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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집회- 하나임을 앎
4.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1:14)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인 자리를 찾고 있다. 다른 점이 많지만 그분과 우리가 영원 안에서 하나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잃어버리면 우리는 많은 혼돈의 세계에 빠져서 분열을 일으키게 되고 그분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임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자녀들은 누가 자기의 부모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또 부모와 자기가 하나인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누가 우리 하나님인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그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인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다른 것은 일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해서 아주 복잡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복잡한 상황 속에서는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 수 없다. 너무나 많이 헝클어졌기 때문에 세상의 많은 종교와 민족들이 헝클어진 문제 속에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큰 숲 속에 들어가서 산을 찾고 있는 이치와 비슷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문제들을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영원 안에서 그분과 우리가 하나인 그 자리를 먼저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번 집회는 ‘하나임을 앎’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과 우리는 실재와 표상이라는 관계로 하나라는 것을 말씀 드렸다. 하나님과 우리는 똑 같은 것이 아니다. 그분은 실재이고 우리는 표상이기 때문에 아주 다르다. 예를 들면 흙과 씨가 다른 것처럼 다르다. 흙이 씨가 될 수도 없고 씨가 흙이 될 수도 없다.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흙과 씨는 하나라는 개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흙과 씨가 모양이나 생김새나 성질이나 모든 것이 다르지만 그것이 하나이고 한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그것을 헷갈리는 것이다. 흙은 이렇게 생기고 씨는 이렇게 생겼는데 어떻게 하나라는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도 같은 말이다. 씨와 흙이 하나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쉽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 그래서 유태인들은 그 말을 듣고 발칵했던 것이다. 네가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냐며 발칵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별로 문제시 생각하지 않고 듣고 있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흙이 씨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므로 대단히 위험한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하면 대단히 위험한 말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주 위험한 말이다. 그렇지만 영원 안에서 보면 이 둘이 하나라는 것이다. 씨는 씨이고 흙은 흙이지만 하나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찾는 것은 흙은 흙이고 씨는 씨인데 그것이 하나라는 것을 찾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인 것을 찾는 것이지 하나님과 사람은 똑같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하나님은 똑같다는 말이 아니고 나와 하나님은 다르지만 하나라는 것을 찾는다. 남편과 아내는 다르지만 하나라는 것을 찾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지만 하나라는 것을 찾는다. 우리도 사실 얼굴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다 다르다. 다 다른데 하나인 것을 찾는 것이다. 얼굴이 같아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질이 같아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지만 하나인 자리가 있어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 우주 안에서 이런 비밀이 다 들어있다. 이것은 비밀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비밀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보화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것을 찾아야 내가 살게 된다. 우리가 함께 있으려면 다르지만 하나인 것을 찾아야 함께 있을 수 있다. 다른 것만 찾으면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다르지만 하나인 것을 찾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으로 지어졌다. 그것은 형상으로 지어졌으니까 실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실재와 하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실 자의 표상이니까. 이삭은 약속의 후사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 약속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이삭. 이삭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삭은 하나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의 약속 사이에서 하나이다. 내 성질과 하나님 성질이 같아서 하나라는 말이 아니고 약속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분명히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왜 문제가 생기는가? 밭이 밭대로 있고 흙이 흙대로 있고 씨가 씨대로 있으면 아무 문제가 전혀 없다. 그런데 다른 씨들이 날라와서 흙에 뿌려져 잡초가 나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콩이면 콩 한가지만 있고 흙이 있었으면 아무 문제도 없다. 언제든지 콩은 대구에 있고 흙은 서울에 있을지라도 결국 하나이다. 그런데 콩이 바로 옆에 있고 흙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그 흙에 다른 씨들이 날라와서 잡초 밭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콩과 흙은 하나라는 사실이 발견되지 않고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잡초가 많이 나다보니 콩이 있을 자리가 없어 콩이 다른 자리로 옮겨간 경우도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갈 때도 있었고 버릴 때도 있을 때가 있는 이유도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실재와 형상은 분명히 하나이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갈라질 수도 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이다. 약속이 있고 후사가 있었지만 언제나 갈라질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이 있는 백성이고 후사로 택함을 받았지만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잘못된 다른 길로 가버렸을 때 이 약속은 깨진 것 같다. 언제든지 이 하나인 것이 깨진 이유는 바로 이런 어떤 것들 때문에 깨질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를 수 없다든가 하나님이 택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누리지 못한다든가 하는 이런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도 해보면 그런 경험을 가질 수 있다. 분명히 말씀을 들으면 하나인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분명히 하나인데 왜 내 가지에는 다른 것이 열려있을까?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는 말이 좀 틀린 말 같은 생각도 들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했지만 그래도 인간이니까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래서 모두 헷갈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는 말이 틀린 말이냐? 그렇지 않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는 말은 맞는 말이다.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것은 영원히 변할 수가 없다. 변할 수가 없지만 어떤 상황으로 인해 이것이 갈라질 수도 있고 분리되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안정한 상태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완전하게 하나가 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분명히 자기 백성이고 자기 하나님이니까 둘이 아니고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많은 문제들이 들어와서 둘이 하나임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결국은 오랜 역사를 지나고 경험하면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완전히 둘이 하나가 되어야지 따로따로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문제가 생겼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말은 육체가 됐다, 한 덩어리가 됐다는 뜻이다. 우리가 산에 나무를 심어보아도 처음에 잣나무를 심어보니 얼마나 잡초가 많이 나오던지 잣나무 보다 잡초가 더 많다.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도저히 잣나무가 살아날 수가 없다. 어찌하면 좋은가 맨날 제초제를 칠 수도 없고 다 쳐버리면 나무도 죽으므로 할 수가 없고 어찌하면 좋은가. 해마다 가서 풀을 베어주고 얽매여진 것을 끄집어냈다. 가장 완전한 방법은 잣나무가 다 커서 다른 잡초들이 크지 못하도록 완전히 잣나무 산이 되는 것이다. 잣나무 산이 되고, 솔밭이 된 다음에는 다른 것이 없어진다. 콩 밭도 완전히 콩 밭이 돼버리고 나면 다른 잡초들이 없다. 완전히 옥수수 밭이 돼버리면 다른 것이 없다. 여기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말은 밭이 됐다는 말이다. 소나무 밭이 됐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 실재와 형상으로서의 아담처럼 오신 것이 아니라 또 약속있는 후사로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체가 되어 오셨다고 요한이 말했다. 마태나 누가에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었다,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이 그를 덮어서 아들을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이 우리가 더 알기 쉬운 말씀 같다.
말씀은 희랍 사람들이 쓰던 고유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로고스’라는 고유한 용어이다. 아마 희랍 사람들은 이 우주 안에 이 우주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그 어떤 절대적인 것이 있다고 믿었다. 그 어떤 것을 로고스라고 했다. 중국 사람들은 이 우주 안에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을 '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어 성경에는 태초에 도가 있었다로 번역을 했다. 요한은 희랍 사람의 세계에 살았기 때문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로 표현했는데 이는 사실 유태인들이 지금까지 믿고 알아왔던 그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태인의 방식으로 한다면 여호와이다. 그런데 희랍인들 방식으로 말하려고 하니까 로고스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 자신의 표현이다. 그래서 말씀이라고 한다. 말이라는 것은 우리의 표현이다. 내가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용이하고 가장 편리하고 가장 적극적인 것이 우리 언어이고 말이다. 내가 말을 할 때 나를 표현하게 된다. 하나님의 표현, 그것을 하나님의 로고스라고 말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이 하나님의 표현이신 이분이 바로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에 왔다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표현이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 됐다. 사람 자신으로 하나님이 표현하게 됐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바로 그것임을 알게 되었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 안에서 생각을 해보니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산혼이 됐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 속에 불어넣어져서 산혼이 되는, 다시 말하면 육체가 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었다. 따로따로 있으면서 영원히 하나인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람 속에 와서 사람의 생각이 됨으로써 사람의 사상이 되고 생각이 되고 사람의 마음이 됨으로써 하나되는 것이 영원한 뜻이었다. 그러나 구약 안에서는 이것이 정확히 보여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것에는 이해가 되지만, 그분과 우리가 하나되는 것은 잘 알 수가 없었다.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지금 보니 하나님 뜻은 하나님 따로 있고 우리 따로 있는 이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 속에 들어와서 사람의 육신이 됨으로써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되고 하나님의 표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인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방법이다. 하나님이 계셔서 나에게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그분이 내 생명이 되어 내 생각이 되는 것과 비교를 해보면 그분이 내 생각이 되는 것이 가장 완전한 방법이다. 그분이 내 마음이 되는 것이 가장 완전한 방법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를 '태초에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 계시니라' 이렇게 할 수도 있다. 태초에 하나님의 그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이 지금 육체가 됐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볼 때 그분은 바로 하나님 마음이었다. 그분의 마음이 곧 하나님 마음이었다. 그래서 아~ 그 마음이 바로 육체가 되었구나. 구약 시대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시고 표현하던 그분이 지금은 이 사람이 됐음을, 이 인격이 됐음을 보게 된다.
예수를 발견한 사람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을 통해 하시던 그 말씀이 한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그 인격이 되어 있는 것을 봤다는 말이다. 이는 천지개벽과 같은 일이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이것이 맞는 것인데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것을 봤다는 것이다. 실재로 한 육체가 된 것을 봤다는 말이다. 육체가 됐다는 말은 이제 갈라질 수가 없다는 뜻이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저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거역이 그들의 육체가 돼버렸다는 것으로 갈라낼 수도 없고 회개해도 안되고 용서해도 안되게 됐다는 뜻이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한 육체가 된다는 말도 육체라는 뜻은 그런 뜻이다. 육체가 돼버렸으면 이미 떡이 돼버렸다는 뜻이다. 떡이 되기 전까지는 쌀과 쑥이 있었는데 기계에 이겨서 찰떡을 만들어 버리니 쑥떡이 돼버린 것이다. 육체가 됐다는 말은 떡이 됐으면 쑥 따로 찾고 쌀 따로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 안에서 보니 놀라운 일이 발생했는데 하나님 따로 사람 따로를 분리할 수 없는 그런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갈라낼 수가 없는 것이 나왔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제자들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좀 보여주시면 족하겠다고 말한다. 빌립아 이렇게 함께 오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또 보여달라고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한다. 그리고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 이렇게 말씀 하셨다. 이것은 바로 한 육체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있고 선지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있고 선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분 안에 선지자와 하나님이 함께 있더라는 것이다. 말씀과 하나님이 함께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가리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라 했다. 우리가 알기로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쉽다. 왜냐하면 우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므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쉽다. 그런데 그분이 표현될 때 하나님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라 한 것이다. 모양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조금도 다름 없는 사람이다. 밥먹고 잠자고 산 사람이고 십자가에 못박으면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에게 나타날 때 하나님으로 나타난다는 그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것이 우리 인류의 최종적인 소망이다. 아담으로 지어져, 흙으로 지어져 생기를 받아서 산혼이 됐고, 산혼이 될 때 우리는 생각을 갖게 되고 사상을 갖게 되고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산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것이 산혼이다. 혼이 떠나가면 죽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산혼이다. 이 산혼과 내 육신과는 분리할 수가 없다. 혼 떠나면 죽는 것이므로 분리할 수가 없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한 육체가 될 때는 떠나가면 없는 것이다.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떠나서 하나님께 갔다는 개념이 없다. 그가 죽으실 때는 죽었다로 이야기했고 다시 살았을 때는 다시 살았다로 말했지 떼어놓고 따로 왔다 갔다 한 것은 없다. 우리 같으면 육체는 놓아두고 영혼이 하나님께 갔다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 그분이 죽었으면 완전히 죽었다고 말하고 다시 살았으면 완전히 다시 살았다고 말했다. 한 떡이 됐기 때문이다. 한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종적인 축복이고 소망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그분이 우리 가운데 왔다는 것, 우리의 첫 열매로써 왔다는 것이 복음이다. 그 전까지는 항상 따로따로였다. 원리적으로 하나이지만 따로따로이므로 늘 문제가 생길 수가 있었는데 말씀이 육체가 된 후에는 한 덩어리이므로 문제가 생길 수가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독생자라는 말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말도 된다. 오로지 그렇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야 되는 그런 모습이었다. 사람이지만 그분에게서 참 하나님이 나타났다. 우리도 이분 안에서 어떤 소망이 생기는가 하면 우리가 분명 사람은 사람이지만, 육신은 육신이지만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날 수가 있구나 하는 소망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모든 종교는 육신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육신을 학대하고 육신을 어떻게든 떼어내어 보려고 분리시켜 보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면 우리 육신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여러분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 육체를 떼어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갈라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수도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를 갈라내려고 수도를 하고 있다. 사시미(생선회) 하는 사람들이 살과 뼈를 갈라내듯이 어떻게 하면 갈라내볼까 하고 아주 예민한 칼을 갖고 칼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될 일이지 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보니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그 육체를 통해 표현되시기 때문이다.
원래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그렇게 지어놓았을 것이다. 분리시켜 내려면 무엇하러 사람을 지었겠는가? 분리시키지 않고 거기서 하나님이 표현되려고 하니까 사람을 육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의 육신은 아주 귀중한 육신이다. 하나님이 표현되는 육신이므로 아주 귀중한 육신이다. 하나님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우리의 육신이 있어야 표현한다. 하나님이 긍휼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우리의 육신이 있어야 표현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것도 우리 육신이 없이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육신을 떼어버리고 나면 하나님 당신은 어디서 표현되겠는가? 표현될 곳이 전혀 없다. 밭을 없애버리고 나면 농사지을 곳이 없다. 잡초가 늘 많이 난다 하여 밭을 팔아버렸다면 씨만 가지고 있으면 잡초는 안나오지만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모든 세상 종교가 육체를 어떻게 떼어내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 농사를 못짓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거룩한 일이고 깨끗한 일이고 신성한 일 같은데 사실은 사탄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육신으로 지어놓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어놓았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려고 지어놓았다. 이 육신이 없으면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 육신이 없으면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아주 귀중하다. 아주 소중하다. 아무 것이나 표현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 표현하도록 지어놓았으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어야 되고 거기에 우리 육신이 유용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참 하나되는 길이므로 이제 하나님을 따로 하늘에 놓아두면 안되고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으니까 우리에게 오신 분을 살아내어야 되고 우리가 표현해 내어야 된다. 이런 시대를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놓은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마치 모세가 옴으로써 율법의 시대가 열려졌던 것처럼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말씀이 육신이 된 시대를 열어놓았다. 성육신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모세가 오지 않았다면 율법시대는 열리지 않았다. 그냥 자기 생각에 좋을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옴으로써 율법시대가 열렸다.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다 율법의 분위기였다. 율법으로 살고 율법으로 행하고 율법시대가 열렸다.
예수가 오신 것은 어떤 것인가? 성육신 시대를 열어놓은 것이다. 우리가 다 우리의 육신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시대를 열어놓았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우리는 절에 들어가서 장좌불하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쭈그리고 않아서 육신을 없애보겠다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생이 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라 할 것이 없다. 우리가 육신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내가 육신이 있으므로 여러분이 나보고 사람이라고 하지 내가 육신이 없으면 나보고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지어놓았지 영물을 지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주 큰 자부심을 가져야 된다.
우리가 그 동안 잡초 밭이 되어 쓸모없는 잡초가 많이 나서 문제가 많이 됐던 것 뿐이지 밭 자체는 잡초가 아니다. 아무리 잡초가 많이 나는 밭이라 하더라도 밭 자체는 잡초가 아니다. 잡초는 뽑아내면 그만이다. 정 안되면 제초제 뿌리면 된다. 흙은 흙대로 남아있다. 그 흙은 너무너무 소중하다. 씨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소중하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육체를 구원하신 것이다. 버려졌던 육체, 이 육체 때문에 늘 죄를 짓는다고 생각했던 육체를 우리에게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이것을 유용하고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가 구속의 사업을 이루신 것이다. 구속은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구속하신 것이다. 종으로 팔려간 사람을 돈을 주고 다시 사오는 것을 구속이라고 한다. 속량한다, 구속한다, 대속한다 이런 말은 종으로 팔려가 있는 사람을 내가 다시 건져오려면 몸값을 지불하고 찾아와야 할 것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몸값을 지불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찾아왔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분이 죽었는데 값을 지불했는가? 그분의 죽으심을 어제 저녁에도 보셨다. 십자가에 못박으니까 죽은 것을 보았다. 우리는 날마다 볼 수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을 보았다. 우리가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졌다 해서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악을 알면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종노릇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죄를 짓게 된 것이다. 나는 그냥 흙에 불과한데 내가 뭔가 될 줄로 생각했다. 사람은 자기가 뭔가가 될 줄로 생각한다. 예수님을 보니 우리가 될 줄로 생각한 그것이 잘못이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노예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에게 가서 양식을 먹고 살다 보면 되는 줄로 생각했다. 되어봤자 종밖에 안되는 것인데 뭔가 되는 줄로 생각했다. 그들은 노예가 된 것이다. 밥 먹고 살려고 노예가 되었다. 우리는 그 노예된 자리에서 나와야 된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나와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무엇인가가 가치가 있는 것 같으니까 우리가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매여 있는 것이다. 아예 나는 죽을 자이다 하면 메일 필요가 없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가 살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버티는 것이지 아예 죽을 줄 알면 버틸 수도 없고 버틸 필요도 없다.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거기서 산 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아~ 인생은 그냥 흙이구나, 선악과를 먹든지 별 것을 하든지 간에 어차피 인생이구나, 우리에게서 별 것이 나온다 하더라도 역시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사탄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탄은 무엇을 하는가? 속이는 자이다. 너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알면 네가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고 속이는 자가 사탄이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일어난 모든 일이 죄이다. 내가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는 것으로 확실히 알면 나는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게 된다. 내가 죄 지을 필요가 있는 곳에다 죄를 짓지않으려고 하니까 어렵다. 그런데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 죄를 지을 필요가 없으니까. 우리가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지 죄를 지을 필요는 많이 있는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교육제도인 것 같다. 평준화를 해서 아이들을 공부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느냐 별 연구가 다 나오는데 아무리 연구를 해도 뽀족한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공부를 안해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간단하다. 그런데 공부를 안하면 못살게 되어있기 때문에 문교부 장관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해도 별 수가 없다. 방법이 없다. 이 방법 내놓으면 저 방법으로 몰려가고 저 방법 내놓으면 이 방법으로 몰려가므로 필요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학원을 없애려 해도 학원이 더 나오고 사교육을 줄인다 할수록 더 나온다. 천사가 온다 해도 안되고 하나님이 온다고 해도 별 수가 없다. 필요가 있는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 강남 학군을 흐트려 본다고 하지만 필요가 있으면 안된다. 학교 안가도 취직 잘되면 된다. 간단하다. 학교 졸업 못하면 취업도 못하므로 어쩔 수가 없다. 죄를 아무리 짓지 않으려고 해도 필요가 있으면 죄를 짓게 된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 하지만 도둑질이 좋은 줄 알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안좋은 줄 알고 한다. 필요가 있으므로 하는 것이다.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세계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세계로 우리를 구원하여 불러 놓으셨다. 그냥 단순히 우리 죄를 사해주기 위해 구속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세계로 우리를 구속했다. 애굽에 살면서 바로를 섬기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를 왜 섬기지 않을 수가 없는가? 밥을 먹고 살아야 하므로 섬기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바로를 섬기는 것은 나쁜 것이고 하나님 백성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바로를 섬기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바로를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광야로 옮겨놓은 것이다. 광야로 옮겨놓으면 바로를 섬길 필요가 없게 한다는 말이다. 왜? 광야에서는 바로가 양식을 주는 곳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양식을 주는 곳이므로 하나님만 섬겨야 된다. 매일 만나를 주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 동안을 살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양식을 준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양식을 주시니까 하나님만 섬겨야 된다. 옛날에는 바로가 양식을 주므로 바로를 섬겨야 되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양식을 주시니까 하나님을 섬겨야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놓아두고 죄를 짓지 말라, 바로를 섬기지 말라 하시지 않고 그 사람들을 광야로 옮기고 다시 가나안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래야만 바로를 섬기지 않는다.
오늘 우리를 예수님께서 구속하신 것은 그냥 있는 자리에 놓아두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이 아니고 다른 세계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필요가 없는 세계로,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세계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보면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는 말을 듣고도 땅굴 파고 있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이 말을 들으면서도 뭘 만들고 있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보면서도 우리가 또 다른 필요를 찾고 있다면 그렇게 미련한 사람이 없다. 그렇게 미련한 사람은 인구 밀도만 높이므로 지구 밖으로 꺼져야 된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우리의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와서 구속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단지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놓고 사도들은 우리를 구속했다고 해석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구속해 준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일이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 그분은 단지 십자가에서 죽었다. 유태인들은 그것을 보고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것을 보고 아~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죽은 것을 봤다는 것이다. 내가 종살이 했던 것은 무엇 때문에 종살이를 했던가? 내가 왜 거기에 있었던가?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종살이를 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을 보니 내 필요가 없어졌다. 바로에게 종살이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바로로부터 벗어져 나왔다. 벗어져 나와서 보니 이것이 구약시대의 구속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구속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사도들은 우리를 구속했다고 해석을 했다.
예수님이 구속을 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것도 아니다. 그분은 단지 십자가에서 죽었을 뿐이다. 누구든지 그것을 보는 사람은, 확실히 보는 사람은 구속을 받게 되고, 그것을 못본 사람은 바로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찾아다니면서 구속을 해주거나 안해주거나 한 것이 아니다. 불공평하게 생각하지 말라. 아무개는 구속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왜 구속을 안해주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은 찾아다니지 않는다.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아 놓았지 장대의 구리뱀이 돌아다니면서 고쳐 준 것이 아니다. 구리뱀을 장대에 매달아 놓고 쳐다보면 산다고 하여 쳐다본 사람은 살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도 어떤 사정으로든지 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면 그것을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다. 유태인들이 해석한 것이 다르고 빌라도가 해석한 것이 다르고 다 다르다. 유태인들이 해석하기로는 하나님을 모독하더니 저주를 받는구나로 해석을 했다. 빌라도가 해석하기로는 참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장하다가 죽는구나로 해석을 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것을 보고 아~ 우리 인생이 끝난 자리이구나, 내가 종살이 하는 것을 끝내게 하려고 죽었구나, 이것이 구속이다.
이렇게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왜 구속했는가? 그분과 우리가 하나되기 위함이다. 원래 하나였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했으니까 하나인데 사탄에게 속아서 우리가 천년만년 살 것으로 알고, 하나님 같이 될 줄 알고 속아서 죄의 종노릇을 했다. 사탄의 종노릇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우리에게 보이심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종살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러면 다시 농사가 지어지는 것이다. 흙이 흙으로 돌아오면 다시 씨 뿌리면 밭이 된다. 묵은 밭으로 10년이고 20년이고 놀렸던 밭이 있다. 농사짓는 사람이 와서 갈아엎고 씨 뿌리면 다시 밭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수천년 동안 묵은 밭으로 버려져 있었다. 여러분은 아직 100살을 살지 못했고 나도 아직 100살을 살지 못했지만 우리가 100살을 살고 못살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수천년을 살아온 것이다. 우리가 수만년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나이가 적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이래보아도 나이가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성경의 역사만 하더라도 6000살을 먹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인류사적으로 말한다면 몇 억만년 전인지 몇 백만년 전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 여러분도 대단히 오래 산 사람들이다. 오래 살았는데 오래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고 있었는가? 묵은 밭으로 오래 살았다. 사탄의 종노릇 하느라고 오래 살았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되었다. 아~ 나는 밭이구나, 나는 흙이구나, 나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통해 하나님 같이 될 자도 아니고 내 능력으로 하나님 같이 될 자가 아니구나, 나는 원래부터 흙이구나, 원래부터 우리는 이스라엘이었구나, 우리는 바로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이었구나, 광야에 와서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애굽에 있을 때는 그것을 몰랐다. 광야에 와서 우리가 원래 하나님 백성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세는 바로에게 왜 네 백성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하느냐 하니 모세가 하는 말이 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우리가 희생을 드리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 말로 하면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경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했다. 바로가 여기서 하라고 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여호와를 경배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흘 길쯤 나가야 된다고 했다. 바로를 떠나가야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로가 내보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애굽에서 한다고 했으면 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애굽에서 하는 것은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가 있는데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흘 길쯤 나가야 된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사흘 길쯤 나온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만 섬길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는 다른 것을 섬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보니 우리는 다른 것을 섬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리 인생이 짧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시간이 얼마 안남았다고 생각하면 다른 것을 할 일이 없다. 옛날 젊었을 때는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여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오만 것에 관심을 가져 오만 곳에 다 돌아다닌다.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왜 공부를 못하는가 하면 처음에 들어가면 할 일이 너무 많다. 구경할 일도 너무 많고 놀 것도 너무 많다. 요즘은 토요일에 학교를 가지 않지만 토요일에 학교를 가보면 군데군데 모여서 내일 어디로 놀러갈까 이야기하고 있다. 놀 것이 너무 많다. 고등학교 때 밤 12시까지 책가방 들고 다니다가 대학에 들어오니 풀어져서 놀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 놀 일에 취해서 일년을 허송세월 해버리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학생들이 들어오면 1학년 때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1학년 때 열심히 해야만 교사 자격증이라도 얻을 수 있고 교직 과목을 신청할 수 있으니 열심히 하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된다. 1학년 마칠 때쯤 어떻게 되었냐고 하니까 못들었습니다 한다. 보나마나 틀림없이 노는 것에 너무 많이 빠져 놀다보니 언제 했겠는가. 모두 분위기가 그러하므로 이를 악물고 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바로 밑에서는 하나님을 섬길래야 섬길 수가 없다. 그래서 사흘 길쯤 나가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다. 우리는 거기를 떠나야 된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안에서 고기를 먹고 그 다음날 나오게 되었다. 어린양의 구속을 통해서 나왔다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의 운명이 이것이구나를 알았어야 되는데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또 수천년이 지나간 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곧 내가 죽은 것이다. 그의 죽음이 곧 내 죽음이다. 우리는 다른 것을 할 시간이 없다.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까 다른 것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제 한가지만 하기도 바쁘다.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표현하는 것도 바쁘다. 다른 것을 할 수가 없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길어진다. 옛날에는 수만가지로 시간을 쪼개서 쓰려고 하니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한가지만 하려면 시간이 남는다. 학생들도 공부만 하면 시간이 모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것까지 하려니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다. 공부 못하는 학생보고 물어보면 항상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고 한다. 교회 안오는 사람보고 왜 교회 안오냐고 하면 시간이 없어서 못온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서 교회 안오는 학생이 잘된 것을 별로 못봤다. 왜 그런가 하면 진짜 공부 잘하는 학생은 교회도 잘오고 공부도 잘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 학생은 교회 오는 일과 공부하는 일 두가지 밖에 안하므로 시간이 많이 남는다. 시간이 없다는 학생은 누구냐 하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려고 하므로 공부도 못하고 교회도 못오고 다 못한다. 시험 볼 때쯤 두고 보자 하면 영락없이 떨어진다. 너무 여러 가지를 하려니까 한가지도 못한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한가지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 그분 자신의 어떤 것이 사상이라 하든지 생각이라 하든지 마음이라 하든지 여기서 말하는 로고스가 바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저절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할 일이 한가지밖에 없으면 저절로 하나가 된다. 내가 다른 것이 없으면 저절로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주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은 것이다. 우리를 천당에 데리고 가려고 온 것이 아니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려고 왔다. 이것을 사탄이 또 교묘한 방법으로 어떻게 어떻게 이상하게 만들어 예수님 오신 것이 마치 우리를 천당에 데리고 가려고 오신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당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세계,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된 세계가 이루어지게 하려고 오신 것이다. 이것을 실현하게 하려고 오셨다. 하나되게 하려고.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 축복을 그대로 두면 사탄이 멸망하게 할 것이다. 사탄이 또 묘한 방법을 써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처럼 하면서 마지막에는 천당에 보내주는 것으로 속여 놓았다. 예수님이 당신은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하면 천당에 가려고 믿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다. 10명에 8명은 천당 가려고 믿는다고 한다. 천당이 없으면 어찌하렵니까 하면 천당이 없으면 안믿겠다고 한다. 예수가 오신 것이 천당 보내 주려고 오신 것처럼 돼버리고 말았다. 천당이 하나님 목표가 아니고 지금 말씀이 육신이 된 이 세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필요한 세상이다. 우리는 절대로 이것을 놓치면 안된다. 이것을 절대로 망각하면 안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동안의 아담으로도 좀 부족하고 이삭으로도 부족한 것을 완성하기 위해 왔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늘 갈라질 수도 있는 그 문제를 이제는 갈라질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왔다. 완전히 콩밭이 되게 하려고 왔다. 콩이 확 커버리면 잡초가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잡초가 많이 나서 괴롭지만 콩밭이 덮어버리면 잡초가 나지 못한다. 누가 보아도 콩밭이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에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하는 말은 이제 콩밭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 동안에 콩도 섞여있고 잡초도 무성한 것만 보다가 어느 날 가서 보니 완전히 콩밭이 되었다. 완전히 콩밭이 되었다는 말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하는 그 말이다. 사람이라는 밭이 하나님 밭이 되어버렸다. 사람이라는 이 흙이 하나님 밭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하나님 밭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 밭이 되어야만 우리가 하나님 세계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결국 새로운 세계를 열기위해 오셨다. 새 세계를, 영원한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를, 원래 하나님이 계획했던 둘이 하나인 세계를 이루려고 오셨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를 살아야 되고, 우리는 하나로 살아야 된다. 그 말씀과 내가 따로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곧 그 말씀이고 그 말씀이 곧 나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이제 나는 다른 것이 할 것이 없다. 다른 것을 할 사람은 다 끝났고 죽었다.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십자가에 올라가서 보니 다 죽은 사람이다. 아무 소용없는 사람이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오직 그분밖에는 살아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이 예수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 한 사람은 그렇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처음 시작해 놓은 것이다. 누구를 위해 시작해 놓은 것인가? 우리를 위해 시작해 놓은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고 오신 것이지 혼자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 세계를 열어놓았구나, 하나인 세계를 열어놓았구나,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바로 그분을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다는 말이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탁월한 대책으로 인해서 이 우주 안에 있는 불가사의한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고 그 안에서 우리가 말씀이 육체가 되어서 하나가 되는 세계를 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이면서도 하나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인 세계 안에서도 하나인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 하나인 것을 볼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우리 눈을 밝히 열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된 이 놀라운 사실을 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