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수필1편
긴 여정, 짧은 만남, 번지 없는 대륙
유럽 또는 호주 보다 더 넓은 대륙, 그러면서도 서계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대륙, 연구 탐사에 투입된 인력 외에는 상주인구가 없는 대륙, 그렇기 때문에 달리 표현하자면 번지수가 없는 땅 남극대륙, 그곳을 잠시 다년 온 적이 있다.
1993년 초에 다녀왔으니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셈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대한민국은 남극 세종기지를 방문했던 불과 몇 시간의 경험은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나간 40여년의 세월 동안 지구를 여러 바퀴 돌면서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살아왔지만 그때 세종기지를 방문했던 일과 그곳에서 잠시나마 그저 손 한번 잡아보고 헤어졌던 우리나라의 젊은 대원들과의 만남은 내 기억 속에 너무도 특별하게 각인되어 있다.
세찬 강풍과 함께 때로는 시커먼 흙비가 쏟아지는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또는 참으로 열악한 환경의 아프리카 오지에서 일하는 우리 근로자들을 보았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문명화된 도시가 있고, 산과 들과 나무와 초원이 있으며 인간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생필품이 넘치는 시장이 있지 않은가?
남극대륙의 우리 세종기지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무섭게 짙푸른 바다와 숨이 막힐 만큼 거대한 얼음산들이었다. 그리고 가끔 물개와 바다표범이 뭍에 올라온다고 하지만 그날 내가 만난 유일한 생명체는 뒤뚱거리는 펭귄무리 뿐이었다.
그곳에는 산도 강도 푸른 초원도 없었으며 나무 한 구루도 볼 수 없었다. 연구대원들의 목소리 외에 들리는 소리는 그저 바닷물이 밀려와 조약돌에 부딪치며 철썩거리는 소리 밖에 없었다. 세종기지는 하늘과 바다를 향해 온전히 열려있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폐쇄된 공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막힌 공간에 오래 있으면 정신착란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그런 곳에서 묵묵히 탐사와 연구에 열중하는 우리 한국인들이 참으로 대단하고 대견스러웠다고 한다면 그런 마음을 갖는 내가 오히려 면구스러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당시 우리의 세종기지 방문 코스는 서을에서 미국 LA를 거쳐 중미의 과테말라를 지나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남미대륙 최남단 도시인 칠레의 푼타아레나스를 경유하는 여정이었다. 과테말라를 경유한 이유는 그 나라를 공식 방문하는 일정이 겹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LA에서 과테말라로 가는 비행기가 8시간 가까이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우리의 남극 방문은 첫 출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 하였다. 우리 일행은 산티아고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푼타아레나스에서 다시 일박한 후 칠레의 공군 수송기 편으로 남극의 칠레 기지에 도착한 다음 그곳에 와 있는 우리나라 한국해양연구소 소속의 해양연구선 “온누리”호를 타고 킹조지섬 세종기지에 도착하는 스케줄로 짜여 있었다.
남미대륙에 체류하는 동안 과테말라의 날씨는 참으로 청명한 초가을 날씨였다. 그러나 산티아고에서 푼타아레나스까지 약 5시간을 비행하는 동안 남미대륙에 남북으로 끝없이 뻗어있는 안데스 산맥 연봉들의 정상은 만년설로 덮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거대한 호수와 푸른 초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장관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신이 빚어 놓은 이 엄청난 장관을 나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벅찼고 몇 줄의 글로는 도저히 담아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서양의 어떤 작가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는 “탐험가는 발견되지 않은 것을 찾고, 여행가는 역사를 탐색하는 사람들이 발견해 놓은 것을 찾고, 관광객은 기업가들이 대신 발견하고 대중홍보를 통해 마련해 준 것을 찾는다.”라고 했다.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당시 나의 목적지는 어디까지나 세종기지였으므로 탐험가도, 여행객도, 관광객도 아니었다. 오히려 신이 안데스산맥에 베풀어 주는 대향연에 무료 입장객으로 참석했다고나 할까! 누구든지 이 구간을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나처럼 무료입장의 행운을 누려 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 일행이 남미대륙의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에 내린 시간은 오후 5시쯤이었다. 날씨는 여전히 좋았고 그곳에서 동양인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고 그 밤이 지나면 드디어 남극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칠레 공군 수송기에 몸을 싣고 3시간 정도 지나면 세종기지에 도착한다는 기대감에 남미대륙의 최남단 도시에 대한 낭만적인 감회 같은 것조차 없었다. 또한 기상이 악화되는 바람에 그 도시에서 2박3일이라는 귀중한 시간 동안 발이 묶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2박3일이 지난 다음 날도 비행기는 뜰 수 없었다. 언제 기상 조건이 좋아질 것인지 예측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리하여 세종기지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는 당초 계획은 어렵게 되었고, 남극 땅을 찾는다는 일도 불투명하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어렵게 찾아 온 이 남극으로 가는 관문에서 발길을 돌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노릇이었다. 서울로 돌아 갈 일정마저 촉박했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칠레 공군에게 맡기기로 하고 하룻밤을 더 기다리기로 했는데, 결국엔 이런 미련을 쓴 것이 다행이었다.
다음 날 네발 프로펠러 군용기가 남극으로 기수를 잡은 다음에야 ‘비로소 이제 가게 되었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비행기 내부는 컴컴했고 C-130 수송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윙윙거렸다. 칠레에 있는 기지까지는 3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했지만 수송기가 칠레 기지에 덜컹거리면서 내리기까지 내가 체험했던 시간은 그 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이 비행기를 믿을 수 있을까’하는 일말의 불안감도 엄습해 왔기 때문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우리를 맞아 준 것은 사람이 아니라 펭귄 무리들이었다. 남극 땅 바닷가였다. 비로소 남극 땅에 내린 것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조다악 고무보트에 옮겨 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 배, 다른 나라가 아닌 대한민국 국적선인 “온누리”호에 올랐다, 머나먼 남극대륙 망암대해 한 가운데 홀로 떠 있는 “온누리”호! 고무보트에 실려오는 나를 기다리는 그 배는 배가 아니라 내 집이었다. 다시 뱃길로 30분 정도 지나서야 마침내 세종기지에 도착했다. 운 좋게도 그날 남극의 바다는 호수처럼 조행했다.
처음 계획은 세종기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 올 예정이었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다음 날의 기상 조건은 매우 유동적이어서 보장이 되지 않으니 일정이 급한 사람은 그날 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칠레 공군 측의 최종 통보였다. 세종기지에서 내가 보낸 시간은 불과 3시간 정도. 하늘은 내게 그 이상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그곳을 떠난 시간은 1993년 1월 20일 현지 시간으로 오후 5시 경으로 기억된다. 다소 여유로운 일정으로 그곳에 남는 다름 일행들이 몹시 부러웠다.
한국으로부터 1만7천240㎞ 멀리에 떨어져 있는 지구의 남쪽 끝, 가장 가혹한 자연환경에 포위된 채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이겨내면서 탐사와 연구에 열정을 바치고 있는 우리 대원들과 세종기지에 대한 방문은 멀고도 김 여정 끝에 결국 짧은 만남으로 끝낼 수 밖에 없었다.
세종기지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남극기지’이다. 지금은 세종과학기지 외에 ‘장보고기지’가 남극 다른 장소에 있지만 내가 갔을 때는 세종과학기지만 있었다. 1988년 2월, 남극대륙 남쉐틀랜드 군도의 킹조지섬에 기지가 준공되기까지는 그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 지도자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그 일에 매달려 헌신한 분들의 피와 땀이 바쳐져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의 방문이었지만 남극, 그곳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들 사이에 소리 없는 전쟁이 발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지난 해 남극세종과학기지가 30주년, 올해 2월 장보고과학기지가 5주년을 각 맞았다고 한다. 연구 주제는 ‘체온이 노화 및 장수에 미치는 영향’ ‘극지 미세조류 유래 유용물질 탐색 및 대량배양’ ‘미세 플라스틱의 수권 및 빙권 거동 기초연구’ ‘효율적인 극지 연구 지원을 위한 소형 육상 로봇개발’ 등 그간 쌓아 온 역량으로 유용한 기술개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준비 없는 자에게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남극대륙! 그곳에 앞으로도 국가적 관심과 역량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첫댓글 김정남 수필가의 모처럼 추억을 회상하는 글에 감회가 새롭다. 六山 김정남은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한국문단에 특이한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시 <日出>(동예 제 1집)을 읽어보면 그의 詩才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50년대 박남수 시인이 가끔 삼척에 들려 찻집에서 주고 받은 대화가 있었고 그 시기에 김정남이 시를 보여주어 등단이 될 것으로 여겼으나 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1993년에 남극 세종 과학기지에 다녀온 것은 <삼우회>에서 일체 말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의 筆力을 새삼 깨닫게 된다. <東藝>동인의 한 사람으로 보람스럽다.
솔봉 선생님
감사합니다... 김익하 작가님의 두타년사를 읽어 보면서, 그 척박한 풍토에서 시와 산문 생명의 움터를 일구신 선배님들께 깊은 존경의 념을 표합니다 !!
김정남 수필가님, 귀한 체험 옥고 잘 읽었습니다.
작품 읽으며 함께 하는 경험을 체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