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산철벽(銀山鐵壁)
처음 화두 들 때 간절하게 의심하여 잡념 망상을 제거하는데 주력하다보면 두뇌頭腦에 화두기운이 생기는데 이 기운을 진리의 기틀 이라고 하여 이기理機라고한다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 때는 절실하고 철저하게 의심을 해야 된다.
우리나라에서 배출한 피아니스트 겸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가 일본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처음 부임했을 때 단원들한테 이상한 물건을 선물로 주었다.
그 선물이 뭐냐 하면 “삽”을 하나씩 선물 했다한다.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땅 파는 삽을 하나씩 선물을 했는데 단원들이 너무나 의아해서 “왜 삽을 선물했냐?” 고 물어보았다.
정명훈 이가 말했다.
“당신들이 연주할 때 음악을 들어보면 너무나 감정이 없고 무미건조하다.
연주할 때는 삽으로 땅을 파듯 당신들의 가슴을 후비고 파서 감정이 북받쳐 나오도록 심오한 연주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연주할 때 그냥 악보대로 기계적으로 연주하지 말고 가슴에 사무치도록 심취心醉해서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듯 화두의심 할 때 역시, 건성으로 들지 말고 나 자신과 의심이 하나가 되도록 감정이 북받쳐 나와야된다.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의심하면 정신이 일도一到되어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고로 정신이 고도로 집중되어 그에 상응해서 몸에 일어나는 현상이 두뇌에 생기는 화두의 기운이다.
화두의 기운은 정진을 제대로 열심히 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절대로 상기병이 아니니 쉬지 말고 계속 정진해야 된다.
잡념 망상이 들어올 때 정신 차리어 화두를 들다보면 자연적으로 따라붙는 것 이 화두의 기운이다.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두의 기운이 앞으로 밀려 나가는 것을 알 것이다.
한참 애를 쓰며 정진하다보면 밀려 나가던 화두의 기운이 더 이상 밀려 나가지 않으니 절벽과 같이 된다. 아무리 밀고 또 밀어도 화두가 없어져 머리가 “훵” 할 뿐이다. 어쩌다 밖에 나가 용변을 보든가 공양을 하고 들어와 자리에 앉으면 잠깐은 정진이 되다가 금세 화두가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말고 온 힘을 다하여 계속 정진 하다보면 화두가 동력動力이 생기어 스스로 자동적으로 밀려 나가게 된다.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가 들리고 구태여 화두의심을 하지 않아도 의심이 생기니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의정疑情이다.
의정이 생기면 화두가 순풍에 돛단배처럼 물위를 미끄러지듯 밀려나가게 되는데 이 경계에서는 한 계단 진척된 공부이니 화두의심을 하지 말고 오로지 잡념 망상 더 나아가 잠재의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 애를 써야 된다.
혹자或者는 공부마칠 때까지 끝까지 의심을 놓지 말라고 하는 공부인 이 있는데 그것은 공부의 이치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물론 의정이 생기지 않았다면 계속 화두의심을 계속 들어야한다.
그러나 의정이 생겼다면 구태여 화두의심을 할 필요가 없다.
의정疑情자체가 의심체 이기 때문이다.
계속의심 한다해도 그것은 “의심한다는 인식認識”만 의심이지 절대로 의심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의식적으로 애써 의심할 필요가 없고 오직 잡념 망상이 없도록 하여 화두의 기운이 순일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산승이 누차 말하지만, 화두가 없어지거나 의심이 나지 않기 때문에 이 경계에서 많은 수행인이 방황하여 염불선으로 돌아가거나 참선을 놓아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정진을 잘못하는 것이다.
이 공부 경계에서는 다시 한 번 마음을 차분히 하고 좌복에 앉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정진할 때 척추를 세우고 가부좌 틀고 앉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연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게 되어있다. 이렇게 몸에 착력이 되면 화두의 기운이 들어붙을 수가 있고 또한 힘을 너무 빼고 앉아있어도 화두의 기운이 더 들어붙을 수가 있다.
화두의 기운이 들어붙으면 자신이 잘 알아서 너무 착력着力하지도말고 힘을 빼지도 말고 다만 화두의 기운이 순일하게 밀려나가도록 만 노력해야 된다.
이때부터는 쉬는 공부에 들어가는데 자세에 구애받지 말고, 앉아서 정진하던, 벽에 기대서 정진하던, 누워서 와선을 하던, 오로지 화두의 기운이 들어붙지 않는 상태 즉 순일한 것을 위주로 하면서 잡념 망상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된다.
화두의 기운이 밀려 나가지 않고 자꾸 들어붙든가, 머리가 도도하고 불편하면 이때는 정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오로지 정진할 때는 몸의 자세에 구애받지 말고 그저 화두가 순일하도록 애를 쓰면 된다.
그리고 이 공부 경계에서는 잡념 망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빈 정신(일체의 념이없는 정신)을 쳐다보는 것이 화두이다.
쳐다보는 것은 관觀한다는 말이다.
념이 없는 빈 정신을 지속적으로 관觀하다가 잡념이 들어오면 얼른 정신을 차리어 잡념을 제거해야 된다.
잡념을 제거하는 방법은, 잡념이 들어오면 정신을 차리어 혀舌신경을 자극하여 혼자 중얼거리듯 “어째서??” 하게 되면 정신이 번쩍 난다. 공부가 좀 진척되면 잡념이 들어올 때 얼른 정신만 차려도 잡념이 사라진다.
물론 빈 정신을 쳐다보는 것 역시 잡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잡념 망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쳐다보는 마음을 화두로 삼아야한다.
그러나 공부가 진척 될수록 화두의 기운은 점점 더 들어붙게 되는데 거기에 상응해서 몸에 힘도 점점 빼야 된다. 당연히 정진할 때의 몸의 자세에도 영향이 있어서 산승 같은 경우는 이 경계에서 몸에 힘을 점점 덜게 되어 나중에는 와선臥禪을 했다.
순풍에 돛단배처럼 화두가 미끄러지듯 밀려 나가지만 공부가 익을수록 미끄러지듯 나가던 화두의 기운이 서서히 뭉치면서 밀려나가던 것이 마침내 멈추게 된다. 밀려나가던 화두가 멈춘 것은 의정이 멈춘 것이며 이 의정은 순수한 의심덩어리로 똘똘 뭉치게 되는데 이것이 의단疑團이다.
이것으로써 화두는 더 이상 밀려 나가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로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나중에는 사량분별과 시비장단이 끊어지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되어 의심 뭉치인 의단만이 홀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을 의단독로疑團獨露라고 한다.
의심체가 고도高度로 집중되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서 화두는 뭉치게 되고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버린 의단을 깨뜨려 버려야 되는데 이 경계를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는 “백척간두”라고도 하는데 참선공부를 지어가는 여정旅程 중에 통틀어서 가장 힘든 관문이다.
은산철벽을 투과 하기란 단단한 바위를 맨 손가락으로 비벼서 구멍 내기보다 더 힘들다.
은산철벽은 은으로 만든 아주 두껍고 높은 절벽을 말한다.
두껍고 높으며 기름 바른 것처럼 미끄러운 철벽이 전후좌우로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서 한 발짝도 나아가거나 물러날 수 없는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철옹성鐵甕城이다.
은산철벽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障壁이며 그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 밖으로 나와 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은산철벽을 투과透過하는 수밖에 없다.
은산철벽을 부수고 나가는 것을 의단타파疑團打破라고 하는데 이때는 절대로 정중靜中에서는 정진할 수가 없게 된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정중에서 정진하면 화두의 기운이 머리에 심하게 들어붙어 정중공부를 지어갈수가 없게 되는 데 이 공부경계에서는 동중공부動中工夫로 전환轉換해야 된다.
그동안 순풍에 돛단배처럼 앞으로 매끄럽게 밀려 나가던 보배寶貝와 같은 화두의 기운이 나중에는 딱딱하게 뭉쳐서 한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되어 그야말로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와 같이 되나니 이때는 정중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동중動中에서 몸을 움직이면서 딱딱하게 뭉친 화두의 기운을 깨뜨려야 되는 것이다.
의단은 순수한 의심의 덩어리가 뭉친 것이다.
간절하게 의심을 거듭 하다보면 정신이 고도로 집중되어 의심하는 마음이 똘똘 뭉쳐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니 그에 상응하여 몸에 나타나는 현상이 화두의 기운이 단단하게 뭉쳐진 결정체結晶體가 두뇌를 압박하는 힘으로 느끼게 된다.
화두의 기운이 단단하게 뭉쳐서 머리에 심하게 들어붙은 힘을 두뇌의 힘이라고 말하는데 이 두뇌의 힘을 부수는 것이 의단을 부수는 것이라고 한다.
동중공부에 나가는 것은 오로지 의단을 깨뜨리기 위함이니 처음에는 도량내에서 서서히 걸으면서 움직이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점차적으로 강도를 높여서 움직여야 되는데 중요한 것은 몸은 움직이되 잡념 망상이 없어야 된다.
정중靜中에서 정진할 때의 정신을 그대로 움직이면서도 잡념 망상이 없는 정신을 유지해야 되는 데, 몸을 움직이게 되면 자연적으로 딱딱하게 뭉친 두뇌의 힘이 부서지게 된다.
어떤 때는 몸을 움직여도 두뇌의 힘이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있을 때는 움직이는 강도를 높여서 움직여야 그 힘이 부서진다. 강도를 높인다는 것은 몸에 힘을 주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이 경계에서 산승 같은 경우에는 태백산 도솔암에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움직였는데 주로 산에 올라가서 화목火木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정중 공부할 때 는 일체 산문출입을 안했지만 동중공부를 시작하고부터는 식량과 생필품 정도는 산 밑의 마을에서 등짐으로 직접 운반을 했다.
움직일 때는 두뇌의 힘이 부서져 없어진 것 같지만 정중靜中에서 가만히 있으면 두뇌의 힘이 또 나타나게 되어있다. 두뇌에 들어붙은 이 힘을 말할 것 같으면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단단하기로 말하면 쇠뭉치나 바위보다도 더 단단하고, 신축성으로 말하면 아주 질기고 질긴 생고무 보다 더 질겨서 어지간히 움직여서는 부서지지 않는다.
은산철벽 경계에서 <고봉원묘 선사>와 <단운지철 선사> 등은 밤낮없이 주야로 용맹정진을 했는데 몸에 힘을 가加하기위해서 주로 힘든 운력運役을 하루 종일 했다.
특히 고봉선사 같은 경우는 두뇌의 힘을 부수기위해서 밤에도 등에다 맷돌을 등짐지고 다녔는데 이 공부경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수마를 쫓기 위해서 맷돌을 등에 지고 돌아 다녔다고 말하지만 모두 의단을 부수기 위해서 동중공부를 한 것이다.
과거 어느 선지식은 이 공부처에서 두뇌의 힘을 타파하기위해서 홀연 단신으로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석산石山을 정釘하나와 망치만을 가지고 석굴石窟을 만들려고 파들어 갔는데 석굴을 다 파기 전에 활연대오 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는 모두 몸에 착력 가加하므로써 의단을 부수는 방법인데 말이 쉬운 것이지 단단한 바위를 정 하나로 쪼아서 굴을 판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머리에 들어붙은 두뇌의 힘도 없고 일체의 념이 없는 상태 그리고 관觀하는 마음까지도 없는 진공眞空상태가 되어야 의단이 타파되는 것이다.
또한 그냥 걷거나 움직이면서 정진한다 하여도 잠자는 시간 조금 빼고 하루 종일 움직인다는 것은 참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다. 움직이는 것도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잡념 망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신을 차리면서 움직여야 되는 데 이때 공부가 깊어지면 움직이면서도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 즉 “움직임만 있고 움직이는 사람이 없는” 삼매에 들어 갈수도 있다.
반복하여 일러두지만 이때의 공부는 움직이는 중에 두뇌의 힘이 없으면서 동시에 잡념 망상이 없어야 된다. 어쩌다 피곤하여 자리에 앉으면 또다시 두뇌의 힘이 나타나는데 두뇌의 힘이 있는 공부 10시간 보다 두뇌의 힘이 없는 공부 1분이 더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에 두뇌의 힘을 부수기위해서는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육체의 힘은 한계가 있어서 너무나 힘이 들면 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방법으로 동중공부를 지어가다 보면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도 두뇌의 힘이 없어 질 때가 있는데 이때는 구태여 동중에서 움직일 필요가 없고 실내에 들어가서 정중에서 정진을 하면 된다. 그러나 한참 정중에서 정진을 하다보면 반드시 두뇌의 힘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때는 다시 밖으로 나와서 움직이던 또는 실내에서라도 움직이면서 정진을 하여 그 힘 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된다.
결론은 정중이던 동중이던 잡념이 없으면서 두뇌의 힘이 느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혹자或者는 말할 것이다. 참선은 화두를 들고 잡념이 없는 상태를 지속하여 번뇌를 끊고 공적영지空寂靈知를 체득하여 깨달음에 이르면 되는 것인데, 복잡하게 화두의 기운이니 두뇌의 힘을 운운云云하니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러나 참선인 들이 꼭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정신이 해탈하려면 반드시 몸도 상응해서 해탈해야 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정신이 해탈하려면 몸이 해탈해야 되고 몸이 해탈하려면 정신이 해탈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화두의 기운이란 정신이 일도一到되면 자연적으로 몸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며 두뇌에 느끼는 감각기운이다.
화두의 기운이 도도하고 뻑뻑하면 몸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고 정신도 여기에 상응하여 경직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는 정진이 안 되고 있는 상태이니 좌선하는 자세를 잘 살펴서 몸에 착력되는 힘과 정신이 맑고 흐리게 함을 잘 조절하여 화두의 기운이 순일하도록 해야 정진이 되는 것이다.
고집 부려 가부좌 틀고 척추를 세우고 정신을 바짝 차려 화두를 든들 화두의 기운이 경직되어 머리에 불편함을 느끼면 그때는 전혀 정진이 안 되고 육신만 피곤할 뿐이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두뇌의 힘이란 화두의 기운이 딱딱하게 굳어서 두뇌를 압박하는 힘을 말하는데, 의심의 덩어리인 의단疑團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머리에 붙었다하여 두뇌의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단은 순수한 의심체의 덩어리인데 정신이 고도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몸도 여기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현상이 화두의 기운이 딱딱하게 뭉쳐버린 것이다.
그에 따라서 우리의 두뇌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화두의 기운(두뇌의 힘)을 깨지 못하면 의심의 덩어리인 의단을 깨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들은 공부를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했을 때 나타나는 경우임을 말해둔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공부가 순숙純熟해지면 두뇌의 힘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는데 두뇌를 압박하는 힘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면 몸에 힘을 주어 착력 할 필요가 없다.
이 경계에서는 마음을 내어 일부러 움직일 필요가 없고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하면된다.
이때부터는 산에서 내려와 요중공부를 해야 되는데 생활선生活禪에 진입進入하게되는 것이다.
동중공부와 요중공부의 차이점은 동중공부할때는 두뇌에 힘이 들어붙기 때문에 정중에서 정진할 수 없으나 요중공부는 정중과 동중을 초월한 경지로써 두뇌에 들어붙은 힘이 크게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정중이던 동중이던 일체처에 자유스럽다.
이때의 공부처는 “닦음 없이 닦는다.” 라고 하여 “하지 않는 공부”를 말한다.
공부가 아주 익어버리면 정중에 있으나 동중에 있으나 정동靜動에 구애받지 않게 되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끄달림이 없다.
시끄러운 시장바닥에서도 마음을 흔들림 없이 여여如如하게 갖는 것이라 하여 요중공부擾中工夫라고하지만 중요한 것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에서 한결같이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어야하며 순경계와 역경계에 취사심取捨心이 없어야 된다.
특히 혼자 정중에서 선정을 닦는 것은 화두를 들고 잡념만 없도록 하기 때문에 단순한 수행법이라서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요중에서는 실생활 속에서 여러 사람을 상대하며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갖가지의 사건을 겪으면서 오욕칠정五慾七情과 탐진치의 경계를 맞이해서 동요하지 않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수행단계 중에서 고차원의 수행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생활을 하며 요중공부에 들어가면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번뇌煩惱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방지자연放之自然하여 매사에 집착하지 않는다.
깨달음에도 집착함이 없어 마음으로 무언가를 조작하려 하지 않는다.
깨달음의 여정旅程에는 정확한 길이 있지만 정定해진 종착역이 따로 없다.
마디마디 가는 길목 마다 몰록 깨달음의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시비是非와 분별分別을 쉬고 평상심을 갖고 생활할 뿐 이다.
정중에 있으면 적적寂寂하나 성성惺惺을 여의지 않았고,
동중에 있으면 성성惺惺하나 적적寂寂을 여의지 않았으니,
일체처에서 고요함과 깨어있음이 함께 공존해야 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감사 합니다---
|
첫댓글 세세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
()()()...
정중 동중 요중공부 잘보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모양(껍대기)에 착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깊이 정법수행하는 참선자들의 두개골을 보면
하나같이 이마 및 정수리 부분이 원형으로 돌출해 있거나, 나한전에 모셔져 있는 제불들의 두상의 윗부분이
돌출되어 있는걸 보고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하는 걸 느꼇는데 큰스님으로부터 처음으로 이런 현상에 대한 법문을 듣고
놀라운 마음 금할길 없습니다. 그리고 心身이 一如하다는 말씀(종국은 일체유심조 지만) 참으로 공감하고 이 말씀 다시한번 깊이 새기고 수행에 적용코자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함께 공감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열심히 수행하시고 더불어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공부 경계에서는 잡념 망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빈 정신(일체의 념이없는 정신)을 쳐다보는 것이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