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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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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한째인 절기 소서(小暑)입니다. 소서는 ‘작은 더위’라 불리는데 이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지요. 더불어 이때는 장마철로 장마전선이 오랫동안 머무르기 때문에 습도가 높고 비가 많이 내립니다. 농가에서는 소서 무렵 모내기를 끝낸 모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때로 논매기를 했습니다. 또 이때 베고 돌아서면 한자씩 자라는 논둑과 밭두렁의 풀을 베어 퇴비를 장만하기도 바쁘지요.
소서 때는 호박이나 각종 푸성귀가 풍부하게 나오는 시절이어서 입맛을 돋우는데, 특히 냉면이 인기가 있으며 또 수제비, 칼국수 같은 밀가루 음식으로 이열치열 건강을 챙깁니다. 또 바다에서는 민어 잡이가 한창이어서 이때 잡은 민어로 요리한 조림·구이·찜·회를 비롯해 민어고추장국·민어포 따위 먹을거리가 우리의 침을 고이게 하지요.
또 이 무렵 논매기나 풀베기에 바빠 허리를 펼 틈이 없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일 하는 농민들은 구름이 지나가다가 만들어주는 “솔개그늘”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솔개그늘이란 날아가는 솔개가 드리운 그늘만큼 작은 그늘을 말합니다. 솔개그늘에 실바람 한 오라기만 지나가도 볼에 흐르는 땀을 식힐 수 있지요. 작은 것에도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을 우리는 소서에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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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속풀이 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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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만든 아악의 5선악보도 잃어버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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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다나베가 촬영한 이왕직아악대의 음악이나 춤을 찍은 영상자료가 2통이었는데,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화면 자료만 참고할 수 있다면 당시의 음악 전반이나 연주형태, 악기편성, 악기의 주법, 의상, 춤사위, 춤과 반주음악 등등을 참고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다나베의 설명에 의하면 모두 3권으로 2통씩 만들어 하나는 이왕직에 보관하였으나 현재는 그 행방이 불명이라는 이야기, 또 다른 하나는 와세다(早稻田)대학 연극박물관에 보관을 의뢰 하려던 차에, 태평양 전쟁이 터져 할 수 없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다가 종전 뒤 복제를 희망하는 조선 사람에게 빌려 주었는데 아직까지 돌려받지 못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이 영상자료와 함께 당시 아악을 5선악보로 만들었던 악보도 잃어버린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1921년 4월13일, 이날은 다나베가 조선 체류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귀국 준비를 위해 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누구의 소개도 없이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석천의일(石川義一)이라는 하와이 태생의 2세였고, 매우 왜소한 체구의 소유자로 일본말도 더듬거리며 잘 못하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석천은 대학에서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하여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딱히 일본으로 돌아가 할 일도 마땅치 않고 해서 조선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다나베의 조선 아악 조사활동이 신문에 연일 보고되면서 그를 도울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일자리를 마련해 보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때 마침 이왕직에서는 아악의 악보(5선보) 작성도 필요했던 시점이고 해서 다나베는 그 청년을 총독부와 이왕직 사람에게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그 청년은 그 후 경성과 평양의 여학교 음악교사를 하면서 10여년에 걸쳐 열심히 이왕가 아악의 전곡을 5선보로 채보하는 작업을 완성하였고, 그 악보를 이왕직에 제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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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보에 대한 행방에 대해 다나베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이왕가의 음악을 5선보로 채보하는 사업은 실로 귀중한 대사업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왕직은 없어졌고, 더구나 조선은 남북으로 갈려 전쟁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그 악보를 모두 잃었다. 다만 나의 손에 몇 곡 남아 있고, 석천군에게 초고만 남아 있다기에 나는 동경에 계시는 구 이왕 전하를 만나 석천군의 초고 정리 사업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드렸으나 이왕도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고, 얼마 후 석천군도 뇌연화증으로 쓰러지고 말아, 결국 이 악보가 부활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
아래의 악보 자료는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일명 보허자(步虛子)의 앞부분이다. 이 곡은 낙양춘(洛陽春)이라는 음악과 함께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온 사악(詞樂, 중국 송나라 때 성행하였던 사(詞)의 음악)으로 지금까지 연주되고 있다. 국악계에서는 이들 음악을 당악으로 분류하고 있다. 당악이란 외국의 음악이 들어오면서 그 이전부터 있어 오던 순수한 이 땅의 음악은 향악이라는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양옥이나 양식, 양복과 같은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종래의 우리 것을 한옥, 한식, 한복으로 부르게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보허자의 악보 자료와 함께 영산회상 중 <타령>도 들어 있으나 이 난의 예시는 하나만 하였다.
악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곡의 악기편성은 지금과 동일하게 당적. 대금, 피리, 해금, 아쟁, 장고, 좌고, 편경, 편종 등이다. 피리는 당피리로 연주한다. 이러한 편성을 당악편성이라고 하며 특징은 관악기와 편종 편경이 합주한다는 점이다. 지금과 다르게 기보한 점은 장고의 주법이다. 가령 예를 들어 쌍(雙)은 오른손의 채와 왼 손을 동시에 치는 합장단인데, 지금은 음표의 기둥을 위 아래로 세우는데 비해, 머리를 위 아래로 그려 넣은 것이 재미있다. 그리고 편(鞭), 고(鼓),요(搖)의 주법 등도 오른손, 왼손의 구별을 음표의 기둥대신 머리로 하고 있어 비교가 되는 것이다.
이 자료는 1933년 3월 25일, 이왕직 아악부에서 다나베씨에게 제공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점에서 이 악보의 채보자가 바로 앞에서 소개한 석천이 아닐까 한다. 그 이유는 다나베가 1921년 4월에 조선에 와서 음악조사를 할 당시, 석천군을 만났고, 석천은 그로부터 10년 후에 아악의 전곡을 채보하여 이왕직에게 제출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우리 음악을 5선위에 얹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 처음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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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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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김영조 ☎ (02) 733-5027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5가길 3-1. 영진빌딩 703호 koya.egreennews.com, pine9969@hanmail.net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