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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나라 프랑스(France)
남프랑스의 풍광(風光)
<남프랑스(Provence)의 역사 고찰>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은 3차에 걸쳐 벌어졌던 페르시아전쟁(BC 5)과 포에니전쟁(BC 2~3)이라고 할 수 있는데 페르시아전쟁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대결이고, 포에니전쟁은 지중해 연안의 패권을 놓고 벌인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충돌이다. 페르시아전쟁은 소아시아반도에서 벌어진 인류 최초 동서양(東西洋)의 충돌이라 보겠는데 저 유명한 마라톤(Marathon) 전쟁, 살라미스(Salamis) 해전 등이 그것이다.
또 제3차에 걸쳐 벌어졌던 포에니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카르타고는 멸망하고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는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지역과 히스파니아 지역(스페인)의 패권을 놓고 벌인 쟁탈전으로 위대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이 등장하는 전쟁이다. 포에니(Poeni)는 페니키아인(Phoenicia)이라는 뜻인데 BC 3천 년부터 지중해 연안에 살기 시작한 고대문명(셈족)이다. 당시 프랑스 전 지역은 울창한 산림지역으로 갈리아(Gallia) 지방이라고 불렸고 게르만, 노르만 등 북유럽의 소수부족이 흩어져 살았는데 기원 전후 로마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에 의해 정복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AD 5세기에 접어들어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서로마제국이 붕괴하자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정권을 잡고 메로빙거(Merovingian) 왕조가 시작되며 프로방스(프랑스)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는데 뒤를 이어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프랑크왕국이다.
AD 10세기, 프랑크왕국이 와해되고 뒤를 이어 오토 1세(Otto I/오토대제)가 독일지역 여러 게르만 소수왕국들을 연합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후 교황과 손을 잡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다는 명분 아래 나라 이름을 신성로마제국으로 바꾸고 초대황제에 즉위한다.
그러나 15세기,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제국(Ottoman Turk/오스만투르크)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함락시키고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삼으며 도시이름을 이스탄불(Istanbul)로 바꾼다. 수도를 빼앗기고 서쪽으로 밀려나 명맥만 유지하던 신성로마제국은 프란츠 2세(1802년)에 이르러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된다. 그 이후 유럽 열강들의 아프리카 쟁탈전 등 극도로 혼란해진 틈에 사라예보 사건(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피살)으로 세계 1차 대전 발발 등... 오늘에 이른다.
1. 피레네(Pyrenees)산맥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떠나 프랑스 국경 부근에 오면 거대한 피레네(Pyrenees)산맥이 나타난다.
이 산맥이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이 되고 이 산맥 속에 인구 7만의 작은 왕국 안도라(Andorra)가 있다.
나는 원래의 여행일정에 안도라의 수도 안도라베야(Andorra-Vieja)에서 1박을 하는 것으로 짰었으나 모로코 일정이 두 배로 늘어나는 바람에 들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어디가 국경인가 버스 차창으로 눈여겨보았는데 어느새 훌쩍 국경을 넘어버리고 프랑스 땅이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갈 때도 졸다가 언제 넘었는지...
유럽은 국경을 넘을 때 아무런 신고초차 없는 것이 이상하다. 나는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를 두 번 갔었는데 다리를 건너 캐나다로 가면 꼭 여권검사를 한다.
프랑스 남단 몽필리에(Montpelier)에서 1박을 하였는데 멋진 해변의 휴양도시였다. 바다 쪽으로 나가면 널찍한 호수들이 여러 개 보이고 수백 척의 요트들과 보트들이 부두 가득 정박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만약 휴식을 취하러 오는 관광객들이라면 좋은 장소겠지만 우리에게는 그저 하룻밤 묵어가는 곳일 뿐...
2. 낭만의 고대도시 아를(Arles)
인구 5만의 자그마한 도시 아를(Arles)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매혹에 빠지게 하는 도시였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음악 전담교사를 한 적이 몇 번 있는데 4학년 과정 감상곡 중에 ‘아를의 여인’이 있어 지도하던 기억이 아름답게 회상된다.
시청광장의 오벨리스크 / 로마 원형극장 유적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는 자신의 단편 ‘아를의 여인’을 희곡으로 각색하였고, 거기에 젊은 시절의 비제(Georges Bizet)가 왕성한 창작열로 27곡의 삽입곡을 작곡하는데 4학년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는 감상곡은 ‘아를의 여인’ 제1 모음곡 중 ‘종’....
아를(Arles) 사진을 구해다 칠판 스크린에 빔으로 쏘며 보여주고 열심히 아를에 대하여 설명을 해대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제목은 ‘아를르의 여인’이었다. 감상곡을 들려주며 그림을 보여주면 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아이들... 그리고 아를(Arles)하면 연상되는 것이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가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던 곳 정도였다.
<1> 아를의 로마 시대 유적들
제일 먼저 아를 시청광장으로 들어섰는데 AD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이집트에서 옮겨와 세웠다는 하늘을 찌르는 오벨리스크가 눈에 들어온다. 큰 도시도 아니고, 그다지 큰 광장도 아니고 별다른 설치물도 없는 광장인데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라니... 또 광장 한쪽에는 11세기에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트로핌 대성당(St. Trophime Cathedral)이 있고 고색창연한 시청 건물도 멋있다.
사람들에게 관광꺼리를 물었더니 성당 뒤쪽으로 가면 로마시대의 유적이 있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반원형 고대 로마극장과 그 앞에 서 있는 하늘을 찌르는 기둥... 서둘러 매표소에 가서 입장권을 끊는데 뒤편에 있는 원형 경기장(鬪技場/투기장) 입장권까지 포함되어 있다며 꼭 보고 가라고 한다.
<2> 로마극장 유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이 고대 로마극장은 반원형으로 관람석이 있는데 반원의 직경이 102m, 관람석은 33층으로 설치되어 있어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사회적 신분에 따라 좌석이 구분되어있었는데 돌에 새긴 좌석 안내표가 좌석마다 새겨져 있다. 무대는 길이 50m, 폭 6m로 엄청난 규모다.
무엇보다 무대 뒷면을 꾸미는 데 사용되었다는 엄청난 높이의 돌기둥 2개는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극장 옆면으로는 고대 성곽들 또한 잘 보존되어있다. 인구 5만 남짓의 조그만 도시 아를(Arles)에 이런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있다니.... 둘러보는 내내 놀라움으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다.
고대 로마 원형 경기장 / 경기장 내부 / 경기장 둘레의 회랑
<3> 로마 원형경기장
로마극장 유적을 나와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면 다시 엄청난 유적이 나타나는데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鬪技場)이다. 우선 둥근 원형 고대 건축물이 완벽하게 남아있다는 자체가 놀라운데 그 규모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내부로 들어가면 반원형 극장과 달리 완전 원형이고 가운데는 검투사(Gladiator)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넓고 둥근 운동장이 있다. 관람석 아래쪽은 둥그렇게 돌아가며 회랑(回廊)과 방으로 되어있어 검투사들이 대기하거나 사람들이 지나다녔던 길인 셈이다. 이 경기장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요즘도 이곳에서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축제 때 투우경기를 하는데 소를 죽이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요즘은 소를 죽이지는 않고 소의 두 뿔 사이에 매달아 놓은 화환을 떼어내는 경기라고 한다.
경기장 입구에는 당시 검투사들의 싸우는 모습 사진과 함께 설명을 곁들여 놓았다.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고 즐거워했을 당시 로마 사람들의 잔인함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음은 프로방스(Provence) 들판과 ‘고흐다리’를 보기로 했다.
<4> 고흐다리(Gogh Bridge/Langlois)
로마 경기장 관광을 끝내고 언덕을 내려오면서 사람들에게 고흐다리(Gogh Bridge/Langlois)로 가는 버스편을 알아보는데 모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대체로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과의 껄끄러운 과거사 때문인지 영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니 아예 못하는 사람이 많다. 영어를 제법 하는 젊은이한테 물어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고흐,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너 진짜 몰라??’ 했더니 ‘아, 방코브릿지? 한다.’ ‘Van Gogh Bridge’를 프랑스 사람들은 ‘방코브릿지라고 발음....’ 고흐 작품명은 ‘랑글로아 다리(Pont de Langlois)’였다고 생각된다.
암튼 가르쳐준 대로 1번 시내버스를 타고 10분쯤 갔는데 버스 종점인 모양으로 기사가 모두 내리라고 한다. 버스 기사에게 방코 브릿지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저~기로 10분쯤 걸어가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따라 내리던 수다쟁이 프랑스 아주머니가 자기를 따라오라더니 조금 가서 벌판을 손가락질하며 저기 벌판이 끝나는 곳,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데까지 가서 왼쪽으로 가면 론강(Rhone River)이 나오고 거기에 방코브릿지가 있다고 한다.
<5> 고흐 도개교(Pont de Langlois)
남프랑스 풍경은 모로코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기분이 상쾌하다.
아프리카 모로코(Morocco)는 가는 곳마다 메마른 황야로 황토색 일색이었는데 이곳은 이미 가을이 깊었건만 온통 푸른 포도밭과 올리브 밭, 그리고 소와 말, 당나귀와 양들이 뛰노는 넓은 목장이 이어져 풍요로움과 여유가 보인다. 그런데 그 유명한 고흐다리를 가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니?? 10분 정도 걸어가 갈랫길에서 왼쪽으로... 한참을 가도 강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가서 모퉁이를 돌자 저편으로 나무로 만든 엉성한 다리 모양이 언뜻 보인다. 다가가면서 보니 바로 그 고흐다리(Gogh Bridge)였다!!!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하여 다가가 보니...
쓸쓸히 무성한 잡초 덤불, 인적 없는 좁은 수로, 사람이 살지도 않는 폐가 옆에 엉성한(?) 고흐의 도개교(跳開橋)가 하늘을 향해 쓸쓸히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고흐다리(Pont de Langlois)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관심도 못 받고 버려져 있는듯하여 서글퍼지는 마음을 가눌 수 없다.
고흐 그림 '랑글로아 다리' /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고흐 도개교(跳開橋)
<6> 네덜란드의 천재 화가 고흐(Gogh)
네덜란드의 천재화가 고흐(Vincent van Gogh)는 살아생전에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 무명화가였다.
오직 그림 밖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고흐는 미술상이던 동생 테오(Theo)의 보살핌 속에 생활했다고 한다. 생전에 1,000여 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팔린 그림은 단 1점.
그것도 미술상이었던 동생 테오가 400프랑(우리 돈 15만 원 정도)에 사 준 그림 ‘포도밭’ 1점 뿐이었다고 한다. 정신질환이 있었던 고흐는 말년에 이곳 아를로 와서 창작 활동을 하는데 화가 고갱(Paul Gauguin)을 불러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등 정신병이 심해지자 고갱도 떠나고 곧이어 동생 테오가 병원으로 옮기지만 1890년 파리 근교 오베르(Auvers)에서 권총 자살로 37년의 생을 마감한다. 형과 특히 사이가 좋았던 동생 테오도 형 고흐 사망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6개월 뒤 34세로 세상을 떠난다.
<7> 고흐의 작품들
아를(Arles) 시기의 고흐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데 ‘랑글로아 다리(고흐다리)’, ‘별이 빛나는 밤’, ‘반 고흐의 방’, ‘자화상’, ‘탕기 영감의 초상화’, 그리고 유명한 ‘해바라기 연작 시리즈’의 11점 중 4점을 이곳 아를에서 그린다. 이후 정신병원 입원해서 해바라기 연작 시리즈를 계속 그렸고 ‘의사 가셰의 초상화’,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 속에서 동생 테오에 의해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던 고흐였지만 사후 그의 작품은 엄청난 고가에 거래된다.
‘의사 가셰의 초상화’가 경매에서 미화 8.250만 달러(약 900억 원), 해바라기 연작시리즈 11점 중 1점이 우리 돈 약 424억 원에 낙찰되었다. 현재 고흐의 작품가격은 1점당 평균 4천만 달러(약 430억 원)이라고 하니 그저 놀랍고 안타까울 뿐이다. 아를시 경계에 있는 이 다리는 홍수로 떠내려가 그 조각을 주어다 원래의 위치에서 조금 옮겨 세웠다는데 버스정류장으로부터 아무런 안내 표지도 없고 인적도 드문 곳 폐가(廢家) 옆에 쓸쓸히 서 있어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아를의 반 고흐(Van Gogh) 도개교(跳開橋)에서
旅浪 白 忠 基
온통
포도밭과 오렌지밭이 펼쳐진 드넓은 프로방스 들판
무성한 포도나무 가지 사이로 바람이 가만히 스치고 지나간다.
따사로운 햇살이 들판가득 넘실거리며 가을들녘의 풍요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도개교 위로 말방울 짤랑거리며 마차가 지나가고
빨래터 아낙네들 재잘거림을 강변의 풀들은 숨을 죽이고 엿듣고 있다.
무성한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웅기 중기 둘러선
키 큰 해바라기들은 긴 목을 빼고 하염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다.
론(Rhone)강 위로 별들이 쏟아지는 밤이면
그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고흐의 강렬한 붓끝은 눈부신 햇살과 함께 캔버스 위에서 자유로이 춤을 춘다.
그의 그림에는 풍요로운 남프랑스의 햇살이 녹아있다.
론 강 도개교 위로 오늘도 무심히 조각구름이 지나간다.
<고흐 작품>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 해바라기 / 밤의 카페테라스 / 자화상
3. 고대 성벽 도시 아비뇽(Avignon)
아비뇽 교황청(뒤: 노트르담 성당) / 아비뇽 성벽
아비뇽(Avignon)은 아비뇽교황청(Palais des Papes)이 있었던 도시로 유명할뿐더러 론(Rhone) 강변의 구도심은 철옹성 같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 성벽이 아직도 온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신비롭다.
<1> 아비뇽 유수(幽囚)
이곳에 교황청이 있게 된 것은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 필립 4세의 강권(强勸)을 이기지 못하고 교황청을 이곳 아비뇽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것을 ‘아비뇽 유수(幽囚)’라고 한다. 즉 교황의 죄수 생활이라는 뜻이겠다. 이후 1377년까지 7명의 교황들이 이곳에 강제로 머물게 되는데 사실상 필립 4세의 포로(인질)이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필립 4세는 교황을 등에 업고 성직자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려 왕권을 강화하는 자금을 모았고, 이 자금을 바탕으로 영지를 넓히는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다고 한다.
당시 교황은 필립 4세의 허울 좋은 ‘보호를 받는’ 처지였는데 교황청이 있는 이 성으로 온갖 망나니들이 다 모여들어 ‘타락의 성(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이 교황이 거쳐하는 교황청 성내는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어서 도둑, 매춘부, 폭력범, 마약쟁이 등이 모여들어 득실거리는 범죄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또 언젠가는 강도들이 들어와 교황청의 물건을 도둑질해가며 교황을 인질로 잡고 강복(降福)을 해 달라고 떼를 써서 교황은 할 수 없이 머리에 손을 얹고 도둑들의 복을 빌어 주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그 이후 1417년에야 교황청이 로마로 복귀하지만, 프랑스는 로마교황을 인정할 수 없다며 아비뇽에 프랑스 출신의 교황을 세워 교황이 둘인 희한한 해프닝도 있었다.
1791년, 프랑스가 세운 아비뇽 교황은 폐위되고 로마령이던 아비뇽성(城)도 프랑스에 통합된다.
<2> 아비뇽(Avignon) 교황청
아비뇽 대성당의 황금 성모상 / 성당 앞 예수 십자고상 / 기념촬영
14세기에 세워진, 론 강안(江岸)의 45m 절벽 위에 성벽 높이 50m, 두께 4m, 성내 면적 15.000㎡로 건축된 아비뇽교황청은 견고한 성벽과 건물들로 지금도 중세 도시를 연상시키는데 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성이라고 한다. 거대한 성벽은 보는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데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중세의 성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교황청 건물과 아비뇽 대성당을 마주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경건해진다. 교황청 건물과 아비뇽 대성당은 두 건물이 거의 붙어 있다. 교황청은 수리 중인지 내부 공개를 하지 않아 들어가지 못하고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먼저 성당 첨탑 꼭대기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성모상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성당 바로 앞에는 아름다운 조각들로 둘러싸인 예수 십자고상이 인상적이다. 그 앞에서 바라보면 아비뇽 시내가 한눈에 조망된다. 성당은 무료입장(거의 모든 성당이 무료입장이다)이라 들어가 잠시 기도를 드렸는데 성당 내부는 비교적 검소한 편이다.
♤ 교황청 보러 가던 날 Episode
아비뇽에서 우리의 숙소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떼제베(TGV) 기차역 부근이었는데 버스를 타려면 5~6분 정도 걸어 기차역 앞으로 가야 했다. 교황청을 보러가던 날, 아침에 버스 종점인 떼제베 역 앞으로 갈까 하다가 버스정류장이 있으려니 여기고 시내 쪽으로 슬슬 걸어가는데 론(Rhone) 강변이 나오며 버스정류장은 없고 인적이 드문 대로의 연속이다. 그래도 정류장이 있겠지...
도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냥 내쳐 걸었는데 아무리 가도 정류장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드문 강변도로다. 결론적으로...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임교장이 소피를 본다며 풀숲으로 들어가기에 혼자 슬슬 걸었는데 항상 앞서서 쌩쌩 걷던 임교장이 도무지 따라오지를 못한다. 며칠 전, 임교장은 여행 올 때 새로 샀다는 배낭의 멜빵끈이 끊어져 붙잡아 매느라 고생하더니 엊그제부터 신발(샌들)까지 너덜너덜... 걷지를 못한다.
우리의 배낭여행이 이미 한 달 반이 넘었으니 이것저것 문제가 발생한다.
풀숲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났더니... 걷는 것이 지겹다는 표정으로 임교장이 나타난다.
그렇게 잘 걷던 임교장도 신발이 발목을 잡나 보다. 이렇게 1시간 정도 걷다 보니....
성곽이 보이고,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정류장, 그리고 교황청 언덕도 보인다.
그리하여 차비는 벌었는데 둘 다 녹초가 되어... 교황청 언덕을 오르느라 기진맥진... 힘든 하루였다. ㅎ
<3> 아비뇽 다리(Pont St. Bénezet)
아비뇽 다리(생 베네제 교/Pont St. Bénezet)
아비뇽 성벽 밑을 흐르는 론강의 아비뇽 다리는 1188년에 처음 건설된 다리로 아비뇽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다리로 프랑스 전래동요에 나오는 다리다. 총 길이가 920m, 폭은 4m나 되고 돌로 쌓은 석조(石造)다리이다. 홍수로 수차례 유실되어 수차례 재건을 하다가 17세기 이후 무너진 채로 보존하기로 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교각 22중 4개의 아치만 남아있다.
이 다리는 교황청의 동쪽 암벽으로 바로 연결된 상당히 높고 긴 다리였는데 홍수로 반복해서 무너지자, 실용적인 낮고 짧은 다리를 바로 근처에 새로 놓고 옛 다리는 무너진 채 유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다리의 교황청 쪽 끝부분에는 작은 예배당이 있고 이곳에서 입장료를 내면 다리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이 예배당에는 생 베네제 기도실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올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쳐다보기만 했는데 강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아비뇽 다리(Pont Saint Benezet)에서
旅浪 白 忠 基
교황청 성벽을 휘감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 역사의 속삭임이 들린다.
『베네제야 강에 다리를 놓아라』 / 『저 혼자 어떻게 놓아요?』
『걱정마라 내가 도와 줄 테니...』 / 끊어진 다리 둥근 아치 밑으로 / 론강 푸른 물굽이는 / 천년을 흐르다.
『즐겁게 춤추자, 손에 손을 맞잡고 / 노래를 부르며 꼼시, 손뼉을 치며 꼼사~~』
다리 위에서 손에 손을 맞잡고 / 둥글게 원을 만들며 깡충깡충 춤추는
빠알간 사과 빛 소년 소녀들의 볼이 보인다.
강변의 포플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 푸른 이파리를 살랑거리며
론(Rhone)강 푸른 물줄기를 / 무심히 바라보고 서 있다. ♦꼼시꼼사(Comme ci comme ça)-이럭저럭<불어>
아비뇽 다리는 1188년에 건설되었는데 일명 ‘생 베네제 다리(Pont Saint Benezet)’ 라고도 부른다.
목동이던 베네제(Benezet)는 꿈에 하느님이 론강에 다리를 놓으라는 말을 듣고 돌멩이를 주워 날라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홍수로 무너지자 사람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프랑스 동요인 『아비뇽 다리 위에서』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2학년 음악 교과서에 번역되어 실려 있다.
♤ 아비뇽(Avignon)에서 아를(Arles) 가기
모로코, 스페인 구석구석을 살피는 50일 여행이 너무 피곤하여 귀국 비행기가 뜨는 파리로 곧장 가서 좀 쉴 요량으로 남불(南佛) 여행은 포기할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 파리로 가는 도중 몽필리에(Montpellier)서 1박, 다음 아비뇽-리용-파리로 노선을 잡았다. 남프랑스는 그냥 차창으로 내다보며 풍경감상으로 만족하고 지나치기로....
그런데 아비뇽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아를(Arles)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너무나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마음을 바꾸어 임교장을 설득했다. ‘아비뇽에서 2박을 예약했는데 아침 도착이라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아를로 가서 구경을 하고, 저녁에 아비뇽으로 와도 거리가 가까우니 충분하다...’
임교장의 동의를 얻어 아비뇽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온 길을 되돌아가는 아를행 열차표를 샀다.
열차가 들어오기에 아를행이 틀림없냐고 두 사람에게나 물어 확인하고 탔는데 얼마쯤 오다 핸드폰 위성지도를 보았더니 갑자기 열차가 님(Nimes) 방향으로 꼬부라지는 것이 아닌가? 옆에 있는 승객에게 물어보니 이 열차는 님으로 가는 열차라고 한다. 제기럴, 분명히 물어보고 탔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님(Nime)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창구로 달려가서 역무원에게...
‘열차를 잘못 탔다. 아를행 기차로 바꿔 탈 수 있나?’ 답변 왈
‘여기서는 아를행 기차 편이 없다. 도로 아비뇽으로 가서 아를행 열차를 타라....’
할 수 없이 역에서 나와 아비뇽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그렇고...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아를로 곧장 가는 버스가 없나 알아봤더니 있다!!! 버스비 5유로(6,000원), 시간은 40분 정도 걸린다.
냉큼 버스를 타고 아를로 향하면서 남프랑스 시골 풍경을 맘껏 즐기노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아를은 고흐의 그림에서 ‘아를의 여인들’ 시리즈를 보았던 기억, 음악 시간에 감상곡을 지도하던 기억 등을 되살리며 남프랑스의 햇살, 풍요로운 들판, 매력적인 여인들을 상상하며 갔는데.....
상상외로 고대 로마의 대 유적들, 그리고 하늘을 찌르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Obelisk).... 아를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두고두고 후회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를을 무지무지 사랑하게 되었다!!
고흐의 작품 ‘아를의 여인들’
그리고 의아스러운 것 한 가지...
프랑스는 열차를 탈 때 개찰도 없고 열차 내 중간 검표도 없을뿐더러 나올 때도 그냥 멋대로 나와도 된다. 맘만 먹으면 어디라도 표를 사지 않고 타고 다녀도 되겠다. ㅎ
4. 프랑스 제3의 대도시 리옹(Lyon)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리옹(Lyon)은 도심의 서쪽 편으로 알프스에서 발원한 론(Rhone)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강을 건너 10분쯤 걸어가면 다시 지류인 손(Saône)강이 나타나는데 론강과 손강의 가운데 부분은 기다란 반도 형태의 언덕이 형성되어 있다.
그 우뚝 솟은 언덕 위에 푸흐비에흐(Fourviere)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데 노트르담 대성당은 언덕 꼭대기에 있어 등산열차(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간다. 성당 조금 아래쪽에는 시내를 내려다보는 골짜기에 어마어마하게 큰 로마 반 원형극장 유적도 있는데 리옹시는 이 언덕 전체를 묶어 ‘리옹역사지구(Historic Site of Lyon)’로 지정하였고 1998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푸흐비에흐(Fourviere) 노트르담 성당 / 대머리 수사님
<1> 리옹(Lyon) 노트르담 대성당
리옹 노트르담(일명 푸흐비에흐) 대성당은 1896 완공되었다는데 성당 앞에서 내려다보면 리옹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노트르담 성당은 외부도 웅장하지만, 내부도 너무나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마침 수사님이 뒤쪽에 오셨기에 염치를 무릅쓰고 강복을 받은 뒤 사진 한 컷...
손강은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서 론강과 합류한 후 아비뇽, 아를 쪽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우리는 1일권 전철(Metro)표를 샀는데 노트르담 성당을 오르는 등산열차도 탈 수 있어서 편안하게 올랐지만 걸어서 올라오는 사람들도 좀 보였는데 이 꼭대기까지 걸어서 오르려면 땀깨나 흘려야 할 듯...
<2> 고대 로마 대극장 유적
등산열차(푸니쿨라)에서 내리면 정상 부근이 되는데 지그재그 공원길을 조금 오르면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된 공원이 나오고 곧바로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하느님의 축복인가 날씨도 너무 좋다. 공원에서 조금 내려가면 엄청난 규모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고대 반원형 로마 대극장을 만나게 된다. 로마 대극장은 로마시대(BC 43)에 세워졌다니 역사가 2,400년이 넘는 셈인데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어있고 지금도 각종 축제와 공연이 이곳에서 벌어진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아를(Arles)을 비롯하여 아비뇽(Avignon), 리옹(Lyon)까지 남프랑스는 가는 곳마다 고대 로마유적들이 남아있어 놀라웠는데 하나같이 2,00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보존되고 있다.
고대 로마 대극장 유적
<4> 리옹 생장(St. Jean) 성당
언덕 아래에는 규모는 작지만 노트르담 성당보다 훨씬 역사가 오랜 생장(St, Jean) 성당이 있다.
12세기에 짓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완공되었다는 이 성당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시계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리옹은 동화 ‘어린왕자’의 작가 생 떽쥐베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고향이기도 하다.
생 떽쥐베리 동상 / 세례받는 예수님 / 리옹 생 장 대성당
~ Epilogue ~
10박 11일간의 프랑스 여행기를 마무리하며...
프랑스 여행의 인상은 이미 예상은 했었지만 너무나 볼거리들이 풍부한 예술의 나라, 문화의 나라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도 많아서 조금 당황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던 점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먼저 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에 놀랐다. 영국과 인접한 나라이고 과거 왕족이 서로 혼인하며 왕조를 이어가는 등 교류가 많았는데도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 못할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와 일본처럼 프랑스와 영국도 가까운 나라지만 껄끄러운 과거사 때문이 아닐까??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도시 전체가 너무 지저분하다는 것과 프랑스 사람들의 오만함이다. 거리마다 구석구석 쓰레기들이 뒹굴고 있는가 하면 허름한 벽면마다 낙서들이 휘갈겨 있는 모습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담배꽁초를 던져버린다. 그리고 지저분한 화장실....
프랑스 사람들은 수다스러운 중년 아줌마들 빼놓고는 대체로 쌀쌀맞고 콧대가 높다는 인상을 준다.
하긴 우리가 탔던 파리의 택시기사는 한국에서 왔다니까 한국은 전자산업이 발달하여 무척 부러우며, 프랑스는 잠자고 있다.(France is Sleeping)고 해서 속으로 기분이 좋긴 했다. ㅎ
프랑스어 발음도 여행자들의 발목을 잡는다. 영어 발음에 익숙한 사람들은 당황하기 쉽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오르쉐(d'Orsay)」 미술관을 「독세/도흐세」라고 발음하면 누가 알아듣겠는가? 영어를 하지 못하는 프랑스 사람들하고는 아예,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사말 「메르시(Merci)」도 「메흐씨」라고 발음을 하니...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파리는 소매치기의 천국’ 이라는 말....
파리 여행 첫날 나는 허리에 차는 전대에 넣어놓았던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다. 전대 지퍼가 보이도록 배 앞에 달고 다니고 계속 신경을 썼는데 어느 결엔가 내려다보니 지퍼가 열려있다!!
1일 관광 경비 200불과 한국에 돌아오면 쓸 한국 돈 5만 원, 그리고 카드가 들어있었다.
그늘에 앉아 부랴부랴 한국 아들에게 전화하여 카드를 막으라고....
같이 여행하던 대학 후배도 굉장히 조심성이 있는 친구인데 귀국 전날 다시 파리로 왔는데 옆 주머니에 넣었던 지갑을 소매치기당했다. 거기도 20만 원 정도....
하여튼, 파리는 우리가 상상하던 ‘예술과 낭만의 도시’가 아니라 ‘소매치기의 천국’이었다. ㅎㅎ
실컷 감탄하면서 구경을 해 놓고는 험담만 늘어놓고 있다고 누군가 나쁜 놈이라고 흉보겠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