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조합(水利組合) 공사
우리 마을은 일 년 내내 바람이 많이 불었다.
동막(東幕) 저수지 / 칠성(七星) 저수지
우리 마을은 일 년 내내 바람이 많이 불었다.
마을은 금광평(金光坪)이라는 멋진 이름에도 불구하고 거름기 없는 시뻘건 진흙땅으로 돌멩이 투성이의 벌판인데 수리시설이 없어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보니 땅은 항상 메말라 있어 심는 곡식마다 배배 꼬이며 제대로 자라지도 않았고 가을이 되어도 여무는 이삭은 반도 못되었다. 가난도 가난이려니와 바람받이 마을이다 보니 항상 시뻘건 황토색 흙먼지가 휘날려서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겨울에는 찬 바람을 막을 언덕이나 숲도 제대로 없어서 북쪽 문은 모두 싸발라 봉창(封窓)을 했는데도 방으로 스며드는 냉기(冷氣)를 막기가 어려웠다. 어린 시절 추억으로는 겨울내내 대관령을 넘어온 차가운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던 춥디추운 겨울밤이 떠오르고는 한다. 눈도 많이 내렸는데 어떤 날은 밤에 자다 들으면 빠지직~ 설낭목(雪落木) 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침에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조금 밀고 문틈으로 보니 눈이 쌓여 문을 막고 있다.
강릉지방은 워낙 눈이 많이 오다 보니 뜨럭이 상당히 높아서 마당에서 뜨럭까지 거의 1m나 되어 섬돌을 놓고 올라오곤 했는데 그 마당에 눈이 꽉 차고 문턱까지 차올랐으니 적어도 1m 50cm는 내렸던 것 같다. 도저히 치울 수가 없어서 어머니가 솥에다 물을 한가득 끓여서 동이에 담아 바가지로 눈 위에 뿌리며 녹이던 기억도 난다. 눈이 워낙 많다 보니 겨우 화장실 가는 길만 쳐내는데 눈을 치우는 아버지가 토굴 속을 들어가는 듯, 쌓인 눈이 키 한 길도 넘었다.
날씨가 너무나 추우니 눈이 얼어서 눈 위로 뜀박질을 하여도 눈이 꺼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님이 몇 시간을 고생해서 100m쯤 되는 우물까지 눈을 퍼내어 길을 뚫었는데 눈 위에 썰매를 타며 뛰놀다 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삽으로 눈을 잘라 길 바깥으로 내 던지는 눈덩이만 보였다. 길을 다 만든 후 누나가 우물에서 물을 기어오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물동이 윗부분만 힐끗힐끗 보이는데 물동이 위에 물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엎어놓은 바가지가 부딪치며 동동동.... 소리만 들렸다.
6.25사변 후 금광리(金光里) 쪽의 동막골(東幕谷) 보리암(菩提庵:현 三德寺)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막아 저수지를 만드는 수리공사(水利工事)가 시작되었는데 제2공구(工區)라고 했다.
또 얼마 후 어단리(於丹里) 칠성암(七星庵:현 法王寺) 쪽 물길을 막아 저수지를 만드는 제3공구(工區) 수리조합 공사도 시작됐는데 지금의 ‘칠성지(七星池)’가 생겼다. 내가 어렸을 때는 칠쌈(七星庵) 절이라고 했다.
사변 후 어려운 시절이라 품팔이꾼으로 타관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와서 마을이 갑자기 북적거렸는데 공사현장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였지만 우리 집도 건넌방을 비워서 세를 놓았었다.
수리조합공사는 골짜기의 물길을 돌리고 먼저 깊은 구덩이(掘方:호리가다)를 판 다음 흙과 자갈을 다져 넣는 일을 한다. 공사현장 바로 밑에는 기다란 숙소와 그에 딸린 식당(함바/飯場)도 생겼고, 흙을 실어 나르는 트럭도 10여 대씩 와서 북새통을 이루었다. 우리 마을 앞에 제법 높이 솟아있던 언덕을 송두리째 파내 트럭으로 흙을 실어 나르느라 항상 동네는 흙먼지로 자욱했다.
우리 어머니와 막내 누님도 동네 사람들과 같이 먼저 공사가 시작된 2공구 공사장에 나가 일을 하셨는데 ‘하꼬(箱)떼기’를 하였다고 한다. 밑이 없는 커다란 나무상자(하꼬/箱)를 놓고 그 속에 저수지 바닥의 흙을 파다가 하나 가득 채우면 도장을 받았다가 저녁에 도장 갯수를 세어 전표(錢票)를 받는다.
처음에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인데 나중에 둑이 제법 높아지면서 바닥에서 흙을 파 담아서 이고, 지고 가파른 비탈을 올라와 둑 위에 놓은 하꼬에다 쏟아붓는데 물먹은 흙은 다져지면서 부어도 부어도 한 하꼬(箱) 채우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전표 쪼가리를 받아 들고는 서둘러 집으로 와서 저녁을 끓여 먹는 둥 마는 둥, 어둠 속에서 밭일과 집안일을 돌보고는 다음 날 새벽이면 다시 공사장으로 나갔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터였다.
남자 장정들은 두 사람이 한 조(組)가 되어 레일에서 구루마(밀차)를 탔다.
어느 정도 높아진 둑 위에다가 레일을 깔고는 산 쪽에서 구루마(車)에 흙을 퍼 담아 올라타고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막대기를 잡고 호기 있게 레일을 달려 내려온다.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도 요란한데 끝부분에 오면 막대기를 뒤로 힘껏 당겨 구루마를 멈춘 다음 위에 얹은 거푸집 모양의 나무상자를 벗기고 삽질로 흙을 반쯤 퍼낸다.
나머지 흙은 브레이크 막대기를 뽑아 지렛대 모양으로 구루마 옆구리에 대고 밀어서 옆으로 전복시켜 흙을 부었다. 그리고는 다시 거푸집과 막대기를 올려놓고 둘이 밀면서 온 길을 되짚어가고 오기를 반복한다.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리던 구루마의 행렬과 개미 떼처럼 바닥에서 파낸 흙을 이고 지고 줄 맞추어 비탈을 오르던 아낙네들과 아이들,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트럭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일하고 받은 전표는 한 달에 한 번 간조(かんじょう〔勘定〕:중간정산)를 하여 사무실에서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
외지에서 공사판에 돈을 벌려고 온 사람들은 숙소 사용료, 밥값 등을 제하고 나면 몇 푼 남지도 않으련만 그나마 일거리를 구하려 타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매일 북적거렸다.
젊은 사람들은 간조(勘定)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전표를 와리깡(할인)하여 술을 먹거나 담배를 사 피웠는데 와리깡(割勘)을 해주는 전주들은 보통 10%를 떼고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기간이 20일이 넘으면 15%씩 터무니없는 고리(高利)로 떼고는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싫으면 그만두라는 등 횡포를 부려서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만복이 형이 나서서 인부들을 모아 고리로 와리깡(割勘)을 못하도록 바로잡기도 했다.
사천집에 밥을 붙여먹던 명철이 형은 타관에서 온 사람으로 2공구 수리조합의 현장 십장(什長)이었다. 공군을 제대했다 하고 키도 훤칠하며 말도 시원시원할뿐더러 예전에 주먹깨나 날렸다더라고 소문이 나서 동네 처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사천(沙川)집 큰딸인 명자가 쫓아다녔는데 연당(蓮塘)집 연옥이도 쫓아다녀서 결국 친한 친구 사이가 갑자기 연적(戀敵)이 되고 말았다. 명철이 형은 딱히 누구를 찍어 정을 주지 않고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쳤던 모양이었다.
명자와 연옥이도 물론 공사판에 나가 하꼬떼기를 했는데 미처 하꼬 언저리까지 흙이 차지도 않았는데 도장을 찍어주기도 하였고 슬금슬금 그늘 밑에 앉아 농땡이를 쳤는데도 항상 다른 사람들 보다 후하게 전표(錢票)를 받고는 했다. 저녁이면 명철이 형은 명자네에 과자 쪼가리며 빗이나 민경(面鏡:손거울) 나부랭이를 내놓아 명자 어머니의 환심을 샀다.
다음 날은 다시 연당집에 가서 어디까지가 정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울이 고향이라는 둥, 집에 엄청나게 부자라는 둥, 시원시원한 달변(達辯)으로 연옥이 어머니의 마음을 휘어잡고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사천집과 연당집에서는 미리부터 서로 사위로 점을 찍고 과년한 딸이 달밤에 명철이와 쏘다니는 것을 모르는 체하였다.
어떤 때는 셋이 만나서 쏘다니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중 하나와 은밀히 만나기도 했는데 이따금 여자 둘이 아옹다옹 말다툼하고는 했지만, 그런대로 잘 지나갔다.
마을 어른들은 그래도 집안을 보면 연당집 연옥이가 낫다느니, 타관 놈을 어떻게 믿느냐는 둥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동네 청년들은 타관 놈이 마을 처녀들을 망친다고 괜스레 열기를 터뜨리고는 했지만, 감히 누구 하나 명철이 앞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그랬는데 막바지쯤 명철이 연당집 연옥이로 기우는 듯 행동을 했던 모양이었다. 얼마 동안 명자는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약을 먹었다더라, 밤에 물에 빠져 죽는다고 연당(蓮塘) 가에 서 있는 것을 끌어왔다더라, 사천댁이 머리채를 잡고 행실 똑바로 하라고 등판대기를 후려갈기는 것을 봤다는 등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공사가 끝나고 명철이 서울로 가면서 연당집에 곧 어른들을 모시고 오겠다고 약조를 하고는 주소도 적어주고 갔다는데 그 이후로 종문소식이었다. 주소를 들고 서울로 찾아가겠다는 연옥이를 붙잡아 놓고 한 달쯤 기다린 끝에 그 주소로 편지를 써서 보냈더니 편지가 되돌아 왔다고 하였다.
명철이 말고도 외지에서 온 품팔이꾼과 눈이 맞아 쉬쉬하면서 만나던 처녀들도 몇몇 있었는데 공사판을 떠난 후 한 사람도 맺어진 사람이 없었다. 타관에서 온 떠돌이 공사판 놈들을 믿은 사람이 바보라는 둥, 그놈의 수리조합 공사 탓에 동네 처녀들만 바람이 들고 망쳤다는 둥 말들이 많았지만, 후일 모두 시집들을 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