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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서양 고대 철학에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의 문을 연 사람들 I
-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원자론자들 -
윤구병, 2019, 02, 16. 한철연에서
대담자: 이규성, 이병창, 양호영, 김인곤, 정준영, 한경자 선생님
* 인간은 인간이라면 모두다, 자연(우주)에서 출발한다. 이 자연에서 존재와 발생을 찾았다는 것이 고대 그리스 철학이 상층과 심층으로 갈라진 것도 발생적 언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공간적 언어인 존재와 시간적 언어인 발생이 다르다.
** 생명의 역사 중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이란 종이 다른 종과 차히를 갖는 것은 660만년이라고 한다. 여러번의 탈영통화를 거쳐서 인간이 인간답게 또는 분업과 생산양식(곡식재배와 가축화)의 영향으로 인간 종들 사이에 차이를 이룬 것은 기원전 6천년에 아나톨리아 구리을 상용화라고 한다. 대부분 철기문화에 이르러 거푸집의 영향으로, 여러 물건을 만드는 원형처럼 여러 개별개념을 통합하는 ‘하나의’ 관념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에 상층의 개념작업에 대해 심층의 활동작용들은 달리본다. 여전히,
개체발생은 종발생을 되풀이 하고 (자의식 발생)인격발생은 개체발생을 되풀이 한다고들 한다. 그 되풀이는 동일반복이 아니라 - 자연의 탈영토화를 계속하고 있기에 같지 않아서, - 이질반복이라는 것이다.
개체 발생은 종 발생은 여전히 되풀이 한다고 하지만 동일하게 되풀이 하는 것은 생물계에서는 없다(이질반복). 게다가 인간이 15세기 전후로 자아(자의식)을 구성한 이래로 인격발생도 새로이 되풀이 한다(세분화 반복). 한국인이 중국인과 일본인과 다른 것은 개체발생보다 인격발생일 것이다. 장준하와 박정의가 “같지 않다”는 것은 공간적 차이가 아니라 시간적 차이에 있다. (52OLI)
****** 같잖은 생각....
좌파에게는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이지, 소요 민란, 반란, 폭동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우파이다. 용어를 쓰는 것이 다르다. 프랑스 혁명의 깃발을 든 마들렌느를 좌파는 자유의 여신이라 부르고 우파는 창녀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파상의 “비계덩어리(boule de suif, 188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빨강이 사유와 파랑이 사고에서 간단히 말하면 전자는 지속의 사유이고 후자는 절편의 사고이다. 전자는 경험적 총체의 사유이며 후자는 요소의 집합적 사고이다. 파랑이와 빨강이를 상층과 심층으로 구분할 때, 공간적 대 시간적 대비로, 또는 차이 대 차히의 대비로 또한 그 밖에 대 그 안에로 대비된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정통 이라고 하고 후자는 같잖은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제 이제 아제의 관점에서 사랑하는 측면에서보면 정통과 같잖은은 도치되어 있다. 들뢰즈는 전복하려고 하지만 벩송은 지속 안에서 사유(직관)하라고 하고, 윤구병은 사랑하라고 한다. 여기서 좌파 우파로 나누지 않는 것은 좌우는 마치 공간의 수평에서 좌우로 보기 때문에 좌우로 나누면 사유가 아니라 사고에 빠져서 우파의 장난(노름)에 빠진다. 좌파가 하고자 하는 것은 초원위에서 놀이이지 놀음이 아니다.
사고와 사유에는 수직적 사고와 수평적 사유가 있다. 전자는 위에다가 또 위를 놓은 것이고 수평적 사유에는 옆으로 확장하며 물결치듯 높낮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층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자를 파랑이 사고라고 하고 후자를 빨강이 사유라고 한다.
사람들은 차이(다르다)가 차별이 아니라고 한다. 공간적 사유에서는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양적이기에 또는 잘려져 있기에 상위와 하위를 구별하여 차이 자체가 등급을 드러내고 위계를 만든다. 이에 비해 시간적 사유에서는 차이가 서로를 구별하여 개별성을 확보하지민 어느 개별자가 더 많다 적다를 말할 수 없는 질적 차히이다. 여기서는 시간적 과정이 들어 있기에 과정에서 질적인 부분을 원인과 결과로 다루지 않고 과정으로 다룬다. (52NLH)
천상의 도식을 공중에, 그리고 사물들에 그리고 마음속에 옮겨놓은 공간적 사유는 우주의 영혼이 개인 속에 들어있다고 사고한다. 이 도식의 공시태의 인전의 방식을 들뢰즈는 삼각형의 이전이라고 부른다. 삼각형은 한편으로 천상에서 국가로 사회로, 가정으로, 다른 한편으로 상층 형이상학에서 사회학으로, 정신분석학(심리학)으로, 인류학으로, 자본제국으로 이전하였다. 이 거꾸로선 사고를 전복하는 것이 혁명이다. 그 혁명의 맹아가 노마드 사유이다. (52NLH)
********2019 02 16
칠판에 큰 글씨로
이 뭐꼬
들어가면서
2월 16일 ... “16일”은 4월 16일을 기억하리라 가만히 있으라 뛰쳐나오라.
정지와 운동의 관계, 삶과 죽음의 연관..
I.1, 세월호 ...
권위: 말이 답인가? 정의란 [자본이라는 제국의 말은 명령어이다.(들뢰즈)]
가만히 있으라
애들이 본능이 있었다면 살았으리라
내가 손을 모음: 사람들은 손 모음은 “때리지 않겠다: 전쟁하지 않겠다”
[한반도와 8천만이 하나이며 손모음은 전쟁하지 않겠다.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
[정태 대 동태; 정주적 대 유목적; 도시(성곽) 대 토지(전원. 산림)]
II. 1. nothos(νόθος λόγος)
다른 생각을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삐딱한 생각일지라도 잘 들어보라.]
다르다 는 틀렸다가 아니다. 같지 않다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 스코티엔
플라톤 – 노토스 로기스모스 (티마이오스편)
1.2. 이 뭐꼬
고려 시대 상사곡 ‘어이’ 부모 [그러면 ‘아이’ 다음 세대]
어제 -- 이제 — 아제 [이= 현재, 현재 현실이 뭐꼬]
2. 있다와 없다. <- ‘이’가 있다. 존재론이다.
제주도 방언 이시다(현재). 어시다(과거). [아시다(미래) 사라지다.]
얼굴: 얼에 굴을 뚫다. 굴을 뚫고 기능들(눈알, 털, 달팽이, 혀 등을 보초로 만들다)
정보(information)
- 얼이 안에다가 꼴(form)을 만들어서 내용을 담다.
3. “이” 뭐꼬
있다. - 어원적으로 ‘이’다에서 ‘이“에서 나옴 – [그래서 현재 상황(높이), 정황(깊이)]
두 갈래가 있다.
하나 톨(입자).
다른 하나 결(떠는, 흔들리는, 흘러가는)
OO
둘이 닿아있다. tangere tangent
함께 있다. (contact)
우연(contingence: 두 가지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어져 있다.) ㄷ 우여
[하나라는 단위는 동시에 경우가 둘이다. 존재와 무, 1과 O. / 두 개의 단위는 4개의 경우의 수가 있다. A, B, AB, φ 이다.]
OO 이어짐, 접촉, 우연 등으로 확장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로써 현실태에서 제3자의 지위가 나온다. 이것이 아페이론이다. [박홍규는 아페이론과 페라스의 난제(aporia)를 해결하기 위해 데미우르고스를 개입시킨다. 나로서는 이미 관념론자가 물질 또는 자연에 개입을 생각했고, 이 개입을 우연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III 1. 같지 않음
플라톤에 비추어서 같지 않은 자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2.
같다 대 다르다. ---> 같다의 ‘ㅌ’은 1933년 맞춤법에서 등장한다.
auton 대 heteron [대의 자리에 “이” 즉 이 뭐꼬이며 들뢰즈의 그리고(et)일 수 있다]
가‘ㅌ’다.
-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 최세진(崔世珍, 1468-1542) 이 받침을 정하다.
- 갑오경장 시기에 ㄷ 탈락, 7자로 [[ 이(虱 슬) 벼룩(蚤, 조) ]]
있음 / 없음 -> 아롬(인식) : 모름
하나(1) 크리스트교. 대 영(O) (공 불교),
갇(갓) + 한 --> 가이 하나다.: 경계가 하나다. 톨이 하나다. / 같다 : 같지 않다.
가: 경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229쪽)
다른(닿다) 경계에 닿다. -> 경계(페라스)에 닿은 것, 즉 아페이론. A 대 ~A
IV 1. 헤라클레이토스
만물은 흐른다(판타 레이) - 이차 문헌에서 나옴
흐르는 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 이차 문헌.
“흐르다”는 ‘흔들리다’처럼, 불(꽃)을 의미할 수 있다.
결은 진동, 파동이기도 하지만 흐름이다. [흐름으로서 결은 마나(mana), 박홍규]
[불길의 흔들림, 르와 구랑의 해석에서, 제련술과 연관으로 노마드의 특성(격)] ( .
2. 엠페도클레스
스토이케이온이 아니다. 물 불 공기 흙 [톨이라기보다 결]
사랑과 미움 [프쉬케, 의인론적으로 읽으면, 또는 마나로 운동방식으로 보면]
[박홍규, ‘소크라테스이전의 철학’(1990): <엠페도클레스에서 사랑이니 중오니 하는 것은 생명체를 가진 것이고 다른 것은 생명체가 아니야. 딱 구별 돼 있어.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의 세계, 즉 철학 세계의 사고방식은 추상적인 사고의 정도(dgree)를 표시한다고 할 수 있지. (233)> ]
사랑의 어원
사랑과 증오가 마치 프로메테우스와 에핌메테우스처럼 비유할 수 있다. ‘
훈민정음의 불경[월인석보] 번역에서 - 어제를 회고하는 것을 생각으로 내일을 기대하는 것으로 사랑이라 했다.
[추억을 생각으로 예측을 사랑으로, 과거(생각) : 미래(사랑) ]
[어제(생각) - 이제 – 아제(사랑): 그러면 이제는? 흐름 이어짐, 지속(duree)일까?] 3. 데모크리토스
우주 공간의 운동이 있다. - 이어짐과 흩어짐.
무한(빈 것)속에서 원자들이 운동(키네시스).
어딘지 어느 땐지 모르는 데, 빗금 운동이 있고, 갈고리가 있어서 뭉친다.
4. 힘에는 하는 힘과 되는 힘이 있다
[포에인 대 피에스타이, 만드는 행위 대 자라는 작동]
V . 위상 공간이란 무엇인가
중국집 수타면을 뽑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나란히 가지만 넘을 수 없는 경계, 즉 페라스가 있다.
[같은 덩어리에서 나온 여러 다른 선(線)들은 같은 길을 가는가?
[이 선들은 반죽의 속성들이며 그 선들 중에 두 개 정도가 인간들이 오성을 아는 정도이다. 스피노자 버전 / 무수히 많은 선들이 새로운 생산(되기)의 길을 간다. 벩송의 다양체 버전. / 성(性)에는 n개의 성이 있고 n+l에서 탈영토화와 되기가 나온다. 들뢰즈 버전. / 8천만의 새로운 환(桓), 단(檀), 한(韓), 겨레는 어떤 버전으로 되기(사랑, 아제)해야 할까? 천야버전.]
5.2.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진리 인식에 대해)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것, (도덕 윤리)
[** 있어야 할 것이 이어지고 없어야 할 할 것은 소멸하는 것이 이제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 구병형님은 “는”과 “을”이 다르다고 하면서 “같잖은 이야기”의 첫 방담을 마치고 다음번에 둘째 방담이 있을 것이다. 박홍규의 “형이상학 강의 2”(박홍규전집3권)을 읽는 것이 윤구병의 같잖은 이야기가 박홍규의 희랍어 버전에 대한 우리말(한글) 버전임을 보게 될 것이다. (52MLJ) ]
*** *** ***
* 쉬운 우리말로 한다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 같아 더 어렵다.
* 존재와 무, 윤리를, ‘있는’ ‘있을’이라고 우리에 맞는 용어만들 찾아내는 것은 중국에서 격의불교가 하는 방식이다.
* [우리 말과 우리 삶에 대한 통시적 관점이 거의 없는 시대에 사는 이들에게 우리 토양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언어는 공시태가 우선이지만, 여전히 철학도 공시태가 우선으로 보는 것은 극우파(자본제국)의 것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아르케(archê)를 본질로 보는 견해(앵글로색슨)과 시초로 보는 견해(박홍규)의 차이는, 전자가 분석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후자는 경험적 총체적으로 벩송의 지속관점이다.(52NLH)]
* 선생님이 오랫동안 학적 발표를 하지 않았고, 정치한 논쟁을 해본지 오래되어 선생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를 공시대로서 르네상스 그리고 1859년 또는 1953년에 옮겨놓고 설명하는 것은 이전의 오류이다. 각 시대는 통시태에서 보면 다른 실증적 차원을 동원한다. 들뢰즈 표현으로 탈영토화의 과정이다. - 플라톤이 1859년에 젊은이라면 미적분뿐만 아니라 행렬도, 자기장도 배워야 하고, 그러면 감각성에 대해 달리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2NLH)]
[같지 않음은 공시태로서 공간적 사유에서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다. 이 곤란을 넘어서는 것은 통시태의 흐름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흐름은 설명이나 설득으로 쉽지 않아서, 과정을 겪고(느낀) 경우에 가능하다. 10살 짜리 꼬마에게 지구가 돈다는 것을 설명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같잖은 생각이 - 공시태 우선이지만, 공시태를 아무 곳에나 옮기는 것은 어제-이제-아제를 부인하는 오류이다. 플라톤의 “네 선분론”은 중요하지만 아무 시대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이 18세기에 살았다면 미적분을 공부해야 할 것이고, 헤겔이 19세기 후반에 살았다면, 열전자 현상이나 자기장 그리고 행렬도 공부해야 할 것이다. 벩송이 20세기 중반을 살았다면 반도체의 제반 나타남에 대해 공부했을 것이다. (52NLJ) ]
# [인간은 처음부터 개념을 잡는 정의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언제 인지 모르지만 거의 기원전5-4세기에 인류가 정의를 하려고 했다고들 한다. 내가 보기에, 박홍규 선생님의 견해에서 중요점은 소크라테스(소피스트)이전에는 추상개념이 없으며, 마치 움직이는 덩어리 또는 움직이는 힘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번역된 철학사와 달리 아르케는 원질이 아니라 원인 또는 먼저 있었던 것에 대한 고민, 즉 윤구병성님이 말하듯이 어제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제로부터 아제로 가는 것이 철학사에서 “욕망”이며 프로이트아류들이 말하는 욕망은 탐욕 도는 욕심을 말한다. 욕망은 아제에 대해 행위할 준비 또는 반보 앞으로 내디디는 것일 것이다
앞으로 다섯 번 즉 도합 여섯 번의 장정이 인류사에서 존재론 인식론 행위론 미학론, 다음으로 “이뭐꼬”의 8천만이 뭐꼬.라며 사랑(기대, 아제)하자고 해야 할 것이다. 테제로서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를 먼저 던져 놓고 보자.]
(4:13, 52MLJ) - <마실에서 천사흘밤 이야기: http://cafe.daum.net/milletune>참조.
# 윤구병,
특별기고
철학을 다시 쓴다
『내 생애 첫 우리말』, 천년의상상, 2016) ]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는 살길을 일러주는,
『그해 봄』은 비판의식을 길러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있음과 없음>, <꼭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좋아>,<몸 가는데 마음 간다>,
첫댓글 무엇인가?(qu’est-ce que?)[뭣꼬?] / Qu’est-ce que c’est?(이뭣꼬) 사이에서 윤구병은 후자의 "이"라는 지칭의 극한에서부터 물었다. / 들뢰즈는 「드라마화의 방법(La méthode de dramatisation, 1967)」의 방법에서 플라톤주의자는 고상한 질문으로 무엇이라는 본질 또는 이데아를 문제 삼고, 어린아이이나 소피스트들은 통속적 질문으로 우연적인 것 또는 실례(경우)를 물었다. 그런데 후자에서 반전이 있다. 즉 사유의 전개과정이 있다. 역으로 비본질적인 것이, 그것도 오로지 경우의 속에서만, 본질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pp. 132-133) (52T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