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거리(le comique)는 희극(la comedie)과 다르다.
과장과 해학은 넘쳐나서 가짜가 판을 치는 것은 웃음거리이다. 웃음 거리를 만들 수 있는 생명체는 인간 밖에 없다. 뻥은 의욕과 열망을 확장하고 상상을 통해 생기있고 활기있게 하는 것이지, 웃음거리를 만들면 사람들을 구렁텅이 빠뜨리는 공상이 아닐 것이다. 웃음거리의 공상 속에는 자기 비하가 있고, 게다가 선을 향한 노력이 빠져 있어서 차악 차차악을 이야기하는 하는 자들의 전유물인 것 같다. 코미디는 벩송 표현으로 다시 그런 반복을 하지 않도록 웃게 하는 사회의 활성화의 소금이다. 가짜로써 웃음거리가 되는 공상은 코메디가 아니다. 그것을 만드는 자들이 스스로 쓰레기 더미를 만드는 길인 것 같다.
상상의 뻥은 괜찮은 편이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르는 뻥은 비행기를 상상할 수 있듯이 말이다. 어쩌면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상상의 노래와 이야기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겠는가 “상상”해보라. 다른 이야기 같지만, ... 상상의 부족은 많은 이야기를 옆 길로 새게 했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무슨 이야기를 할라치면 한자를 섞어야 하는 것이 울나라 습관이다. 한글이 나오기 전에 우리 문자가 없어서 한자를 차용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단지 우리 말을 비하시킨 것이 부끄럽다. 우리말은 눈, 코, 귀 등 단순한 것은 우리말 단어 이다. 이것을 안(眼), 비(鼻) 이(耳) 등으로 하는 것은 안과 이비인후과 등으로 학술 명칭에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똥은 변(便)이라 하고 공은 구(球)라 하여 구기(球技)종목이라 한다. 궁술은 궁도(弓道)라고 쓰는 것은 일본이 유도(柔道) 차도(茶道)라는 용어에서 왔다고 한다. 일본 용어의 우리말 잠식은 지방의 고유한 명칭이 사라진 것도 한 몫을 했다. 철학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다. 일본이 서양의 필로조피(philosophy)를 처음에는 희철학(希哲學)이라 번역했는데 ‘희’자가 빠지고 철학이 되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도학(道學) 또는 경학(經學) 유학(儒學)이 우리나라의 주축 학문의 이름인데, 민중이 일본이 철학한다는 것을 우습게 여겨 시중에서 돗자리 깔고 철학 한다고 해서, 점치는 집들이 철학이란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도 철학관은 점술가의 집이다.
동북아 4개국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불교에서 각승의 다비에서 나오는 사리(舍利)라는 개념이 있다. 여러 불교 국가의 사람들을 불러다가 사리에 대해 물으니 남방 불교는 유골(relique)라 하며, 티벳 불교에도 태우고 남은 재(cendre)의 일부라고 한다. 사리에 너무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사리 각승의 유골의 일부인 셈이다.
이(夷)를 한번 보자, 중국이 뭐라고 하든, 이(夷)는 파자해 보면 활을 쏘는 대인의 모습이든, 활이 큰 모습이든. 즉 활 궁(弓)자와 큰 대(大)의 합성어 즉 회의(會意) 문자이다. 말하자면 동이란 동쪽에서 활잘 쏘는 이를 지칭한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 이 글자를 읽을 때, 오랑캐 ‘이(夷)’자로 읽는가? 이는 중국 사대주의에 물든 것으로 보인다. 내가 중국 본토인을 만나 환(桓)의 뜻이 무엇인가 물었다. 그 중국인은 환은 영원(éternité)라고 한다. 왜 이 글자의 의미가 박달나무에 한정되었을까? 환은 형성(形聲)의 문자로 태양이 지평선 위에 빛나는 단(旦)에 위에 작대기 하나 더 넣어서 나무(목 木)를 붙여서 생명의 영원성일 수 있으며, 우리에게는 환하다는 음가에서 환을 따올 수 도 있다고 하면 - 가차(假借)일 수 있다.
영국이 아메리카에서 미국인과 전투할 때, 미국 촌놈 바보라 부른 것이 양키 두들이라 한다는데, 동부의 미국인들이 원주민(인디언)에게 배우고서도 양키라는 말로서 원주민과 달리 자부심(?)으로 양키라는 말을 그대로 자기들의 것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동이(東夷)라는 말은 중국이 본토의 관점에서 동쪽이라는 것인데, 지구가 둥근데, 우리가 꼭 동쪽이어야 이유가 없으니 ‘동’자를 빼면 될 것이고, 우리가 이(夷)족이고, 중국이 서화(西華 서쪽에 있는 중국)이 되는 것으로 보아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문화를 비하시키는 것도 있지만, 삶에서 상층과 심층 사이에 용어를 번역에서 상반되게 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저항(resistence), 봉기(revolte), 혁명(revolution)은 좌파의 기본 언어 이며, 존경 받는 용어들인데, 울나라에서 인민이 저항하는데 민란이라, 사건을 발생하게 하는 것을 (광주의) 폭동이라,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통진당의 경우) 국가 전복이라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누가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가? 이런 연관에서 독립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은 배제되고 소외되며 그런 활동을 한 분들이 삶이 팍팍하고, 차악의 선택을 주장하며 민란이니 폭동이니 전복이니 하면서 인민을 겁주고 호의호식하는 자들이 넘쳐난 것도 사실 아닌가? 단죄도 형벌도 없었던 해방 후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 요강공주를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프랑스 대혁명에서 열쇠왕자는 단두대에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나는 죄없다(innocent)"라고 하였다. 요강공주는 "나는 몰랐다”고 하며, 구치소로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상층은 선거 때마다 차악이라도 투표하라고 하는데, 인민은 선을 추구하고 차선을 선택하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도 최선을 위한 촛불시위도 저항도 봉기도 혁명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황학정의 구호로써 “국궁(國弓)의 종가(宗家)”가 있다. 좋은 표현이다. 그런데 그 속에는 전통 유가의 표현이 남아 있으며, 한 문중의 으뜸인 셈이다. 좀 더 넓게 그리고 좀 더 깊게(심층) 기억을 보존할 수 있게 뻥을 칠 수는 없을까?
국궁의 종가 황학정에서 “이족(夷族)의 정맥(正脈)” 황학정이나 “이족(夷族)의 숨결[이족의 혼(魂)]’ 황학정, 이족의 국궁장 황학정 등으로 좀 포괄적이고, 역사적 연속성이 있는 표현으로 바꿔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 뻥은 단지 공상으로 가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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