼저 보고 소 그림을 보았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소 그림부터 보고 소를 본다. 도시의 아이들이 소를 볼 수 있는가? 못 본다. 그러니까 그림에 있는 소부터 보고 다음에 시골에 가서 소를 보면서 이게 소네, 이렇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다. 똑 같다. 그래서 영이 실재가 될 때까지는 원형 그대로 보존 되어야 한다.
유태인들은 아주 보수적이다. 그런 민족이고 배타적인 민족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지금도 지탄을 하려면 수없는 지탄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어디든 가는 데마다 자기들의 독특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사람들과 융합이 안 된다. 그런데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자기 민족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태인의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디가든지 동화되어버렸다고 한다면 유태인은 지금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동화가 안 되는, 그렇게 배타적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성경이 보존되었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어디가나 다 동화가 되어 버리는 그런 민족이었다고 한다면 없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계시가 벌써 다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동화가 안 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서 볼 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예수님도 오실 수가 없었다. 바울과 사도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봤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그렇게 해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 속에 내려왔던 관념이 깊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니까 이 사람이 성전이었구나! 이렇게 안 것이지 그런 것이 없었으면 어떻게 사람을 보고 성전이라고 하겠는가? 인간을 보고 누가 성전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성전’이라고 봤다.
그러니까 영이 실재화가 될 때까지 있어야 될 것은 있어야 된다. 그것을 보존한 사람들이 바로 유태인들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주 고집스러운 데가 있고 아주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태인을 못 따라간다. 우리가 만일 일본에 100년 이상 지배를 받았으면 동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지킬만한 그런 사람들이 못 된다. 그런데 유태인들은 2000년 동안 그것을 보존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것을 맡겼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B. 육신으로 성전이 되신 예수
-.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다. 모든 것들은 주님의 인정하심과 허락이 있을 때까지 있을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제가 올 때까지는 보존되어야 한다. 그것은 실제를 기다리게 하고 밝게 해 준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그 형상들을 보여주셨고 보내셨으며 사용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된 성전에 대해서 제시하셨다.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없어진다. 어떤 것도 다 없어진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어떤 것도 다 없어진다. 우리 인생도 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 일단 없어지면 아무것도 없다. 찾을 데도 없다. 우주공간에 어디 가서 죽은 사람을 찾겠는가? 없다.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명령이 나에게 있고 하나님의 소원이 나에게 있다는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것을 빼버리고 나면 우리는 동물하고 똑같다. 하나도 틀릴 것이 없다.
옷 입고 다닌다고 우리가 사람이고 지식이 있다고 인간이고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볼 때는 사람이 다른 짐승들보다 낫다고 보지만 다른 동물들이 볼 때 그렇게 보겠는가? 다른 동물들이 볼 때는 저것들 이상하다고 볼 것이다. 털이 있으면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옷을 입고 다니는가, 무엇 때문에 빌딩을 짓겠나. 아무데나 자면 되는데, 굴 파고 살면 되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굉장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동물들 입장에서 보면 이상한 괴물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뭐라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나의 어떤 자존심, 내가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자존심을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경우에는 쉽게 비워버리는 사람은 편하다. 내려놓을 때 내려놔 버리면 쉬운데 내려놓을 자리에 가서 못 내려놓으면 굉장히 힘든 것이다. 자존심이라는 것을 내려놓을 자리에 가서 내려놓으면 아주 쉽다. 그런데 못 내려놓으면 자기도 힘들고 남도 힘들다. 남존여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라. 옛날에 남존여비는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는 의미였는데 요즘의 남존여비는 남자는 자기 자존심을 여자에게 싹싹 빌어야 한단다. 남존여비라고 그렇게 이상하게 해석을 하더라. 그러면서 요즘 세상은 그렇게 해석을 해야지 옛날처럼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안 된단다. 당장 쫓겨난다. 그러니까 내려놓을 때 가서 확실하게 내려놓으면 쉽다. 그게 살기 편하다. 괜히 없는 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 영원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체하다가 힘만 들어가고 고생할 필요가 뭐있나.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잠시 있다가 없어진다. 모든 것들은 주님의 허락하심과 인정이 있을 때까지, 그때까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전도 너무너무 귀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인정할 때까지, 그때까지만 중요한 것이지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성전이 있던 자리에 모슬렘 사원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면 모슬렘 사원이 오던지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인정할 때만 그것이 성전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인정한 그것까지만 내 인생이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생도 아니다.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인생이 있는 이유는 실제가 올 때까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에 잠시 있다가 없어질 존재이지만 그러나 영원한 것이 올 때는 이 잠시 있다가 없어질 존재를 통해서 올 것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그것은 실제를 기다리는 것이고 실제를 기다리게 해주는 것이고 그리고 밝게 해주는 것이다.
사람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사람이 도대체 뭐냐? 그렇게 생각하면 허망하다. 그래서 뭔가가 있어야 되겠는데~,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집을 지어놓았는데 빈집이다. 그러면 누가 들어가 봐도 왜 이렇게 빈집을 지어놓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도 내가 자세히 보면 빈집이니까 누가 있어야 되는데 속에 왜 아무것도 없나? 왜 이렇게 속이 비어있나? 하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이런 자리가 왜 있냐? 뭔가 실제를 기다리는 자리다. 뭐가 있어야 되는데 한 가지가 없나? 이런 게 우리 인생에게 항상 있다. 이것이 실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실제가 올 때는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성전도 어떻게 생각하면 돌로 지어놓은 건축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 보니까 그 건축물이 전부 의미가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성막을 해석하는 것은 성막 자체를 두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놓고 비교 해석을 한 것이다. 이것은 이래서 있었고 저건 저래서 있었구나. 실제를 보니까 그렇게 해석이 된 것이지 실제가 만일 없었으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또 그 형상이 만일 없었더라면 실제가 왔어도 이것을 해석할 수가 없다. 언어가 없고 표현이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오셨다고 하더라도 그냥 사람이면 사람이지 더 이상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런데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성막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번제단이었구나! 이렇게 해석을 한 것이다. 번제단이라고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으면 사형 당했다. 핍박받고 죽었다. 이렇게 되고 만다. 사형 당하고 죽었다. 핍박받고 죽었다. 이것하고 번제단이었구나. 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었구나. 사도들은 예수를 보면서 옛날에 본 성전을 놓고 해석을 했다.
그러니까 이런 껍데기 같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실제가 올 때까지 그것을 기다리고 밝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나는 왜 있었던가? 나는 왜 머리가 있는가? 나는 왜 생각이 있는가? 이런 것들이 무엇 때문에 있는지 다 알아질 수가 없는데 그리스도가 오시면 해석이 된다. 해석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또 그리스도가 해석이 된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끔 이런 형상들을 보여주시고 또 우리에게 보내기도 하고 또 그것을 사용하기도 하고 이렇게 했던 것이다.
모세시대에 성막이라는 특이한 건축을 허락해주었는데 그때 당시에 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뭐라고 했겠는가? 다 몰랐을 것이고 우리처럼 모른다. 왜냐하면 그 실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처럼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 장소가 그래도 하나님이 허락을 해서 땅에 있는 사람을 접견하겠다고 하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어디 가서 하나님을 만나겠는가?
그리고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이방인들처럼 됐을 것이다. 여기저기 가서 아무데나 예배를 드렸고 어디서나 제사를 드리고 심지어는 아이들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는 데도 있고 여러 가지 이방인들의 제사가 있는데 그런 제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물론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될 것이고 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성막이 있어서 번제단을 통해서 물두멍을 지나서 성소에 들어가서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간다. 이렇게 정해져 있었다. 뭔지 명확하게는 몰랐지만 그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수가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에서 예수가 오실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나라에 올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 백성들에게 알맞도록 어떤 형상을 허락했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마침내 물질로 지어진 성전은 예수님을 통해 육체(肉體)로 실제화 되었고, 인격(人格)으로 완성 되었으며,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최종 완성될 것이다. 물질(物質)로 지어진 성전은 이때를 기다렸던 것이다(그 형상으로서의 전이 먼저 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먼저는 육이 있는 자요, 다음은 영적인 자이다.(고전15;46참))
이것이 마침내 물질로 지어진 성전이 예수님을 통해 육체(肉體)로 실제화 되었다, 육체(肉體)로 실제화 되었다는 말은 인격으로 됐다. 이것은 인격으로 완성되고 새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이것이 완성될 것이다. 물질로 지어진 성전은 이때를 기다린 것이다. 육체로 되어진 성전이 올 때까지를 기다린 것이고 또 그 육체로 되어진 성전은 인격으로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또 인격으로 완성된 그 성전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막연한 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새로워지고 완성되어져 가는 길로 들어서 있다. 내 인생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점점 더 실제화 되는 길로 지금 가고 있다.
그러니까 그 형상으로서의 전이 만일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은 먼저는 육이 있는 자고 다음은 영인 것이다. 인생은 영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육이 있는 자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하늘로부터 시작한다든가 하면 안 된다. 사람은 육신이니까 어차피 사람이라는 구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실 수도 있고 또 이 구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게 되어 있지 사람이 천사처럼 하늘에 날아다닌다든지 이렇게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자체를 무시하고 육체를 무시하고 하고 있는 모든 종교적인 어떤 것들이 공중에 떠다니다 없어지고 떠다니다 없어지고 한다. 뿌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허황해서 없어지고 한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면서 인생은 참 중요한 것이구나! 비록 이것이 빈껍데기지만 중요하구나! 내용이 없는 그릇이지만 중요하다는 말이다. 언젠가 그릇을 사다 놓으면 그래도 물건이 들어올 날이 안 생기겠는가? 좋은 접시를 하나 사다 놓고 나면 접시 때문에라도 어디 가서 좋은 생선 한 마리 사다 구워 놓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겠는가? 잘못하다가 천주교 되어버리면 안 된다. 그럴 염려가 없으니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천주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형상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밀가루 떡인지 알지만 그것을 자꾸 예수님의 몸이라고 먹다보면 실제로 내가 예수님의 몸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꼭 그런 의미가 아니고 우리 육신으로 된 인간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네가 누구기에 성전을 감독하느냐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두고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하셨다. 이 육체는 하나님이 거하시고 말씀하시는 인격 성전이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말씀하시는 곳이 성전이다.(고전3:16, 엡2:21참)
예수님 보고 네가 뭔데 이것을 감독하느냐?고 했다. 네가 무슨 표적을 내놓겠냐? 이렇게 할 만한 자격이 너한테 있냐는 말이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독특한 말을 했다. 이 성전을 헐어라, 사흘 동안에 내가 다시 일으키겠다고 말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동안 지은 전인데 네가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냐? 그게 말이 되냐? 이렇게 했는데 제자들이 하는 말이 이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라고 해석(解釋)을 했다. 이것은 부활한 후에 그렇게 해석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육체는 하나님이 거하시고 말씀하시는 인격의 성전이었다는 것이다. 인격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육체 안에 있는 것이다. 육체와 더불어 있지 인격이라는 것이 육체를 떠나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체는 하나님이 거하시고 말씀하시는 인격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말씀하시는 곳이 성전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이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전인 것을 모르느냐?”는 곳이 나온다.
-.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이다. 이 육체는 저주 안에 있던 그 육체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거하시고 말씀하시는 전이 되었다. 인간 육체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이다. 이 육체는 어떤 육체인가? 창세기에서 저주받은 그 육체이다. “저들이 육체가 됨이라, 나의 신이 영원히 저기거하지 않겠다.”(창6:3)했던 바로 그 육체이다.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육체가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요1:14)는 것이다. 이건 아주 놀라운 일이다. 그런 육체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거하시고 말씀하시는 전이 되었다는 뜻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은 저주 받아버린 그런 육체이지만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革命)이다. 하나님은 인간 육체 안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혁명이다. 성전이나 성막이나 이런 곳에서만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육체 안에서 말씀했다는 것이 혁명이다.
전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수한 사람 모세, 선지자,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만 말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6장 나왔던 그 육체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게 되었다는 것이 혁명이다.
지금 우리는 자동차(自動車)를 운전하고 갈 때 휘발유를 넣어서 태우고 있다. 여기서 매연도 많이 나오고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오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일어나고 문제가 나오고 있다. 지금 연구 중이라고 하기는 하는데 수도꼭지 열고 물 부어서 간다면 이것은 혁명이다. 연료혁명이다. 수소연료를 만들어 가지고 쓴다면 고속도로 휴게소 이런데서 수도꼭지 몇 개 열어 놓고 다 떨어지면 물만 넣으면 되니까 혁명이다.
5.16은 사실상 쿠데타인데 혁명이라고 한다. 군인들이 일으켰으니까 쿠데타인데 왜 혁명이라고 하냐면 우리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5000년 역사가 가난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가난을 벗어 날 수 있는 그런 구조가 안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타파한 것이다. 우리도 잘 살아보자고 새마을 운동을 했다. 결국은 이것을 동원해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경제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은 산업혁명, 대한민국의, 조선 민족의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다. 시작은 쿠데타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혁명이 됐다.
뭔가 전에 있던 것하고 전혀 다른 개념이 생긴 것, 혁명이 다른 게 아니고 이것이 혁명이다. 그러니까 지금 성전이나 천사(天使)나 이런 어떤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성스러운데서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거기서만 하나님이 계셔야 된다. 또 계실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전 우주(宇宙)를 덮고 있는 그런 사상인데 말씀이 육체가 됐다는 이것은 혁명이다. 완전한 혁명이다.
-. 여호와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상들이나 이방인의 말 못하는 신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 육체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방인들의 신들은 육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말도 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우상들과 구별이 되는데 성경에서 우상을 말할 때 말도 못하는 우상 앞에 내가 왜 절하느냐? 이렇게 되어있다. 우상(偶像)이나 이방인(異邦人)들의 신들은 말을 못한다. 말을 못하는데 사람들이 거기다가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서 경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왜 그럼 그 사람들은 말을 못하는 신을 섬겼을까? 말 못하는 것을 만들어 놓고 왜 그것을 섬겼을까? 이런 생각이 있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없다. 육체는 부정하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말 못하는 신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할 수 있다고 했으면 말 못하는 신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안 된다고 했으니까 말 못하는 신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체가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면 다 말 못하는 신을 만들 수밖에 없다. 예수님 이전에도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 말이 너희 입술에 있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죽은 나무나 돌이나 말 못하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비록 그것이 육체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 그렇게 했다. 사람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없었지만 사람을 사용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육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썼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 아니겠는가.
-. 말씀하신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셨다.(히1:1~참)
그러나 그런 말씀하심으로는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을 기다리셨으며, 그가 나타났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다.(막9;7) 여호와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오랫동안 이 사람을 기다리신 것이다.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하심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온전하게 말해줄 사람을 기다렸다. 온전하게 자기를 표현해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자기를 온전하게 표현해 줄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셨다. “그리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렇게 했다. 여호와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이 사람을 기다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사야도 있고 예레미야도 있고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무얼 받아가지고 말한다는 형식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서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런 모양이었다. 단지 말씀의 통로였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진짜로 자기를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이다.
악기(樂器)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결국 우리에게 가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노래는 성악(聲樂)이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하는 노래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성악을 좋아하시는 분이다. 기악으로 해서는 자기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성악을 좋아하신 분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 말씀이신 하나님에게는 말씀할 사람이 필요하다. 여호와는 말씀할 사람으로 말씀하게 하신다. 즉 말씀할 육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는 육체 없이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말씀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함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도록 예수 안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1요1;1)
직접 말하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말씀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를 표현 할 사람을 찾고 있다. 여호와는 말씀할 사람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다. 하늘에서 그냥 말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냥 말하는 분이 아니고 사람으로 말하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찾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면 하늘에서 말하는 것이 가장 완전하다. 이 육체인 사람을 거쳐 나오면 그래도 뭐가 묻어 나와도 묻어나올 것 아닌가? 그런데 사람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하시면 완전 100%!, 99.9%도 아니도 완전 100%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지 자기가 직접 하늘에서 말씀하는 분이 아니다. 여기서 잘못하면 사람이 속는다. 사람이 말 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직접 들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접 듣기만 들으면 참 좋지 않겠는가? 물론 하나님이 직접 바로 나에게 들려 줬으니까 얼마나 정확하고 좋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말씀하는 원칙이 있다. 말씀하는 원칙이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예수가 필요 없다. 직접 말씀하려면 예레미야나 이사야가 왜 필요 하겠는가? 직접말씀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다. 말씀할 육체가필요한 분이다. 비록 흠이 있다 하더라도 말씀할 육체가 있어야 된다.
여러분은 하늘에서 음성들을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란다. 잘 못 하면 홀린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음성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들려오면 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좋음 말이면 다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된다. 사탄이 좋은 말 못하겠는가?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사탄이 만일 공중에서 말 한다면 하나님이 말 하는 말을 못하겠는가. 천사가 말 하지 않았는가.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그러니까 하늘에서 들려 왔으니까 이것은 정확하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비록 육체이지만은 육체인 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 육체 없이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 하실 수 없다. 하나님 말씀 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사람 말씀했다는 것 다르고 저 사람 말씀했다는 것 다르다. 그렇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전적으로(주관적으로)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듣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다 똑같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혼자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 혼자만 듣는다는 말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밖 에 없다.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누구를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성경에 가끔가다 그런 예가 있다. 예를 들어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들었다. 또 아브라함이 들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들었다. 이런 것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것을 찾는 모양이고 또 그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나는 그것이 참 딱하다. 딱한 것이 뭐냐면 모세가 어떤 사람인데 모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가? 아무나 모세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바울이 어떤 사람인 줄 아는가? 성경에 써 놓은 것을 보면 아무나 바울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이 들었다고 해서 나도 듣고 모세가 들었다고 해서 나도 듣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내 주제를 파악 했는데 도저히 그것은 나 하고 안 맞는다고 생각한다. 설사 내가 들었다고 한다면 나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으로 말씀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말씀 하셔야 한다. 어떤 사람은 알아듣고 어떤 사람은 못 알아듣고 이러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 이 육체가 됐다는 말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도록 예수 안에서 말씀했다는 말이다. 누구나 들을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어떤 비상시대에 어떤 사람에게 특수하게 주관적으로 말씀 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것은 특수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특수한 경우에 특별한 일로 그런 경우도 있지만은 바로 특수한 경우와 특별한 경우가 나라고 생각 한다면 착각 일 수도 있다. 그것이 나다. 그 특별하고 특수한 경우가 나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계신 분들은 다 아니라고 할 것이다. 내가 그렇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내가 지금 특수한 계시를 받아 가지고 왔다 여러분이 전혀 모르는 특별한 것을 내가 어제 저녁에 받아가지고 왔다면 다 달아나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다른 교회가면 그렇게 되면 대 환영을 받는다. 다 신기해서 모여 들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주제파악을 했다. 나는 그렇게 못 할 사람이다. 사람이 한 말도 잘 못 알아듣는데 천사나 하나님이 한 말을 내가 어찌 알아듣겠는가? 사람이 한 말도 내가 잘 못 알아 듣는데.... 어떤 사람들하고 얘기를 해 보면 나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데 기껏 말을 해 놓고 나면 자기 속을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사람 속도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 속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 성전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곳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인격적인 몸이다.
물질적 장소가 인격적인 몸이 된 것이다. 장소(성전)로 말씀하셨으나 이제는 몸(인격)으로 말씀 하시게 된 것이다. 이 몸은 우리와 같은 육체다. 할렐루야!
성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다. 예수는 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몸이다. 이렇게 혁명이 되었다. 말씀하시는 장소에서 인격적인 몸으로 전환이 되었다. 물질적인 장소가 인격적인 몸이 된 것이다. 장소 즉 성전으로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몸(인격)으로 말씀을 한다.
인격으로 말씀하는 것을 떠나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우리 같은 사람은 위험하기에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에게 주면 아주 큰 사고를 칠 것이니까 안주는 것 같다. 아주 유명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 같다. 줘도 사고를 안 칠 사람, 하늘에서 날마다 음성을 들려줘도 절대로 사고를 안 칠 사람, 이런 사람에게 줄 것인데 나 같은 사람에게 줘놓으면 사고를 칠 것이다. 그래서 안주는 것 같다.
우리는 육체이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쓰시면 인격으로 말할 수 있다. 저주받았던 육체는 말씀하는 몸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감사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니까 감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서 한다면 감사할 일도 없다. 그런데 전혀 불가능한 사람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육체와 하나님이 얼마나 다른가? 더구나 창세기 6장에 저주받은 그 육체하고 어떻게 교통이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영광인 것이다. 내 육신을 사용해도 감사하고 내 인격을 사용해도 감사하고, 하여간 나를 사용하면 그 자체가 감사한 것이다. 사용 받았으니까.
-. 저주받았던 육체는 말씀하는 몸이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어떠한 영광인가!
예수님은 문을 여셨다. 화염검으로 막히고 그룹들로 감시되었던(창3;24) 문이 열렸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대제사장만이 열던 휘장을 우리 구주 예수께서 여신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이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닫혀있던 문을 연 것이다. 화염검으로 막히고 그룹들로 감시되어있던 그 문이 지금 열렸다는 것이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번 들어갔던 그 문이 이제는 모든 사람이 들어가도록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제자들이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말했다. 사실은 찢어졌는지 안 찢어졌는지 모른다. 언제 제자들이 들어가서 봤겠는가? 도망가기 바쁜 판에 언제 성전에 들어가서 찢어졌는지 안 찢어졌는지 확인하겠는가? 그런데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말한다. 왜? 자기들 안에 자기들 앞에서 분명히 찢어졌으니까 현장을 안 봐도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예루살렘 성전에 가 보고서 알겠는가? 그게 아니다. 우리 앞에서 두껍게 가려져있어서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그 휘장이 찢어지면 그때 그것이 찢어진 것이다. 지금 찢어졌는데 그때 그것이 왜 안 찢어졌겠는가? 제자들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육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죽은 육체가 부활로 말씀하게 되었다.
죽임 당한 자가 살아서 말씀한다. 죽었다고 우리 모두가 버리고 갔던 그 육체가 부활이요 생명이 신 예수님을 통해 성전이 되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말씀하시는 전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육체로 하나님이 말씀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도 이제는 육체로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육체가 부활로 말씀을 하게 되었다. 죽임당한 자가 살아서 말을 하게 되었다. 죽었다고 모두가 버리고 갔던 그 육체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성전이 되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말씀하시는 전이 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 이것이 바로 인격회복이다.
세상에서 일이 잘되어가지고 영광스럽게 되었다면 그것은 조금 있으면 없어진다. 뭘 달았다면 조금 있으면 다 사라진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안 사라진다. 한번만 대신해도 된다. 내 평생 한번만 하나님을 대신한다 해도 영광스러운 것이다. 내가 어디 가서 어떤 일에 한번만 쓰여진다 하더라도, 잠깐 있다가 없어질 인생이 단 한번이라도 쓰여진다면 그것보다 큰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평생 쓰여지길 바라지 말고 단 한번이라도 주님 앞에 쓰여진다면 그것은 영광이다. 왜냐하면 나는 인생이 너무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세계 안에 들어오면 이렇게 인생이 복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 인생 복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요양원 같은 곳에 가보면 인생이 참 불쌍하고 비참하다. 노인들이 전부 요양원에 와있는데 치매가 있는 분도 있고 없는 분도 있는데 모두 앉아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다 비슷비슷하게 보였다.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다르게 보였는데 그 안에 들어가니까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것 같다. 거기서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밖에 아닌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뭐라도 해야지 그렇게 되어버리면 뭘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된다. 직접 가서 보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그냥 시간만 기다리고 있구나.
동대구역 대합실(待合室)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사람들은 서울 간다는 부산 간다는 희망이 있다. 그런데 이 대합실은 희망이 없다. 거기도 대합실은 대합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데 안 가고 싶다. 그런데 내가 형편상 안 갈수가 없어서 봤는데 그렇게 반갑게 나를 알아보시던 분이 못 알아 봤다. 내가 아무개라고 하니까 어~ 그래 그래 그래,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서 사람이라고 하기가... 그러니까 아무리 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반갑게 만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인생을 보니까 너무 허망하다. 내가 인생에 허망한 것을 느낀 것이 두 번 있었는데, 맨 처음 창경원에 가서 침판지를 보고 영락없이 사람처럼 생긴 것을 봤다. 젊었을 때 그것을 보고 인생이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요양원에 가니까 그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기회가 있다. 이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 또한 육신으로 성전이 되신 예수님은 부활 생명 안에서 교회로 건축되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생명의 건축을 이룬다.
육신으로 성전이 되신 예수님은 부활생명 안에서 교회로 건축이 되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생명의 건축을 이루게 되었다. 교회는 생명의 건축이다. 옛날 성전은 돌로 지은 것이지만 교회는 생명으로 건축된다. 그러니까 교회는 교리나 조직이라고 할 수 없고 그런 것으로 조직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생명만 교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어라 사흘 동안에 내가 다시 일으키겠다고 담대하게 말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게 드려진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성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비둘기를 드린 사람도 있고 양을 드린 사람도 있고 송아지를 드린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제사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을 거기에 드리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쓸 것인지 그것은 모른다. 어떻게 쓸 것인지 알고 드리면 그것은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쓸 것인가 물어보고 나하고 맞으면 드리고 나하고 안 맞으면 안 드리는 것은 드리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쓸지 모르지만 나는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살고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우리도 어느 날 가면 요양원에 들어가서 눈만 뜨고 뻔히 쳐다보고 있을 것인데 이렇게 웃고 즐거워하고 찬송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그래서 소아과를 하는 李선생에게 넌 정말 행복하다, 행복해, 라고 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본다. 소아과에 가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른다. 난리다. 난장판이다. 천성이 그러니까 그것을 하지 보통 사람은 못한다. 울고 떠들고 하는데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한다. 거기는 그래도 아프고 울고 해도 치료하다보면 뒤로 가서 중학생 되고 고등학생 된다. 사람이 살아나고 하니까 재미가 있다.
그런데 요양원에 가면 밑으로 내려간다. 올 때보다 점점 못하지 더 좋아질 수 없다. 요양원은 올 때보다 더 못해지는 곳이고 소아과는 올 때보다 좋아지는 곳이다. 의사가 실력이 없어도 거기는 결국 좋아지는 곳이다. 실력이 좀 없어도 결국 아이들은 좋아진다. 한때 그런 거니까. 그러니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오늘 우리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하루라도 교회를 빠지면 큰 손해다. 이 시간에 여기에 안 오면 뭘 보겠냐는 것이다. 어디에 가서 뭘 보고 있겠는가. 시장바닥에 가면 이렇게 좋은 것이 있겠는가. 극장에 가면 이렇게 좋은 것인 있겠는가. 어디를 가 봐도 그게 그거다. 다 기울어져 가는 것만 볼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에 오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된다. 교회는 생명의 건축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보잘 것 없는 인생에게 허망한 인생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기회,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을 아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새 예루살렘을 향해서 건축되어져 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