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책가방/김미헤
꾸밈없는 낯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사북초등학교 64명 어린이 시 / 임길택 엮음/ 김환영 그림/ 보리2006)
특별히 ‘글짓기’를 모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 아이들이 지금 사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글로 쓸 수는 있었고, 나는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오후 내 책상에 앉아 그 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더러 가슴이 미어짐을 어쩔 수 없어 그 글을 읽다 말고 창가로 가면, 아직도 좁은 운동장엔 가방을 놔둔 채 뛰고 달리며 신나게 노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비로소, 아이들 편에 서는 ‘선생님’이 되어갔다.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책 속에 들어 있는 머리말이다.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는 한없이 가슴 먹먹하게 했던 임길택 시인의『탄광마을 아이들』에 나오는 아이들이 쓴 삶의 이야기이다. 이미 30년이나 지난 이야기이지만 그 시들은 낡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시간의 무게를 견뎌내고 여전히 감동을 주고 있는 그 시들이야말로 진품 아닐까 싶다. 내 동시의 젖줄이 되어 준 시, 임길택 선생님이 사랑한 그 아이들이 담아낸 그들의 현실과 마음, 꾸밈없는 낯을 함께 읽어 보자.
공부
5학년 하대원
아버지가 알면 / 얼마나 실망하실까. / 아버지는 술을 잡수시고 오면 / 우리 보고 공부를 하라고 한다. / 예, 하고 말해 놓고 / 한참 놀다가 들어온다. / 아버지 우리 공부 다 했어요. /라고 하면 / 진짜로 공부를 한 줄 알고 / 과자 사 먹으라고 돈을 주신다. / 나는 그 돈만은 받지 않는다.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보리2006, 93쪽)
나는 그 돈만은 받지 않는다! 압권이다.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 수오지심을 잃지 않고 과자가 먹고 싶어도 참아낼 줄 안다. 대견하다. 욕망을 제어할 줄 모르는 이들과 사뭇 다른 아이한테 숭고함이 느껴진다. 도금이 벗겨져 까뭇까뭇 속살이 드러나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넘치지 않는가. 살아온 길을 감추려고 거짓말을 하고, 나쁜 짓을 해도 높은 자리에 오르고, 그래도 당당하게 대중 앞에 나서는 뻔뻔한 이들을 보아 온 지 오래다. 그래서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대원이, 이 아이 마음이 더욱 반짝 빛나는 보물이다.
거짓말, 말 바꾸기, 모르쇠, 합리화, 미화. 그렇게 해도 오르고 또 올라 권력의 꼭대기까지 오른 이는 쾌재를 부르며 대원이처럼 시를 쓸 테지.
국민들이 알면 / 얼마나 실망할까 / 그래도 무슨 상관 / 높은 자리 휘청거리면 / 위기 탈출 넘버원 구원투수 / 수첩에서 뒤적뒤적 / 부름만 받으면 / 만신창이가 무슨 상관 / 청맹과니들의 뜨거운 사랑은 / 콘크리트 사랑. / 얼씨구나, 주구장창(주야장천) 해먹어야지 / 고관대작 탄탄대로 내 인생. / 해가 지지 않는 / 빅토리아 시대로세. (김미혜)
권력에 기대어 온갖 것을 차지하고 곳간을 더 짓고 더 채우기 위해 비리를 저질러온 인생, 비루한 삶이 만천하에 드러나면 어떠리. 사과하고, 버티고, 오리발 내밀면 무사통과인걸.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초록은 동색, 낯부끄러운 줄 모르고 초록을 끌어안는걸.
주인집의 아이들
5학년 이해남
우리가 과자 같은 것이 있으면 / 같이 노는 척하면서 / 과자를 빼앗아 먹는다. / 그리고 /
지네들이 과자가 있으면 / 우리랑 같이 안 논다. (24쪽)
‘갑’ 은 이렇듯 염치없다. 해남이는 갖지 못한 자의 서글픔을 지나 권력 가진 것들을 단순 명쾌하게 비판하고 있다. 용기 있는 비판 정신이 참되고 올바른 사회로 만들어오는데 힘이 되어오지 않았던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들어가려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매의 눈이 필요하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입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식구 이야기 친구 이야기 이웃 이야기를 순박하고 진솔하게 들려주는 아이들의 시는 자못 깊은 감동을 준다. 아이들 눈높이로 때론 익살맞고 천진난만하게, 때론 담담하고 준엄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언제나 날된장에 찍어 먹는 봄동 맛이다.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를 비롯하여 『어린이 시 이야기 열두 마당』『우리 모두 시를 써요』라든가『엄마의 런닝구』『까만 손』『개구리랑 같이 학교로 갔다』와 같은 어린이 시 모음집들도 그러하다. 여기에 담긴 시들은 ‘머리로 짜내고 꾸며 맞추는 죽은 시, 가짜 동시를 쓰게 하지 않은 시’이며 ‘어린이들이 살아가면서 가슴으로 느낀 것, 온몸으로 겪은 것을 시로 쓰게 한’ 시들이다. 그리하여 이오덕, 임길택, 탁동철, 이승희 선생님과 함께 시를 쓴 아이들의 작품집은 학년이 바뀌어도 버리고 싶지 않은 교과서며 교사 지침서이며 늘 곁에 두는 사전인 셈이다.
책가방에 담기는 책들은 세월 따라 변해 간다. 꽃과 나비와 봄바람 위로 학대받는 너구리와 부조리한 세상과 건강한 삶과 회복을 기원하는 간절함이 올라간다. 지금 이 마음 위로 무엇이 차곡차곡 쌓일지 모르겠다. 빼고 덜어내고, 채우고 보태며 애벌레를 지나 번데기로, 나비를 꿈꾸는 번데기로, 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탈피하길 꿈꾸는 중이다. 대개들 그렇듯.
끝으로 시 한 편 더 소개하련다. 갱도의 끝에서도 예쁘네요, 말하며 함께 웃는 날들이면 좋겠다.
아버지가 오실 때
5학년 하대원
아버지가 / 집에 오실 때는/ 쓰껌헌 탄가루로 / 화장을 하고 오신다. / 그러면 우리는 장난말로 / 아버지 얼굴 예쁘네요. /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이 / 그럼 예쁘다말다. / 우리는 그런 말을 듣고 / 한바탕 웃는다. (60쪽)
김미혜
2000년 『아동문학평론』으로 등단. 『아기 까치의 우산』『아빠를 딱 하루만』『꽃마중』, 『신나는 동시 따 먹기』, 『저승사자에게 잡혀간 호랑이』『돌로 지은 절 석굴암』『누렁이의 정월 대보름』『귀신 단단이의 동지 팥죽』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