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에 몽촌(夢村) 김종수(金鍾秀)가 귀양지에서 용서를 받고 돌아올 때 내 아버님이 마침 남한산성의 한 절에서 책을 읽고 계셨더니 재종숙인 담포께서 부윤으로 계셨는데 아버지를 오라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어제 몽촌이 집으로 돌아왔으니 찾아가 뵙도록 하여라 했다.
아버님이 곧 당나귀를 타고 몽촌의 집에 다달으니 고리짝에서 시 한 수를 꺼내 보여주는데, 시에 말하기를
해가 지도록 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갔지만
하늘은 높아 외롭고 슬픈 마음을 호소할 길이 없었네,
아득히 경루를 생각하는 달 밝은 밤에
신도 또한 죄진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지요? 라고 했다.
김종수는 이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귀양살이하던 곳에서 이 시를 지은 날 특별히 임금님의 용서를 받았으니, 어찌 기연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때 문 밖에 한 사람이 서서 이 광경을 엿보다가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갔다.
나의 아버님은 곧 돌아와 몽촌이 이야기한 것을 재종숙께 말씀드렸다.
다음날 재종숙 판서공께서는 인마(人馬)를 보내 아버님을 부르시니 아버님께서는 곧 성안으로 들어가 재종숙께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재종숙께서 물으시기를
"과연 가서 인사를 여쭈었습니다." 라고 했다.
재종숙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몽촌이 너에게 내보이면서 울었던 것이 무슨 물건인가?" 라고 하시자,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곧 몽촌이 귀양살이하던 곳에서 시를 짓던 날 특별히 용서를 받았다하여 그것을 내 보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라고 했다.
재종숙께서 또 물으시기를
"너는 그 시를 외울 수 있겠느냐?" 라고 하시자, 아버님께서는 시를 곧 공에게 외워서 전해드렸다.
재종숙께서는 시를 종이에 써서 소매 속에 넣고 초헌을 타고 대궐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몽촌의 문밖에서 엿본 자는 곧 임금님(정종)께서 그곳에 보내신 심부름꾼이었다.
그런데도 재종숙을 시켜서 아버님을 불러 그것을 물어 보게 하였으니 정조때의 신하들을 대하는데 있어 밝게 살펴 잘못이 없도록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錦溪筆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