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黎明)의 다쓰노구치
법난의 어둠을 밝힌 ‘태양의 불법(佛法)’
“어서에서 배운 ‘발적현본(發迹顯本)의 땅’에 드디어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대투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가마쿠라 ‘다쓰노구치(龍口)’에 있는 ‘SGI 교학회관’을 처음 방문한 미국 동지의 탄성이다.
유럽의 벗도,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벗도, 북미․ 중남미의 벗도 한결 같은 감동을 토로했다.
“우리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대성인은 당신의 생명을 걸고 싸워 주셨습니다. 그 광선유포 신심의 혈맥은 오직 우리 SGI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정말로 큰 긍지로 삼고 있습니다.” 라고.
이 지역의 가마쿠라권을 비롯해 쇼난현의 모든 분이 언제나 진심을 담은 정성으로 회관을 가꾸어 주시며 해외 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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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하기 10년 전, 나는 이곳을 찾았다.
전망이 좋은 남쪽 정원에서 내려다보면 맑은 사가미만이 유유히 태평양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모래사장은 완만한 활 모양을 그리며 우측의 에노시마로 향하고 있다. 남쪽 연안선을 따라 왼쪽으로 가면 시치리가하마, 유이가하마로 이어지고 그 왼쪽 끝에 가마쿠라의 마을이 있다.
그윽한 향이 피어나는 장미 정원이 만발했던 1968년 5월 1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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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관부지는 의학자 나가요 쇼기치 박사의 별장이었다. 박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위장 병원을 개원한 공로자이다. 문호 나쓰메 소세키도 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일이 있다.
노벨상을 받은 독일의 세균학자 코호와도 교우 관계가 있어 일본을 방문하면 이 별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의학이라고 하면 다쓰노구치 법난에 있어서 순교의 결심으로 대성인과 함께 있었던 시조깅고도 의술에 조예가 깊은 무사였다.
또 나가요 박사의 동생은 시라카바피 작가인 나가요 요시로다. 그의 명작 《다케자와 선생님이라 불리는 사람》은 나도 젊은 시절, 애독했던 책이다.
그 관계에서 같은 사라카바파의 문인 무샤노고지사네아쓰나 ‘레이코상(像)’ 등으로 유명한 화가 기시다 류세이도 이 별장에 와 문학과 예술과 철학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더욱이 나가요 박사의 사위는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의 아들이었다. 이누카이 수상은 마키구치 초대회장과 친분이 있어 ‘창가교육학 후원회’의 필두에 본인의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깊은 인연이 있으며 유서와 품격이 빛나는 회관이다.
돌이켜 보면 1979년에는 희망으로 빛나는 가나가와회관이 완공됐다.
그리고 최근 탄압 속에서 깊은 의의를 담은 ‘SGI교학회관’이 1999년 탄생했다.
모두가 대성인께서 창가학회에 주신 정법정의의 보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회관을 방문하는 분들이 어떤 것에도 지지 않고, 미래 영원히 일체의 난을 승리해 가는 금강의 생명이 되길 바란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며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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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1271년(문영 8년) 9월 12일.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을 어마어마한 무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막부의 실력자인 헤이노사에몬노조가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초암을 덮쳤던 것이다.
대성인은 큰 소리로 외치셨다.
“참으로 가소롭다. 헤이노사에몬노조가 발광하는 꼴을 보라. 그대들은 지금 일본국의 기둥을 쓰러뜨리고 있노라.” (어서 912쪽)
이 폭거의 배경에는 참성증상만인 고쿠라쿠사 료칸이 있었다.
료칸은 대성인에게 사의를 파절 당하고 거짓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기우(祈雨) 승부’에서도 졌다.
‘법문(法門)’으로도 이길 수 없다!
‘인덕(人德)’으로도 이길 수 없다!
‘현증(現證)’으로도 이길 수 없다!
이렇게 되었기에 대성인을 악인으로 몰아붙이는 수밖에 없다.
료칸은 책모를 꾸몄다. 권력자와 그 부인을 속이는 ‘참언’. 즉 비열하기 그지 없는 ‘만들어낸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다.
당시 막부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몽고 내습이라는 비상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입정안국론>으로 경종을 울렸던 그대로의 총벌(總罰)이었다.
나라를 걱정한다면, 도리에 맞는 대철인의 올바른 말을 겸허하고 솔직하게 경청해야만 진정한 위정자(爲政者)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의 행복 같은 것은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라의 위기에 편승해 오로지 자신들의 권세를 강화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에 방해되는 진정한 나라의 보배를 말살하려고 계획했다.
‘질투에 미쳐버린 승려’와 ‘광적으로 교만한 권력자’가 손을 잡고 최근 불의불칙(佛 意佛勅)인 창가학회에 가했던 박해도 이와 전혀 다름이 없는 형태다.
대성인은 흡사 반역자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가마쿠라 시내를 끌려 다녔고 결국 호조노부토키의 집에 맡겨졌다. 노부토키가 유죄지인 사도의 담당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심야가 되자 살그머니 대성인을 집에서 끌고 나왔다. ‘다쓰노구치’에서 죽이기 위해서.
즉 적법한 절차를 거친 사형(死刑)이 아니라 권력자에 의한 사형(死刑)이었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정의의 태양’이 두려웠다. 참을 수 없었다. 권력의 마성이라는 어둠이 잔인한 칼을 갈며 광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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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쓰노구치의 형장으로 가는 도중 와카미야고지에서 대성인은 말에서 내려 하치만궁(八幡宮)을 향해 통렬하게 간효하셨다.
“지금 니치렌은 일본제일의 법화경의 행자이며, 게다가 몸에 일분(一分)의 허물도 없느니라.” (어서 913쪽)
“황급히 계책을 강구하시라.” (어서 913쪽)
법화경 회좌(會座)에서 정법의 행자를 지킬 것을 약속한 제천선신을 향해 엄한 질타의 사자후였다.
게다가 유이가하마로 나오자 대성인은 구마오라는 심부름 소년을 통해 시조깅고에게 급히 이 사실을 알렸다.
깅고는 맨발로 형제 4명과 함께 한달음에 달려 왔다. 이 중대한 역사적 사건의 증인으로서 부른 것은 가장 신뢰하는 재가의 제자였다.
형장이라고 해도 특별한 시설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그 곳에서 목을 자르려 했다고 생각된다.
칼을 손에 쥔 무사는 당장이라도 목을 내려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조깅고가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하고 말하며 흐느꼈다.
대성인은 눈물을 보인 깅고를 나무라며 “이처럼 기쁜 일이 있을 손가! 웃어라!”
그 때였다! 에노시마 방향에서 달처럼 빛나는 둥그스름한 것이 갑자기 날아왔다.
칠흑 같던 어둠이 점차 대보름날처럼 밝아졌다.
칼을 들고 있던 무사는 정신이 혼미해져 쓰러졌고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1백 미터 이상이나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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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빛나는 물체’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을 ‘염소․ 황소자리’(유성)이 아닐까하는 연구가 있다. 도쿄 천문대 소장이며 도쿄대학교 명예교수이었던 고(故) 히로세오 박사의 설이다.
박사는 1271년 9월 12일 밤, ‘빛나는 물체의 출현’ 시각에 대해 ‘달이 떨어진 시각이거나 그 조금 후’ 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 날의 ‘달이 진 시간’은 ‘오전 3시 14분’이라고 한다.
어서에는 빛나는 물체는 어둠을 뚫고 ‘진사(辰巳=남동쪽)에서 술해(戌亥=북서쪽)에 걸쳐’ 빛났다고 쓰여 있다.
여러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한 결과, 이 빛나는 물체는 오전 4시경에 출현한 ‘대유성’이었다는 것이 박사의 견해다.
그 고도는 34도. 방위각은 남에서 북으로 79도. 시기적으로 봤을 때 이것은 헬리 혜성을 모혜성으로 하는 ‘염소․ 황소자리’ 유성군에서 생겼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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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대성인이 어둠 속에서 목이 잘려 나가려고 했던 그 때, 그 일순에 큰 빛이 나타났다.
도망쳐버린 무사들에게 대성인은 “목을 자르려면 아침이 오기 전에 빨리 잘라라!”고 재촉했지만 겁을 먹은 병사들은 누구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파도 저편 멀리서 희미한 붉은 빛이 나타났다. 빛은 곧바로 좌우로 넓혀지고 위로 부풀러 올라 수평선이 확실하게 보였다.
‘새벽’이 온 것이다.
태양은 순식간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바다를 비추고 하늘을 비추었다. 구름은 일곱 가지 색으로 수놓은 듯한 비단이 되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의연하게 솟아올랐다.
그것은 무명의 깊은 어둠을 부수는 ‘태양의 불법(佛法)’이 지구를 감싸기 시작한 장엄한 순간이기도 했다.
☞ 수필 신․ 인간혁명 ‘여명의 다쓰노구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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