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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영웅주의와 성성: 1절 갑작스러움
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차례] 300
서문 Avant-Propre 1
제1장 유기적 총체성 Totalités organiques 5
제2장 자유 Liberté 28
제3장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80
제4장 생명 La vie 132
제5장 영웅주의와 성성(聖性) L'héroïsme et la sainteté 182
제6장 개념들의 무와 정신의 충만 Le néant des concepts et le plein de l'esprit 200
제7장 단순성 La simplicité. Et de la joie 229
부록: 벩송과 유대주의 Appenice: Bergson et le judaïsme 255
영혼 전체와 더불어 Avec l'âme tout entière 286
참고문헌 Bibliographie 297
차례 Table des matières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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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영웅주의와 성성(聖性) L'héroïsme et la sainteté 182
벩송주의는 그 자신이 벩송주의를 실행했던 것과는 달리 결론 지울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차후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도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를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알지 못하나,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 한다” 이와 같이 벩송 자신은 거짓 인식의 현상들에 대한 주제에서 표현되었다. 우리에 관한 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을 제안한다. 미래는 단지 전미래(le futur antérieur)를 예견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내일의 위대한 드라마 작품이 무엇일 것이라고 내가 알았다면, 나는 그 작품을 썼을 것이다”라고 벩송은 「가능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dans PM)에서 썼다. 프루스트의 베르고트는 자신의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창조자는 자기의 모방자들이 그 자리에서 글로 쓸 수 있었을 것을 결코 만들지 않는다. 벩송은 벩송의 부분(du Bergson)을 만드는 것이 전혀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포레(Gabriel Fauré, 1845-1924)의 목표는 “포레의 부분”을 만드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제 서야 벩송의 도덕론이 쓰여졌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그 도덕론을 예견했던 것 같다. 그러한 것은 생애의 목적성이며, 항상 의외의 목적성이지만, 항상 이성적인 목적성이다. 그러한 것은 알랑(Alain, 1868-1951)이 말했듯이 기대되었지만 기대하지 못 했던 것이다. 매 순간에 우리는, 미래가 항상 새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미래를 향해 예상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효과성(l'effectivité)이란, 베르메르(Vermeer, 1632-1675)의 푸른색이라든지 포레의 반올림 파 발라드(Ballade en fa dièse [Ballade, op.19], 1881)의 청취이라든지 처럼, 나도 모를 새로운 것을 또는 나도 모를 가장 잘 예견된 표상에게 의심 받지 않을 것을 항상 첨가하지 않는가? 생성 중인 재능(un génie)은 예언들만을 허용한다! 불행하게도 재능이 중단될 때, 어떠한 재능도 그 자리에서 “미완성 교향곡”의 종지부를 쓸 수 없다. 상상된 종지부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재능이 아주 다른 것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떠한 관념도 갖지 않는 그 무엇을 쓸 수 있었을 것을 예감하고 있다. 차후에 이런 것[사정]은, 마치 안녕하고 인사하는 만큼이나, 단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한 것이란] 항상 알아맞혀진 관점에 관한 또는 항상 불가사의한 관점에 관한, 거의 예견 가능한 예측불가능성(l'imprévisible presque prévisible)의 비밀스런 자극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도덕론은 시론과 물질과 기억의 동시대인들이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니다. 물질과 기억은 창조적 진화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마치 우리가 진화한 벩송주의의 후배들인 것처럼, 학설의 목적성은 우리에게 아주 자연적이고 거의 유기체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자유사상가들(les esprits forts)은 벩송주의가 지혜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얕본다. 자유사상가들이 체념하고 받아들여만 했던 것이 있는데,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시합을 그들에게는 예전에 했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벩송주의의 도덕론을 사정권 밖에 있는 일종의 아마추어 애호주의라고 이미 단죄했는데, 그의 도덕론은 그들의 예견을 벗어났고, 그리고 난제들(les apories)에 대해 달리 당황하지 않고서 영웅주의에 호소하여 완성되었다.
이제 벩송주의에는 더 많은 반명제가, 즉 두 가지 도덕의 반명제와 두 가지 종교의 반명제가 있다. 많은 위대한 철학들처럼, 데카르트의 철학처럼 그리고 칸트의 철학처럼, 벩송의 진행방식은 비판방식(une Critique)이며, 다시 말하면 분리방식(une séparation)이다. “비판적” 정신을 갖는 것, 그것은 상식이 혼합해 놓은 거기에서, 우리에게 분해하도록 허락 하는 분간의 어떤 선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그 자체들일 뿐인 존재들을, 다시 말하면 다른 어떠한 것도 섞여있지 않은 존재들을 탐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데카르트는 명석 판명한 관념들의 방법에 의해서 불순한 것들을 분해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자연학으로 혼합된 혼란들을 분해한다. 빠스깔과 더불어 그는 물체적인 사물들을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인 것들을 물체적으로 말하는 자들에게 등을 돌린다. 벩송은 데카르트처럼 단순한 자연들(des natures)을 탐구하며, 시론에서 공간과 지속을, 물질과 기억에서 순수 지각과 순수 추억을, 창조적 진화에서 지성과 본능을 대립시킨다. 만일 사람들이 제논의 난제들에서 만큼이나 아인슈타인의 환상들(les fantasmes)에서, 또한 관념연합론의 잡종개념들에서 만큼이나 페히너의 로그함수에서 빠져나오고자 원한다면, 양을 양적으로 질을 질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학은 내가 숨 쉬는 공기를 조합한 혼합물이라고 가르쳐 봐야 소용이 없다. 나는 산소도 질소도 분리해서 숨 쉬지 않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추억과 감각된 것은 지각 속에서 분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연합되어 있다. 두 도덕과 두 종교를 분리한 이후에, 따라서 벩송은 어떻게 신비주의가 종파의 독단 속에 구현되었는지를, 어떻게 사회적 책무가 자비[자애 慈愛]와 사랑으로 증발했는지를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49RKC)
제1절 갑작스러움 Soudaineté 184. 돌연함
따라서 여기에 벩송의 윤리학의 중심 주제들이 있다. 도시의 도덕인 “정태적” 도덕과 “역동적” 도덕 사이에서, 가능한 협약도, 어떠한 타협도 없다. 규칙적인 아름다운 단계들 좋아하는 상식은 가족적인 사랑과 애국주의로부터 점진적으로 인류의 사랑을 추출하고자 원했으리라고 한다. 만일 그것이 관념론적이라면, 마치 지각을 추억으로부터 추출하고자 원했으리라, 만일 그것이 유물론적이라면, 추억을 지각의 증가하는 피로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보고자 원했으리라. 아무것도 표본적인 ‘점차세게’(ce crescendo)를 중단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점차세게’의 끝에서 우리는 인간의식의 모든 가장 아름다운 덕목들을, 즉 헌신, 자비(la charité, 자애), 영웅주의를 재발견할 것이다. 거기에서 이것은 경험론자의 착각이며, 기계론자의 제작자의 착각이다. 이 착각은 요소 그 자체에 의해 다양하게 되어있었던 다소 단순한 요소를 - 변형된 감각, “신경 충격” 또는 잘 이해된 이기주의 - 가지고 우주 전체를 구축하기를 즐긴다. 사람들은 단선적인 진화론에서, 그리고 직선적인 완전함을 이룬 모든 관념들에서, 어려움 없이 이 자연의 편견을 고발했을 것이다. 그러한 대칭은 도덕적으로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확신에 차 있을 것이다. 작은 함량들[분량들]에 의해서 가정적이고 조합적인 연대성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이고, 그리고 굉장히 넓은 폭의 끝에서 자애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기주의에서 이런 횡재가 있다니! 이제 결국 이 단체의 조화롭게 된 덕목과 이익[관심]도 있다. 집단적 이익에 관한 한, 공리주의자들은 대체든지 이전이든지 모든 종류의 가설상, 집단적 이익이 개인적 이익과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즐긴다. 밹송의 비판에 이 추신(追伸)을 걱정 없이 덧붙여 보자. 만일 가정에서 선한 시민이 인류를 사랑하기를 배운다면, 또는 만일 그가 종족에서 조국으로 연속적으로 이행한다면 왜 그 자신을 사랑하면서 그가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않을 것인가? 차곡차곡 겹쳐진 모든 원들의 중심에는 분명하게 자아가 있다. 이 자아는 무한히 작은 원이며 거의 점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자애는 마치 이기주의의 최상급처럼 나타나리라! 본성상 차이들 속에는 주지주의의 값비싼 습관들을 혼란하게 하는, 그리고 측량사에게 공통 척도에 따라서 사물을 측정하기를 가로막는, 피곤하고 불안한 어떤 것이 있다. 또한 측량사는 개념들의 점진적이며 아름다운 연발을 중단시키는 “질적인 도약”의 공포증을 지닌다. 단순주의자의 점진적 단계들의 취향은 우리가 이미 불러냈던 두 가지 착각에 의해 전개되었고 유지되었다. 하나는 회고성의 착각이며 다른 하나는 대상과 섞인 영혼 상태의 온혼동(Confusion)이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전자에 관하여 강조했으며. 그리고 처음으로 벩송은 여기서 착각도 자신의 고유한 학설 속에서 행하는 역할을 의식한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이 착각의 뿌리란, 현재를 과거로 소급하는 능력(le pouvoir rétroactif)이다. 사람들은 일종의 회고적 예견에 의하여 가능적인 것을 거꾸로 재구성하기 위하여 “전미래”에 위치한다. 예지작용은 차후에 운동의, 정의의, 의욕의 표본적 이미지를 얻는데, 실재적인 것은 쪼가리들에 의해 이상적인 것을 갈아먹고, 또는 벩송도 또한 말했듯이 실재적인 것은 이데아 뒤에서 달려간다. 요소들로부터 출발하는 이 재구성을 사람들은 스칼라양의 점진적 단계들에 대해 점묘파적이고 원자론적 광기(조증)에서 재발견 한다. 회고적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며, 애국주의는 자기(에고)-이타주의자를 총체적 헌신의 길로 가게 해야만 한다. 이는 마치 안녕[잘 삶]이 우리를 사치의 길을 가게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기배려만의 몰취향(la philautie)은 최소한의 사랑이며, 사람들은 친구를 다른 자아자체로 만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주의와 함께 어려움 없이 새로이 관계를 맺는다. 다른 자아(Allos autos)의 논리는 모든 초자연성을 몰아냈다.
다른 한편, 이 광기[조증]는 물리적[신체적] 기반과 더불어 영혼 상태의 혼동에 근거한다. 자극이 양적으로 커나가는 것으로부터, 페히너는 감각 또한 커나간다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진동[파장] 물리학은 파동의 길이[주파수 周波數]들을 목록으로 작성하기 때문이다. 뗀과 스펜서는 후회하지 않고 이 불연속, 근본적 이질성, 감각적 성질의 환원 불가능성을 무시했다. 그런데 왜냐하면 민족은 거대한 가정과 닮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류를 가능한 한 가장 큰 민족으로 취급할 것이다.... 따라서 세계시민주의자는 애국주의의 모든 기록들을 쳐부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가 다른 [동물] 사회들처럼 하나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누가 보지 못하는가? 인류와 민족적이고 가정적인 다양한 집단들 사이에서 이 연관은 전체와 부분의 사이에 연관과 동일한 연관이다.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교되지만, 전체와 비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인류란 정의상으로 전체이다. 따라서 인류를 사랑하기 위하여, “한계”[경계]를 거치기 위하여, 갑작스런 결심이, 개종이, 변환(métabole)이 필요하다. 가정들과 국가들은 서로 대립되면서 서로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사회들이기 때문이고, 서로는 서로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가 무한하기 때문에, 인류는 무엇에 대립될 것인가? 확실히 닫힌 사회 속에서, 즉 민족과 가족에서 사랑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 적들을 배제하면서 사랑하는 것, 그것은 자비[자애]라는 무한한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실한 단절은 동일한 전형의 두 집단체인 가정과 도시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시와 인간 종 사이에 있다.
왜냐하면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벩송주의는 도약의 철학보다 더, 변신의 철학보다더, 거대한 열정의 철학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이 순수 자비를 - 그 자비는 적극적이고 또한 딴 생각 없이 사랑하는 순수 자비를 - 만나게 해 줄 당신의 이기주의를 깊이 파고들면서[깊이 연구하기 때문에], 우리들 속에서 강도 있게 당신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원하는 만큼 당신의 쾌락을 교묘하게 만들어보고, 긁어도 보고, 속도 파보라 - [그래도,] 당신은 쾌락만을 얻을 것이다. 사랑을 발견하기 위하여 처음에, 또 단번에(tout d'un coup) 사랑이 주어져야만 한다.
정지는 최소한의 운동이 아니다. 운동은 정지의 절정(꼭대기)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모든 사물에서 진실하다. 그리고 예를 들어 사랑은 우정에 의한 시작이 아니며, 사랑자체에 의한 시작이다. “당장 이거나 또는 결코 아니거나!” 우정과 사랑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소명에 해당하며, 점점 더 분화한다. 그러나 복합체의 제작자는 어리석은 논리를 가지고, 즉 사랑이 우정의 감정들을 가지고 조금씩 건물을 세우는 것이라고, 또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덕분에 연인이 될 것이라고 믿는 체 한다. 그는 생성이 되게 하고 또 미래를 도래하게 하는 불연속성들과 건너뛰기들을 알고자 전혀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의 언어와 사랑의 언어 사이에서 간격을 뛰어넘을 수 없다. 우리는 그 간격(틈)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전이들에 의해서, 또는 다윈주의의 “미세변이들”과 유사한 인위성에 의해서 그 간격을 채우려고 시도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개념으로부터 판단을 관통하여 추론으로, 또 감각으로부터 지각을 관통하여 추억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감정들의 연속적 계보학이 또한 왜 현존하지 않을 것인가? 애석하도다! 처음에 우정에 자리 잡은 자는 도대체 우정만을 발견할 것이다. ... 정태적 도덕에서 동태적 도덕으로 가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다양화”[다수화]가 아니라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그것을 말했듯이 조바꿈할(moduler) 줄 알아야 한다. 앞선 그의 책들 중 어떤 것에서 보다 아마도 더욱 분명하게, 벩송은 여기서 이 이질성들의 근원을 지적했다. 생성의 매순간에 우리는 완벽한 조합들만을, 완전한 유기체들만을, 또는 더 좋게 말하자면 총체성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감정들은 미네르바처럼 어른으로 태어난다. 정태적 도덕과 동태적 도덕의 연관은 폐쇄와 개방의 연관과, 또 끌림의 압력과 열망의 연관과 동일한 연관이다. 동태적인 것으로는, 말하자면 운동으로 전환되기 위하여, 통과해야할 모험적인 변환(une mutation)이 있다. 이 변환, 영혼의 개방과 유통화(une mobilisation)은 벩송에 따르면, 처음에는 [이스라엘] 예언가들 덕분에, 그러고 나서 크리스트교 덕분에 작업되었다.
따라서 이리하여 개방된 윤리학은 모든 존재들을 동일한 균일성 아래 징집하는, 또 는 개별자들을 동일한 류개념 아래 순화시키는, 모든 종적 경험으로 유일한 법칙의 개별화 경우를 만드는, 소위 말해서 요소들을 범주들 속에서 계열로 만드는, 공통분모의 광기(조증)에 대하여 거짓으로 기록된다. “연속주의”와 “연속화주의”가 (삶과 죽음 사이에, 인간과 신 사이에)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추이들과 전이들을 다양화[다수화]하는 거기에서, 생명도약(l'élan vital)의 철학은 불연속적 뛰어넘기(le saut)와 위험한 급등(le bond)의 관념에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벩송주의의 연속성은 키에르케고르의 불연속성과 결코 이웃하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어떻게 제임스가 유동과 결단(le fiat, 의식의 깊은 중첩)을, 타동사적인 것과 실사적인 것, 벩송에게서 전념과 르누비에에게서 충실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지를 더 잘 안다. 왜냐하면 만일 시론과 「변화의 지각」(PM)이 무엇보다도 간격에 관하여, 지속의 불가분의 덩어리들(les blocs)에 관하여, 그리고 플라톤의 필레보스편에 따르면 현재의 불가분의 한계를 두께 있게 하고, 순간적인 지금(Nunc)의 주위에 빛을 발하고 있는, 기억흔적의 과거와 예상참여의 미래에 관하여 명상했다면,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처음으로 점점으로 된 순간과, 재능 있는 새로움의 원리인 이런 출현(cette emergence, 창발)과의 매개 작업이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가 헤겔의 논리적 내재주의를 거부했듯이, 또한 벩송은 메가라학파의 소피즘에 반대하여, 그리고 시작의 불가사의와 처음 한 번(la première fois)의 불가사의를 요술로 감추고 있는 누적적 연쇄에 반대하여, 예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기회[경우]의 솟아남, 알맞은 때(Kairos, καιρός)의 명백함은 이제부터 사실에 덮친 기습이기를 요구한다. (49R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