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이대호(롯데 자이언츠) 선수는 지난 8월 세계신기록인 9경기 연속 홈런을 쳤다.
국가대표 에이스 류현진(한화 이글스) 투수는 29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선발투수가 6이닝 이상 던져 3자책점 이내로 막는 것)를 기록하며 이 부문 세계기록을 갱신했다. 이전 기록은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소속이었던 1968년 밥 깁슨의 26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였다.
류현진은 지난 5월 9이닝 동안 삼진 17개를 잡아 국내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도 세웠다. 야구전문가들은 이들이 당장 세계 최고의 무대인 미국 메이저리그에 가더라도 뛰어난 활약을 펼칠 것이라고 평가한다.
야구전문가들은 이들의 비결이 ‘밸런스’에 있다고 말한다. 성준 한화 투수코치는 “류현진이 국내에서 가장 이상적인 밸런스를 가졌다”고 말했다. LG 트윈스에서 타격코치를 했던 김용달 ISPN 해설위원도 기자와 만나 “이대호는 밸런스가 좋아졌기 때문에 지난해에 비해 더 많은 홈런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TV, 신문 등에 자주 등장하는 밸런스는 운동역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야구의 밸런스는 체조의 ‘정지 기술’ 동작과 달리 연속동작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뛰어난 선수를 순간순간 사진 찍어보면 균형이 무너진 것처럼 보여도 연속동작으로 보면 균형이 맞아 있다.
투수는 준비 자세부터 공을 던지고 난 후까지, 타자는 준비 자세에서 타격을 한 후의 스윙까지 밸런스가 유지돼야 한다.
좋은 밸런스를 가진 선수는 적은 힘을 들여 자신이 원하는 투구와 타격을 할 수 있다. 밸런스가 좋으려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신체의 각 부분이 전체 밸런스를 맞춰주는 보상동작이 필요하다. 적절한 보상동작이 없을 경우 밸런스를 회복하기 위한 쓸데없는 움직임이 많아져 운동을 방해한다.
가만히 서서 오른쪽 다리를 들어보자. 오른쪽 다리를 들면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움직이고 몸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왼쪽 다리의 바깥쪽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이때 왼팔을 들어주는 보상동작을 하면 왼쪽 다리에 들어간 힘이 빠진다. 따라서 앞뒤, 좌우로 균형 있게 움직여야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운동 효과를 낼 수 있다.
투수의 머리를 보면 밸런스가 보인다
투수의 밸런스가 좋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공을 던질 때 힘의 전달 과정을 단순하게 표현해보자. 투구를 할 때 투수는 무릎을 끌어올렸다가 앞으로 내딛어 전진하는 힘을 만든다. 이어서 내딛는 발을 지면에 닿게할 때 하체의 전진력이 관성을 통해 상체에 전달된다. 이때 꼬였던 허리와 어깨가 풀리며 지면과 수평으로 회전하고, 어깨와 팔꿈치가 지면과 수직으로 회전한다. 이때 몸의 각 부위는 허리가 시속 40~48km, 어깨가 시속 48~56km, 팔이 시속 104~120km로 순차적으로 가속하며 힘을 전달해 시속 160km의 공이 날아간다.
힘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투수의 무게중심이 앞뒤,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던지고 싶은 방향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이때 무게중심이 잘 유지된 상태를 투구 밸런스가 좋다고 한다.
류현진 투수를 비롯한 뛰어난 투수들은 대부분 밸런스가 좋다. 밸런스가 좋으면 힘의 손실이 없이 공을 던질 수 있다. 성준 코치는 “투수는 시속 160km의 공 하나보다 시속 150km의 공을 원하는 곳에 반복해 던지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롯데 자이언츠의 양상문 투수코치는 좋은 밸런스를 갖기 위해서 머리와 착지하는 다리의 무릎과 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내딛는 발과 무릎은 유연하게 하체의 전진력을 상체로 넘겨준다. 또 상체가회전할 때 생기는 회전력을 받쳐주며 밸런스가 좌우로 흔들리지 않게 막아준다. 이때 발과 무릎에 오는 부담을 허벅지의 안쪽 근육이 지탱하므로 투수들은 이 부위의 근육이 잘 단련돼 있어야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다.
양상문 코치는 “던질 때 머리의 움직임을 보면 좋은 밸런스를 가졌는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던질 때 머리가 무게중심의 진행선상에 있지 않고 앞뒤로 기울어져 있으면 밸런스가 무너진 것이다. 머리는 인체에서 가장 무거운 부위이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신체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쉽다. 머리가 기울어지면 던지고 싶은 방향과 다르게 몸이 기울어져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질 수 없으며, 공이 일찍 손에서 떠나 위력이 감소한다. 투수가 공을 2.5cm 먼저 놓을 때마다 타자가 느끼는 체감구속은 시속 3.2km씩 감소한다. 타자가 공을 오래 볼 수 있어 투구에 대응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 때문이다.
류현진 투수는 국내에서 가장 이상적인 투구 밸런스를 갖고 있다. 그는 하체의 중심이동보다는 상체의 회전력을 바탕으로 공을 던진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보폭이 적어 전진력이 작지만 큰 몸집에서 나오는 회전력이 뛰어나다. 몸집이 큰 선수들이 밸런스를 유지하는 데 어려워하지만 류현진 선수는 타고난 유연성을 바탕으로 최적의 밸런스를 유지한다. 그의 투구 동작을 보면 머리가 앞뒤로 쏠리지 않고 무게중심의 축을 따라 나오며 이를 지탱하는 하체가 잘 발달돼 있다.
이는 SK 와이번스의 김광현 투수와 비교하면 더 잘 알 수 있다. 양상문 코치는 “김광현 투수는 머리가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쳐 류현진 선수에 비해 제구력이 좋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김광현 투수는 류현진 투수에 비해 내딛는 보폭이 크다. 보폭이 클 경우 전진력이 크지만 공을 놓는 지점이 낮아진다. 김광현 선수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던지는 팔각도를 높여 공을 놓는 지점을 높였는데 이때 머리가 오른쪽으로 조금 넘어간다. 몸의 중심이 흔들리므로 김광현 선수는 류현진 선수에 비해 제구력이 떨어진다.
김광현 투수는 밸런스가 흔들리지만 다른 부분에서 약점을 보완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그가 공을 놓는 지점이 높은 만큼 직구와 변화구의 낙차가 커 타자들이 치기 까다롭고 투구 자세가 역동적으로 보여 타자에게 심리적으로 위압감을 준다.
야구 중계방송에서 해설자가 자주하는 “투수가 공을 던질 때 공을 놓은 지점이 흔들린다”는 말이나 “공을 던진 이후 몸이 한쪽으로 치우친다”라는 말은 모두 밸런스가 흔들렸을 때를 가르키는 말이다.
타자에게도 밸런스가 중요하다. 타격도 전진운동과 회전운동이 적절하게 결합돼야 힘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타자는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 어깨 넓이 정도로 발을 벌리고 있다. 이후 다리를 들어 뒤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가 발을 내딛는 전진운동을 한다. 내딛는 발이 땅에 닫는 순간 만들어진 전진력이 이미 시작된 배트의 회전운동에 전해져 날아오는 공을 향한다.
밸런스 없이는 홈런도 없다
타격에는 회전운동을 중시하는 이론과 전진운동을 중시하는 이론이 있다. 회전 운동을 중시하는 이론에서는 상체의 회전을 중시하고 하체는 중심이동보다는 상체를 지지하는 데 더 큰 역할을 부여한다.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주장한 이 이론은 덩치가 큰 선수에 적합하다고 한다. 덩치가 크면 중심이동을 하면서 상체 밸런스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중심이동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상체의 회전만으로 공을 배트의 중심에 맞히는 데 집중한다.
이에 반해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타격코치인 찰리 라우는 전진운동을 더 중요시한다. 하체의 중심이동을 통해 힘이 잘 전달돼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체의 중심이동이 크면 상체의 밸런스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밸런스를 잡기 쉬운 체구가 작은 사람에게 유리하다.
최근에는 찰리 라우의 이론보다 테드 윌리엄스의 이론이 주목받고 있다. 투수들이 던지는 변화구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변화가 심해져 타자들이 밸런스를 잡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투구에 대응할 시간을 확보하며 더 많은 힘을 전달하기 위해 하체의 전진거리를 줄이고 상체의 회전력을 극대화하는 타격이 강조되고 있다.
김용달 해설위원은 이대호 선수도 회전운동을 중시하는 타격을 한다고 말한다. 이대호 선수는 다리를 높이 올리지만 보폭이 크지 않다. 좁은 보폭으로 밸런스를 잡는 시간을 줄여 투구를 더 오래 볼 수 있게끔 노력한다.
이대호 선수는 타격 준비를 할 때 배트를 어깨에 메고 있다가 전진운동을 위해 다리를 들 때 배트를 세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이다. 다리를 들 때 반작용으로 인해 무게중심이 뒤로 치우치기 쉽다. 이를 막기 위해 무게중심을 중심으로 대각선 방향에 있는 팔꿈치를 몸의 중심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배트가 서 자연스럽게 밸런스를 맞출 수 있다. 다리를 내딛을 때도 비슷하다. 이대호 선수는 다리를 내딛을 때 몸의 중심으로 끌어당겼던 배트와 팔꿈치를 뻗어 밸런스를 유지한 후 스윙을 시작한다.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은 부상을 방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삼성트레이닝센터 안병철 센터장은 “밸런스가 좋지 못하면 부상 위험이 크다”며 “특히 투수들의 어깨뼈 관절의 부상 우려가 높다”고 말한다. 팔은 어깨뼈에 걸쳐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대신 팔이 회전할 때 원심력을 지탱하는 것은 관절 주위의 인대와 근육뿐이다. 투수가 하체에서 상체로 이어지는 힘의 전달이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에서 팔만 빨리 회전할 경우 팔과 어깨뼈 사이의 인대와 근육에 무리가 가서 부상 당할 우려가 높다.
밸런스가 야구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국체육과학연구원 문영진 책임연구원은 “스포츠는 종목의 특성에 맞게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역도에서는 좌우 근력의 밸런스가 중요하다. 바벨을 들 때 좌우 균형이 틀어지면 무게가 한쪽으로 쏠린다. 이때 집중된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관절이 순간적으로 더 큰 힘을 내다 부상을 당하기 쉽다. 사이클은 페달을 밟을 때 좌우 동일한 힘을 주며 움직이는 균형이 중요하다. 엇박자가 될 경우 신체 좌우, 상하로 변화의 폭이 커지며 힘은 더 들고 속도가 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한국야구에 운동역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야구 지도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감으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하지만 점차 운동역학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립켄 야구학교에서 코치를 지냈던 조용빈 씨가 투구의 운동역학을 설명한 ‘바이오 피칭 메카닉’이라는 책을 4월에 발간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몇몇 코치들이 이를 현장에 응용하려 하고 있다.
양상문 코치는 “미국과 한국 선수는 체격이 다르고 투수의 투구폼도 천차만별”이라며 “선수마다 다르게 적용할 필요는 있지만 기본적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용달 해설위원도 “최고의 타자가 되려면 감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운동역학을 알 필요가 있다”면서 “선수의 자세가 안 좋아졌을 때 운동역학을 이해하고 있다면 문제점을 빠르게 찾아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려면 시즌 내내 좋은 밸런스를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