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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 성곽(城郭)을 따라 돌아보면 북쪽으로는 "연주봉 옹성"(連珠峰 甕城)이 있고,
동쪽으로는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 信地甕城)이 있다.
그리고 지세(地勢)가 완만한 남쪽에는 연이어 "제1 남옹성"(第一 南甕城), "제2 남옹성"(第二 南甕城), "제3 남옹성"(第三南甕城)이 연달아 있다.
10년전인 2012년 봄,가을에 다섯 곳을 여러번 돌아 봤지만 역사탐방을 위한 것은 아니고,
그곳에 있는 야생화(野生花)를 보기 위함이였다.
성(城)에서 보는 "연주봉 옹성"(連珠峰 甕城) 입구.
현재는 입구에 계단을 만들어 성(城)외곽으로 돌아가는 길을 내었지만 옛날에는 막혀 있었을 것이다.
"연주봉 옹성"(連珠峰 甕城)으로 들어가는 암문(暗門).
밖에서 보는 암문(暗門).
옹성(甕城) 입구 옆에 있는 치(稚)
처음 이 구조물을 봤을 때는 "봉수대"(烽燧臺)로 착각하고 어떻게 연기를 피울까 생각하기도 했다.
"연주봉 옹성"(連珠峰 甕城)이 이렇게 복원되기 전에도 많이 와 봤지만
그때는 카메라도 없이 다녀서 아쉽게도 사진이 없다.
이곳은 "능선"(稜線)향한 포구(砲口) 하나만이 있다.
양 옆은 가파른 비탈이기 때문에 "포"(砲)가 필요하지 않아 그랬을 듯하다.
다음은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 信地甕城)이다.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 信地甕城)이란 "장경사"(長慶寺)에서 수어(守禦)를 담당하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남한산성"내에는 절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절의 스님들이 외적의 침입시 방어도 하고 성벽의 보수도 했다고 한다.
성(城)북쪽에서 내려오다 보면 멀리 "신지옹성"(信地甕城)이 보인다.
암문(暗門)위쪽에서 본 옹성(甕城) 내부.
옹성(甕城)으로 들어가는 암문(暗門)
앞쪽에 두개의 포대(砲臺)가 설치되어 앞산의 능선을 겨냥하고 있다.
포루(砲樓)
모든 포루(砲樓)에는 좌측에 이방(耳房)이라고 하는 포탄(砲彈)을 저장하는 곳이 있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구슬붕이"라는 야생화(野生花)가 많이 있어서 이다.
지난 11월 27일.
지인(知人)이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남사모)를 따라서 남한산성을 가자고 하여 따라 나섰다.
원래 어떤 모임에 가입하는 것이 싫어서 혼자 다녔는데 웬지 느낌이 좋아서 였다.
버스를 타고 산성으로 올라가면서 기분에 꼭 "남옹성"(南甕城)쪽으로 진행을 할듯했는데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오늘 일정이 "남옹성"(南甕城)을 공부하러 간단다.
여지껏 성곽으로만 다녔지 이길로 올라가기는 처음이다.
저 이름 없는 문 오른쪽에 암문(暗門)이 있다.
제 7암문.
제 7암문이 "제1남옹성"(第一 南甕城) 암문(暗門)이다.
이 사진은 10년전에 찍은 사진이다.
소나무의 크기가 세월을 말해준다.
"제1남옹성"(第一 南甕城)으로 가는 길.
성곽 아래서 보이는 "제1남옹성"(第一 南甕城).
"제1남옹성"(第一 南甕城)은 제7 암문과 남서쪽 성벽이 굽어지는 곳 사이에 지리적 이점(利点)을 최대한 활용해 만들었다.
장군이 지휘하는 누대(樓臺)인 장대(將臺)를 설치했으며, 옹성(甕城) 성벽은 본성(本城)에서 구릉(丘陵)을 따라 내려오면서
지형 조건에 따라 축성(築城) 기술을 달리하면서 쌓아올렸다고 한다.
10년 전의 "제1남옹성"(第一 南甕城)
저러한 상태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장대(將臺)위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다.
멀리 "도봉산"(道峰山)까지 훤히 보인다.
그런데 장대(將臺)위에 두개의 구멍이 난 큰 암석이 뭍혀있다.
용도가 무엇일까?
집에와서 여기 저기 찾아봐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전면을 향하여 포루(砲樓)가 여덟개가 있다.
각 포루(砲樓)에는 왼쪽으로 포탄을 저장하는 이방(耳房)이 하나씩 있다.
장대(將臺)에서 보는 성곽.
이제 "제1남옹성"(第一 南甕城)에서 되돌아 나와 "제2남옹성"(第二 南甕城)으로 간다.
앞에 가로막는 성벽은 "제2남옹성"(第二 南甕城)을 바라보도록 쌓은"치"(雉)다.
"제2남옹성"(第二 南甕城)으로 나가는 암문.
이처럼 크게 돌출 된 "치"(雉)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크다.
그리고 석축(石築)을 쌓은 방식이 옆의 성벽과 전혀 다른 것이 나중에 새로 축조(築造)한것이다.
"제2남옹성"(第二 南甕城)의 현재 모습.
"제2남옹성"(第二 南甕城)의 10년전 모습.
"제2남옹성"(第二 南甕城)으로 내려가는 도중 보이는 "제1남옹성"(第一 南甕城)의 모습.
옹성(甕城)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남한산성에서 세개의 능선(稜線)이 완만하게 내려오므로
이 능선(稜線)을 따라 적의 침입이 쉬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2남옹성"(第二 南甕城)안에서 바라보는 본성(本城) 치(稚).
보고 싶었던 "무인각석"(戊寅刻石 : 戊寅碑)이 성벽 안쪽에 있었다.
전에 생각하기에는 따로 비석(碑石)이 있는 줄 알았다.
戊寅碑
戊 別 都
寅 監 將 廳
泥 冶 石 木 七 役 領 折 通
匠 匠 手 手 月 官 驤 將 衝 尹 政
金 李 辺 辺 日 前 前 前 衛 禦 將 兼 大
乭 己 首 首 部 司 部 司 梅 府 軍 防 夫
屎 嘆 姜 梁 將 果 將 果 將 事 僉 禦 守
木 木 福 南 金 慶 金 宋 軍 崔 知 使 廣
七 二 木 木 義 以 明 孝 行 晩 中 洪 州
七 七 龍 孝 律 祥 龍 得 樞 瑑 府
三 四
라고 105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都廳通政大夫 守廣州府尹兼防禦使 洪瑑 (도청통정대부수광주부윤겸방어사 홍전)
別將折衝將軍 僉知中樞 府事 崔晩得 (별장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최만득)
領將禦梅將軍 行龍 驤衛司果 宋孝祥 (영장어모장군 행룡양위사과 송효상)
監役官前部將 金明律 (감역관전부장 김명율)
前司果 慶以孝 (전사과 경이효)
前部將 金義龍 (전부장 김의룡)
戊寅七月日 (무인7월 일)
木手辺首 梁南 木七四 (목수 변수 양남 목74) #辺首=邊首(변수 : 우두머리)
石手辺首 姜福 木七三 (석수 변수 강복 목73)
冶匠 李己嘆 木二 (야장 이기탄 목2) #冶匠(야장 : 대장장이)
泥匠 金乭屎 木七” (니장 김돌시 목7) #泥匠(니장 : 흙이나 회를 바르는사람)
축성을 맡은 관리책임자는 통정대부 광주부윤겸 방어사 "홍전"(1606~1665)이고
목수(木手)는 "양남"외 74명, 석수(石手)는 "강복"외 13명,
대장장이는 "이기탄"외 2명, 니장은 "김돌시"외 7명이라고 책임자를 명시해 놓았다.
무인비(戊寅碑)라는 명칭은 "무인년"(戊寅年)에 만들은 碑라는 뜻으로 별다른 의미는 없다.
"제2남옹성"(第二 南甕城)앞에서 바라본 남한산성.
"남옹성"(南甕城)들은 모두 병자호란(丙子胡亂) 직후인 1638년(인조 16년)에 축성했는데,
"제2남옹성"과 "제3남옹성"의 포루(砲樓)가 청나라와의 외교적인 문제로 축조 이후 곧 헐어내고 다시 축성한 것이라고 한다.
"제2남옹성"의 포루(砲樓)는 "제1남옹성"의 포루(砲樓)가 전면과 좌측을 향하고 있는 것과 달리 전면과 좌우에 있다.
이는 옹성과 옹성사이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함인듯하다.
옹성(甕城) 안 오른쪽에 커다란 암석이 하나 있다.
위쪽이 반듯하게 잘린 모습이 뭔가에 사용됐음직 한데 아무 설명이 없다.
어느 분이 "옹성"을 정비하고 남은 돌이라고 하는데 저리 큰 암석이 쓰임없이 남았을리 만무하다.
또한 정비하고 남은 돌이라면 그안에 방치할 이유가 없다.
이와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암석이 옹성 밖에도 하나 있다.
원래 "제3 남옹성"(第三 南甕城)까지 보려 했으나시간이 부족하여 다음을 기약하고 "남장대"(南將臺)로올라간다.
"제3 남옹성"(第三 南甕城)으로 가는 길.
"제3 남옹성"(第三 南甕城)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암문(暗門)
성곽 끝에 조금 튀어나온 "치"(稚)가 보인다.
그아래에 "제3 남옹성"(第三 南甕城)이 있다.
암문(暗門)은 밖은 문위가 홍예(虹霓)로 되어 있지만 안쪽은 "평거식"(平据式)으로만들었다.
특히 이 "암문"은 성곽뒤로 무척 두터웁게 보강을 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급경사지점에 "암문"이 있는 관계로 취약할 수 있어 보강을 한 것인듯 하다.
옛날에는 창살로 막아놨었다.
"암문"위쪽으로 올라가 보면 멀지않은 곳에 "제3 남옹성"(第三 南甕城)의 위치가 보인다.
10년 전에 성곽위에서 본 "제3 남옹성"(第三 南甕城).
"암문"에서 "제2 남옹성"(第二 南甕城)쪽으로 가면 먼저 "군포지"(軍鋪址)가 나온다.
이어서 둥근 주춧돌만 남은 "남장대지"(南將臺址)가 나온다.
전에 이 주춧돌위에 빙 둘러 앉아 노래하며 노는 모습을 보며 참담했던 과거를 모르는것에 우울해 했던 기억이 난다.
"남장대지"(南將臺址)앞에 "제2 남옹성"(第二 南甕城)을 앞으로 만들어진 "치"(稚).
"남한산성"에 이렇게 큰 "치"(稚)는 이곳 밖에 없다.
당시에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였는지 짐작케 하는곳이다.
"남장대지"(南將臺址)앞 "치"위에서 내려다 본 "제2 남옹성"(第二 南甕城).
"옹성"안 오른쪽에 있는 큰 암석과 '옹성"밖 왼쪽에 있는 큰 암석의 용도가 궁굼하다.
10년전의 "제2 남옹성"(第二 南甕城)
"치"(稚)안쪽의 "여장"(女牆)에 새겨넣은 꽃무늬 "문양"(紋樣).
아마도 남한산성의 성곽 "여장"(女牆)에는 이곳에 있는 이 "문양"(紋樣)이 유일할듯 하다.
오늘 모든 해설을 해주신 "만해기념관"의 "전보삼"관장님과,
오늘의 모임을 이끌어 주신 "김내동" 남사모 회장님등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첫댓글 남한산성을 이렇게 자세히 안내한 것이 어디 또 있으랴.
덕분에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