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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行], 시공 불교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05756&cid=50763&categoryId=50784
① 산스크리트어 saṃskāra, 팔리어 saṅkhāra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식 작용. 무명에 의한 의지력·충동력·의욕.
② 산스크리트어 saṃskāra 분별하고 차별하는 의식 작용.
③ 산스크리트어 caryā 동작. 행위. 실천. 수행.
④ 산스크리트어 gamana 걸어감. 나아감.
⑤ 산스크리트어 saṃskāra 모든 현상을 움직이게 하는 힘.
[네이버 지식백과] 행 [行] (시공 불교사전, 2003. 7. 30., 곽철환)
행[行], 원불교대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4496&cid=50765&categoryId=50778
(1) 동작ㆍ행위ㆍ실천ㆍ실행ㆍ수행ㆍ행동 등의 뜻.
(2) 불교에서의 행(Saṃskāra)은 근본교리 가운데 하나인 12연기에서 두 번째 과정. 어리석은 마음으로 일체 동작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은 신행(身行)ㆍ어행(語行)ㆍ의행(意行) 등의 삼행(三行)을 뜻하며, 그것은 삼업(三業)과 같다. 즉 무지무명을 인연으로 하여 그릇된 몸과 말과 마음의 삼업을 발생하는 것이 행이다.
이 행은 그릇된 행위뿐 아니라 그 행위의 여력으로서의 습관력도 포함된다. 행위 경험은 어떠한 것이라도 그대로 소멸되지 않고 반드시 그 여력을 남기며, 그것은 지능이나 성격 등의 소질로써 보존, 축적되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행 [行] (원불교대사전)
행(行),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6%89_(%EB%B6%88%EA%B5%90)
행(行)은 범어 삼스카라(saṃskāra)의 역어로, '만드는 것'과 '이변(異變)하는 것'의 뜻이 있다고 하며,
12연기(十二緣起)의 제2행(行)은 전자, 즉 업(業)의 뜻이고,
제행무상이라고 할 때에는 후자, 즉 모든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수행(修行)이란 뜻에서의 행은 그 원어가 다르다.
업[業], 원불교대사전, 필자 김도공(金道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2823&cid=50765&categoryId=50778
[개요]
불교에서 말하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의 일. 불교의 근본교리 가운데 하나. 몸(身)ㆍ입(口)ㆍ뜻(意)으로 짓는 말과 동작과 생각, 그리고 그 인과를 의미함. 업은 짓는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또는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싼스끄리뜨 까르마(karman)의 의역으로, 음역하여 갈마(羯磨)라고도 한다. 정신으로 생각하는 작용인 의념(意念)이 뜻을 결정하고 선악을 짓게 하여 업이 생긴다. 의업은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으로 나누어진다.
사업은 뜻으로 활동하는 정신 내부의 의업이며, 사이업은 한번 뜻을 결정한 뒤 외부에 표현되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다. 곧 신ㆍ구ㆍ의 3업(三業)이라 한다.
또 몸과 입으로 외부로 나타나 표현되는 표업(表業)이 있으며, 그 표업이 끝난 뒤에 밖으로는 표출되지 않아도 선업이나 악업을 상속하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한다.
그리고 업은 선업ㆍ악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십선업(十善業)ㆍ십악업(十惡業)이 그것이며, 악업만을 단순히 업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착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선도 악도 아닌 무기심에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起業)으로 나누어 이를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하며, 그 업과가 나타나는 시기에 따라서는 순현업(順現業)ㆍ순생업(順生業)ㆍ순후업(順後業)의 3가지로 분류한다. 중생이 업과(業果)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을 업도(業道)라 하며, 여기에는 십선업도(十善業道)와 십악업도(十惡業道)가 있다.
[업사상의 배경과 전개]
인간은 의식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문화를 창조하며 살아왔다. 복잡다단한 인간역사는 의식의 전개과정이다.
석가모니는 무명(無明)에 사로잡힌 중생의 무지몽매를 일깨우기 위해 업보윤회전생(業報輪廻轉生)의 업사상을 천명했다.
당시 힌두교의 업이란 오직 유일절대 창조신인 범신(梵神)에 대한 제사행위만을 바람직한 선업으로 보았다.
그리고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비롯한 당시 대부분 사상가ㆍ종교가들은 운명적ㆍ숙명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서 유물주의ㆍ쾌락주의ㆍ고행주의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업이 타력적ㆍ운명적ㆍ숙명적 사고로 파악되고 있었다.
이에 석가모니는 업력이 역학적 인과관계에 의하여, 인연화합(因緣和合)의 관계에서,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에서, 그 마음의 주체의지에 의하여 그 강약이 나타남을 깨우쳤다.
이를 통하여 허구적인 창조론과 숙명적ㆍ운명적 허무주의에서 탈피하고 자유로운 업력의 주체가 되도록 했다.
특히, 인과응보의 교설과 더불어 업의 본질이나 분류에 관한 고찰이 심화되었고, 행위에 대한 과보(果報)로서의 업은 자연법칙적인 인과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윤리성에 직결된다는 것을 간파하도록 했다.
곧, 인간 가치 판단의 기본적인 것으로서 업보를 나타낸 것이다. 인간은 몸과 말을 통한 두 가지 업이 행해지고, 그 행위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표업으로 남는다. 이와 같이 인간의 행하는 일이 그 사람의 마음을 성숙하게 하고 마음속에 남게 하는 것을 향기가 의복에 풍기게 하는 것에 비유하여 훈습(熏習)이라 칭한다. 선악업의 잠재여력은 욕망과 우치(愚癡)와 진에(瞋恚)에 의하여 생긴다.
업의 결과가 과보이다. 그 과보와 동질성의 습기(習氣)가 잠재여력으로 남아 업장(業障)이 된다.
이것은 다시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으로 구분되는데, 공업은 생물이 공통으로 받는 업이고, 불공업은 개개생물, 즉 유정세간(有情世間)에서의 자업자득과 자작자수(自作自受)를 의미한다. 그러나 곧 개업(個業)이 공업으로, 공업이 개업으로 연결되어 사회업(社會業)의 공존공영으로 인한 윤회전생의 순환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불교에서는 사회와 개인이 결코 무관한 관계가 아님을 업을 통하여 인식시키고, 이와 같이 업을 파악하는 것이 깨달음의 첫걸음이 됨을 강조했다.
업은 일상생활의 굴레로서 회전하고 있다. 불교는 확실히 개개인의 해탈을 추구하고, 연기설(緣起說)은 유정(有情)의 생존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존, 예컨대 인간과 사회 환경과의 상호의존관계까지도 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사상이 수립한 법계연기(法界緣起)ㆍ무진연기(無盡緣起)는 시간적 관계에서 공간적 넓이를 가지고 추구된다.
불교의 업사상은 개인의 이숙(異熟: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모양)의 인과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공업이 추구되고 있다.
[원불교의 업]
소태산대종사는 영가(靈駕)의 천도를 위한 법문에서
“이 세상에서 네가 선악간 받은 바 그것이 지나간 세상에 지은 바 그것이요, 이 세상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 또 다시 받게 될 바 그것이니, 이것이 곧 대자연의 천업이라,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고를 받게 되므로 부처와 조사며 범부와 중생이며 귀천과 화복이며 명지장단(命之長短)을 다 네가 짓고 짓나리라”(《대종경》 천도품5)고 했으며, 또한
“사람의 영식이 이 육신을 떠날 때에 처음에는 그 착심을 좇아가게 되고, 후에는 그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없는 세상에 길이 윤회하나니, 윤회를 자유 하는 방법은 오직 착심을 여의고 업을 초월하는 데 있나니라”(《대종경》 천도품11)고 했다.
소태산은 윤회의 원인이 업에 있다고 보았으며, 업을 짓는 원인을 착심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하여 착심을 두게 되면 업을 짓게 되고 그로 인해 무한한 윤회를 반복하게 된다고 보았다.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은 자성의 본래를 깨달아 마음의 자유를 얻어서 업을 돌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업 [業] (원불교대사전)
업[業], 철학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88288&cid=41978&categoryId=41985
산스크리트어의 karman의 번역어. 처음에는 작용, 행위를 의미하였다. 불교에서는 신(身)ㆍ구(口)ㆍ의(意) 등 세 종류의 행위를 말한다. 즉 인간의 행위는 신체에 의한 행동과 언어에 의한 발표, 그리고 의식 내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일상적 행위는 반드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사후의 운명에 관계하고 '윤회'의 길을 결정한다. 선을 행하면 극락에 태어나고 악을 행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인데, 일반적으로는 '선인낙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로 나타난다.
낙(樂)이라든가 고(苦)라든가 하는 것은 선업(善業)ㆍ악업(惡業)의 '과보'(果報, vipāka)이다. 과보에 의해 행위를 분류하면, '복업', '비(非)복업', '부동업'(不動業)의 세 종류가 된다. 또 업에 기초한 인과관계를 통해 보면, 현재의 상태는 과거의 업의 결과이고 미래의 모습은 현재의 업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업이 고(苦)라는 결과를 낳는 까닭은 그것이 번뇌에 의해 야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에서 혹(惑 : 번뇌)ㆍ업(業)이라는 관계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업은 행위와 그 원인이 되는 잠재적인 동인(動因)의 두 면을 포함하게 된다.
한편 행위나 작용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면, 그것들은 모두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순간적 현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지속성과 통일성이 보여지는 것은 전후 순간의 행위를 관련지우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잠재적인 업, 잠재적인 번뇌, 형성력으로서의 행(行, samskāra)은 그와 같은 힘을 말한다.
후에 발달한 불교 교의에 의하면,
이것을 이전까지의 행위의 여세라는 의미에서 '습기'(習氣, vāsanā)라 하고,
다음 행위를 야기하는 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종자'(種子, vija)라 부르며,
또 이 현상 자체를 '훈습'(燻習)이라 한다.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업이 윤회의 주체라고 생각하였다. 불교뿐 아니라, 인도 철학의 여러 학파에서도 각각 독자적인 업설(業說)을 주장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업 [業] (철학사전, 2009)
업[karma, 業],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89243&cid=40942&categoryId=31543
요약 불교에서 말하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
원어명 Karman
불교에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혹은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 Karman의 의역으로, 음역하여 갈마(羯磨)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신업(身業)·구업(口業)·의업(意業)으로 나누고 이를 삼업이라 하는데, 신업은 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고 구업은 언어적 표현으로 나타나며 의업은 정신적 활동으로 나타난다. 또 삼업을 세분하여 십업을 말하기도 한다. 밀교에서는 이를 삼밀(三密)이라 하여 신밀·구밀·의밀이라 칭한다.
의지의 활동인 사업(思業)과 사업이 끝나고 행하는 사이업(思已業)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의업은 사업이고 구업과 신업은 사이업이다.
또한, 착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선도 악도 아닌 무기심에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起業)으로 나누어 이를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하며, 그 업과가 나타나는 시기에 따라서는 순현업(順現業)과 순생업(順生業), 순후업(順後業)의 3가지로 분류한다.
중생이 업과(業果)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을 업도(業道)라 하며, 여기에는 십선업도(十善業道)와 십악업도(十惡業道)가 있다.
업의 본성에 관하여는 《화엄경(華嚴經)》〈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생은 4대(四大)로 이루어져 그 안에는 자아의 실체가 없고, 모든 존재의 본성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과보를 받는 것은 업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 업이라는 것도 실체는 없다.
마치 맑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여러 가지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종자와 밭이 서로 모르지만 싹이 트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지옥의 고통이 따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이와 같이 업은 실체가 없지만 일상을 통하여 선악의 업을 쌓으면 그것이 업인(業因)이 되어 업과를 받는다. 다만 선도 악도 아닌 무기업(無起業)은 과보를 이끄는 힘이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업 [karma, 業]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