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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감성매거진 `월간 태백' 7월호>
구름에 달 가듯이, 구름과 놀다
- 가장 한국적인 그래서 가장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김광석
글 박제영
사진 최용주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손꼽히는 김광석 기타리스트가 9일 권진규미술관 1층 갤러리에서 특별공연을 했다. 이날 공연은 미술관 1층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류장복 서양화가의 「지금 여길 감각하고, 그때 거길 기억한다」전의 오프닝 세리머니로 마련된 것이다. 이날 김광석 기타리스트는 자작곡인 「사막」을 비롯해 팝송과 「울고 넘는 박달재」 「동백아가씨」 등 트로트 곡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려줬다. 록, 발라드, 트로트, 국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일렉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진가를 보여줬다. 김광석 기타리스트는 유진규 마임이스트 등 예술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연을 자주 하는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한편 이날 공연에는 전시의 주인공인 류장복 화가와 김현식 대일광업 대표, 박민수 전 춘천교대 총장, 김진묵 음악평론가, 김대영 서양화가, 박명환 연극인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강원일보 2017년 5월 10일 자, 최영재 기자가 쓴 기사다. 실은 그 자리에 나도 있었다. 공연 전에 기타리스트 김광석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그의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했다. 이 글은 그날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날 공연에서 들려준 그의 기타 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그 감동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죽은 김광석과 살아있는 김광석이 전하는 메시지
인터뷰할 때마다 뻔하지만 펀(fun)한 얘기로 시작하는 게 일종의 버릇이다. 고쳐야 할 버릇인데, 이번에도 고치지 못 했다. 살아있는 김광석, 기타리스트 김광석은 매니아들에게는 명인이고, 최고의 뮤지션이겠지만 대중들에게는 죽은 김광석, 가수 김광석이 아무래도 훨씬 더 유명하지 않은가. 그러니 동명이인으로서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없지 않을 터. 뻔하지만 펀한, 그래서 조금은 편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이(가수 김광석) 하고는 인연도 있어요. 아주 가깝진 않지만 서로 잘 알았죠. 1집도 같이 나왔고… 근데 제 음반 나오고 얼마 후에 운명했죠. 사실 가수 김광석 씨는 한 시대의 감성을 깊이 울려주고 간 훌륭한 아티스트였죠. 근데 그이가 워낙 유명하다보니까 죽은 지 10년 지났는데도 동아일보에 제 콘서트 기사가 나가는데 사진이 그이 사진이 딱 나간거야. 신문에. (웃음) 그이 때문에 손해 볼 일이야 뭐 있겠어요? 손해 본다기보다는 난감할 때는 좀 있어요. (웃음) 한번은 장사익 씨하고 부산 공연을 갔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데 저 위에서 학생들이, 여학생들이 꽃다발을 들고 수십 명이 그냥 막 뛰어오는 거예요. 사진 찍고 난리가 났어. 저에게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요. 그러더니 학생들이 ‘오늘은 왜 노래 안 부르시고 기타만 치세요?’ 이러는 거야. 속으로 눈치 챘죠. ‘아, 이 친구들이 가수 얼굴도 모르면서 나를 가수 김광석으로 생각하는구나.’ 아직까지도 그렇게 헷갈려 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해요. 그냥 저도 ‘이등병의 편지’ 잘 듣고 있다, 그러고 말죠. 하하”
죽은 김광석과 살아있는 김광석을 둘러싼 웃지 못 할 풍경이 어쩌면 뮤지션(연주자 혹은 음악가)과 가수를 대하는 이 사회의 풍경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 죽은 김광석과 살아있는 김광석의 간극. 딱 그만큼의 간극이 뮤지션과 가수 사이에 존재한다는 생각. 기타리스트 김광석은 가수 조용필부터 장윤정까지 국내 내로라하는 대부분의 가수들 음반 녹음에 참여한 1세대 기타리스트이며 최고의 뮤지션이지만, 여전히 대중들은 죽은 김광석(가수)만을 기억할 뿐이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도 대중들에게는 낯선 이방인. 이 사회는 어쩌면 딱 그만큼 병든 사회가 아닐까. 어떤 분야든, 무엇이 되었든 편식은 독이다.
그냥 기타가 좋았고, 그냥 기타로 놀다보니 여기까지 오더라
김광석에게 기타는 소위 ‘나의 운명’이다. 강원도 원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가 처음 기타라는 악기를 본 것이 다섯 살 때란다. 다섯 살 때의 일을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사실 자체도 내게는 놀라운 일이다.
“동네 친구네 집에서 놀러 갔는데 그 친구 아버지가 치던 빨간 기타가 있었어요. 갈 때마다 신기해서 쳐다보고 그랬죠. 그걸 보고 기타를 비슷하게 만듭다시고 곽대기에다가 뭐 고무줄로 해서 그렇게 띵띵띵 치고 놀았죠. 그러다가 열한 살 때, 길 건너 레코드방에서 기타를 팔았는데, 아버지가 여동생한테 생일 선물로 그걸 사줬어요. 그런데 여동생은 기타에 관심이 없으니까 제가 가지고 논 거죠. 그냥 기타가 좋았고, 그냥 기타에 빠져서 그냥 기타를 가지고 놀았죠. 처음에는 아버지도 제가 그렇게 기타에 빠질 줄은 모르셨죠. 근데 고2 때 제가 콘서트를 했어요. 원주에서. 고등학생이 기타 연주 콘서트를 한다는 건… 그 당시 전국적으로 처음일 겁니다. 그렇게 기타에 빠져 사니까 아버지가 반대를 하셨죠. 기타도 많이 부수고… 공부를 해서 성공하길 바라셨는데, 엉뚱하게 기타에 빠졌으니… 어쨌든 그 이후 집을 나와서 쭉 여기까지 왔는데, 이 나이 되었어도 여전히 그냥 기타가 좋고 기타에 빠져서 기타랑 놀고 있네요.”
그의 말에서 다른 것은 다 허투루 듣는다 해도 놓쳐서는 안 되는 말이 있었다. 우선 ‘그냥’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그 다음에 ‘빠진다’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마지막으로 ‘좋아서 논다’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이렇게 방점을 찍은 세 개의 말이 지금의 김광석을 만든 것이니까. 물론 지나치게 생략된 것인 줄 안다. 지금의 김광석이 있기까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 하는, 얼마나 많은 경험과 노력이 있었겠는가. 몇 개의 이력만 살펴봐도 그것은 금세 알 수 있는 노릇. 계속해서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힌 그는 1975년 대학교 2학년 때 결국 매형이 사준 기타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그는 미8군 무대에서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하여 히파이브(He5)와 히식스(He6), 신중현과 뮤직파워 멤버로도 활동했고, 1977년부터 가수 음반 녹음에 참여하여 1978년 마침내 당시 모든 연주자들의 선망이었던 녹음실의 전속 연주자가 됐다. 스물네 살의 일이다.
“제가 스물네 살에 스튜디오 들어갔는데… 마장동 스튜디오라고 당시 대단했죠. 최고들만 모이는 곳이었으니까. 그 스튜디오 전속 멤버가 됐는데, 당시만 해도 녹음실 전속 멤버가 된다는 건 엄청난 일이죠. 전속 멤버에 들어가려면 오로지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니까, 어떤 빽도 안 통하니까. 제 인생에서 큰 행운이었죠. 그 당시 녹음실이란 곳이 어떤 곳이냐면… 요즘에는 뭐 아무나 가서 하는 시대지만… 그때는 일단 연주 실력이 최고라는 것을 인정받아야만 멤버로 인정을 해주잖아요. 당시 음반 제작이란 것이 보면… 녹음을 하려는 사람들, 가수나 제작자, 작곡자, 편곡자 이런 사람들이 자기네 음반의 운명을 맡기는 거니까, 장난이 아니잖아요. 집 팔아서 땅 팔아서 음반 내는데. 아무한테 연주를 맡기겠어요? 무조건 최고여야 하는 거죠.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거기는 정말 치열하고 냉정한 곳, 어떠한 경우도 봐주거나 용납이 안 되는 곳인데, 그런 곳에 제가 스물네 살 그 어릴 때 전속 멤버가 된 거니까. 그때는 힘들고 바쁘고 그래서 몰랐는데 돌아보면 제가 밟아온 길이 보통 길은 아니었던 거죠.”
그후 4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녹음 세션 활동을 놓지 않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가수들과 호흡을 맞췄다. 조용필, 전인권, 주현미, 심수봉, 이문세, 장사익 등 셀 수가 없다. 왜 그 많은 가수들이 그와 함께 했을까. 하고 싶어할까. 아, 우문이다. 록, 트로트, 국악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들고, 일렉(전자)과 어쿠스틱(클래식·통기타)을 가릴 것도 없이 구름에 달 가듯이, 구름과 놀듯 연주하는 그의 기타를 누군들 마다할 것인가. 한 마디로 ‘기타에 관한 한 동서고금을 통달했고, 기타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그다.
다시 방점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풀어놓은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이력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임을 부인하진 못 하겠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를 최고의 경지로 만든 것은 오히려 먼저 얘기한 세 개의 방점(그냥, 빠져서, 좋아서 노는)에 있다. 무릇 동서고금 모든 정점에 오른 사람들이 다 그러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 분야의 어떤 사람보다 자기 분야에 대해 ‘그냥(이유없이) 빠져서(미쳐서)’ 그리고 ‘그냥 좋아서 놀았고 여전히 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가 가는 길, 가고자 하는 길은 아티스트
내로라하는 대부분의 가수와 음반 작업을 해온(그가 함께한 가수만 천 명이 넘고, 참여한 곡만 10만 곡이 넘는다고 한다) 기타 연주자 김광석이 꼽는 최고의 가수는 누굴까. 궁금했다.
“장사익 씨, 전인권 씨 그리고 조용필 씨 그렇게 세 사람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우리 음악하는 분 중에서 아주 대선배님께서 공개석상에서, 우리나라 남자 가수 중에서 득음을 한 사람이 세 명이 있는데, 그게 조용필, 장사익, 전인권, 이렇게 세 사람이라고 그러셨어요. 워낙 대선배님께서 말씀을 하시니까 아무도 반론을 못 하죠.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맞는 말씀이에요. 그 세 사람하고 같이 한 작업이 지금까지 가장 인상적이고… 장사익 씨 같은 경우는 녹음실 와서 연습조차 안했어요. 소리가 그냥 넘쳐 흘렀으니까. 연습도 안하고 바로 갔어요. 장사익 씨 1집 음반이 그래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완전히 소리들이 살아 있으니까. 우리나라에는 가수들은 많은데 아티스트는 좀 드물어요. 스타는 있어도 아티스트가 좀 귀해요. 그런데 장사익 선생님 같은 분은 스타이기도 하지만 예술성을 갖고 계시는 분이 거든요. 그분이 ‘동백아가씨’를 부르면 유행가가 아닌 거죠. 예술이 됩니다. 장사익 선생님 같은 경우는 뿌리는 국악이지만 사실은 그냥 자기 장르를 만든 사람이죠. 그게 힘든 거거든요.”
조용필, 전인권, 장사익. 그가 꼽은 최고의 가수다. 이 세 사람을 최고로 꼽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가수를 넘어 스타를 넘어 마침내 아티스트라는 것. 그 얘기는 바꿔 말하면 아티스트야말로 김광석 본인이 가고 있는 길이고, 가고자 하는 길이고, 마침내 이루고 싶은 길일 것이다. 세션맨을 넘어, 기타리스트를 넘어, 마침내 아티스트가 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이미 그는 충분히 아티스트이고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가 아닐까.
그런데 또 문득 궁금했다. 하고 많은 악기 중에 왜 하필이면 기타인지. 물론 그냥 기타가 좋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냥 기타가 좋았고, 지금도 그냥 기타가 좋아요. 너무 재미있어요. 저는 지금도 기타 칠 때가 가장 행복하고, 기타를 칠 때만이 제가 존재하는 거 같아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기도 했다. 나이로만 보면, 옛날 같으면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인데, 기타 치는 게 아직도 그냥 재밌다니? 기타가 뭐길래!
“사람한테 감동을 주는 악기가 세 가지가 있어요. 노래, 첼로, 기타. 이 세 가지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악기라고, 제 생각이 아니라 책에 쓰여 있어요. 근데 맞는 얘기 같아요. 그 세 악기의 공통점이… 전부 소리가 앞으로 나간다는 거죠. 위도 옆도 아닌 앞으로. 노래도 첼로도 기타도 소리가 앞으로 가잖아요. 물론 뭐 억지스러운 면도 있죠. 기타나 첼로나 노래만이 감동이겠어요? 하기 나름이지. 그런데 기타는 멜로디와 리듬, 하모니 연주를 하나로 다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악기입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부터 ‘목포의 눈물’까지 기타 하나로 다 되잖아요. 독주도 되고 반주도 되고, 어디든지 들고 다닐 수 있고, 품에 안고 연주하니 소리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죠. 근데 단점도 많아요. 기타는 음이 금방 끊어지잖아요. 소리가 지속이 안 돼요. 땅! 치면 싹 없어지잖아요. 그러고 또 기타는 음량이 작아요. 다른 악기에 비해서 음량이 너무 작다보니까 오케스트라에 못 끼는 거예요. 그런데 또 재밌는 게… 음량이 작고 끊어진다는 약점이 결국 기타를 제일 먼저 일렉트릭화할 수 있게 한 거예요. 악기 중에서 제일 먼저 일렉트릭화한 게 기타거든요. 일렉트릭이라는 게 기타에 붙으면서 그전과 전혀 다른 엄청난 문화가 태어났잖아요.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무언가 부족한 게 오히려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동기가 되는 거. 재미있지 않아요?”
가장 한국적인 그래서 가장 세계적인 아티스트
이십대 중반에 시작한 세션 활동.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김광석은 세션맨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세션맨들과 다르게 꾸준히 독집 앨범을 내고, 단독 콘서트를 열고, 초청 연주회를 다닌다.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환갑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기타를 공부하고 있고, 기타와 놀고 있다. 그냥 재미있어서. 그만의 음악관은 무엇일까. 육성으로 들어보자.
“제가 세션을 하면서도 항상 음반을 내려고 했었어요. 근데 그때는 워낙 바쁘니까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마흔 살 때, 이제 그때 음악의 흐름이 바뀌어요. 새로운 류가… 과거의 음악이 한 고개를 이제 넘어가고 새로운 음악이… 그 시작이 바로 서태지였고 어쩌면 K팝이 태동한 거죠. 댄스 음악을 중심으로 음악의 흐름이 변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동안 그렇게 바빴던 게 딱 숨이 죽더라고요. 저한테는 오히려 그게 기회였죠. 여유가 조금은 생겼으니까. 그래서 그때 1집 앨범(『The Confession』)을 냈어요. 그게 95년도에요. 서태지가 나왔던 그 무렵…. 그리고 지금까지 네 장의 정규 앨범을 냈죠.”
“저는 배운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수학이라든가 그런 거는 기초가 있어야 하고 단계가 필요하지요. 근데 예술은… 음악이나 미술, 이런 것들은 다르죠. 배운다는 자체가 선입견이라는 하나의 틀일 수도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배운 것에서 벗어나질 못 해서 그 틀 안에서 평생 자기 음악 생활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잖아요. 예를 들어 실용음악과에서 기타를 배운 친구들은 연주나, 레퍼토리나, 톤이나 똑같아요. 연탄처럼 딱딱딱 찍혀 나오는 거죠. 거기에는 ‘자기’가 없잖아요. 예술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것을 하는 거죠. 남의 것을 흉내 내는 것은 배움의 과정이고 어느 단계가 되면 그걸 버리고 자기 거를 해야 되는데, 배운 것을 벗어던지는 것이 배우는 것보다 더 힘든 거 같아요. 물론 배운다고 되고, 안 배운다고 안 되고 이런 것은 아니고… 그런 거와 관계없이 결국은 자기 길을 가야 한다 이거죠. 남이 하던 걸 따라하면 학생 수준밖에 안 되는 거죠. 미술도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피카소’ 거 아무리 잘 그리면 뭐하겠어? 그렇지 않아요?”
“사실 저는 1집 앨범을 창작곡이라고 얘기하지 않아요. 자작곡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창작이라는 개념이 없거든요. 알고 보면 외부 음악에 있는 다 장르니까. 내가 피카소 그림을 보고 다르게 그렸다면 그건 피카소 아류일 뿐이잖아요. 자작은 되지만 창작은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그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가 결론을 내린 게 뭐냐면 ‘형식을 버리고 양극(단)을 극복하고 근본으로 돌아간다’였어요.”
“블루스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연주자가 우리나라에 왔었어요. 비비 킹(B.B. King)이라고. 얼마 전에 작고했죠. 근데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공연하는 걸 봤는데, MC가 신청곡을 받겠다고 했는데, 관중석에서 누구도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요. 세계 최고가 와서 하는데…. 그때 느낀 게 뭐냐면, 세계 최고가 와서 해도 저런데, 내가 블루스에 인생을 바칠 이유가 없겠구나! 세계 최고가 와서 해도 아무 반응이 없는데, 그걸 따라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결국 나는 한국에서 살고 있잖아요. 조상에게 물려받은 혼이 있고 피와 살이 있고… 우리 문화, 우리 사람, 우리의 땅과 공기, 그런 우리 것을 표현해야죠. 내 유전자는 거기에 가장 특화된 것이니까. 내가 여기서 플라밍고를 스페인 기타리스트보다 잘 치면 뭐하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학생 때, 스무 살, 서른 살까지는 그렇게 하더라도 사람들이 와! 이럴 수도 있지만… 육십 넘어서도 그러고 있으면 ‘쟤, 아직도 저러고 있냐?’ 그러지 않겠어요?”
“못났으면 못난 대로 우리 된장 냄새 나는 것을 쳐야지요. 1집 이후 그렇게 마음을 먹고 완전히 바꿨어요. 아까 얘기한 대로 ‘형식을 버리고 양극을 극복하고 근본으로 돌아온다’는 화두를 가지고 작업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지요. 양극을 극복한다는 게 뭐냐면,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거예요. 크고 작음, 복잡함과 단순함, 빠름과 느림 그런 양극단을 극복하면 자유로워지죠.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까 얘기한 대로 내가 이 땅에 살고 있으니까, 내가 호흡하는 음악을 하겠다, 그런 소리를 내겠다. 그런 거고 형식을 버린 다는 것은 내 소리를 만들고, 주법도 아예 내가 만들고… 4집 앨범은 악기도 제가 새로 만든 거로 연주했고…. 그게 아티스트가 해야 하고 가야 하는 길이 아닐까. 저는 아티스트라면 대중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그렇다고 대중들한테 외면 받지도 말고, 대중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힘든 일이죠. 대중을 쫓아가지 않지만, 대중한테 외면 받지 않는다는 게. 그렇지만 그게 진짜 아티스트니까. 지금 보면 피아노든 바이올린이든 세계 1등 연주자가 다 한국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냉정하게 말하면 훌륭한 연주자일 뿐이죠. 자기 깨달음과 자기 세계로, 자기 음악으로 가야지요. 그래야 진짜 아티스트가 되는 거죠. 아티스트는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에요. 스타가 아무리 멋지고 벤츠 타고 사람들이 많이 따라다녀도 그 사람들은 조명을 받는 것이고, 아티스트는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고. 그게 중요하죠.”
구름에 달 가듯이 구름과 놀다
아, 인터뷰 말미에 나온 얘기. 인터넷에 김광석이 ‘소리새’의 멤버, ‘솔개 트리오’의 멤버로 나오기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란다. 이참에 확실히 밝혀둔다.
“솔개 트리오도 그렇고 소리새도 그렇고 저하고는 인연이 없는 그룹들이에요. 아마 동명이인일 거예요. 인터넷이라는 게 개념도 없이 잘못된 정보도 그냥 싣잖아요. 사람들은 또 개념 없이 그거 보고 프로필로 쓰고 그래요. 그렇다고 뭐 제가 일일이 다 해명할 수도 없고….”
인터뷰를 마치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이미 1층 갤러리는 사람들로 꽉 찬 상태다. 나도 관중 틈에 끼어 앉았다. 드디어 시작된 그의 연주. 천상의 음악과 천상의 향기로 허공에 지은 것이 건달바성(乾達婆城)이라면 지금 이 순간, 지금 이곳이야말로 건달바성이 아닐까 싶었다. 이미 알고 있던 곡들을 연주하는데, 들리는 소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트로트인 듯 트로트가 아닌 듯, 음악인 듯 음악이 아닌 듯, 기타인 듯 기타가 아닌 듯, 산 듯 죽은 듯, 울음인 듯 웃음인 듯, 사람인 듯 귀신인 듯… 신명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싶었다. 그렇게 그와 관중 모두는 하나가 되어, 구름에 달 가듯이 구름과 놀고 있었다.
그날 그 순간을 떠올리면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린다. 진정하고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그날 그가 했던 말 중에서 유독 가슴에 와닿은 말이 있다. “스타는 빛을 되비추는 행성일 뿐이고, 아티스트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이다.” 그랬다. 그는 태양처럼 스스로 빛나는 항성이었다. 그의 빛을 받은 수많은 행성들이 그의 뒤를 따르며 스타가 되고, 수많은 대중들이 그런 스타를 따라다니겠지만…, 여전히 대중은 스타(행성)에 매달리고 열광하면서도 진정한 빛이 아티스트(항성)에서 나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겠지만…,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는 언제나 홀로 빛날 것이다. 그는 진짜 아티스트니까.
빛(예술)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빛(예술)을 만드는 사람. 그가 아티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