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 구르몽
시몬, 나뭇잎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의 빛깔은 은은하고, 그 소리는 참으로 나직하다.
낙엽은 땅 위에 버림받은 나그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의 모습은 쓸쓸하다.
바람이 불어칠 때마다 낙엽은 조용히 외치거니.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길에 밟힐 때면 낙엽은 영혼처럼 흐느끼고
날갯소리, 여자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엾은 낙엽이 되리라.
가까이 오라, 밤은 벌써 내려 우리를 휘감는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이봄비 옮김)
|斷想| 시므온(Symeōn): 존재의 소리를 듣는 자
01.〈낙엽 Les feuilles mortes〉의 시인 레미 드 구르몽(Rémy de Gourmont, 1858~1915)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상징주의 문학의 이론적 지주다. 그는 고독한 산책자로서 박식하고 명석한 지성인이다. 고대 철학과 문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인간 사유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는 그는 젊은 한때 결핵성 피부 질환을 앓아 고양이와 함께 두문불출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에 둘러싸여 창작과 비평 활동에 전념한다. 저서로는 시집[시몬]과 소설집[뤽상부르의 하룻밤],[色, 색,색:낙엽의 여인들], 그리고 언어(프랑스어)의 미학적 원리를 다룬[프랑스어의 미학], 사랑의 에세이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로 지목되는[아마조네스에게 보낸 숨겨둔 편지]등이 있다. 인용시 「낙엽」은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1920년을 전후해《태서문예신보》와[오뇌의 무도]를 통해 안서 김억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된 이후 지금까지 가을이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02. 나의 시몬, 그대와 함께 가을 숲에 들게 되면 나뭇잎은 이미 지고 없다. 숲의 이끼와 돌, 작은 오솔길에는 낙엽과 낙엽으로 뒤덮여 있다. 시몬, 그대에게 묻노니 낙엽 밟는 소리가 좋은가? 낙엽에는 그 무슨 팔레트색으로도 비롯될 수 없는 빛과 색이 있다. 곱고 은은하며 아름다운 상처의 낙엽, 그 소리는 낮고 울림이 있다. 낙엽은 어디론가 길 떠나는 유민. 황혼녘이면 지는 잎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바람이 불 적마다 떨어진 잎은 가만히 외친다. 발길에 밟힐 때마다 낙엽의 혼은 흐느껴 운다. 애내(欸乃)소리, 여인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 생각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한 줌 낙엽 되어 허공으로 흩어질 것이니. 밤은 우리의 허리를 휘감고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나의 시몬, 그대에게 묻노니 이 가을 낙엽 밟는 소리가 정녕 좋은가,그저 즐길만한 것인가… 낙엽은 생의 절정에 도달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빛이자 색이며 수레바퀴다. 타지마할, 그‘영원을 바라보는 눈물 방울’이다.
03. 시몬의 시인 구르몽의 문학적 명성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무렵, 그는 이렇다할 필화 사건으로 오래 몸담아 온 직장(파리 국립도서관 사서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런 그에게 낙엽은, 시간의 흐름이란 무엇인가? 숲에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고요함이 있다. 마음이 있다. 시몬(Symeōn,시므온)은 연인이거나 가상의 인물, 혹은 독자이거나 무엇보다 존재의 소리를 듣는 자다. 후렴구로서 청자 역할을 하는 이 구절(“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의 반복적 리듬은 생명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반복을 거듭할수록 질문은 더욱 깊어진다. 종내는 생의 궁극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발밑에 밟히는 낙엽 소리는 결코 비루하지 않으며 날개 소리와 여인의 옷자락 소리로 아름답게 은유된다. 영혼의 흐느낌으로서 낙엽은 가을의 정취라기 보다 삶의 한 계절을 지나는 이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환기한다. 우주적 연민(cosmic pity)이다. 빛의 소리, 소리의 빛은 경계가 경지로 화하는 순간이다. 구르몽의 단편집[色,색,색: 낙엽의 여인들]에는 사랑의 빛깔을 다채로운 낙엽 빛깔들(검은색/흰색/빨간색/파란색/자주색/진홍색/연보라색 등)로 채색하여 아름답게 묘술(描述)하고 있다.(“뒤크로가 지금까지 보아 온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검은빛을 띤 달리아였다. 그것은 노르망디 어느 작은 마을의 공원 한구석에 튤립과 데이지, 등나무, 오렌지 나무 따위가 함께 어울려 있는 가운데 아주 작고 가냘픈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낙엽은 인생과 자연의 이치를 일깨우는 핵심 상징이다. 단풍의 붉고 노란 색이 절정의 색이라면, 낙엽의 갈색은 모든 인위적인 것을 제하고 남은 자리에서 대지로 돌아가는 자연-본래의 색이다. 겸손과 순응과 복명(復命)으로서 무등(無等)의, 내려놓음의 색이다.
04. 구르몽에게 삶은 서로 다른 의식 상태와 연결된 일련의 감각들이다. 풍요롭고 깊은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다양한 의식의 상태를 경험하고, 매 순간 찾아오는 감각들을 온전히 깨어 있는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런 그의 비평적 스타일은 개인의 주관적 감각과 미학적 인상을 우위에 둔다. 참된 시인은‘시와 현실을 화해시키는 법’을 안다. 참된 시인은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의 눈과 마음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두 세계를 하나로 잇기에 부심(腐心)한다. 문제는 시의 현실성(Wirklichkeit)이‘죽음에 이르는 길 위에서 마주치는 것’이라면.
05. 저녁 금호강은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옷깃을 조금 여미고 길게 이어진 나무 데크를 지나 아양 기찻길로 들어선다. 해는 지고 달빛 아래 물억새가 한눈에 들어온다. 먼 나무로 돌아가는 새들, 파극천(巴戟天)으로 불리는‘노니’가 신(神)이 준 열매라면, 애잔한 그리움의 억새는 너와 나 사이의 꽃이다. 밤하늘을 바라본다. 유현(幽玄)이다. 빛과 어둠, 물과 꿈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이 순간의 현전을 무엇이라 말할까. 샛길을 걷는다. 식물은 앞을 못보는 대신 전체를 감각한다. 두 눈을 감는다. 깊이(profondeu)가 세계의 내부에서 생기를 얻는 순간, 차원들이 중첩 상승하는 미적 경험은 숲길을 생각하고 느끼는 자에게 온전히 열려 있다. 낙엽은 가장 깊은 차원의 새로운 시작(始作)과 시작(詩作)이다.(김상환)
첫댓글 감사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읽는 시몬, 이라는
언어와 시평 상세하게 알게해주셔서 정말 공부가
잘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한 줌 낙엽 되어 허공으로 흩어질 것이니. 밤은 우리의 허리를 휘감고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나의 시몬, 그대에게 묻노니 이 가을 낙엽 밟는 소리가 정녕 좋은가 - 시므온(Symeōn) - 존재의 소리를 듣는 자여! - 깊고 높고 아득하다. 김상환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낙엽 / 구르몽", 잘 읽었습니다. 낙엽 해석이 새롭습니다. "낙엽은 가장 깊은 차원의 새로운 시작(始作)과 시작(詩作)이다" 동감입니다. 마지막 (05) "저녁 금호강은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로 시작하는 부분은 한편의 좋은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