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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히브리서]
15. 더 좋은 새 언약 2018. 10. 26. 이현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소소한 이야기가 아닌 아주 엄청나게
큰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라고 하면 책 한권이니까 간단한 것 같지만 엄청나게 큰 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것은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라고 해석을 해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의 경륜에서 은혜의 경륜으로 경륜을 바꾸셨다고 생각한다. 물론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율법도 은혜이지 저주가 아니다. 잘되라고 준 것이지 망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할 때 결과적으로 죄를 죄 되게 하려고 준 것이다. 죄를 드러나게 한 것이라고 해석해서 그렇지 처음부터 망하라고 주었겠는가? 갈 길 모르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줌으로써 어떤 지도 같은 것을 준 것이다. 지도 없이 가는 것과 지도가 있어서 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광야 생활이 어려웠던 것은 지도가 없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것은 지도가 있어서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추수를 하는 것은 지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쉬운 것이다. 그것보다 쉬운 것이 율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막연하게 모른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는데, 무엇이 하나님 뜻인지 모른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특별히 기독교 안에서 싸우는 것을 보면 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나는 사탄을 대신해서 싸운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주장하고, 자기는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만일에 율법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율법이 없어지고 나니까 은혜라고 해놓으니까 각자 자기가 옳다는 대로 되고 만 것이다. 재판을 하려면 법령이 있어야 하는데, 법령이 없는 재판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들 안에서 싸움이 생기면 끝이 없다. 누가 재판을 할 수 없다. 세력이 큰 사람이 이기고, 세력이 작은 사람이 진다. 부자세습이 옳다는 사람도 있고, 부자세습이 안 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성경에 율법이라도 있다면 이러니까 안 된다고 하면 되는데, 법이 없으니까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그러니까 율법도 은혜다. 큰 은혜다.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준다는 것이 굉장한 은혜다. 그것을 대신한 것이 교리다. 율법이 없기 때문에 교리가 나왔다. 그런데 그 교리가 또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고, 적용하는 것이 다르고 교단마다 다르니까 역시 싸움이 끝이 안 난다. 율법이 있으면 차라리 그런 일은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기 때문에 교파가 갈라진다든가 하는 것이 없다. 율법대로 사니까 누가 더 옳으니 그르니 하고 싸우지 않는다. 그런데 율법을 폐지하고 나니까 기준이 없다. 누가 기준이 되냐 이것이 문제가 되고, 어느 파가 기준이 되냐 이것이 달라지고, 이단이니 정통이니 이런 문제가 생겼다. 유대인에게는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율법에 다 있는데, 정통이니 이단이니 할 것이 없다. 차라리 지금 기독교의 혼란스러움은 율법이 있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서 주자학은 법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 북송이 망하고 난 후에 남송은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 주자의 성리학이 생겼다. 그래서 성리학은 아주 종교적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주기도문과 비슷하다. 하늘의 뜻은 영원한 진리이고 그것은 땅에 와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있는 성리학이다. 이것만 가지고도 그렇게 싸웠는데 하물며 교회에서 싸움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율법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 시대에 가장 좋은 것이다. 가장 은혜로운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율법보다 더 좋은 것이 있어서 신약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신약을 은혜라고만 하면 율법은 나쁜 것이고, 신약은 좋은 것이라고 하게 된다. 지금 현실이 그렇다. 율법을 대체한 것이 은혜인데 은혜는 다 은혜다. 율법을 대체한 것은 생명이다. 로마서를 보다가 히브리서에 왔는데 로마서의 전반부는 율법 하에서 멸망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한다. 이렇게 되는데 믿음으로 의롭게 한다는 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의롭지 못하지만 아들을 믿는 것으로 해서 하나님이 다 봐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이 객관적이라면 은혜도 객관적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율법이 하나님께로 나왔기 때문에 외율이다. 나한테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은혜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율법보다 은혜가 더 혼란스러울 수가 있다. 누가복음에서 탕자의 비유에서도 재산을 팔아서 나간 아들의 이야기인데 율법으로는 그 아들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까 오히려 환영을 했다. 그래서 환영한 것이 은혜가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법으로 완전히 정죄 받을 아들을, 그 사람이 그 집에 와서 환영을 받는가?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기 때문이다. 남은 그렇게 못한다. 재산을 다 팔아서 나가서 거지가 되어서 들어왔는데 환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법을 은혜로 바꿨다고 단순히 생각하지만 은혜가 어디서 나왔는가? 아버지한테서 나왔다. 아버지가 없었으면 그 은혜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생명이다. 쉽게 말하면 내 피붙이다. 은혜의 근본은 생명이다. 그냥 은혜가 아니고 생명에서 나온 은혜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 가면 연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 이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한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이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고 이것이 은혜의 문제만도 아니고 생명의 문제이다. 생명의 연합 안에서만 우리는 예수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 아들을 무슨 방법으로도 우리가 누릴 수 없다. 생명의 연합으로밖에는 누릴 수가 없다. 여러분들도 많이 해봤겠지만 궁극적인 문제는 내가 예수님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해봐도 안 된다. 그만한 믿음도 안 되고 그만한 충성이나 헌신도 안 된다. 항상 예수처럼 살고 싶고 예수를 따라가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문제다. 왜 안 되는가? 그분과 내가 꼭 같지 않으니까 그렇다. 그분과 우리가 한 생명이 아니니까 못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열심히 없어서 그런가? 충성심이 없어서 그런가? 그것이 아니다. 그분과 나는 같을 수 없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나와 우리 형제들과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동은 내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형제들이 본받으려고 해도 안 된다. 초창기에는 형제들이 나를 따라온다고 열심히 본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안 된다. 그렇다고 내가 성자여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나와 자기와 생명이 다른데 어떻게 같게 되겠는가? 그분과 내가 생명이 하나 되지 않고는 아무리 열심히 따라가도 안 되고 목숨을 내 놓아도 안 되고 무엇을 해도 안 된다. 될 수 없다. 개가 소의 행위를 어떻게 본받아서 따라 하겠는가? 소는 소고 개는 개지 같을 수가 없다. 그래서 행위를 본받으려고 하면 예수님이 아니라도 다른 선생님의 본을 받으려고 하더라도 저주가 된다. 같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아주 인내심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 내 인내심을 다른 사람이 모방하려면 안 된다. 나도 인내할 때는 인내하는데, 인내를 하지 않을 때는 안한다. 못한다. 생명이 같지 않은 한 똑같을 수가 없다. 우리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생명의 연합이 없이는 결국 구약이나 신약이나 매한가지다. 어쩌면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결국 로마서의 중심은 믿음을 위한 책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기 위한 책이 아니고, 이것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책이다. 바울의 목표가 거기 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가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한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으면 끝난 것 같은데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기초에 불과하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니까 그냥 봐주는 것이지 그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하고 나하고 같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을 용서했다면 악한 사람이지만 내가 용서했다면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거지 처녀를 어디서 불쌍해서 데려왔다. 그런데 이 거지 근성이 없어지지 않으면 같이 못산다. 거지 근성이 없어져야만 살 수 있다. 생명의 연합이 없이는 무엇을 해도 안 된다. 아담이 하나님이 지으신 생물들을 모두 내 놓고 네가 이름을 지어보라고 하니까 다 이름을 지었다. 개라고 하고 소라고 하고 각자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다 지었는데 갑자기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겠는가? 아무리 봐도 자기 생명과 같은 배필이 없다. 배필은 한 생명이어야 하는데 예쁜 것도 있고, 아름다운 것도 있고 힘 있는 것도 있고 다 있는데 자기 생명하고 하나인 것이 없다. 그래서 갈빗대를 뺀 것이다. 갈빗대를 빼서 사람을 지어놓고 나니까 아담이 하는 말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말한다. 동물 중에도 예쁜 것은 많다 새들 중에는 물감으로 그려놓은 것 같이 예쁜 새도 있다. 그런데 나하고 배필이 될 수는 없다. 배필은 반드시 한 생명이라야 된다. 그리스도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근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와 교회도 한 생명이라야 되지 무슨 다른 일로는 교회가 될 수 없다. 머리와 몸은 하나이지 머리 다르고 몸 다르면 살아지겠는가? 목만 잘라서 이식을 하면 그것이 사람이 되겠는가? 내 생각에 아마 다른 것은 다 이식을 해도 머리는 이식이 안 될 것 같다. 머리를 이식하면 만일 산다고 해도 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된다. 배필은 한 생명이라야 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생명이라야 된다. 피로 값 주고 샀다는 말은 결국 한 생명이라는 말이다. 갈빗대로 샀다는 말이다. 내 갈빗대로 만든 것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갈빗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충만이라고 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지금 그리스도를 보려면 어디서 보는가? 교회에서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지금 저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그러려고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자기의 배필을 구하려고 왔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결국 배필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신부를 구했다는 말이다. 자기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 신부를 구했다는 말이다. 왜 꼭 목숨을 바치고 구하겠는가? 한 생명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신약은 결국은 다른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법을 그들의(저희) 생각에 두고 그들의(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는 이것은 돼지에게 사람 법을 어떻게 넣겠는가? 또 소한테 개의 법을 어떻게 넣겠는가? 하나님의 법이 내 속에 있다면 내 생각 속에 있다면 그분과 나는 하나여야 된다. 하나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고 해도 생명이 하나가 되지 않은 한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다 섞어져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된다. 그런데 다 구별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께서는 다 똑같게 만들지 않고 구별되게 한 이유가 있다. 신약은 생명의 길로 들어온 것이다. 그냥 은혜라고 생각하면 오해하기 쉬울 것 같다. 안 되는 말은 아닌데 구체성이 없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게 된다. 율법에서 은혜로 단순히 들으면 좋다. 율법은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데 은혜는 다 봐준다. 얼마나 좋은가! 나도 옛날에 안 될 때는 그 말이 너무너무 좋았다. 율법 안에서 내가 정죄 받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제는 법으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은혜로 대해주니까 알고 보면 너무너무 좋은 일이다.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보통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 오니까 참 편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법적인 세계에서 많이 시달렸던 것 같다. 우리 교회에 오면 법이 없으니까 참 편하고 좋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왜냐하면 내가 법을 놓고 교리를 놓고 사람을 대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아주 편안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와 하나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율법이냐 은혜냐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법이냐 생명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율법도 밖에 있는 것이고, 내 밖에 있는 것이고, 은혜도 내 밖에 있다. 광야 40년 생활을 생각해보라. 그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시간인가. 가만히 있는데 새벽이면 만나가 내려와서 먹고 물이 없으면 반석이라도 쪼개서 물을 주시고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하면 안 되냐 하면 불확실성이다. 언제 만나가 내릴지 안 내릴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 구름기둥이 뜰지 가라앉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다. 편안한 관계가 아니다.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예측 가능하다. 씨를 심으면 열매를 거둘 수가 있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살수가 있다. 광야교회라고 써붙인 데가 있던데 이런 교회에 가면 상당히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로 광야 교회를 한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매일 긴장 속에 살아야 한다. 비행기를 타면 긴장을 해서 오줌을 싸는 사람이 있다. 소심한 사람들 중에는 비행기를 타면 긴장을 해서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긴장을 하고 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한다고 하더라도 긴장을 하고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과 사람 관계가 긴장 관계가 되면 안 될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긴장 관계가 되면 안 될 것이 아닌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부자유친이다. 부자간에 친함이 있어야 하지 긴장되어 있으면 안 된다. 생명 안에는 친함이 있지만 법안에는 긴장이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 믿는 것이 긴장상태에 있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생명의 연합이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의 생활이 이렇다. 알고 보면 차라리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편하게 살 텐데 예수 믿어서 괜히 고생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에도 누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목사님이 맨날 예수 이야기만 해서 진력이 난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 가니까 아주 편하단다. 자기 안에 성령이 있어서 성령이 자기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외율이 없기 때문에 긴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잘못 들으면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 더군다나 율법적인 설교를 들으면 사람이 바짝 긴장한다. 그러면 그것이 알고 보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고생시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안에 들어오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그냥 사는 것이 편하다. 암도 안 걸린다. 긴장하고 살면 잘못하면 암 걸린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이제는 생명관계여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도 안정이 되고, 나도 안정이 되고, 사람도 안정이 된다. 하나님도 율법으로 다스리려고 하면 항상 긴장해야 된다. 하나님 자신도 그렇다. 조그만 잘못하면 하나님 당신은 왜 이러십니까? 한다. 사람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왜 이러냐고 한다. 하나님도 대답 못할 말이 많다. 유대인 600만이 학살당할 때 당신은 뭐하고 있었습니까? 이렇게 묻는다. 여호와 당신은 뭐하고 있었냐고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래서 기독교 일부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를 대신해서 어떻게 대답했느냐 하면 예수를 죽일 때 이 피를 우리가 우리 후손에게 돌려달라 했다는 것이다. 그랬으니까 당연하게 받는 것이다. 히틀러가 600만을 학살한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답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참으로 무자비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 죽었다고 600만을 가스실에 넣어서 죽이는데 그것을 모른 체한다는 말인가? 그러면 또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하나님이 자비하시다더니 자비는 어디로 가고 아주 포악한 하나님이 되고 만다. 구약과 신약은 법이냐 생명이냐의 문제이지 법이냐 은혜냐의 문제로 생각하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좀 혼란스럽다. 생명이니까 은혜가 더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은혜라고 하면 혜택이라고 하기 쉽기 때문에 오해되기 쉽다. 우리는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계속 혜택을 받고 살아왔다. 그보다 더 큰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어떻게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며, 어떻게 반석에서 물을 얻었으며, 어떻게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다. 길목마다 다 은혜였다. 그런데 그것이 만족이 안 된다. 40년 동안 그런 혜택을 받은 사람 중에 그렇게 혜택을 많이 받았어도 두 사람 외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혜택으로만 생각을 하면 400년을 살아도 안 된다. 왜냐하면 만나를 오늘 먹었다고 내일 배가 안 고픈가? 오늘 많이 먹었어도 내일은 배가 고프다. 그러면 배고프면 원망하게 되어 있지 어제 배불렀다고 감사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C.C.C.에서 엑스플로 74를 할 때 한 자리에서 같이 하려니까 30만명 분의 밥을 한꺼번에 했다.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우리 역사상 해본 일이 없는 것을 했다. 그런데 밥이 안 된다. 전기로 연결해서 쌀을 씻어서 넣었는데 밥이 안 된다. 첫날 저녁에 밥이 안 되니까 밥을 굶었다. 그래도 시골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다 마음먹고 올라왔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는 노래로 한 끼를 때웠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이 밥이 또 안 되는 것이다. 서울 시내에 있는 모든 빵을 걷었다. 빵을 주니까 우리 민족이 빵을 먹고 살겠는가? 할 수 없이 먹었는데 점심에 또 안 되는 것이다. 인천에 가서 소금 반 새우반하는 새우젓을 있는 대로 긁어서 왔다. 그런데 그것을 주니까 있는 데로 입이 튀어나오기 시작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는데 무서웠다. 학교마다 사람을 가득 넣어 놓았는데 웅성웅성하는데 무서웠다. 그때 내가 모세를 돌로 치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조금 더 가면 돌로 칠 것 같았다. 간신히 꼬셔서 데려다 놓았는데 배고파 죽는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 정말 애를 먹었다. 만나를 10년 먹었어도 몇 번 굶어버리면 10년 먹은 것 전부 없어진다. 은혜는 그렇게 쉽게 없어진다. 혜택이라는 것은 금방 없어져 버린다. 우리가 그래도 10년을 공짜로 먹었는데 우리가 불평하면 되겠느냐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러니 누가 200만분의 2 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겠는가. 옛날에 어떤 선교 단체에 있는 젊은 사람인데 자기는 믿음으로 여호수와와 갈렙처럼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너 200만분의 2가 되겠냐? 될 수 있겠냐고 했는데 그 말을 못 알아듣고 갔다. 불가능하다. 은혜를 잘못 해석하면 아주 곤란하다. 은혜의 본질은 생명이다. 신약은 생명의 복음이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에서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했다. 그러고 나서 구약에 있는 유명한 사람들이 쭉 나온다. 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다. 그런데 마지막 29절에 가보면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히11:39)한다. 엄청난 이야기를 해 놓고 마지막 결론에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받기는 받았는데 약속된 것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구약에 있는 것들은 모두 현금이 아니라 수표라고 할 수 있다. 수표를 받고 안정이 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11:40)고 했다. 우리가 아니면 더 좋은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복음이다. 그렇게 기라성 같은 분들이고 엄청난 믿음을 가진 분들이었다. 중간에 순교자들이 나오는데 순교의 역사를 보면 사람으로서는 당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고통을 받으면서 죽은 분들이 있다. 사람이 악이 나면 더 사람을 괴롭게 한다. 어떻게 하면 더 괴롭게 죽일까를 연구해서 순교자들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 것도 믿음으로 참고 견뎠다. 그렇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약속된 것이 뭔가?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 나의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겠다는 이것이 약속이다. 이것은 어떤 것을 가지고도 해결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좋은 믿음, 충성 그런 것을 가지고도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증거만 받은 것이지 아직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은 바로 그 답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복음인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으면 어떤 사람들은 ‘나도 이래야지. 나도 이런 신앙을 본받아야지.’라고 생각한다.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해보면 해도 해도 끝이 안 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참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힘도 좋고 의지력도 있고 신앙심도 있고 이랬으면 따라가 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원체 그럴 자격이 없어서 일찍 포기했다. 내가 절에 있으면서 요양을 했었는데 그때 중이 안 된 것이 그래서였다. 스님이 내가 중이 되었으면 했는데 내가 들어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활을 못하겠고 끝이 없고 답이 없는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20세 때 ‘스님 지금 70이 넘었는데 아직 성불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고 내가 물으니까 ‘그래서 난 지금 인도환생하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사람이 되면 다시 출가를 해서 또 이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막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님의 말을 못들은 체하고 말았다. 만일 그때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그 길을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게 성철스님 같은 그런 기질이 있었다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달콤한 말이 많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녀서 이적은 오직 하나님만 하시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절에 가보니까 이적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이적은 하나님만 행하시는데 무슨 이적이 있지 했다. 그런데 절에 가면 이적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다. 이적이라는 것을 꼭 하나님만 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이 한 말인데 사람은 혼의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 능력이 지금은 문화의 영향 때문에 가려져서 발휘를 하지 못해서 그런데 발휘가 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유리겔라라는 사람이 왔었는데 안동교육청에서 젓가락을 가지고 뭘 하는데 따라하라고 해서 했는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한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렇지 만일 이것을 하나님이 한다고 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혹했을 것이다. 사람의 혼에도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가만히 있는 책상을 드는 이런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요즘에는 금이빨 만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도 옛날에는 그런 것을 한 번 해보고 싶었지만 나는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직접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런 능력이 있는 것 같으면 흠집 나 있는 내 폐도 바꿀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이런 것처럼 세상에는 별것 다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의 세계에서 어디에 와 있는가? 생명의 세계에 와있다. 그 이전 것은 경륜이 다 지나갔다. 나는 안 지나갔을지 몰라도 세대가 지나간 것이니까 다 지나 간 것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고무신도 좋은 신발이었다. 흰 고무신 사면 아낀다고 밖에 나갈 때만 신고 집에서는 선반에 올려놓고 애지중지했다. 그런데 고무신 시대는 지나가버렸다. 지금은 아무리 좋은 고무신이라도 나이키 시대에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으로 바꿔졌다. 나는 그대로 있는데 세상이 바꿔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경륜도 내가 유태인도 아니고, 율법 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지만 그런 시대는 이미 다 지나가버렸다. 시대가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옛날 것은 아무리 손대봐야 소용없다. 그때는 그것이 필요해서 주었고 그것으로 상대를 했는데, 지금은 그것으로 상대하지 않는다. 화폐개혁을 하면 옛날 화폐는 아무 소용이 없다. 꼭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생명의 복음의 시대다. 연합이 안 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기독교방송을 가끔 들어보는데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가끔은 답답함을 느낀다. 그래서 들을게 너무 없는 것 같다. 차라리 불교방송을 듣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불교방송을 들으면 지혜라도 배운다. 그런데 기독교방송을 들으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들을 말이 없다. 옛날 우리가 어렸을 때 하던 말을 지금도 하고 있다. 이것은 경륜의 문제다. 지금은 어느 시대에 와있냐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약시대에 와 있다. 신약시대에 온지가 벌써 2000년이 넘었다. 이렇게 바꿔졌는데 아직도 구약경륜 안에 있으면 어디로 가냐는 것이다. 늦게 간 것은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 밭에 가서 식물을 보면 늦게 열매를 맺는 것이 있다. 가을이 됐는데 그때 열매가 열리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결국 못 먹고 만다. 한번 서리를 맞고 나면 소용 없어져버린다. 아무리 지 혼자 열심히 커도 때가 지나버렸기 때문에 안 된다. 지금 율법의 경륜시대가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 그때는 잘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지금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지금은 하나님의 경륜이 생명 안으로 왔으니까 “아들을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했다. 그런데 이것이 또 율법시대처럼 객관적으로 예수를 믿으니까 보상으로서 우리를 구원해준다는 식으로 되면 이것은 구약과 똑같은 것이 된다. 예수를 믿으면 하는 믿음이 문제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많다. 믿으니까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서 구원해준다고 하면 이것이 구약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똑같다. 또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양이나 송아지 같은 것으로 제물을 드렸는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이 직접 드렸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사가 효과가 있다.’고 믿게 되면 구약과 차이가 없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받아먹어라.”고 했다. 이것은 그분의 생명을 받아먹어야 된다는 말이지 구약보다 훨씬 낫다거나 송아지 고기보다 훨씬 낫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예수를 먹겠는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나시지 않으면 나와 관계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예수를 먹느냐는 것이다. 예수를 먹어야 내가 그와 하나가 되니까 생명의 교통이 생긴다. 그러나 못 먹으면 어차피 구약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왔어도 그를 먹을 수 없으면 어차피 구약이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오셔서 믿음을 강조한다. 이적을 행할 때는 믿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 가면 이적이 없어진다. 이적을 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가면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고 말씀한다. 잡히시기 전날 저녁에 “이것은 내 살이다. 이것은 내 피다. 받아먹어라.”했다. 그리고 십자가로 간다. 만일 받아먹으라고 해서 효과가 난다면 예수님이 뭣 때문에 십자가로 갔겠는가? 지금 어떤 사람들은 소위 피를 갈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진짜의 피를 받으면 진짜가 된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만약 이것이 된다면 예수님이 뭣 때문에 십자가에 가셨겠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고 표식물이었을 뿐이지 예수님에게서 떡을 받아먹었다고 해서 되겠냐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미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내 몸이다. 받아먹어라. 잔을 주시면 가라사대 이것은 내피다.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바 내 피다. 받아먹어라.”고 되었으면 무슨 문제가 있었겠는가?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떡만 많이 만들어 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분을 먹으려면 나와 그가 동기화되는 곳으로 가야한다. 예수님과 내가 같은 곳은 한 곳뿐이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뛰어내리지 못하는 그곳뿐이다. 어떤 곳도 나와 같은 곳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어디에 주었다는 것인가? 십자가에 주었다. 뱃세다 광야에서도 주시도 여러 방법으로 주었지만 우리가 먹을 수 없었다. 떡으로 주니까 사람들이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는데 너는 우리에게 뭘 주겠느냐고 말했다. 우리가 생각하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였으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40년 동안을 먹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고치는 많은 이적을 행했다. 우리는 크게 생각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였다. 이것은 결국 예수를 못 먹는다는 말이다. 그런 예수를 우리는 먹을 수 없다. 존경할 수 있고 숭배할 수 있고 신으로 모실 수도 있지만 먹을 수는 없다. 이것은 결국 예수와 내가 하나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올 필요가 없다. 아들이 오신 것은 우리가 먹으라고 오신 것이다. 우리와 하나 되게 하려고 오신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5) 나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먹는 곳으로 가야한다. 먹을 수 있는 예수를 찾아야 한다. 먹지 못하는 예수를 아무리 찾아봐야 소용없다. 보기 좋은 소가 있으면 뭐하는가? 내가 먹을 수 없다. 푸줏간에 가야 내가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으셔서 죽으셨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예수를 버리고 갔다. 제자들까지 버리고 갔다. 자기들이 먹을 양식으로 오신 그분을 버리고 갔다. 뭔가 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된 것이 없고 완전히 실망했다. 모두가 실망했다.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분과 우리가 하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예수와 내가 어떻게 하나 되겠는가? 거기에서만 하나 된다. 그 사람이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하늘로서 내려온 신부가 된다.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교회가 된다. 그리고 교회가 성장해서 신부가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단순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막막하다. 산사람과 연합해도 시원찮은데 죽은 사람과 내가 연합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런데 죽은 사람과 연합해야 그 사람이 살 때 같이 산다고 한다. 그분과 함께 죽어야 그분과 함께 산다고 한다. 그분 따로 죽고 나 따로 죽어서는 소용없다. 세상이 다 버리고 간 그 사람을 우리의 운명으로 취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그분과 연합해서 새생명이 된다. 새생명은 다른 것이 아니고 연합한 생명이다. 연합을 해야 유정란이 된다. 그래야 병아리가 나온다. 예수와 연합한 곳에서 모든 새로운 일들이 생겨난다. 더 좋은 것을 예비했다고 한다. 그분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그분과 하나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변죽만 울리는 것이 되고 만다. 수박 겉핥기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내가 하나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아버지께로 가면 나도 아버지께로 가고 그분이 보좌우편으로 가면 나도 보좌우편으로 가는 것이다. 내가 무슨 수로 보좌우편으로 가겠는가? 우리가 무슨 수로 하나님께 나가겠는가? 인간이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겨우 가인과 아벨이다. 그 이상 가져갈 수 없다. 가인과 아벨은 선악과를 먹고 낳은 인간의 대표자들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 이상의 다른 제물을 하나님께 가져갈 수 없다. 어떻게 잘 들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늘 하는 말이다. 늘 듣는데 잘 들어보면 달라진 것이 생기게 된다. 같은 말하는 것 같지만 나는 할 때마다 다르다.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 밤에도 이 성경을 놓고 깊이 생각했다. 더 좋은 것을 생각했다. 그들은 그렇게 신앙심이 좋고 그렇게 열심히 신실하게 했는데 아직 약속한 것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더 좋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 받은 것도 있다. 그들은 그 시대에 최상의 선물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만큼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그분들만큼 순교할 정도도 아닌 것 같다. 6.25때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 때문에 죽으면 어쩌나 해서 움츠러들었다. 육지에서는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대부분 죽음 앞에서 살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6.25때 7형제가 다 학살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굴하지 않고 다 순교했다고 한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존경한다고 해서 내가 순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받는 구원은 최소한도의 사람이 받는 구원이다. 그러면 만민이 다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받는 구원이라면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잘 받을 수 있다. 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다 죄인이 되겠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 이상의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아주 잘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 밑에 사람들은 다 멸망이라는 말이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간신히 커드라인에 걸려서 들어갔다면 그 밑에 사람은 아예 볼 필요도 없다. 다 낙방이다. 그런데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그 학교에 합격했다면 그 이상은 다 합격이다. 그래서 나같이 연약한 사람을 택한 것 같다. 하도 불쌍한 사람이 많으니까 나 같은 사람을 택해서 낙제하지 말라고 하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연약한 것도 감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용감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나는 할 수가 없으니까 정말로 존경한다. 또 그런 사람들 때문에 지금까지 신앙이라는 것을 지켜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존경할 수는 있는데 따라갈 수가 없다. 기도도 해보니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식하면서 기도하는데 보통일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C.C.C.에서 금식기도를 못해서 잘렸다. 그때 40일 금식기도를 선포했는데 나는 금식기도에 자신이 없어서 못 갔다. 나는 40일은 아예 안 되고 3일도 못 굶는다. 40일 금식기도에 참석하지 못해서 잘렸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대구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더 복이 되었다. 참 희한하다. 하나님이 내 연약함을 왜 그렇게 쓰셨는지 모르겠다. 누구를 위해서 쓴 것이다. 나만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쓰신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한다. 이번에 를 쓸 때도 절절히 그런 마음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은혜를 입었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되게 재미없을 것이다. 우등생들이 읽으면 재미없을 것 같다. 열등생들이 읽으면 소망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오늘 오신 분들에게는 한 권씩 드리겠다. 나는 누가 이 책을 읽어만 줘도 감사하다. 나 혼자 좋은 것인데 누가 읽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왜 더 좋은 것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 되었는가? 바로 이것이다. 율법으로도 안 되고 그냥 은혜만으로도 안 되는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선심을 쓰신 것 같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졌다.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십자가를 진 것이다. “아버지여 내가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실 수 있으면 옮겨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다. 이것은 버틸 때까지 버텨본 것이다. 그냥 각본대로 한 것이 아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이것은 버틸 때까지 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길을 가야하나?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가신 것이다. 제일 안 된 것이 아무리 해도 예수와 하나 안 되는 것이다. 기도해도 안 되고 뭘 해도 예수와 하나 안 된다. 물론 그때는 내 기도가 부족하구나, 내가 약해서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때 더 잘했더라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예수와 하나 될 수 없는 일이다. 40일 아니라 50일을 기도해도 안 될 일은 안 된다. 기독교에서 40일을 금식기도 한다니까 어느 절에서 스님이 70일을 금식했다. 거기에 아예 명함도 못 내밀었다. 우리나라에 누가 그랬다. 그리고 성철 스님 같은 분도 장좌불와 했다. 눕지 않고 앉아서 자는 것이다. 그것이 보통 일인가? 우리 같은 사람은 쥐약이다. 죽이는 것이다.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을 만나야 나는 살아난다.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고 어쩔 수 없이 죽은 그분이 나에게 짝이 되고 위로가 되지 용감해서 십자가를 지고 갔다거나 뛰어 내릴 수 있는데 뛰어내리지 않았다면 나와는 영 인연이 없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도 알고 보면 못 만들었다. 돌로 떡을 어떻게 만드는가? 그런데 그것으로 시험을 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네가 하나님 아들이거든 해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 보라는 것이다. 사탄의 시험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다 사탄의 편에서 그 생각에 다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도 그렇게 동의했다. ‘뛰어 내려 보세요. 뛰어 내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안 그랬겠는가? 얼마나 가슴 조이며 그렇게 했겠는가? 그런데 결국은 못 뛰어 내리셨다. 거기서 뛰어 내렸더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세상에 난리가 나서 황제고 뭐고 와서 다 절하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경륜이 이루어지는가? 안 이루어진다. 되지 않는다. 황제가 예수를 믿었다. 굉장히 좋은 일을 한 것 같다. 그것은 기독교를 버려 놓은 것이다. 황제가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해 보라. 사자가 어린 양을 경배하겠는가? 어느 사자가 어린 양 앞에 절을 하겠는가? 황제가 예수를 믿으면서부터 기독교는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잘 되어 간 것이 아니다. 양적으로는 커졌지만 내용상으로는 완전히 몰락한 것이다. 황제가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이겠는가? 황제가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지 못한 예수를 믿겠는가? 거기다 경배를 하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절대로 죽어도 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더 좋은 것, 더 좋은 것,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앞에 3명이 달렸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그런데 마지막 주자가 넘어져 버리면 다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3명이 비실비실해서 잘 못 달렸다. 그런데 마지막 주자가 확 치고 나갔다면 그때 박수가 나온다. 그런 식이다. 이것이 9회 말 홈런이다. 얼마나 재미가 있는가! 처음에 1등 하다가 떨어지는 것보다 꼴찌 하다가 마지막에 확 치고 나가면 그것 정말 재미있다. 더 좋은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몫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그것을 마무리 한 것이 아니고 위대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것이 마무리 된 것이다. 선생이 진짜 선생이 되려면 정말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진짜 선생이 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선생의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니고 줄어든다. 왜냐하면 한 마디 하면 다 알아들으니까 자기가 공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천재들만 가르쳐 보라. 선생이 둔재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둔재들만 가르치면 선생이 천재된다. 옛날에 주일학교를 해보니까 그랬다. 조그만 예배당에 아이들이 꽉 찼는데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다 한 자리에 모였다. 이것을 무슨 수로 조용하게 할 수 있는가? 안 그러면 떠들어 버리는데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이놈들을 어떻게 하면 조용하게 할까?’하고 연구했다. 어떻게 말씀을 하면 이 아이들의 귀를 세울까? 그렇게 연구를 했다. 그래서 내가 말할 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 잘 들었다. 그랬는데 도시에 나가서 큰 교회에서 3개 군이 합해서 사경회를 했다. 주일학교 교사 대회를 했다. 설교 대회를 하고 동화대회를 하는데 두부 판처럼 학생들이 짝 앉아 있고 반사들이 하나씩 지키고 앉아 있어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그 난장판에서 이야기 하다가 얼마나 말하기가 좋은가! 그래서 했더니 설교 대회에서 1등을 했다. 동화 대회는 2등을 했다. 그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시골구석에서 저런 사람이 왔느냐고 했다. 그때 사실 나는 최악의 조건에서 그것을 어떻게 살려 보려고 하다 보니까 유명한 선생이 되었던 것이다. 좋은 환경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안 된다. 내가 교회에서 말씀을 하다가 중등부를 한다고 해서 갔다. 말을 몇 마디 하니까 웅성거리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말을 못하겠어서 말을 끊었다. 요즘 아이들은 말을 안 듣는다. 그 아이들을 상대하려면 다르게 연구하여 가야 할 것 같다. 그냥 해서는 도저히 안 된다. 우리 교회가 시끄럽다고 하지만 그래도 하니까 편하다. 그런데 중학생 아이들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조용히 있더니만 조금 가니까 완전히 지들 멋대로 하여 그만하자고 하고 말을 하지 않고 나왔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우리 같은 사람을 상대로 해서 유명해진 것이다. 나도 예수님을 좀 도와 준 셈이다. 유명해지도록, 더 좋은 것을 예비하도록 도와준 셈이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마무리는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생명 안으로 들어와야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 안에서 공생회 안에서 아무리 잘 해 봐도 나머지 백성들이 더 많은 것이다. 거기에 참여 못한 사람이 더 많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명한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과 함께 간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광야에서 다 죽었다. 그런데 그때도 제일 안 되는 사람을 되게 할 수 있었다면 200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인데 제일 안 되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 율법이다. 율법으로는 그 사람이 될 수가 없다. 결국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다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들어갔다고 한다. 나머지는 다 멸망이다. 만일 여호수아와 갈렙도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경륜이 더 바꿔졌을지도 모른다. 애굽에서 꺼내 와서 광야에서 다 죽어버렸다고 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하나님은 무슨 특단의 조치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있으니까 나머지는 죽어도 상관이 없다. 둘이 살면 또 생기니까. 그 시대에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더 좋은 것, 더 좋은 것, 생명 안에는 더 좋은 것이 몸으로 있다. “내 법을 그들의(저희) 생각에 두고 그들의(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 이 속에 무궁한 것이 들어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생명의 신비가 들어 있다. 어찌될지 모른다. 모르지만 너무너무 감사하고 편안하다. 안심이 되고 안정이 된다. 불안한 것이 없어진다. 그리고 누구를 대하든지 사람을 대할 때 전혀 두려운 마음이 없어진다. 그 전에는 이런 사람은 이렇고 저런 사람은 저렇고 다 구별되었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져 버렸다. 다 똑 같은 사람이다. 다 뼈밖에 없다. 알고 보면 특별한 것이 없다. 이번에 어떤 목사님이 오셨는데 묘지 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자기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면 시멘트로 큰 통을 만들어서 밑에 황토를 깔고 그 위에 자갈을 두껍게 깔았다. 거기에 화장터에서 온 가루를 뿌린다고 한다. 그리고 물을 쫙 뿌리면 가루가 쏙 가라 앉아 내려간다고 한다. 밑으로 내려가면 차근차근 쌓여서 큰 덩어리 뼈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교회 교인들을 전부 거기다 묻으면 마지막에 가면 한 떡이 되는 것이다. 납골당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희안한 방법이다. 그전에는 다르고 했지만 뼛가루를 넣으니까 다 똑같다. 가루만 갖다 놓으면 똑 같다. 나는 그것을 항아리나 이런 곳에 넣으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뒤로 가면 처리하기가 곤란하다. 그것은 다 스며 들어서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뚜껑에 이름만 써 놓는다고 한다. 지금 도시에는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별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별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믿음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으며, 사랑이 있어봐야 얼마나 나오겠는가? 바짝 마른 명태를 비틀어 짠다고 기름이 나오겠는가? 그런 인간이 예수와 연합한다고 하면 얼마나 영광이겠는가? 그분과 우리가 연합해서 한 생명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랑이고 영광이다. 거기서 나온 것이 새 생명이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같은 모양으로 죽은 자는 같은 모양으로 살게 되는데, 이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려 하려 함이다. 새 생명은 따로 없다. 둘이 연합한 생명이 새 생명이다. 총각 처녀 때와 결혼하면 다르다. 새 생명은 다른 것이 아니고 결혼한 생명이다. 총각과 처녀의 생명이 아니고 결혼한 생명이 새 생명이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생명이다. 처녀 총각은 아무리 잘났어도 아기를 낳을 수 없다. 그런데 결혼하면 아무리 못났어도 다 아기를 낳을 수 있다. 새 생명이라서 그렇다. 이것이 새 생명이다. 예수와 연합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생산할 수 있다. 아들을 낳을 수 있다. 이것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원래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그 목적으로 지어졌으니까 하나님의 성품이 생산되면 그것이 최고지 무엇을 또 기다리는가? 그리고 그렇게 교회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교회가 아름답겠는가? 향기 나는 교회가 따로 있겠는가? 그런 교회가 향기 나는 교회가 안 되겠는가? 교회가 시끄러울 때 보면 다 잘난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다. 헌금하기 어려운 것도 헌금 많이 한 사람이 시끄럽다. 헌금 많이 하고 조용한 사람은 참 귀하다. 교회에 열심이 없는 사람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고 원래가 열심이 있는 사람이 시끄럽다. 자기 의가 있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은 시끄럽지도 않다. 처음에 우리 형제들은 내가 일을 아무 것도 안 시켰다. 일을 좀 하면 시끄럽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 보면 달라진다. 그러면 시끄러워진다. 해마다 여름이면 나가서 여름 집회를 했다. 그런데 한 번도 내가 누구보고 무엇을 하라는 말을 안 했다. 자기들이 알아서 먹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굶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한 번도 굶은 적도 없고 다 잘했다. 어차피 나는 밥을 얻어먹으니까 너희는 할 사람이 해서 밥 먹어라 했다. 그랬더니 잘 했다. 생명이 성숙해지면 밥도 한다. 억지로 시켜 놓으면 시끄러워진다. 하지 못할 사람에게 일을 시켜 놓으면 시끄러워진다. 할 사람이 해야 된다. 일도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지 안 보이는 사람에게 시켜 놓으면 율법이 된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하라고 하지 않아도 자기가 한다. 해 보니까 희안하다. 여자들이 밥을 먹었으면 최소한도로 밥그릇은 씻어놓고 가야 되지 않은가? 그런데 씻지도 않고 가 버린다. 그래서 수북하게 쌓이는 것이다. 마지막 사람이 와서 그것을 투덜거리면서 씻는다. 늘 그렇게 그냥 가는 사람은 늘 그냥 그렇게 가 버린다. 자기가 먹은 밥그릇도 안 씻는다. 참 희안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사람이 좀 여유가 생기면 자기 눈에 일이 보인다. 그러면 하라고 안 해도 한다. 그것을 기쁘게 한다. 교회서도 기쁨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일을 해야 조용하다. 억지로 시켜 놓으면 시끄러워진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일을 절대로 시키지 마라. 일을 안 한다고 교회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일을 안 해도 교회는 되는 것이다. 말씀만 있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교회는 된다. 듣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먹고 충분하면 젖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안 먹고는 젖이 나올 수가 없다. 내가 많이 먹으면 좋은 젖이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것을 먹으려고 오게 된다. 오게 되면 처음에는 자기가 그냥 가도 다음에는 일을 하게 된다. 먹고 크면 한다. 교회는 일을 시키면 안 된다. 각자 자기가 알아서 하도록 해야 된다. 우리 교회는 아무 것도 안 시킨다. 그래도 할 사람이 다 한다. 그러므로 아주 조용하다. 일 하려고 생각하면 다 시끄럽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일하러 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양식을 공급하러 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양식만 공급해서 배부르도록 해 주면 된다. 그러면 해결된다. 모든 것이 해결 된다. 나는 교회당을 짓자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예배당을 지어 놓았다. 시간은 오래 걸렸다. 자기들이 하자고 하니까 쉬웠다. 내가 하려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나는 안 하려고 생각하니까 40년 동안 안 했다. 안 해도 내가 말씀할 자리가 없겠는가? 어디에 앉아도 하게 될 것이고 듣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와서 들을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굳이 예배당을 지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자기들이 필요해서 지어야지 내가 혼자 지으려고 하면 얼마나 시끄럽겠는가? 이제 생명의 시대에 왔다. 생명의 시대를 이야기 하려고 별 것이 아닌 이야기를 했다. 생명의 흐름 안에, 경륜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교회이다. 율법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생명의 목장이다. 양들이나 소가 풀을 뜯어 먹을 때 보면 눈을 감고 먹을 때도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독초를 안 먹는다. 혀로 아는 모양이다. 풀을 뜯어 먹는 소가 독초를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자기가 알아서 다 먹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는 너무너무 신기하다. 옛 생명도 우리가 그냥 죄를 짓고 싶어서 지었는가? 저절로 지어지니까 지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싶어 먹은 것인가? 저절로 먹어지니까 먹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 생명도 하나님을 일부러 위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생명이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다. 다른 것이 할 일이 없다. 우리는 생명의 공급이 필요하다. 더 풍성하게, 더 맛있게, 내게 맞는 대로, 내가 행복한 대로 그렇게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축복이다. 내가 남을 대접하기 위해서 밥을 준비한다는 것은 헛일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산다. 밥해 준 사람이 오래 산다. 스님이 여자들이 왜 오래 사는가 하면 좋은 것을 다 먹어서 그렇다고 한다. 누룽지 같은 것은 맨 밑에 쌓인다. 무거운 쌀이 가라앉는데 여자들은 무거운 쌀을 먹기 때문에 오래 산다고 한다. 억지 해석이지만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것도 일리가 있다. 공짜가 없다. 밥을 해서 위에서 살살 긁어서 주면 이것은 영양가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것은 다 밑으로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일한 사람은 일한 만큼 자기는 보상을 받는다. 누가 안 주어도 다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봉사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내가 누구를 위해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인생의 의미다. 내가 아무도 위해서 살 사람이 없다면 이것처럼 불행한 것이 없다. 부모들도 아이들이 클 때 행복하다.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 내 정체성이 아주 중요하다. 겨울에 찬 물에 우엉을 넣어 놓고 그것을 깎고 있는 아줌마를 유심히 보았다. 손이 얼마나 시리겠는가? 그런데 얼굴에는 만면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찬물에 우엉을 깎는데도 너무나도 얼굴이 밝았다. 한참 동안 봤다. 저 여자의 마음속에는 자식들이 들어 있으니까 행복한 것이다. 남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우리가 누구에겐가 복음을 주어서 그 사람이 살게 한다면 우리가 먼저 복을 받는다. 율법을 주면 내가 먼저 저주를 받는다. 남에게 율법을 주면 내가 먼저 저주를 받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말이 자기를 심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축복을 하면 내가 한 축복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지금 정말 좋은 자리에 와 있다. 직업이라고 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직분에 와 있다. 직업은 직업인데 직업이라고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직분이다. 남을 살리려고 하는 직분이다. 의사들의 직업이 고귀한 것은 남을 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전쟁을 하면서도 의사들은 안 죽인다.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만일 시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면 적이 없어질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도 너무너무 감사하다. 누가 들어주겠는가? 아무도 안 들어준다면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 들어주려고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내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유명한 사람들이 강의한다고 난리를 치고 사람을 모은다고 하는데 말씀을 듣는다고 온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몇 명이 오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보통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이다. 나는 말씀을 40년 동안 전했는데, 말씀을 전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내가 만약에 말씀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성경도 별로 안 봤을 것이다. 끈질기게 못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려니까 보게 되었다. 말씀을 전하려니까 나에게 좋은 일이 너무 많다. 좋은 밥을 하려면 나에게 너무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 제일 좋은 것은 자기가 제일 먼저 먹는다. 자매들은 알겠지만 요리하면서 맛있는 것은 제일 먼저 먹는다. 가족을 위해서 맛있는 것을 준비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