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의 불교수용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서기 4년 혹은 5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역사 기술론자들은 서기 4년으로 잡고 있다. 서기 4년으로 본다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후 약 4백여년이 흐른 뒤이다. 우리나라의 최초불상으로 석가여래 부처님 금불상 53구를 신라 제 2대 남해왕 원년에 지금의 강원도 고성땅에 이윤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곳은 신라의 영토였는데 얼마뒤 금불상을 금강산으로 이윤하여 지금의 금강산 유점사에 점안하여 모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왕은 그 사실을 고을 수령 노춘으로부터 전해 듣고 절을 지어 금불상을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일이 있은후 38년이 지난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임시 궁전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며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 오른지 6년 후, 서기 48년 7월에 서역 중인도의 옛나라 아유라국의 공주 허황옥이라는 여인이 석탑을 싣고 바다를 거너 가락국 해변에 도착하였다. 김수로왕은 허황옥을 신부로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으므로 아들 열을 낳았다.
장남인 거등은 대를 이어 왕이 되게 하고 둘째 아들은 허황후의 성씨를 따라 석이라고 불리웠으며 그 외 아들들은 가야산에 입산케 하여 불교와 선도를 수업케하였으니 이것이 불교포교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조선시대불교통사]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전래에서 시작되었다는 북방 전래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談格義)불교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372년 이전에 이미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민간경로로 전파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당시의 왕권은 민중에 대한 지배의 필요성과 자기네 지위를 신성시 해주던 재래 신앙(자연신과 조상신 숭배)의 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새로운 지배이념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372년 왕실이 불교 수용의 주체가 되어 중앙 집권적 지배 체재를 정비하는 데 이용하게 된다.
한편 전진왕이 불교를 전하게 되는 것은 당시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남방의 동진과 대치한 상황에서 후방인 동북방의 견제의 필요에서 고구려와 관계 개선을 위한 문화 교류의 한 방편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전진 불교는 도안의 새로운 불교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불교는 민간 경로를 통한 격의적 불교와 왕실을 통한 도안적 불교의 두 가지 형태로 발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사회에 토착화되어 민간 사회나 지방 사회의 신앙적인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고 후자는 공식적인 불교가 왕실의 지원 아래 순도에 의해 포교되면서 중앙 왕실이나 지식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 나갔다. 따라서 다른 삼국에 비해서 아주 두드러진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의 대표적인 예로 고구려에서는 승려 학자 승랑을 배출하였는데 그는 섭산의 고구려 승랑 대사라고 불리었으며 그는 고구려 불교의 주체적인 수용에 앞장서면서 존재와 無의 변증법적인 지향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인 인식론도 관념론적 제약으로 인해 변혁적인 세계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봉건 지배자에게 봉사하는 한계를 극복치 못했다.
그 후 불교의 주류는 삼론종이라는 학문적인 경향으로 기울었고 그 당시 고구려의 불교가 어떤 상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왕이다. 그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속에서 죽는 것은 백성들 뿐이었고 그런데도 계속 불교를 신봉하라는 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권력에 의해 짓밟힌 민중들의 행복을 신앙의 위안과 복으로써 보상받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는 기복신앙적인 호국불교의 최초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호국불교는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진리를 말하라.]는 석가모니불의 본 뜻과는 달리, 거짓말과 시기와 간첩을 하면서까지 철저히 지배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 이익을 위해 민중을 배신하고 수탈에 일조하는 이른바 호국불교의 허구성과 모순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 침략시에 나타난 승려들의 반외세 투쟁으로, 최초 승군이 있기도 했지만, 이것도 또한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정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 중생을 위한 것이었는지, 또한 호국불교라는 말이 팔만대장경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말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말만 호국불교라 외치지 말고 그 뜻을 한 번 음미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말년에는 불교, 유교와 함께 도교가 당에서 전래되어 성행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말 영류왕( 榮留王 ), 보장왕 시대에는 사람들이 다투어 도교의 일파였던 오두미도(五斗米道) 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기복을 위한 기도 불사로서 왕실에서 수용한 불교는 국민의 정신 통일의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말기에 이르러 특히 연개소문에 의해 배불정책이 일어났고 재차 당에서 도교가 들어오자 백성들은 다투어 오두미도( 五斗米道 )를 신봉하였고 결국 불교는 쇠약해지고 훌륭한 불교 승려들은 일본이나 신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삼국 시대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재래의 토착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고 천지신을 그 정점으로 하여 대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외래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었다. 따라서 재래신앙인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인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된다. 종래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무불교대(巫佛交代)라는 입장으로 단순화시켜 보아 왔다. 그것은 지배층의 입장에서 불교의 전래와 수용을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외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것과 이것을 그 사회가 수용하는 것, 국가가 이를 공인한 것과는 개념상의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종래 연구는 이를 간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불교가 전래된 것이 그렇게 많이 늦은 것이 아니다. 이미 눌지왕대에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 사람 모례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양나라 사신이 왔을 때 왕실에 들어가 불교에 대해 이해를 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소지왕대에는 이미 내전에 분수승(焚修僧)자리잡고 있었다. 신라는 다만 국가적 공인 조치가 늦었을 뿐이다. 그것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과 대립이 심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문화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신라는 중국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라가 토착신앙에 의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여 사상을 통일을 하였으므로 외래신앙인 불교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차돈이 토착신앙의 제장인 천경림에 사찰을 지으려다가 강력한 저지에 직면하였으며 그러한 경험이 신라인으로 하여금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부진통을 겪게 됨으로써 독특한 신라의 불교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타협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산신각과 장승이라 하겠다. 즉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수용되는 단계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과 갈등을 겪게 되었으나 일단 그 과정을 거치면서 융화되어 가는 문화접변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공인 이후를 무불교대로 보아서는 안되며 무불융화의 입장에서 신라사상의 흐름을 파악하여야 한다.
1)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을 빚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 이차돈의 순교설화이다. 이차돈의 순교설화는 [삼국사기] · [해동고승전] · [삼국유사] 및 금석문에 실려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법흥왕이 본디 불법을 존중하여 흥교(興敎)할 뜻이 있었으나 군신들의 반대가 두려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던 이차돈에 의해 창사의 결심을 하고 이차돈에게 왕명을 내리어 창사의 책임을 부여하였다. 군신들은 절을 지으라는 왕명에 대하여 내심으로 반발하였지만 강력하게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차돈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 하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서게 되었고, 이에 따라 창사가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창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알고 보니 이차돈이 왕의 허락도 없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왕은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려는 데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군신들의 의견을 도외시 할 수 없었고, 더구나 자기와 장소에 대하여 의논하지 않고 천경림에 창사한 이차돈을 왕의 입장에서 교명죄(矯命罪)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법의 온건파인 법흥왕은 흥법문제에 있어서 군신들이 촉각을 워낙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차돈이 군신들의 신경을 건드려 가며 천경림에 창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흥법의 강경파인 이차돈은 창사를 할 바에는 아예 토착 신앙의 본거지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흥법의 의지를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군신들의 반발이 거세게 나오고자 왕은 군신들의 반발을 일단 완화시키고 왕명의 준엄함을 보이기 위해 이차돈을 교명죄로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단 것이다. 즉 흥법에 대해 온건파인 법흥왕과 강경파인 이차돈의 의견 차이와, 흥법 자체에 대한 반대파인 군신들과의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서 이차돈이 순교를 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아직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불교세력이 결국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권의 강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또한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가 지배 이데올로기화되어 가고 불교세력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무불교대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불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 종래 토착신앙이 갖고 있던 위치를 차지하게 되 었지만 이것은 통치이념의 변화일 뿐 사상적으로는 두 개의 신앙이 마찰과 갈등을 겪으며 융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즉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토착신앙이 다소 약화되었지만 그 전통은 지속되어 오히려 불교에서 배워온 것도 있고, 반대로 불교가 토착신앙의 제요소와 융화하여 독특한 한국불교로 토착화되어 갔다. 불교는 지배층에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토착신앙이 일반적 추세였다. 따라서 통치이념의 관점에서 지배층 위주로 볼 때는 무불교대라는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사회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대부분 기존의 토착신앙을 중요시하였으며, 또한 불교 자체도 토착신앙과 융화하여 토착화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2) 토착 신앙과 불교와의 융합
전국 어느 사찰에 가더라도, 뷸교 본연의 불사를 드리는 본당 이외에 토착신을 모시는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인도 ·중국 ·한국에 있어서 각국의 토착신앙과 융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신을 모신 산신각은 우리 나라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된 모습을 나타내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또한 산문 근처나 사찰 입구에서 장승이나 돌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산신각이나 사찰입구의 장승은 한국사찰의 특징이며, 이는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가람의 배치에서뿐만 아니라 사찰연기설화 ·연등회·팔관회·탱화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토착신앙 내에도 무당의 무의 ·무구 ·무신도 ·무속용어 등에 불교적 요소가 융화되어 있다. 이렇게 토착신앙과 불교는 상호 영향을 끼치며 융화되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토착신앙이 불교화한 것으로 환인천제가 불교의 제석천 곧 제석환인의 신앙으로 변화한 것과 국조 단군이 독성님이나 불교적 산신으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불교신앙이 토착신앙화 한 경우로는 불교의 미륵신앙이 화랑국선으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토착신앙과 불교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토착신앙의 성역과 불교사찰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아도본비를 인용하여 신라는 그 서울 안에 일곱개의 가람의 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이)요,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요, 셋째는 용궁(龍宮)의 남쪽이요, 넷째는 용궁의 북쪽이요,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요,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이요, 일곱째는 서청전(壻請田)이니 모두 전시에 가람의 터로 법수가 길게 흐르는 땅이라 하였다. 여기서 천경림, 삼천기, 용궁 남, 용궁 북, 사천미, 신유림 및 서청전 등은 토착신앙의 신성지역들이다. 사원 건립 이전부터 토착신앙의 종교적 공간으로 여기에 불교사찰이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나 토착신앙의 신성지역에 불교사찰이 들어섰지만 불·보살에 대한 숭배와 의례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신에 대한 숭배와 의례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삼국유사]의 선도산 성모수희불사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선도산에 산신과 신모의 신사(神祠)가 있었는데 이들 산신과 신모의 도움으로 새로 불전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모가 불상과 더불어 벽상에 53불(佛)과 6류(類) 성중(聖衆) 제천신과 오악신군을 그려 받들며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풀어 이를 항규로 삼으라 하였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려시대에도 이와 같은 일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주기하였다. 진평왕대(579∼631)의 이 기록은 산신과 비구니, 신사와 불전, 불상과 천신, 산신탱화가 융화하고 있는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일연이 주기한 오악에 대해 살펴보면 산신과 불사와의 관계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일연은 여기의 오악을 [삼국사기] 제사지에 보이는 오악으로 보았으나 안흥사의 비구니 지혜가 모신 오악신군은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오악에 있는 산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주 산천조에 의하면 선도산이 서악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의상이 전교활동을 하던 화엄십찰이 오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을 때 이미 이교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의 이교도는 바로 토착신앙을 믿는 무리들인 것이다. 결국 삼국시기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한 지역의 오악과 남북국시기의 [삼국사기] 제사지에 보이는 오악 모두 토착신앙과 불교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선종이 수용된 9세기 이후 산지가람으로 발전하면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는 보다 긴밀하게 된다. 산신이 사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러한 산지의 가람건립 과정에서 보다 확대되어 갔다.
토착신앙의 성소는 산신각과 장승의 형태로 불사와 융화하거나 민간에서는 계속 신성지역으로 숭배되어 산신당 ·서낭당 ·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위치 상으로 보아 산신각이 상위, 불당이 중위, 장승이 하위에 위치하는 우리 나라 가람의 삼중구조는 상당으로 관념되는 산신당, 중당으로 관념되는 서낭당, 하당으로 관념되는 장승과 솟대의 동제당의 삼중구조와 상호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 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신당은 불교의 수용과 함께 융화되어 토착신앙의 가람 건립화에 따라 사원내에 존재하며 현세구복, 기복불교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3) 토착 신앙과 불교의 교대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하늘 ·땅 ·해 ·산 ·바람 ·비 ·동물 등 여러 자연신에 대한 신앙과 제의가 이루어졌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계급이 발생하고 정치체가 형성되면서 여러 신들의 위계화가 이루어져 자연신의 하나인 천신이 여러 자연신의 최고 정점에 자리잡게 되었다. 고대사회의 지배자는 만신들의 하이어라키의 최고 정점에 위치한 천신을 자기와 동일시하여 천신을 지배이데올로기로하여 계급사회의 정당성을 사상적으로 보장받고자 하였다. 고대국 가가 발전하면서 시조묘를 세워 천신신앙과 조상숭배신앙을 결합시켜 다른 정치체보다 우월함을 보였으며, 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그 지역신을 중앙집권적 구조 속에 재편성하면서 천지신을 신앙하고 제의를 받들었다.
노동력의 수취보다 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복전쟁이 확대되고 많은 군사력이 요구되어 양인화가 많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체제의 변화는 새로운 사상과 신앙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미 전래 수용된 불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하였다. 이는 불교가 천신신앙보다 평등주의적이며 보편적인 종교였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는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지배충과 피지배층 모두에게 필요하게 되었다. 피지배층은 현실적 어려움, 특히 전쟁에 참여하면서 현실보다는 내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 수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광범위하게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피지배층이 믿는 불교를 이용하여 전쟁에 승려들을 참여시키고 전몰장병을 위해서 팔관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불교를 국교로 하여 대승통을 임명하였고 국가사원인 성전사원(成典寺院)을 건립하였다. 토착신앙에서 불교로의 변화는 보다 평등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의 변화라 할 수 있으며, 오묘(五廟)와 사직(社稷)에 대한 제사로의 변화는 중국적 예제로 편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