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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이 경 미 발바닥에 퍼즐 조각들이 닿자 쭈뼛, 머리카락이 선다. 제각각의 굴곡과 색깔을 가진 손톱만 한 조각들이 상아색 책상 위에도 빼곡히 널려있다. 휴먼 어데카, 세로인 헌터, 다크 세이버, 세로인 메이지……. 책상 옆에 놓인 5단 책꽂이 역시 칸마다 기괴한 색상의 요괴형상과 이름이 박힌 퍼즐 상자가 툭툭 튀어나와 있다. 머리가 터질 듯해 딸아이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 내동댕이치며 꽥 소리를 질렀다. 벌떡 일어난 딸아이가 나를 밀쳐내고 천정이 쏟아져라 제 방문을 닫았다. 눈을 질금 감고 닫힌 방문 앞에서 방안에서부터 울려오는 딸아이의 고함을 듣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지 주머니 양쪽에 손을 찔러 넣었다. 한쪽 주머니에 무언가 잡힌다. 더듬어 보니 퍼즐 조각이다. 그대로 움켜쥐고 슬며시 돌아선다.
아파트 입구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는데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만만찮다. 11층에서 내려오는 동안 몰랐던 무게다. 이대로 가다간 몸뚱어리 어느 한 곳이 삐끗하고 말 것 같다. 필요한 것만 챙긴다고 그 와중에도 신경을 썼는데 홧김에 막 집어넣었나. 그럼, 이 무게가 내 화의 무게란 말인가. 가슴 한복판으로 설렁 금 하나가 지나간다. 오랜만에 나서는 길이 결국 이런 연유라니. 콧마루가 짠해 와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투박하고 낡은 신발이 눈에 들어온다. 이만하면 나선 길이 그리 두렵지만은 않겠다. 팔 년 전, 동생과 이레 동안의 미국여행에서 편안함이 입증된 단화이다. 영화 프리미어로 편집 일을 하는 동생은 가끔 외국출장을 갔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 언니 이번에는 꼭 데려가고 싶다고 진작부터 말했었다. 아이들은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미리 얘기되어 있어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형부, 형부 하며 조르다가 나중에는 제 남편까지 동원해서 허락을 받아낸, 나로서는 평생 있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물론 항공료의 절반값이 동생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도 톡톡히 한몫했을 것이다. 배낭을 메고 신장 문을 열었을 때 계절에 어울리지 않은 검정 통가죽이지만 자연스레 손이 간 것도 그 때문이다. 살갗을 스치는 오월의 바람이 훈훈하다. 아파트단지의 정문을 나가기도 전에 가벼운 느낌의 밝은색 단화가 마음 한구석에 떠오른다. 하지만 신발을 바꿔 신자고 다시 돌아설 만큼 여유로운 외출이 아니다. 뒤범벅으로 똬리를 튼 감정이 턱밑까지 북받쳐 올라와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내 아이 또래의 학생 몇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배낭을 끌어안고 정류장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자 도로 건너편의 늘어선 은행나무가 햇발 아래 푸르다. 그 너머 단정히 전지된 사철나무 울타리가 있고 안쪽에 20층짜리 아파트 마지막 동의 창마다 맑은 고요가 잠겨 있다. 변함없이 안정적인 풍경이다. 보고 있자니 민망스러워진다. 허허로운 바람이 가슴팍으로 밀려든다. 어느새 눈가가 젖었다.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꾹꾹 누른다. 살며시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북받쳐오는 마음을 애써 다독인다. 그곳에 가려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결혼하기 전 가끔 찾던 곳. 삶이 버겁고 힘겨울 때, 쉬엄쉬엄 올라갔던 곳. 바람기로 생을 탕진하는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생을 진저리치던 친정어머니. 어머니의 간헐적으로 내퍼붓는 한탄 조의 지청구를 한바탕 겪고 나면 곧장 도망갔던 곳, 금정산 기도원이었다. 배낭을 꾸리면서 줄곧 그곳을 생각했다. 갈 데라고 딱히 집히는 데도 없었지만 혼자이고 싶었다. 눈물이 저항 없이 고인다. 먼 곳을 바라보다 지친 듯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앉았던 사람들이 일어서고 서 있던 사람들이 인도 끝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반사적으로 나도 일어섰다. 목적지를 향한 버스가 오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활기차고 분주한 차창 밖의 풍경에 어느 먼 고장으로 와 버린 느낌이다. 안내 방송이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는 유명한 시장도로임을 알려 준다. 버스 정면에 부착된 동그란 시계의 바늘이 한창 바쁜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퇴근길이고 저녁 준비로 장을 보는 사람들. 그들의 움직임이 설핏 지는 햇발에 눈부시다. 밥통 생각이 난다. 밥이 얼마나 있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끔 외출할 때면 으레 밥통을 확인하고, 아이들이 때를 거르지 않도록 조치를 해 두고 나오는데 오늘은 그냥 나왔다. 에라, 확인한들 무엇하리. 쌀을 안쳐 놓고 나오면 나오는 의미가 있나. 잘 잊었다. 결국,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마흔을 앞두고. 도시의 경계를 벗어난 버스는 낯익은 풍경 속에 달리고 있다. 똑같은 형태의 건물, 똑같은 문구의 간판들. 은행, 마트, 이어지는 옷집, 쇼핑몰. 시내는 어디나 복제된 형상이다. 안내 방송에 따라 한 무리의 승객들이 내리고 탔다. 반복되는 배경에 반복되는 동작들. 체화된 틀에 갇힌 몸짓이리. 노선도를 본다. 갈 길이 멀다. 내려서 산성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차창에는 벌써 붉은 기운이 시들해지고 있다. 달리는 버스의 지속적인 흔들림에 언제까지고 몸을 맡기고 싶다. 슬그머니 눈을 감는다. 어제저녁, 화를 참지 못한 남편은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다가 내 머리카락을 거머쥐고 흔들며 쥐어박았다. 그 순간 맞은편 화장대 거울에서 친정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거울에 눈길을 붙박은 채 헝클어진 머리를 고갯짓으로 바로 했다. 이제는 마주 봐야했다. 보기 싫은 것일수록 마주해야 한다고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남편의 격한 어조가 다시 왕왕 울렸다. “그래, 내가 뭘 잘못했지? 그럼, 아들한테 말도 못해? 내 맘대로 말도 못하냐고. 말할 때마다 너에게 허락받고 말할까? 쟤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과잉보호한다고 그래. 왜 자꾸 내 말을 자르는 거야. 너,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알아?” 나는 가슴이 떨려왔지만, 그가 모르는 속말을 이번만은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나는, 당신이 아들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난…… 난 말 못해? 안 그러겠다고 했어도 그렇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왜 내 말을 다 듣지 않고 아이에게 가서 그래?” 앙칼진 나의 목소리에 남편은 멈칫했다. “…… 너 이야기 듣고 걱정이 돼서 아들한테 가서 물었다. 밥을 왜 안 먹었느냐고. 내가 뭐 나쁜 말 했니?” 이렇게 하찮은 것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찮은 한순간이 살아온 세월을 휘발시키는 순간은 허다하다. “너, 날 참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이를 물고 부르르 떨며 남편이 내 얼굴에 대고 씹어뱉듯 말했다. 순간, 딸아이가 맞추다 둔 작은 상위의 퍼즐 조각이 떠올랐다. 흩어져 있는 것들, 상자에 담겨 있는 조각들, 조각들은 틀린 것이 아니라 어긋나 있는 것, 자리를 잡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림이 되려면 우린 멀었고 그도 나도 비켜나야 했다. 하지만 나만 비켜나면 되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 꼬부장한 생의 조각들을 내가 배열할 수 있는 날은 없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남편은 기고만장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쟤를 잡아먹을까, 아침마다 학교까지 태워다 줘, 필요하다는 거 다 해 줘… 먹고 싶다는 거 다 사 줘.” 남편은 일주일에 한두 번 새벽시장에 간다. 차로 이십 분 정도의 거리이다. 때론 내가 주문한 채소도 있지만 대체로 제철의 횟거리와 해산물을 잘 사왔다. 문어는 마트의 반값인데다 살아 있고 어떨 땐 금방 죽은 것을 덤으로 얻어오기도 했다. 가을엔 전어를, 겨울엔 굴을, 이른 봄까지는 낚시로 잡은 자연산 숭어를 사 와서 회를 떴다. 물론 손질도 썰어 내는 것도 남편이 직접 했다. 아이들은 싱싱한 해산물과 식사를 하고 등교했다. 스포츠용품으로 자영업을 하는 남편의 출근 시간은 아침 10시다. 8시면 학교 부근까지 차로 아이들을 데려다 주었고 퇴근길엔 아이들의 전화를 받은 대로 문방구로 마트로 들러서 수업 준비물이나 간식거리를 사왔다. 운전을 못 하는 나로선 할 수 없는 부지런함이다. 그럼에도 꼭 집어낼 수 없는 불안이 가슴을 답답하게 눌렀다. 어제,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사 먹은 간식이 소화가 안 돼서 속이 안 좋다고 현관을 나가며 말했다. 킥 복싱 도장을 가는 길이었다. 그럼, 갔다 와서 먹도록 하자며 나는 뜨던 국을 솥에 도로 쏟아 부었다. 때로 식사를 못할 수도 있지, 생각하면서도 왠지 아들의 말이 매몰찬 거절로 느껴져 국솥을 휘졌고 있었다. “엄마, 그거 어디 갔어?” 언제 제 방에서 나왔는지 딸아이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중학생이 되고부터 방문을 꼭 걸어 잠그던 딸아이는 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한 살 위인 오빠라 그런지 대하는 행동이나 말투가 초등학생 때와 판이했는데 식사도 오빠와 따로 했다. 오빠로 보기보다는 동년배 이상으로 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들 사이에 중간 역할은 말 그대로 신경전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뭐?” “퍼즐 마무리하는 풀.” “아, 그거 버렸어.” “그걸 왜 버려, 아직 다 붙지도 않았는데. 여기 봐, 중앙에 다 떨어지잖아.” 앵돌아진 딸아이의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나는 할 말이 있었지만, 아이의 태도를 한 마디로 무지를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계속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용인즉, 500조각의 퍼즐을 맞추느라 몇 날이 걸렸는데 풀을 제 허락도 없이 버려서 작품을 다 망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심장이 뛰었다. 액자에 넣겠다며 풀칠해서 거실에 둔 지가 달포도 더 된 것 같아서 낮에 청소기를 돌리다가 퍼즐이 놓인 상을 한쪽 벽면으로 옮겼고, 풀이 담긴 튜브를 버렸던 것이다. 나는 베란다의 수거함을 뒤져서 상 위의 원래 위치에다 그것을 갖다 놓았다. 딸아이가 성난 모습의 남편과 빼닮은 얼굴을 하고 퍼즐 판에 튜브를 쥐어짜며 명제인 듯 말했다.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도대체 생각이 없다니까.”
천공 저쪽은 아직도 대낮의 잔영이 남아 연분홍빛인데 스쳐 가는 눈앞의 풍경엔 먹빛이 빠르게 풀어지고 있다. 꿈속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언젠가 걸었던 길 같기도 하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데서 오는 허무적 기분과 이제야 홀로 먼 곳까지 왔다는 야릇한 안도감이 뒤섞여 가슴이 멍하다. 노선도를 보니 여섯 정거장만 가면 될 것 같다. 옆자리에 놓아둔 배낭을 들어본다. 역시 묵직하다. 네온사인으로 이어진 도롯가의 풍경이 일제히 화려해졌다. 불빛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현란한 빛깔의 불덩이가 켜졌다 꺼졌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오른쪽으로 흐르는가 싶더니 왼쪽으로 흐른다. 간판들이 저렇게 요동치니 저것은 필시 유혹이다. 유혹이라도 단단한 유혹이다. 이럴 땐 차라리 저런 불덩이 같은 유혹에라도 빠져 버렸으면. 하지만 그것도 멋모를 때의 이야기다. 유혹의 기본이 베일의 작용 아닌가. 나에게 가려진 것은 무엇인가. 결국, 두 종류의 생명체, 각기 다른 성의 부대낌일 뿐이겠다. 강렬하게 고동치는 도시 너머 검은 산의 완만한 윤곽이 보였다 사라졌다 반복하고 있다. 기도원은 산성으로 가는 마을버스로 제법 산길을 돌고 돈 다음 삼십 분은 족히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그곳까지 오가는 차가 기도원에도 있겠지만, 달랑 나만을 위해 부를 수 없는 노릇이다.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고만 당혹감이 슬며시 밀려든다. 어쩐다. 집을 나설 때의 계획대로라면 씩씩대며 올라가야 하지만 저 산속을 어찌 혼자 올라가겠는가. 이렇게 되면 버스를 계속 타고 갈 이유가 있나. 한 정거장이라도 덜 가서 내려야 할 것 같다. 어디로 가지? 약간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나올 때부터 예상했던 상황이 결국, 닥쳤고 시간상 이럴 것 같기도 해서 마음 한편으론 변경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길은 내 멋대로다. 버스는 일정한 간격으로 안내방송을 하고 내리는 사람만 있다. 나도 이번에 내려야겠다. 팔 차선 도로의 건너편은 현란한 네온이 불야성을 이루는 반면 이쪽은 지하철의 고가 다리 그늘로 어두침침했다. 인적 없는 길을 드문드문 떠있는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걸을 수밖에. 친구가 다닌 대학이 길 건너 있었고 부근에 지하철역사가 있었는데. 좀 더 가야 하나. 아, 배낭의 무게가 만만찮다. 뒷짐을 지듯 두 팔로 배낭을 바쳐본다. 한결 가볍다. 엉거주춤한 자세가 마음에 안 들기는 해도 누가 보는 것도 아니니 어때. 아니, 본들 어떠리. 자식도 남편도 안 맞아 집 나온 여자가 무슨 남의 눈을 상관한단 말인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사통팔달로 길이 깔린 지하철 역사를 빨리 찾아야겠다. 덮칠 듯 달려와 멀어지는 자동차들, 귓속으로 빨려드는 굉음의 질주, 크고 작은 헤드라이트 불빛에 정신이 없다. 아무래도 내린 곳이 어중간한 위치였나. 역이 보이지 않는다. 등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얼마나 걸었을까. 휘어진 보도를 따라 노르스름한 불빛을 안은 제법 큰 건물이 전방에 다가온다. 저 건물이 지하철 역사? 아. 예전의 역사 자리가 확실한 것 같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바닥으로부터 미세한 울림이 느껴지자 달려오는 지하철 진동이 머리 위로 와락 쏟아진다. 순간, 검은 물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철커덕철커덕철커덕. 바퀴들이 심장 위를 구른다. 검은 물체는 시커먼 벙거지를 쓴 남자였다. 역사의 불빛만 보며 가고 있는 내 앞으로 남자가 몸을 기울이는 바람에 느닷없이 나타나 보였다. 몸이 얼어붙는 듯했지만 지나치며 남자의 어깨에 두툼한 배낭끈을 보았다. 묘한 기분이 스친다. 같은 차림을 하고 같은 길 위에 있는, 시공간을 통한 공감일 리는 만무하고 미처 보지 못한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떠올라 막연한 두려움이 섬광처럼 다가왔다. 어깨를 짓누른 배낭에 등이 따끔거린다. 허리에 힘을 잔뜩 넣고 걷다가 슬그머니 돌아봤다. 남자의 배낭이 기우뚱거리며 멀어지고 있다. 허리가 푹, 꺾인다. 그러고 보니 늦은 아침밥 한 숟가락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어제저녁부터 입맛이 똑 떨어진 것이다. 오늘 저녁이나마 애들과 함께 먹을까 했는데. 역사에 들어서자 매점이 보인다. 한산하기 그지없어 사는 행위조차 어색할 정도다. 어쩐다. 허기를 느끼다니. 내 속의 내용물들이 이제야 제 위치를 찾아가는 건지. 그러나 나는 아직도 한바탕의 악다구니를 담고 있다. 낮에 딸아이에게서 생각지도 못할 소리를 들었다. 삼 년째 퍼즐 세트를 사 모으는 아이의 방은 항상 퍼즐 조각이 뒹굴었다. 학교에서 막 돌아온 아이의 방문을 연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퍼즐들을 발로 밀치며 책상 앞으로 갔다. 퍼즐 판에 머리를 박고 앉아 있는 아이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 내동댕이치고 고음 섞인 한마디를 던졌다. 발딱 일어선 아이는 몸으로 나를 밀어내고 눈앞에서 세차게 방문을 닫더니, 엄마가 그 모양이니까 아빠가 엄마한테 그러지. 괜히 그럴까봐. 모가 나서 갈라지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방문을 넘어 날아왔다. 나는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고 되도록 최대한 이성적인 상태에서 집을 벗어나고자 애썼다. 아이의 말에 기가 막혔지만 그에 대한 노여움은 없었다. 남편이 그동안 나에게 한 행동들과 아이들에게 보여 진 모양새가 일시에 얼굴을 덮치듯 떠올랐고 명치에서 그를 향한 뜨거운 비명이 치밀었다. 민망했다. 자식들 앞에서 더 이상의 민망함은 허락할 수가 없다고, 없어야 한다고 나는 줄곧 그 생각으로 배낭을 꾸렸다. 어디론가 목적을 정해야 하는데 감정이 제 마음대로 뻗쳐나고 있다. 횡설수설하던 마음 끝에 며칠 전에 있었던 시어머니와의 전화통화가 떠오른다. 애들 아범과 곧 갈게요. 장사하는데 와지겠니, 시간 안 되면 오지 마라. 아니에요, 늦더라도 가야죠. 가게 한다고 늘 미뤄지고 말았던 시댁행이다. 혼자 불쑥 가는 것이 마뜩잖지만 시어머니께 간다고 해 두었으니 그리 느닷없지는 않을 것이다. 친정은 생각조차 하기 싫고 지금 상황으로선 차라리 시댁행이 더 타당하겠다. 먹자골목에서 요기한 후 오늘 밤만 해결하고 아침 일찍 나서야겠다. 연세가 있으시니 솔직히 다 말해 버릴 수 없는 일이긴 해도 상황을 봐서 다 이야기할 것이다. 혼자가 되신지 몇 년 됐으나 일주일에 두세 번 교회에 가시고 의료기 체험장에서 친구들을 사귀며 지내신다. 홀로 적적할 수도 있는 시간을 잘 보내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분께 딱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원망도 손톱의 거스러미처럼 있다. 그것은 당신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알지만 부모이기에 돌아가는 원망이겠다. 남편의 나에 대한 이기적인 욕구를 생각하면 태평한 삶을 누리는 그의 부모가 미워지는 것이다. 이참저참 시댁행이 최선이겠다. 플랫폼에 내려서자 막 빠져나간 열차의 여운이 한 줄기 낯선 바람으로 휘돌고 있다. 전광판 시계의 숫자가 8:45를 표시했다. 여기저기 사이버틱한 이미지의 커다란 광고판이 낯설다.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는다. 강행군이었다. 몇 킬로그램인지 정확하지는 않아도 이만한 무게의 배낭은 평생 처음이다. 이 시간까지 홀로 타고 걷는 것 또한 결혼 이후 처음이다. 그동안 잘 살아온 것일까. 잘 살아낸 것일까. 몇 년 전 남편과 친척집 행사에 갔다 오며 역에서 노숙자들을 봤다. 낡은 부댓자루가 부려진 듯 제 몫의 생에 부려진, 그들은 나와 다를까? 달라 그리되었을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이리 나와 하루 이틀 거리에서 보내다 보면 그리되지 않을까. 마음 하나 놓으면 어디 선들 눈 붙이지 못할까. 인기척에 돌아보니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걸음걸이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불안해 보인다. 무릎이 툭 튀어나온 면바지에 휘주근한 잠바를 받쳐 입은 남자다. 여기서 봐도 보통 취한 것 같지 않다. 이 도시는 벌써 잠들었나. 건너편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전철을 타려는 사람이 저 남자뿐인가. 저 남자, 계속 이쪽으로 오면, 와서 내 옆에 앉으면…. 남편이 옆에 없으니 사람이 옆에 오는 것도 신경 쓰이는 것은 밤이 어서 그런가 여자여서 그런가. 간잔지런한 눈길을 한 남자가 이쪽으로 오다가 비칠대더니 가까이 있는 벤치에 털썩 앉는다. 남자와 나 사이에 띄엄띄엄 벤치 두 개가 있다. 다행이다. 남편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개수대에서 설거지할 때, 돌아서서 식탁을 닦을 때, 방바닥을 닦을 때 그의 손은 언제인지 나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고 샅을 슬몃슬몃 건드리며 칭얼대듯 말한다. 너 아니면 집이 되어가나, 너 없는 집은 집이 아니지. 사랑해, 라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오기 한 시간 전쯤에 전화벨이 울린다. 애들은 왔나. 사랑해. 윤기 도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딸각. 그 소리는 또 하나의 폐쇄적인 소리다. 철컥. 현관문 잠그는 소리와 흡사하다. 남편은 직접 문을 잠근다.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그는 여유롭게 나를 탐하고 출근한다. 현관문이 닫치고 벽과 문이 맞물려서 잠기는 금속성 소리. 그 소리를 안에서 듣는 순간은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고 싶다. 큼큼, 복도를 울리는 남편의 콧소리. 불거진 배를 하고 거칠 것 없는 화장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기척에 곧바로 현관문을 열었다가 문짝이 부서져라 크게 닫곤 했다. 어쩌다 바깥 모임이 있을 때면 영락없이 문자메시지가 들어온다. 어디야. 잘 놀다 조심해서 들어가. 지금 전화벨도 문자메시지 도착 소리도 없다. 휴대폰을 끈 채 배낭 밑, 바닥에 두었다. 밑바닥. 남편은 자꾸 나의 밑바닥을 보려 했다. 벤치에 앉은 남자가 슬쩍슬쩍 힘없이 머리를 흔들며 이쪽을 보고 있다. 잠깐 눈이 마주치자 드러내놓고 나를 보고 있다. 남편이 곁에 있었다면…… 그래도 저렇게 보았을까. 남자의 옆모습에 남편의 얼굴이 겹쳐진다. 능멸의 코웃음 나온다.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라 눈길을 정면으로 돌렸다. 따르르르릉. 지금 도착할 열차는 신평, 신평행 열차입니다. 안내 방송이 울리자 플랫폼의 건조한 공기가 일시에 출렁인다. 남자가 근드렁대며 이쪽으로 오는가 싶더니 정면에 보이는 철로난간에 가 선다. 나도 간격을 두고 천천히 일어선다. 40분 남짓 열차가 달려 도착한 곳은 생각 밖에 썰렁했다. 현란함이 밀집했던 지하상가도, 극장 앞의 떠밀려 다니는 분위기도 온데간데없다. 먹자골목에도 노점들이 다 들어 가버린 상태다. 경기가 안 좋다는 사람들의 말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다문다문 떠 있는 먹거리의 리어카불빛만 찬란하다. 호떡 하나를 서서 먹고 식당이 즐비했던 곳으로 기억을 더듬어 걷는다. 국제시장통.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포목점과 각종 도매상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도로 건너 깡통시장은 언제나 박작거리며 북새통을 이루었고 그 끝에 시댁이 있다. 마침내 골목길로 접어들자 사위가 어둑하다. 상점들의 셔터가 모두 내려져 있고 저만치 불빛 몇 개가 골목을 깊숙이 비추고 있다. 길의 끝, 건너편은 시어머니가 계신 곳이다. 먹물에 잠긴 것 같다. 순간, 둔기로 맞은 듯 정수리가 번쩍한다. 의식의 심연 위로 비로소 솟아오른 기억. 저곳엔 이제 시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그럼…… 어디…… 어디지. 어디 계시지. 어디로 가신 걸까.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지난 명절, 설과 추석 때 우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정신이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둑한 골목의 중간에서 건너편 암흑을 마주한 채 서 있다. 또 다른 절망에 빠져들까 빨리빨리 기억을 소급해 본다. 직장을 다니며 이 길을 홀로 출퇴근했던 때가 있었다. 아침 출근길을 더듬어 본다. 저녁 무렵 퇴근길을 더듬어 간다. 아. 사 년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이사를 하셨다. 세를 내주고 있는 지금의 가게 이 층으로. 근처에 아주버님 댁도 있어 이곳을 정리하고 가신 것이다. 늘 남편의 차로 집 앞에서 출발해 집 앞에 도착해서일까. 내 기억 속의 시댁은 결혼 후 잠깐 직장을 홀로 출퇴근했던 그 시절에 있었다. 왔던 길로 방향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한다. 갑자기 요의가 밀려온다. 지하도 화장실에 들어서자 형광등 빛이 부드럽다. 흐억흐억. 누가 구토를 하는가. 좁은 공간을 메운 소리가 자극적이다. 끽, 끽, 끽. 절박하게 들린다. 끼긱끼긱. 나는 소리 따라 화장실 칸막이 문을 급하게 열어젖혔다. 온갖 악취로 버무려진 훈기가 와락 달려든다. 꼭 껴안고 있는 그들은 매달린 채 엉긴 넝마 주머니 같기도 하고 잿빛 곤충의 교미 같기도 하다. 돌아서 있는 남자의 어깻숨을 따라 여자의 머리통이 까딱거린다. 덩어리진 까만 머리카락이 여자의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다. 얼굴만 보이는 여자는 입술을 뒤틀며 살가운 웃음을 짓다가 멈춘다. 눈빛이 나의 목덜미를 거머잡을 듯하다. 황망한 발걸음으로 나는 재빨리 화장실을 벗어난다. 매표소로 향한 발길이 더 빨라지고 있다.
“너, 너. 해주 아니야?” 시댁이 코앞이라 지하도 계단을 급히 오르는데 짙은 남색 체크무늬의 스트라이프정장을 한 제이가 내려오고 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가지런한 치아가 환하도록 웃는다. 그가 이 도시에 살고 있음이 떠올랐다. "응…… 그래. …… 여전하구나." 하필 이런 상황에 만나다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늘 보던 사람이듯, 그가 스스럼없이 다가와 예의 매력적인 울림의 목소리로 너야말로 여전하네, 한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느라 그런지 몸을 약간 흔들었다. “여전하긴.” 2년 전에 처음 참석한 대학의 과 동창 모임에서 봤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여전하다고는 했지만 세월의 간극을 무엇으로 메우리. 여전하다는 나의 말은 2년 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도 역시 그때 봤던 나의 모습을 두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한때 연극배우였다. 한창 잘 나가던 때에는 시에서 주최하는 연극제에서 신인상을 받더니 그 이듬해 남우주연상도 받았다. 나도 스텝으로 치다꺼리하며 그가 있어 즐거웠다. 아마 나의 전 시절을 통해 그때가 가장 맑은 웃음을 지은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그는 곧 시의원인 아버지의 강권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이제는 모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굵직굵직한 건설 사업을 하고 있다고 동창 모임에서 들었다. “어디를 가느라고.” “한 며칠 휴가받아 나온 몸이야.” 나는 배낭의 무게를 의식하며 말했다. “야. 난 또, 네 남편 대단하네.” “대단하긴 뭘…… 나, 정기적으로 휴가 나와.” “그래? 정기적인 휴가라…… 바람직하게 사네.” 제이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과 달리 대화가 겉돌아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다. 그럼 다음에 봐, 나는 손을 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묵직한 통증이 가슴께를 통과했다. 지상을 향해 몇 걸음 올라갔을 때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도리어 원하지 않는 상상을 부추길까 뒤돌아섰다. “급한 길 아니면 잠시 같이 있다 가.” 그가 한달음에 달려와 나의 팔을 잡는다. 나는 웃으며 나의 팔을 잡은 제이의 소매 끝을 잡아 살며시 내리고 스스로 결정한 듯 걷는다. 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단번에 나를 데려가 앉혔다. 카페인지 주점인지 혼미한 불빛이 생소하다. 쓰러지듯 깊숙이 제이가 옆에 앉는다. 낯선 향기가 허공에서 머뭇거린다. 어깨의 검은 실루엣이 내 옆에서 우람하다고 느껴지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아내와 애들은 물 건너 가 있다고 제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물 건너 어디, 하고 물으려다 만다. 마실 것과 앙증맞은 모양새의 요리가 테이블에 놓이자 제이는 잔을 들었다. “마셔봐. 설마 먹지도 못할 걸 시켰겠니? 예전에 네가 먹던 거야.” 들어오며 묻지도 않고 무언가를 주문한 것에 내가 의구심이라도 품은 줄 아는 모양이다. 연극 연습을 마치고 모두 헤어지고 나서도 그와 나는 캠퍼스 언덕을 오르내리든지 어디론가 붙어 다니곤 했다. 그때 명분을 붙여 가끔 마셨던 칵테일이었다. 자동차 점검이 있어 지하철을 이용하려다 만났지만 제이는 오늘의 나를 기다린 것만 같다. 잔을 든다. 셜리템플이 요요한 조명에 붉은 늪 같다. 서서히 몸 안으로 흘러드는 액체가 피곤함을 깨운다. 예전의 친구였고 지금도 친구다. 친구의 어깨에 나의 몸이 기댄다. 뜻하지 않게 만났고 하루쯤 함께 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좀 더 느긋하게 그에게 기대었다. 제이는 한쪽 팔을 펼쳐 내 목덜미를 받쳐주었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잔을 들고 마셨다. 나는 슬며시 눈을 감는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멀리서 흔들리는 창밖의 불빛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다 다시 감는다. 보이지 않지만 제이는 아까와 달리 굳어진 표정 같다. 어색한 침묵이 그러하다. 뜨거운 그의 호흡이 목덜미에 감긴다. 그는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겠지. 흔들리는 눈동자 속으로 그저 나를 던지고 싶다. 그때처럼 나를 기다리는 걸까. 양쪽 집안의 가세가 너무도 차이 나는 것을 먼저 안 나는 그때 그에게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런 나를 그가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이 완전히 열리기를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 마음, 이제 와 이렇게 열리다니. 나는 제이 쪽으로 몸을 틀었다. 흔들리는 눈빛을 한 그가 나를 보고 있다. “나, 그만 가 봐야겠어.” 나는 테이블을 밀치고 그를 빠져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내 배낭이 그의 어딘가를 때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침침한 계단 중간에서 나는 멈추었다. 내 어깨를 잡은 그가 거기서 오래도록 내 입술을 탐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택시를 타고 달린 지 얼마나 됐을까. 제이의 한마디에 알 수 없는 장소에서 택시가 멈췄다.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의 가로등 불빛이 엔진 소리에 파르르 떨었다. 빈 택시가 쏜살같이 어둠 쪽으로 빨려들자 그가 내 허리를 힘껏 당겼다. 다른 손으로 그가 허공을 가리켰다. 검은 바다에 떠 있는 방주처럼 형상대로 금빛 테를 두르고 있는 건물이었다. 불빛은 버스 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번쩍거렸다. 어릴 적, 아버지와 밖에서의 일박도 그렇게 현란한 불빛을 통과했다. 그 불빛의 선명함이 지금 나를 관통한다. 그가 나를 이끌고 객실로 들어섰다. “우리, 조금만 있다 가자.” 나를 두고 그가 들어간 곳에서 곧 물소리가 들려왔다. 객실의 베란다 창에 어둠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다. 산이 가로막고 있는지, 들이 펼쳐졌는지, 강이 흐르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원하던 순간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저쪽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마주 보이는 먹빛 창에 그녀의 모습이 또렷하다. 화장실에서 살을 섞던 그녀다. 그 웃음은, 눈빛은. 그녀는 온통 그 일에만 집중한 걸까. 나를 조롱한 걸까. 그녀… 굴종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남편의 몸은 내 몸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를 원했다. 슬그머니 다가와 집요하게 요구하는 만큼 그의 몸은 자신이 누릴 것만 챙겼다. 내 몸보다 먼저 느끼고 먼저 끝을 맺는 그의 몸은 십몇 년을 지나오면서 도무지 내 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몸만이 몸일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몸이 내 몸을 원할 때 받아 주지 않으면 더욱 확실했다. 결국, 온 식구가 불안에 떨게 되는 것이었다. 어제저녁 남편은 나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아들의 방문을 벌컥 열고는 왜 밥을 안 먹었느냐며 고각함성을 질러댔다. 생각이 깊은 아들은 느닷없는 질문에 대답을 더듬었고 내가 대신 대답했다. 그때 내 맥박은 아마 사맥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아들 대신 내가 대답한 것에 분노했다. 아니, 전날 그의 몸을 거절했음에 대해 계고장처럼 심기를 드러냈다. 나는 그의 몸을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몸이 내 몸을 모르듯이…… 그러나…… 아아. 허깨비 같은…… 낯익은…… 남편보다 더 강퍅한 얼굴을 결국 마주하고 말았다. 성숙치 못한 남편이라고 그의 몸 아래서 온갖 방법으로 그를 추락시킬 상상을 품던 얼굴이 아닌가. 불만으로 조성된 긴장을 반란으로 해소할 꿈을 꾸는 몸가짐은 삶을 흉내만 냈다. 논리와 지성과 상식을 동원하여 나는 남편을 용납하지 않았다. 굴종으로 인한 공생만을 유지했다. 늘 부재중이었던 아버지. 어머니의 입으로 전해 들었던 아버지는 남편이 다가올 때마다 중첩되어 떠올랐다.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녀가 함께 외출했던, 어머니도 까맣게 모르는 여섯 살 때의 기억에 존재하는 아버지 모습이다. 몸 어딘가에 있는 점처럼 어딘가에 아버지가 있다는 의식만 남아 있던 무렵이었다. 검정 승용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며칠 집에 있더니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며 외출준비를 했다. 거울 앞에서 주홍빛 넥타이를 매느라 턱을 치켜든 채 너도 갈래? 하고 아버지는 나에게 물었고 어머니는 반색하며 당장 나를 예쁜 인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따라나선 길은 신기하였다. 처음 보는 아저씨들과 요리 집에도 가고 다방에도 갔다. 여자의 비음 섞인 웃음소리와 규칙적인 진동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알 도리가 없는 여자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고 아버지는 승용차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차창 밖이 깜깜했다. 잠결에도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알았다. 엄마가 생각났지만 자는 척했고, 아치형의 달뜬 불빛을 여자에게 안겨 통과했다. 낯선 방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나란히 누웠다. 나는 창 쪽 여자 옆에 뉘어졌다. 치명적인 배반일수록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임을 그날 밤 목격했다. 아버지는 하나의 소품인양 나를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환한 얼굴로 나에게 원피스를 입혀주던, 아버지와의 외출을 배웅해주던 어머니와 내가 처한 상황을 곱씹으며 차가운 눈물을 삼켰다. 언제, 누구에게든지 배반당할 수 있다는 것을 푸르스름한 창문을 올려다보며 몸에 새겼다. 검은 거울에 슬픈 얼굴이 떠 있다. 어머니처럼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자국걸음으로 산을 오르던 그때, 하찮은 생이라고 서로 홀대하던 그때, 생의 보잘것없음에 몸서리치며 내 생의 권위를, 당위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사는 것이라고, 살 수 밖에 없다고,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려 주겠노라고 했었다. 제이에게서 그렇게 떠났었다. 한때는 내 생의 이면에도 살아볼 만한 무엇이 있을 거라고 기대한 적이 있다. 누구에게든 인정받고 싶었다. 어머니의 중매와 강권으로 결혼했을 때, 사실 결혼을 분기점으로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갈수록 독재적이었다. 명령조의 말투에 반역을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일방적으로 나의 몸을 품을 때, 서슴없는 강압으로 알 수 없는 체위를 유도할 때 나는 입술을 앙다물어야 했다. 그런 후, 모로 돌아누운 그에게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란, 낯모르는 여자와 한방에 누운 그 밤의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소음이었다. 가쁜 한숨만 소리 없이 토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도 낯선 여자를 품을 것만 같고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는 상상으로 밤을 새우다가 자신이 남편의 하룻밤 낙樂인 여자로 전락하고 만 것 같았다. 지상에서 남편이 영원히 부재하기를 꿈꿨다. 밑바닥. 누구도 모르는 나의 밑바닥이 이것이다. 이 공간에 들어서며 내 발걸음은 주춤거렸다. 아이 때문이다. 낯선 여자와 아버지를 지켜본 아이는 나에게서 분리되지 못하고 그 밤에 멈추어 버려 나의 심연 속에서 나를 통제해 왔다. 아버지가 나를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아이를 떨치고 싶다. 제이와 함께 침대에 오른다면 떨칠 수 있을까. 헝클어진 퍼즐 조각들이 자리 잡듯 제이로 내 감정의 조각들이 정리될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제이는 긴 손가락으로 내 손을 깍지 끼고 진저리치며 잡더니 나의 겉옷을 헤집었다. 맨살 어디엔가 그의 손이 닿자 일제히 곤두선 감각들이 나를 묶었다. 손은 따뜻했다. 차창의 아득한 어둠을 응시한 채 그에게 몸을 맡겼다. 제이, 나를 가져 봐. 느닷없는 소리가 가슴에서 울렸다. 어느 사이 그의 목덜미 아래다.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속눈썹에, 볼에, 코에, 귓가에 뜨거운 입술을 찍었다. 턱선을 따라 호흡을 빼앗듯 내 입술을 빨았다. 눈을 감는다. 이지러진 표정의 아이가 순간 눈앞에 또렷하다. 어서 여기서 나가기를 종용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남편의 품에 있을 때도 같은 표정이었지 않은가. 내게 향한 경멸로 일그러진 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아내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남편을 생의 실패자로 낙인찍고 멸시를 품었다. 왈칵, 뜨거운 것이 뺨에 쏟아진다. 재킷의 양쪽 호주머니를 뒤진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는다. 손수건은 없고 퍼즐 조각 하나가 잡혀 나온다. 딸아이는 국그릇과 밥그릇 사이에 퍼즐 판을 펼쳐 놓았다.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이 이미 지나고 있었다. 가슴이 화끈거렸고 식탁 모서리에 외따로 있던 조각 하나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딸아이는 그것을 찾느라 헤맸을 것이다. 손가락 끝에 퍼즐 조각 테두리가 울퉁불퉁 만져진다. 이어폰을 꽂고 퍼즐에 몰입해 있는 딸아이, 말수가 별로 없는 아들이 망막에 잡힐 듯하다. 내 몫의 조각은 내가 거머쥐고 있었다. 문제를 풀 듯 놓아가면 된다는 결기가 생긴다. 퍼즐 조각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배낭을 거머쥐고 일어서자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당신에게 머물 순 없어. 안녕. 제이. 소리 없이 문을 열자 혼미한 불빛이 복도에 가득하다. 엘리베이터의 딩동, 1층을 알리는 음향이 생소하다. 샹들리에 불빛과 어둠이 어우러져 아늘아늘 그림자가 진 유리문을 민다. 금빛 테를 두른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네온의 잔광 끝 저편으로 어둠이 거대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처음 느껴보는 냉기라고 화들짝 몸이 놀란다. 배낭 밑바닥에 두었던 휴대폰을 손에 들고 배낭을 어깨에 멘다. 어둠의 가랑이 속을 향해 걸음을 뗀다. 주먹만 한 별들이 머리 위에서 빛을 내뿜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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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울 문협샘들의 활약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축하드립니다.
경미 샘 !!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축하 드립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너무 섹쉬해서
갈 수가 음네예 한 그릇 
소. 

축하 합니다...경사 났네요,......고생 하셨어요^^
다듬고 다듬고 다듬었을 그 손끝이 느껴지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에 문협에 좋은 소식들이 많이 들리니 더 좋은 계절인 것 같습니다 이 가을을 좀 더 붙들어 놓는다면 경사스러운 일들이 자꾸 생길듯 합니다~ㅎㅎ 저도 퍼즐이란 제목으로 시를 한 편 끄적거리고 있는데 시간만 가고 ...아 어렵네요~ㅎㅎ 같은 제목이라 더 정감이 가고 축하도 많이 많이 해드리고 싶네요. 고생하셨어요^^*
이제야 봤네요.
감사합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해 주시니 기분이 좋고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함께 건필을 바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