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쓰기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2.
제 2장 신지학회 (Theosophical Society)
이 글은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3’과 앨렌 와이스타인과 데이비드 루벨 공저로 이은선이 번역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미국사’에서 많은 참고를 하였다.
차 례
(1) 1860~ 1880년대의 미국의 상황
(2)신지학회의 주역 블라바츠키와 헨리 올코트
(3) 스리랑카에서의 활동
(4) 일본에서 올콧과 달마팔라
(5) 블라비츠키와 올코트 이후의 신지학회.
(1) 1860~ 1880년대의 미국의 상황
일본은 미국과 1854년 미일화친조약,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을 해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의 개방을 통해 미국인들은 불교에 대한 토론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받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1870년대가 시작되면서 많은 미국 지식인들이 다양한 이유로 스스로 이국적인 동양을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에드워드 모스, 어네스트 페놀로사, 윌리엄 스터리스 비글로우, 퍼시벌 로웰, 헨리 아담스, 존 라파즈, 라프카디오 헌 등이다. 이들중에는 에드워드 모스와 어네스트 페놀로사 등은 도쿄제국대학교 교수였다. 윌리엄 스터리스 비글로우는 하바드 대학교 교수였으나 모스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예술품을 수집했다. 1885년 9월 페놀로사와 비글로우는 일본에서 천태불교의 계를 받았다.
1790~1860년 사이 미국 남부의 면화 생산량은 연간 1000톤에서 100만톤으로 증가했으며 그 기간동안 노예들의 수도 50만에서 400만으로 증가했고 노예문제는 미국의 큰 문제로 부상하였다. 전달에서 이미 남북전쟁에 대해 설명을 하였지만 이번 호에는 좀 다르게 기술한다.
남북전쟁.
186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링컨이 승리하였다. 링컨이 당선된 후 12월 사우스 케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였다, 1861년 2월 4일 7개 주는 앨라바마의 몽고메리에 모여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했다. USA에 대항하는 CSA는 2월 8일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역사가들은 남부 7개의 연방탈퇴 이유를 3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정치, 산업, 금융, 제조 면에서 북부에 압도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남부인들의 광법위한 인식. 둘째 북부 주도의 의회가 남부인들의 생활방식을 위협하고 있다는 생각. 세쨋, 흑인들의 남부지배, 광범위한 흑백결혼, 백인여성들에 대한 겁탈이야기처럼 남부 문필가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인종적 광란상태다.
1861년 4월부터 1865년 4월까지 4년간 'Civil War'라는 남북전쟁이 있었고 북부의 연방군이 승리했다. 당시 흑인은 400만 명이었고 이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은 60만 명이었다. 이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남북으로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는 전쟁이었다고 역사가들은 주장한다. 링컨은 인디언들에게 무자비한 정책을 한 사람이고 평소 흑인열등론를 자주 피력하였다. 그는 1862년 8월 이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이 전쟁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연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룰 구하거나 파괴하는 게 아니오.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도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요. 또 노예를 해방하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역시 나는 그렇게 할 거요. 노예제나 유색인종을 처리하는 문제는 연방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하오.”
이 말에서 보다시피 링컨은 통합적이고 집중화된 국가 즉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가들의 주장이 많다. 남북전쟁의 끝난 후에는 엄청난 인디언 살육이 다시 시작되었다. 또한 전쟁 후에 미국의 산업화는 한층 가속화되었고, 풀먼 사의 본사가 있는 시카고 경우에는 폭발적인 추세를 보였다. 도시 주변의 빈곤지역은 골칫거리 빈민촌이 되었다. 콜레라아, 결핵 같은 감염성 질환이 대책 없이 퍼졌다. 범죄와 알코올 중독을 비롯한 사회적 병폐가 사람들을 공격했다. 생활력을 잃은 농민과 외국 이민자들이 시카고로 몰려들면서 노동자 계급은 허름하고 비좁은 주택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1870년대 시카고는 노동계는 상당히 불안했다
남북 철도개통
4년간의 남북전쟁 후에 미국역사에 중요한 것은 동서철도 개통이다. 1862년 의회가 대륙간 철도 노선을 승인하고 재정지원을 한 지 7년 만인 1869년 5월 유타주의 프로몬토리 포인트에서 동부철도와 서부철도의 선로를 연결하여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하였고 이것은 국민통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개통으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7일 만에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870년대에는 경제 규모가 영국보다 더 커졌다.
사진 ---
미국 독립 100년 주년을 맞는 세월동안 미국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항해기술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1876년경 이민자들은 대서양 횡단에 7주에서 12주나 걸려야 했던 종래의 작은 돛단배가 아니라 불과 7일이나 12일이면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증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링컨이 세운 미국이라는 제국의 초석을 무대로 증기선, 철도, 전신, 전화 등은 제국 건설의 인프라로 가능하게 된다. 이후 미국은 초고속 압축성장의 길로 치닫는다. 1865년에서 1880년 사이에 국부(國富)는 2배가 되며, 1900년엔 또다시 2배가 되고, 이 35년 동안에 인구도 2배가 된다. 1860년에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 산업국가였지만, 1894년에 이르러 세계 제일의 산업국가로 급부상하였다.
이 시기에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도 있었고 심령주의도 일부에서 유행되었다. 영매(靈媒)들이 미국 전역에서 속출했고 1870년대에는 영계로 부터의 방문의식을 행사는 장소가 전염병처럼 불어났다. 심령주의는 남북전쟁 이후에 친지를 잃은 친척들의 슬품을 위로했을 뿐 아니라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사회 진화론’을 주장한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1882년 가을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의 유행에도 앞장섰다. 불가지론은 1869년 생물학자 토머스 H.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가 만든 조어로 신의 존재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 즉 판단을 보류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가리킨다.
(2) 신지학회의 주역 블라바츠키와 헨리 올코트
1875년 뉴욕에서 시작된 신지학회는 미국불교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단체를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와 헨리 올코트는 불교신자로 계를 받았는데 이것은 미국에서 백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불교를 대중화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스리랑카, 일본에서 불교 부흥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신지학은 영성주의, 최면술, 힌두교, 그리고 불교가 뒤섞인 것 이었다.
헬레나 블라바츠키는 1831년 러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아이와 청소년 시절 강한 의지와 충동을 보였다. 그녀 성격의 중요한 부분은 어머니의 모범과 독립성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17살에 러시아장교 니키포르 블라바츠키와 결혼한 어린 헬레나는 즉시 남편을 떠나 동방과 동유럽 서유럽을 널리 여행하며 정통한 비전의 지식들을 찾았다. 런던에 있던 20살 생일에 영적 스승인 마하트마 모리야를 만났고 그는 후에 그녀의 신지학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그녀는 불교와 힌두교를 직접 공부했고 타르타르족 주술사의 도움으로 티베트 국경을 넘었다.1850년대에 그녀의 모험정신은 미국으로 가서 뉴욕부터 시카고까지 여행하고 짐마차를 타고 개척자들 무리와 함께 계속 서부로 나아갔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1873년 42세에 마침내 놀라운 모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세상과 나눌 준비가 되었다. 그녀의 해외에서 많은 시간은 바로 영적인 순례였다. 위대한 서양 사상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부터 동양 철학자인 부처까지 심오한 사상들을 수집하고 흡수했다. 작은 구도자 무리가 그녀 주위에 모였다. 블라바츠키가 미국에서 행한 첫 활동의 하나는 당시 미국과 유럽에 유행하던 심령주의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버몬트 치텐덴의 농장을 방문해서그곳에서 올코트대령을 만나게 되었고 친하게 되었다. 헨리 올코트는 블라바츠키 여사를 만났을 때 그는 뉴욕시의 변호사였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남북전쟁동안 그는 부패한 육군 청부업자들의 매점동맹을 적발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링컨 암살에 따른 조사단의 특별 수사단장으로 계속해서 활약했다. 블라바츠키는 얼마 후 심령주의에서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다. 블라바츠키는 마침내 뉴욕시에 정착하면서 올코트와 함께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정규적으로 만났다. 이들은 신비주의(Occultism)에 관심을 가졌는데 전 세계에 이런 수 많은 신비학(神秘學: Occult)의 지맥들이 존재했었다. 블라바츠키 인용에 따르면 “주된 뿌리와 줄기는 아시아의 철학 학파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가 미국에 온 한 하나의 이유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동쪽으로 방향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는 일이 자신의 임무였다. 신비한 비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적잖게 블라바츠키와 똑같은 식으로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동양을 여행하면서 “직접 겪은 체험과 수행”을 바탕으로 이야기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났다. 그녀는 “신비학의 요람”인 그곳에서 수 천년 동안 손상되지 않고 순수하게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수할 수 있었던 전문 수행자들의 학교를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지학회는 국제단체로서 1875년 뉴욕주에서 처음 결성되었다. 헬레나 블라바츠키, 헨리 스틸 올코트와 윌리엄 콴 저지(Helena Petrovna Blavatsky, Colonel Henry Steel Olcott, William Quan Judge)가 공동 설립했다 창설자의 한 명인 윌리엄 콴 저지는 원래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21살에 미국에 와서 상법에 관련된 일을 했으며 학회 설립을 도왔다.
원래 이 학회의 회칙에 따르면 “이 학회의 목적은 오직 우주를 관할하는 법칙 관련 지식을 모아서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 학회에는 세가지 목적이 있었다.
인종,신조, 성(性), 신분이나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없이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의 핵심을 구축한다. 고대와 현대의 종교, 철학, 과학을 연구하며 그런 연구의 중요성을 입증해 보인다. 자연에 대한 설명되지 않은 법칙과 인간에 내재한 심령의 능력을 탐색한다.
유명한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 저명한 작가이자 플라톤학파 학자인 알렉산더 와일더 박사 등 많은 사람들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블라바츠키 여사의 친구였던 와일더는 1300페이지의 『계시된 이시스』 편집을 도왔다.
(3) 스리랑카에서의 활동
헬레나 블라바츠키, 헨리 스틸 올코트 이 두 사람은 두 명의 신할라족 불교 승려들과 서신 왕래를 시작했는데 한 사람은 유명한 팔리어 학자로 ‘아담의 정상’이라는 종파의 종정인 수만갈라였고, 다른 한 명은 파나두라에서 자신에게 도전하는 한 집단의 그리스도교의 선교사들을 사흘에 걸친 토론을 통해 굴복시켜 유명해진 매지투와테 구나난다였다. 블라바츠키 여사와 올코트는 스승 세라피스(Serapis)가 1878년 12월을 넘기지 말고 인도로 떠나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다. 그들은 인도를 방문하고 인도인들과 인도를 통치하던 영국인 통치계급 양쪽에 신지학회의 발판을 마련하고 난 후에 스리랑카로 갔다.
스리랑카 불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영국의 연이은 식민주의의 파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영국은 전의 두 나라보다 표면상으로는 온건한 정책을 쓰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통치방식에서 간접적인 통치방식으로 전환했을 뿐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공식적으로 불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으나, 그리스도 교회에서 행한 결혼만이 법률적으로 인정되었으므로 불교식으로 결혼한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비합법적으로 취급되어, 나중에 공적인 일자리에 지원할 때 명백한 불이익을 당해야만 했다. 더욱이 모든 학교는 정부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으니, 매일의 학업 일정에 공인된 판본의 성서공부를 하루 한 시간 동안 포함시키지 않으면 정부의 기금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실론에 도착했을 무렵에 그리스도교 학교는 805개인데 반해, 불교 학교는 4개에 불과한 실정이었다.헬레나 블라바츠키와 올콧은 이미 뉴욕에서부터 구나난다와 서신 왕래를 해 왔었다. 블라바츠키는 그녀의 저서 아이시스가 출판되자마자 두 권을 구나난다에게 보냈고, 구나난다는 블라바츠키의 편지뿐 아니라 이 책의 일부를 신할라어로 번역했다. 이 글은 스리랑카에서 매우 열정적으로 읽혔다.
그래서 신할라족 불자들은 두 사람이 1880년 5월 17일 해안의 갈레라는 마을에 당도했을 때 열렬히 환영하여 맞이했다. 5월 25일, 블라바츠키와 대령은 갈레의 사원에서 불교승려 앞에 무릎을 꿇고 ‘5계五戒 수계의식’에 참여했다. 이날의 의식을 올콧은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계율의 마지막 부분을 끝마치고 관례대로 꽃을 공양하자, 온 신경을 얼얼하게 할 정도로 거대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신할라인들은 이날 통치계급인 백인들 가운데 불교를 존경에 가까운 태도로 대하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던 셈이다. 그리고 이날은 미국인이 공식적으로 다른 불교도에게 인정되는 방식으로 불교도가 되었던 최초의 순간이기도 했다. 이들은 스리랑카에 7개의 불교신지학회를 만들었다. 그는 스리랑카 방문을 통해 대부분의 신할라인들 역시 유럽인들만큼이나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과장이나 모략에 쉽게 넘어간다는 사실도 역시 알게 되었다. 대령은 불교 교리 문답서를 만들어 불교신앙의 기본적인 교리를 짧고 알기 쉬우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하여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로 결심했다. 1881년 출간된 올콧의 불교 교리 문답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첫 걸음을 내딛은 셈이었다. 이 책은 일본과 인도에서 번역되었고, 대부분의 유럽 언어로도 번역되었다.
올콧은 1882년 봄에 실론으로 돌아왔다. 그가 보기에 신할라인들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불교학교의 부족이었다 . 신할라인들을 위해 올콧이 기울인 노력의 정점은 1884년에 신할라인들을 대표해서 식민지 장관에게 탄원하러 런던으로 갔을 때였다. 그가 런던을 떠날 때 장관은 신할라인들이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결혼하기 위해 중산모를 쓰고 프록코트를 입어야만 한다고 규정했던 법을 폐지했고, 4월 초파일(젊은 헤위비타르네가 이 축일을 지키다가 매를 맞았음)은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신할라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신지학자 한 사람이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되찾아 준 셈이었다.
올콧 대령은 좀더 넓은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전세계의 불자들이 하나의 기치 아래 결집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차이를 찾아내는 데 시간을 쓰느니, 차라리 합의에 이를 수 있게 해 줄 원칙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는 당시의 조각조각 난 불교활동보다는 통일된 불교운동이 전세계에 훨씬 커다란 영향을 미치리라 확신했다. 1889년, 수만갈라와 함께 제작한 불교깃발은 올콧이 지닌 비전의 상징이었다. 올콧은 자기 일기장에 썼다. “깃발은 훌륭한 착상이었다. 난 순식간에 내가 불교에 입문한 이래로 고수해 왔던 불교적 통일성의 구도 속에서, 한 상징으로서의 깃발이 지닌 광대한 잠재력을 인식했다.” 올콧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깃발은 모든 그리스도교도에게 십자가가 기여하는 것과 똑같은 목적에 이바지할 테니, 신앙의 보편적 상징으로서 모든 불교국가들이 채택할 경우, 강력한 증원부대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4) 일본에서 올콧과 달마팔라
1888년, 일본의 젊은 불자들로 구성된 한 위원회가 올콧 대령을 일본으로 초청하기 위해 시인 노구치를 파견했다.
올콧과 스리랑카 불교신자인 달마팔라(그도 일본인들이 초청했다)는 이 초청에 응해 노구치와 함께 콜롬보를 떠났다. 일본에서 올콧은 그 다음 3개월 동안 계속해서 75회의 강연을 했다. 그의 추산에 따르면, 18만 7천 명에게 연설하였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대체로 서양 저자들이 출판하는 불교관련 서적들로 인해 세계 여론이 불교로 기울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에드윈 아널드의 아시아의 빛(Light of Asia)을 특히 중요하게 인용했고, 미국 내에 적어도 5만 명의 불자들이 있다고 추정했다. 일본 신문들은 올콧의 방문을 대서특필했다. 이러한 블라바츠키와 올콧이 전개한 여타 노력을 통해 불교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촉발되었다.
(5) 블라비츠키와 올코트 이후의 신지학회. 두 주요 창립자인 블라비츠키가 1891년에 헨리 올코트가 1907년에 세상을 떠난 후 헬레나 블라바츠키의 두 제자인 애니 베상트와 윌리엄 콴 저지가 신지학회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 블라바츠키의 다른 유명한 제자인 성공회 목사이자 투시안을 가진 작가 찰스 리더비터는 블라바츠키 여사를 만나 후 채식인이 되고 그녀를 따라 인도로 갔다 블라바츠키가 세상을 떠난 후 찰스 리더비터는 애니 베상트의 친한 친구가 되었고 찰스 리더비터를 만난 일 년 후인 1895년 애니 베상트도 투시안을 가졌다. 투시안을 통해 우주와 물질 사념체, 오라 인류역사를 함께 탐구하고 몇 권의 책을 공동 저술했다. 1909년 인도 아디야르에서 신지학회 본부의 강변을 거니는 동안 찰스 리더비터는 지두 크리슈나무리티란 이름의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투시안을 가진 그는 크리슈나무리티의 순수한 오라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자신이 지금까지 본 가장 훌륭한 오라로 한 점의 사심도 없었다』고 묘사했다 .
https://www.theosophical.org/
1861-1865 미국 남북전쟁
1866년 8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으로 침입 평양에 접근하여 조선군인 납치. 식료품 약탈과 살상. 현지 관민들의 화공을 받고 침몰, 선원들 모두 죽음 19명
1869년 5월 10일 유타주 프로몬트리 포인트에서 동부철도와 서부철도 연결. 대륙횡단철도.
1868년 크리스토퍼 숄즈가 발명하고 1874년 총기제조업체인 레밍턴사가 타자기 보급시작
1872년 렌시 타쿠우 유네가마 스님 4명의 스님과 함께 유럽에서 서양종교 공부한 후 미국 여행, 당시 미국에 일본 사람 70여명.
1875년 신지학회 창립
1875년 샌프란시스코에 8개의 중국 사찰이 있었다.
1876년 3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전화 발명
1877년 토머스 에디슨 축음기 발명.
1879년 영국에서 출판한 영국인 에드윈 아놀드(Edwin Amold)의 ‘아시아의 빛, 혹은 위대 한 체념, 고타마의 인생과 가르침, 인도의 왕자이자 불교의 창시자(The Light of Asia, or The Great Renunciation, Being the Life and Teachings of Gautama, Prince of India and Founder of Buddhism)를 보스톤에서 출판하여 큰 호응 얻음
1880년대 미국에서 백화점 대중화 시작.-1890년대 백화점은 신문의 주요 광고주로 등장
1880년 스리랑카에서 오계(五戒)를 받은 신지학회 헨리 올콧과 블라바츠키 부인이 받았다.
1881년 올콧은 ‘불교교리문답(Buddhist Catechism) 출간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1882년 10월 뉴욕에서 선교사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s)가 ‘한국, 그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발행. 미국 개신교 선교부의 선교전략 수립에 큰 참고서 역할. 그리피스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조선인들을 위한 행위라고 한 친일인사.
1884년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조선 입국. 선교사로 첫 번째 조선 입국.
1885년 4월 장로교 목사 호러스 언더우드, 감리교 목사 헨리 아편젤러,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이들은 1884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였다.
1886년 5월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의사인 존 팸버톤이 코카콜라 발명.
1887년 켈리포니아 산타크르즈에서 필란지 다사(Philanngi dasa)가 ‘The Buddhist Lay'라 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7년간 발행
1889년 3월 12일 정토진종 스님 카가히 개인자격으로 호놀룰루에 도착. 노동자 실태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