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디밀라집사님은 그 당시 아직은 마흔아홉에 걸려있었던 고려인 여자 집사님이었습니다. 아띠라우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고 그곳 고려인사회에서 그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폭넓게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고려인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말씀을 고려인 신도들에게 러시아말로 통역을 하는 아주 중요한 분이었습니다. 장성한 두 아들이 있었고 남편 분은 카스피안해에서 큰 배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루디밀라집사님은 무엇보다도 얼굴 예쁘고 마음씨는 천사 같았던 아주 고았던 분으로 제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분입니다. 가끔씩 한인 선교사님이 알마티로 출타를 하셨는데 그때마다 목사님은 제게 주일 예배 시 고려인신도들 앞에서 간증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은 날로부터 주일까지 매일 밤늦게까지 영문으로 말씀준비를 했고 다시 회사의 러시아어 통역사에게 부탁하여 영문 설교원고를 러시아어로 번역했습니다. 그 원고를 드리면 루디밀라집사님이 교정을 하셨지요. 그리고 우리 둘은 밤늦도록 설교연습을 했습니다. 드디어 주일예배시간, 제가 한국말로 한 소절을 말씀드리면 이어서 집사님이 러시아어로 통역을 하셨습니다. 예배 후 고려인 성도님들은 은혜가 되었다고 말씀들 하셨습니다. 힘든 현장일후에 그리고 밤늦게까지 설교연습을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루디밀라집사님과 함께였기 때문 일 겁니다..
공사가 끝나서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집사님은 아띠라우공항에 나와서 저를 전송해 주셨습니다. 항상 단정하고 때론 차갑다고 느껴지던 루디밀라집사님, 그러나 그날 저는 집사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항상 눈물 많은 저였지만 그때는 오히려 제가 집사님을 달래 드렸습니다.. 그때 제게 주신 검정가죽허리띠는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며 아껴 착용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에 머무는 동안 꼭 가 볼 곳이 몇 군데 있었지만 한 군데도 못 가보고 일만 열 불나게 많이 했습니다. 한평생 노가다일을 해 오다 보니 말년에 일본사람들과도 같이 일을 하게 된 경우였는데 듣던 대로 그 들은 정말 대단한 일 벌레였습니다. 시간 내기도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일본인 현장소장은, 비행기여행은 허락할 수 있지만 기차여행은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마피아 때문에).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한 곳이 카자흐스탄 북 서쪽에 위치한 '바이코누루(Baikonur)우주기지'로의 기차여행이었는데 결국은 못 가봤습니다.
벌써부터 아띠라우는 거대 다국적 석유회사들의 각축장이 돼있습니다. 셰브론텍사코 오일, 엑슨모빌, 쉘, BP, 아모코, 엘프아키텐, 아집, 스타토일, 루코일, ENI등이 아띠라우에서 사무실을 두고 근처의 텡기즈, 카사간, 카라차가낙 등의 유전지대에서 원유를 뽑아 올리며 시추와 탐사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스텝 / Steppe (풀만 있고 나무가 없는 넓디넓은 황량한 카작의 들판)이 무성한 나라 카자흐스탄 고려인이 8만 명쯤 살고 있는 나라, "다스비 다냐 카자흐스탄!" (안녕 카자흐스탄) - 카작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