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사생활
-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소설가 이인규
돌이켜 보니 지금의 내 삶은 예전에 예정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부산의 금정산 언저리가 아닌, 이보다 거대한 지리산이 있는 산골 마을에 산다는 것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하긴 나로선 어디에서 사는가보다, 어떻게 사는 가가 더욱 중요하므로 크게 문제 되진 않는다.
산골작가의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한 뒤, 간단한 아침을 먹고 설거지, 청소를 끝낸 후 읍내 도서관에 출근하면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종일 글을 쓰고, 책 읽으며 하루를 보내고 나서 나는 해거름에 읍내 목욕탕에 간다. 간단히 몸을 씻고 냉온욕을 즐긴 뒤 집으로 돌아와서 밥 짓고 반찬을 만들어 아내를 기다린다. 물론 아내가 특별한 약속 없이 제시간에 온다는 전갈을 받으면 말이다. 그렇지 않고 아내가 늦게 온다든지, 가끔 작년에 부산에서 읍내로 이사 온 장모님 댁을 들른다고 하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며 밥상 대신 간단한 술상을 차린다. 그때부터 나의 화려한 사생활은 시작된다.
본채 앞 데크에 흐린 술 한 병과 통기타가 놓이고 비닐하우스에서 따온 고추 몇 개와 된장이 주된 안주이지만, 산골 특유의 적막감과 알싸한 꽃내음이 어우러져 이곳은 정극인이 노래했던 ‘상춘곡’의 주 장소가 된다. 행복감이 밀려오면서 나는 귀촌 초기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을 뒤로 한 채, 통기타로 노래를 부른다.
자, 여기서 솔직히 털어놓는다. 많은 사람이 “소설 쓰고 기타 친다고 돈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뭣해서 먹고 사는데?”, 하는 물음에 관한 답이다. 이는 이곳 목욕탕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시의 지인 그리고 시골에 사는 많은 분의 주된 관심사이다. 이에 어떤 이는 “소설을 써서 먹고살 거야”, 아니면 “부모에게 받은 유산이 있을 거야”, 하고 지레짐작한다. 다 틀렸다. 시골에서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를 찾은 건 다 이유가 있다. 나는 10년 전, 생면부지의 땅에 들어올 때 스스로 한 약속이 있었다. 그건 소설이든 뭐든, 오직 글로써만 먹고 살겠다는 당찬 포부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몇 년 전, 결국 나는 서울의 꽤 유명한 업체와 계약한 대필작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평일에 연애편지, 탄원서, 반성문, 자소서 등을 작성해 주고 원고료를 받는다. 한마디로 매일 소설을 쓰는 것이다(이 때문에 거짓말과 문장력이 크게 늘었다). 이로 인해 한때는 직장 다닐 때만큼 월수입도 되었지만, 이제 그러지는 않는다. 본업인 소설창작을 위해 꼭 필요한 돈만큼만 일하기로 마음먹은 탓이다. 이 돈으로 나는 나의 음주·가무 비용은 물론, 막내 딸아이와 장모에게 용돈을 주고, 나처럼 귀촌하였지만, 수입이 거의 없는 가난한 시인들에게 술을 사며, 나머진 아내에게 생활비를 건넨다. 하긴 생활비로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지만, 아내는 예전과 같이 나를 타박하지 않는다. 귀촌 후 다달이 들어오는, 나의 젊은 시절 ‘참았던 대가’의 결과인 공무원 연금이 그녀의 통장으로 쏙쏙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농사엔 소질 없지만, 밥 짓기와 설거지, 빨래 널기, 청소 등 집안일에 내가 크게 도움이 된 까닭이다.
11년 전, 마지막 직장(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겨우 51세의 나이로 명예퇴직을 신청할 때, 동료는 물론, 지인들이 도시락을 싸 들고 말렸다(그런데 일찍 나오기 참 잘했다. 안 그랬으면 ‘선제 타격’ 운운하는 그자에 의해 억지로 쫓겨나왔을 테니). 친가와 처가에선 이런 나의 결정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했다. 하긴, 그때가 아들이 중2, 딸아이가 초2였다. 어쨌든 둘 다 시골 학교에 보낸 우리 부부는 흔히 말하는 도시의 경쟁적, 배제적 삶과 부실한 교육을 극복하고 헨리니어링 부부처럼, 농사 지으며 자연 친화적으로 살려고 엄청나게 노력하였다. 하지만, 일 년 내내 비닐하우스에서 작물을 키우고 직접 팔았음에도 연 소득은 300만 원을 넘지 않았다. 당연히 경제적인 문제로 아내와 나는 심하게 다투는 날이 많아지면서 급기야 내가 부산으로 가출한 적도 있었다. 이후 결국, 우리 부부는 각자 도시에서 잘했던 일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간호사이면서 상담사였던 아내는 군청으로 들어갔고 나는 소설가로, 대필작가로, B급 통기타 가수로뿐만 아니라, 지난 9월부터는 유튜브채널(이인규시골살이tv)를 운영하며 지역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다.
대학 시절, 늘 술에 취해 통기타를 메고 다니던 한심한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럴 때마다 막내인 나를 감싸 안으며 “그래도 야아가 형제 중에서 가장 행복하게 잘 살 꺼요.” 하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렇다. 3년 전 작고하신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다. 청년기에 허약하고 내성적이었던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세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결혼하여 아이들은 낳은 것과 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20년을 버텨 적지만 다달이 연금 받는 것 그리고 셋, 시 대신 소설창작을 고집, 모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되어 작가(대필작가 포함)로 살아가는 거였다. 게다가 현재 나 대신 돈 벌어주는 아내가 있고, 산골에서 잘 큰 두 아이가 있으니 한마디로 나는 행복한 ‘꽃 중년’인 셈이다.
‘겨울은 버텼고 봄은 왔다’, 하고 추위를 극도로 싫어한 소설가 한강이 지인의 담벼락에 글을 남긴 것처럼 시골에도 다시금 봄이 왔다. 오늘 역시 나는 일과를 끝내고 시골집 데크에 앉아, 흐린 술 한잔에 진달래 꽃잎을 띄우고 통기타로 노래를 부르며, 여러 사정으로 아직 시골행을 결심 못 한 또래 중년에게 염장을 지른다.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
출처 : 작가와 사회 90호(2023.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