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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1938),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4권. 17세기, Le dix-septième siècle1-273
제10장, 벨 과 퐁뜨넬 – X. Bayle et Fontenelle 261-271
1절 삐에르 벨 I. Pierre Bayle 261
삐에르 벨(Pierre Bayle, 1647-1706)의 주요 작품들은, 그의 유명한 역사와 비평사전(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1697)이 나오기 앞서, 몹시 슬픈 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시기에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들은 자기들의 나라로부터 추방되거나 개종하기를 강요되었다. 벨 그 자신도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출신이었으며, 한때 짧은 기간에안 카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가 개혁된 종교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1680년에 그가 철학을 가르치던 스당 대학을 떠났다. 여러 동료 종교인들과 함께 은신처를 찾아 떠났으며, 이 동료 중에 쥐리외(Pierre Jurieu, 1637-1713)도 함께 암스테르담에 망명했다. 그는 거기서 나머지 생애를 보냈다. 그 당시의 그의 모든 저술들, 1680의 해성의 출현 기회로 소르본 박사들에게 쓴 여러편지의 사유(Pensées diverses écrites à un docteur de Sorbonne à l'occasion de la Comète qui parut au mois de décembre 1680 (1682), 마임부르 신부의 캘빈주의 역사 비판(Critique de l’histoire du calvinisme du Père Maimbourg, 1683), 예수-크리스트 말투들에 관한 철학적 주석: “그들을 들어오게 강권하라”(Commentaire philosophique sur ces paroles de Jésus-Christ: « Contrains-les d’entrer », 1686)은 관용을 위한 청원들인데, 그러나 매우 새로운 강도의 말투이다. 벨은 모욕받았고 추방된 종파의 구성원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쥐리에처럼 캘빈주의만이 보유하는 것으로 여기는 진실한 종교의 이름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그의 지적 의식은 관용 없음의 부조리를 느꼈으며, 적어도 루이 14세의 용기병들(dragonnades)의 테러에 항거할 만큼이나 느꼈다. 그는 캘빈교도 카톨릭교 만큼이나 관용 없음을 알았다. 신학자들은 서로들 간에, 우선 토론을 받아들일 때조차, 결국에는 모두 “프랑스의 개종강권자로서 끝난다.이 신사들[부르좌]은 1680경에 그들의 방황하는 형제들과 함께 종교에 관한 강연을 열기 시작했다. 신학자들은 방황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의심들을 듣고, 그것들을 밝히고, 그들을 궁휼하게 교육시키고자 허용했다. 그러나 두 세 번 응답한 후에 그들은 모순들을 더 이상 감내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밝힘들에게 복종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사람들이 고집쟁이이라고 발설했을 것이다. 처음에 그러한 것을 발설하는 것이 더욱 가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의 반대자가 대꾸하기만을 원할 때, 토론에 들어가 가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Dict., art. Rufin, Remarque C.) 어떠한 신학자도, 그가 어떤 편에 속하든, 토론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신은 쥐리외의 프로테스탄트 행정관[루앙의 행정관] 속에서 가장 매서운 자신의 적을 발견하였다. (262)
그러면 어떻게 이런 정신이 형성되었는가? 17세기의 위대한 형이상학들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나타났으며, 역사를 위하여 이 시대의 깊은 취향을 의심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이에 대해 더 널리 퍼지지 못했다. 벨이 쓰기를, “물리적 경험들의 탐구자를 위하여, 수학자들 위하여, 당신들은 역사와 그것은 부속물들을 연구하는 100여명을 발견합니다.”고 한다. 그리고 벨은 탐구들을 오해하는 “경멸스런 격률들”을 강하게 단죄했다. 수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법들의 명증을, 우리에게 인간적 사실들의 탐구로 남아있는 어둠들[미지의 영역]에 대립시키는가?그러나 우선 역사적 사실들은, 그 종류에서 완전하다는 확실함과 더불어 알려질 수 있었다. 더하여 역사가는 마치 수학자처럼, 우리 영혼의 관념들일 뿐인 존재들에게, 또한 “우리 상상작용의 바깥에 현존”할 수 없었을 존재들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진실한 실재성들에 적용한다. 벨은 덧붙여서(여기서 사람들은 라이프니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수학자들은 신의 무한성에 대한 많은 관념들을 가치있게 하였고, “이 많은 관념들에게 수학들의 추상적 깊이들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역사학자는 추상적 깊이들에게 보다 정확한 정도의 인식을 대립시켜서, 자신의 탐구들이 인간적 추론[이성]의 허약성들과 그것의 한계들 위에다가 그 정확한 인식들을 자신에게 부여할 것이다. (262)
사람들은 경향성을 본다. 벨 덕분에 박학다식은 그의 전문성을 제한되게 하지 않는다. 그 경향성 또한 철학에도 소위 주장된다. 경향성은 인간의 자연[본성]에 관하여, 기하학적 철학자들이 이에 관하여 결코 부여하지 못했던 것 보다 아마도 더 깊이있고, 더 중요한 교육내용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사실상, 그것은, 마치 사전의 기획에서 그가 그렇게 말하 것처럼, 그 방책을 진행했던 역사가들에게서 또는 사전 편찬가들에게서 알려진 사실상의 거짓들을 근원들의 도움으로 반박하면서 일 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문제 삼았던 것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견해들의 가치이다. 그는 그의 시대의 중요한 형이상학들을 모두를 비판했다. 그는 스피노자에 반대에 열심이었고, 그는 변신론에서 자신에게 응답 했던라이프니츠와 당당하게 싸웠다. 그는 철학자들의 독단론만큼이나 신학자들의 독단론을 비난하였다. (263)
이런 비판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벨이 그 자신으로서는, 인간적 견해들의 다양하고 알록달록한 광경을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visible)하다. 그러나 이런 취향은 몽테뉴 같은 회의주의자의 취향과 형식에서도 깊이에서 동일한 것을 드러나지 않는다. 벨은 사람들이 논쟁에 열을 내엇던 시기에 살았다. 사람들은 “은총”에 관하여, 또 “검토의 길과 권위의 길”에 관하여 그리 많은 토론을 매우 격렬하게 결코 하지 않았다. 벨 자신도 쥐리외와 싸울 때는 논쟁가이긴 하지만, 관용을 그와 반대로 옹호했다. 그런데 논쟁에서 주장된 견해들은, 반대자들에 대항하여, 이 견해들을 말하자면 마치 확정된 특징들을 지닌 학설처럼, 내적인 정합성을 지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적합한 원리들에 지지를 받는 학설처럼, 보증하는데 가장 호의적인 방식으로 소개되었다. 벨이 그가 토론한 주제들에게 부여하고자 애쓴 것은, 논쟁을 위하여 준비되었던 이런 형식이다. 이처럼 그가 주제들을 다루어보았고, 그가 이 주제들을 거부하는 것은, 주제들이 시험결과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 문제인가? 그 주제를 멈춘 것은, 상상작용에게 제시되기에는 “모두 불가능성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체는 단순하고 그럼에도 그의 지각작용을 자발적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외적인 근거[이유] 없이 한 지각작용에서 반대 지각작용으로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쟁들을 그만두게 할 첫째 수단은 두 논쟁자들의 각각이 자기 자신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게다가 알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고 제시하면서 이다. (263)
최소한의 부정합에 민감했던 그는 논쟁자들의 편에 선 정신이 감추거나 또는 덮어버린 동종의 관념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유성에 관한 다양한 사유들(Pensées diverses sur la comète, 1683)의 대부분에서, 그는 교회가 믿고자하는 공식적인 기적들과 세속인이 유성의 출현에 부여하고자 하는 미래 예측의 가치사이에 다소간 명시적으로 가정한 인근성(l’affinité)에 근거한다. [그의] 비판의 수단에 대해 사람들은 전적으로 쉽게 보고 있다. 은총에 대한 까다로운 질문에서 그는 반대자들이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가[증빙]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대자들에게 암시했다. 그 때는 그들이 같은 편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학설을 생각하는데 만족하자 할 때라는 것이다. “자유의 소재에 관하여, 취해야할 두 방편만이 있다. 하나는, 자유와 협력하는 영혼으로부터 구별된 모든 원인들이 행하거나 또는 행하지 않거나 간에 영혼의 힘에 맡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원인들이 영혼이 스스로 방어할 수 못할 것과 같은 종류의 행위하는데 대해 영혼을 규정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첫째 편은 몰린주의자들이고, 다른 편은 토마스주의자들, 얀센주의자들, 제네바의 신앙고백의 프로테스탄트들이다. 후자의 세 편은 몰린주의와 싸웠고, 이들은토대에서 동일한 독단만을 그 위에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얀센주의자가 아니라고 부르짖으며 주장했다. 그리고 얀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자유의 문제에 관하여 캘빈주의자들이 아니라고 똑같은 열성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합의로 얀센주의자들과 또는 캘빈주의자들과 어떤 일치성으로 남아 있었더라면,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예견했던 일련의 부끄러움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으로 궤변론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얀센주의를 가르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몰린주의자들은 그런 궤변을 사용하지 않았다.”(항목, 얀세니우스, 논평 H) 거꾸로 그는 우리의 편견들이 우리에게 확고하게[파기할 수 없게] 통합되어 있다고 믿게하는 사정들을 분리하여 다루기를 좋아했다. 예를 들어 그는 마술을 믿음과 악마의 능력을 믿음은 신의 믿음을 함축하지 못한다고 하는 이런 반성을(당시에는 매우 새롭고, 그리고 인종학적 탐구들에서 그러한 범위로 제시될 반성)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극동의 인식에서 유럽에 들어온 극동지방의 종교들이 그에게 그것의 증거이라고 반성했다.
이런 영속적 비판은 유보없이 지적인 신중함으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어느] 편드는 정신을 피하고서, 주제 그 자체들을 다루면서, 그 주제의 지식 불가능성 또는 내적 모순을 알게 하면서, 가끔은 반대되는 주제들 사이에 있는 인접성을, 즉 몇몇 주장들을 반대로 통합하는 연결의 임의성을 제시하였다. 관념들의 이런 영속적 조정작업, 즉 주제들의 양조작업은, 독자에게 항상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이절판으로 된 사전을 통하여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264)
그럼에도 이런 비판은 그가 그 책을 처음 냈을 때만큼이나 퍼져나갔는가? 벨은 이런 전파의 이유 자체 때문에, “일상의 판단들에 약간 자유롭게 그리고 약간 부합하는 자기의 반성들로” 범위를 완화하기를 시도했다. “나처럼 완전히 세속적이고 특성 없는 인간이 광대한 역사적 수집들 가운데서 종교적인 또는 도덕적인 어떤 오류를 퍼뜨린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수고해야만 했던 것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소재에서 주제에 대해 지나가듯이 기회에 맞게만 말을 하는 저자를, 그리고 마치 초원에 바늘처럼 자기의 감정을 뿌리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함으로써 따라가야 할 고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게 되는 저자를, 안내자로 삼지 않는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몽테뉴(Montaigne, 1533-1592)의 사상들은 신학자들을 시작에서 불안하게 하였는데, 그 때는 그의 사상들이 삐에르 샤롱(Charron, 1541-1603)의 체계 속에 축소되었을 때라고 한다. (265)
실재로 우리는 벨의 모든 비판들에서 항상 그 자신과 동일하며 특이한 힘을 지닌 변증법적 운동을 발견한다. 그는 자연에서 그리고 인간적 이치[이법]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들에게 모든 지지점을 박탈하는데 있으며, 비록 연속적인 정통교설에 감화하면서도 벨은 주제들에게 요청되는 신적인 권위에만 이 주제들을 귀결시켰다. 데카르트(1596-1650)이래로 그 시대에 거의 모든 중대한 형이상학들은, 몇 가지 신학적 주제들이 인간적 이법[이성]의 자연[본성] 자체에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하였다. 그 주제들이란 신의 현존과 단일성[통일성], 섭리, 영혼의 불멸성이다. 동시에 가장 넓은 의미에서 관용의 찬성자들은 그럼에도 무신론자들 또는 유물론자들 귀찮게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유물론자들의 견해들은 모든 도덕적 삶에 반대이라고 생각했다. 벨의 비판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은, 중요한 종교적 독단들을 이법과 도덕성의 근본적 필요들과 소위 말하는 연결에 있다. (265)
먼저 신의 현존의 주제이다. 벨이 말하기를 “자유는 이런 고려에서 보면 충분히 크다. 그리고 한 박사가 이런 현존이 다른 수단들에 의해 증거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저런 개별적 증거를 비판할 자유를 넘겨줄 것이다.”(항목: 자바렐라, 논평 H) 이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증거가 없자는 것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다. 사실상 제1운동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거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세계의 영원성을 포함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그 증거는 신만이 증빙하는 것만큼이 다수의 제1운동자들을 증빙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증거는 모든 부분들로부터 비판받았다. 소르본 대학의 박사인 레르미니에(Nicolas L'Herminier, 1624-1673)는 토마스의 모든 증거들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는데, 그는 단지 우주의 질서에 기초한 증거만을 받아들이다. 이리하여 이런 소재[문제]들에서는 어떠한 절대적 명증성도 없다. 게다가 루터(Luther, 1483-1546)의 스승인 비엘(Gabriel Biel, 1420-1495)은 “이법이 신의 현존을 제공할 수 있는 증거들은 그럴듯할(probalbe 개연적일) 뿐이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265)
섭리를 보자. 벨이 선호하는 문제이며, 이 문제로 그는 수백 번 되돌아온다. 이런 이유로 변신론의 문제가 수세기 이래로 해결할 수 없으면서도 헛되이 흔들리며 동요되었다. 사람들은 악(잘못)의 현존과 무한히 선하고 전능한 원리의 현존을 화해시키기에 이르지 못한다. 또는 만일 신이 그가 발할 수 있었던 악을 허락한다면, 선성을 제한해야만 한다. 또는 만일 악을 막으려고 원했는데도 그가 악을 할 수 없었다면, 그의 권능을 제한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말한 모든 것은, 신으로 하여금 불합리한 전제군주(un despote absurde)를 만드는 것이다.예를 들어 그가[신이] 자기의 지혜를 표시하기 위하여 죄를 허락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신 속에서 “ 그것[항쟁]을 치유했다는 영광을 보기 위하여, 항쟁들(les séditions)을 증가하게 내버려두는 군주(monarque)를 보는 것이다.” 마니교 만이, 하나는 잘[착]하고 하나는 서투르다(mauvais, 모자란)는 두 원리의 이론과 더불어, 문제의 해결을 허락했었다. 또한 이것이 상황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상황에서 우리의 이법(raison, 이유)이다. “누가 우리 이법의 숙명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누가 한단할 것인가? 여기에 마니교도들은 있다. 이들은 완전히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가설을 가지고, 정통교리가 매우 정당하고 필연적이고 오로지 진실한 전제를, 즉 무한히 선하고 전능한 제1원리의 전제를 가지고 행했던 것보다 백번 더 잘 경험들을 설명한다.” (항목; 뽈리시안교도들, 논평 E) 너울에 덮혀진 아이러니 이지만 확실하다. (266)
이번에는 영혼 불멸성이다. 이것이 이법에게서 명증성을 허용할 수 있는가? 폼포나찌(Pietro Pomponazzi, 1462-1525)의 논문은 소요학파는 그것을 증거할 수 없다고 충분하게 제시햇다. “이러한 고려에서 아주 견고한 원리들을 제시했던 데카르트의 체계만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 언리 자체(영혼의 정신성)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증하지 못하다. 그에게 반대하여 가상디(Gassendi, 1592-1655)의 대꾸가 많은 일반인을 만족하게 했다.(항목, 폼포나찌, 논평 F) (266)
이런 독단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말할 기를 독단들은 공공적인 도덕성에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 신앙자들이 범죄자들이 될 수 있을 때, 사람들이 무신론자들에게 가끔 주목하는 선한 풍습들의 경험이 대립된다. 그리고 벨은 “수많은 사기꾼들과 흉악범들이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다고, 그리고 다수의 성자들과 정의로운 자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폼포나찌가 주목했다는 것을 시인했다. (266)
유성에 관한 다양한 사유들(1683)에서 벨은 자신에게 여러 반대들을 선동했던 무신론자들에게서 도덕적 품행의 현존에 관하여[도덕성이 있음을] 많이 강조했다. 벨이 말하기를 “그들은 종교적 동기들이 우리 행위의 유일한 동기들과 거리가 멀다고 보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과 다른 동기들이 있다.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했던 사두개파들(Sadducées)은 신의 율법의 준수를 마약 주사 맞듯이 믿었던 바리새이파들(Pharisées)보다 더 선량한 백성들이었다.” (항목, 사두개파들, 논평 E) “풍습들의 붕괴는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또는 사람들이 여기 삶 다음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항목, 산체스, 논평 C) 믿기 위하여 인간들을 거의 알 필요가 없다. 우선 착각은, 미래의 삶에 대한 믿음이 도덕적 삶을 규제한다고 선천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인간은 항상 자신들의 원리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온다. 반대로 우리의 견해들과 우리의 실천 사이에 일치 보다 더 드문 일은 없다. 예를 들어 우리의 종교적 신앙들이 정신적인 우리의 성향들을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한 쥐리외는 이로부터 관용을 논리적으로 연역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취향들을 토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들에 대해 가장 비관용적인 태도를 스스로 내 보인다. 게다가 사람들은 종교적 동기들은 우리 행동의 유일한 동기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그런데 동기들 중에 많은 다른 동기들이, 칭찬의 사랑, 치욕의 걱정 등이 있고, 그리고 종교적 동기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또한 덕성 있는 행동들로 이끌어갈 수 있는 다른 동기들도 있다. (사전, 1715, t. III, p. 988.) (267)
이런 몇몇 지적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이 작업이 어떤 인내를 가지고 계속되었는지를 보게 되는데, 이 작업은 인간적 자연[본성]속에 있는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진리들을 지탱해온 버팀목들을, 즉 그 진리들을 가지고 인간에게 필수적인 어떤 것을 만들었던 근거지들을, 한마디로 인간의 본질로부터 끌어냈다고 믿는 모든 이유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에 견실하고 진실한 어떠한 거점을 다시 끌어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에서, 신적인 무오류의 [교회] 권위 이후에 매우 오류 가능한 인간적 자연[본성]은 무엇인가? 변신론의 문제에 대한 모든 조심성들은 그 [교회]권위에 의해 제거되었다. “여기서, 틀림없이 선량한 편과 진실한 길이 의심들을 제거한 것이다. 신은 이걸 말했고, 신이 이걸 행했고, 신이 이걸 허락했다. 따라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정의이며, 현명하게 행하고 현명하게 허락한 것이다.” (항목, 뤼팡, 논평 C.) 그에게서 요청해야 할 것은 권위에게, 그리고 오직 권위에게 뿐이다. 그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고서, 뻬로 다블랑꾸르(Nicolas Perrot d'Ablancourt, 1606-1664)가 빠뜨뤼(Olivier Patru, 1604-1681)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했다. “너는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다. 너의 이법이 너에게 그걸 그렇게 보게 하는 이유에서 믿지 만, 나로서는 나의 의미에 반대이네. 나는 우리의 영혼이 불멸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종교가 나에게 그걸 이런 방식으로 믿으라고 권하기 때문이네. 두 감정들을 고려하여 보면, 너는 나의 감정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아마도 고백할 것이네.” (항목, 뻬로, 논평 I.) (268)
그러므로 여기에 매우 높이에 있는 형이상학적 진리들이 있어서, 그 진리들은 더 이상 인간적 관심을 갖지 못한다. 종교적 삶이 그 자체로 환원되어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삶과 따로 떨어져 있고, 그것의 장중함 속에 고립되어 있어서, 어떠한 지지대가 없어도 [상층에] 매달려 있다. 적어도 그 [교회] 권위가 우리와 일치할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고, 일치한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판단을 그것[판단]의 가치를 좋게 평가하기 위하여 다시 개입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경전을 찬성과 반대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한다.”(항목 상블랑세, 논평 C.) 경전 해석의 방법에 관하여,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니꼴Nicole 1625-1695)과 카톨릭교도들은 로만 카톨릭의 무오류의 해석이라는 권위의 방법을 지지한다. 그러나 누가 우리에게 보증해 줄 것인가? 만일 신앙자들에게 불가능한 기나긴 탐구들와 이런 전통의 통일성이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던 검토의 방법, 그 자체는 무한한 토론들만을 생성하였다. 따라서 모든 인간적 방법이 권리를 평가하기에는 우리가 모자란다. 무엇이 남겠는가? 만일 인간들이 순수하게 비합리적 수단들에 의해, “한편으로 교육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은총에 의해”, 종교에 인도되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일단, 여기서 착하고 굳건하게 단절된 이법(이유)과 모든 결속이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종교는 완전히 신적이며, 종교는 인간적이 전혀 아니다. 한편으로 아마도 종교의 제1접근 수단인 “교육”이 지적하는 대로, 교육은 결국 태어나면서부터 우연(le hasard)에 의존하는 무차별적 습관으로부터 이다. 다른 한편 아마도 벨의 사유는 그가 니후지우스(Nihusius, 1590-1657)에게 빌려온 이런 반성들로 표현된다: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교육에 의해 어떤 종교 공동체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이 거기서 숨쉬며 살 때 불편함둘은 공동체를 떠나야 하는 합법적 이유들이 아니다. 사람들이 교환에서 이득을 가질 수 없거나 말하자면 사람들이 아주 편안하게 있는 지위에서 지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나서 자랐던 [종교] 공동체를 포기하는 것이 무엇에 소용이 있는가? 만일 거기를 떠났기에 우리가 [정신적] 질병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항목, 니푸지우스, 논평 H.) (268)
따라서 벨의 부정적 변증법의 결과로서 삼는 것은 관용이다. 이 관용은 종교적 확신을 은신처에 또한 종교적 토론 밖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변증법은 인간적이고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자연의 개념작업을, 개념작업에게 초월적인 어떠한 항과도 연관시키지 않고서, 마치 긍정적 반대항목처럼 삼는다. (268) (57MLH)
2절 퐁뜨넬 Fontenelle 269
퐁뜨넬(Fontenelle, 1657-1757)는 처음에 짧고 전원적인 싯구의 저자였으며, 성공하지 못한 비극작였다. 그는 그의 시대에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이, 공공적인 취향의 혁명에 관하여 그리고 “인민들 정신 속에 연속적으로 행해지는 운동에 관하여” 반성을 해야만 했다. “그런 취향들은 서로 서로에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어지고 있었고, 취향이 쫓겨나고 파괴되면서 일어나는 일종의 전쟁과 같았으며, 여론들과 관습들의 영원한 혁명이었다.” (269)
취향의 변화는 규칙이 없이 있는가? “한 취향이 다른 취향으로 이어지는 것은 우연(hasard)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필연적이고 감춰진 연결이 있다.”(전집, II, 434). 사람들은 여기서 공공의 취향을 살피는 인간을 느낀다. 그는, 랑부이예 호텔[성]과 마차의 시대에 아름다운 정신에 비하여, 자기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가졌던 반감으로부터 스스로 깨달았다. 여러 세계들에 관한 대화들(Entretiens sur la pluralité des mondes, 1686)에서, 그는 후작부인들에게 흥미 있게 할 수 있는 것이 천문학이라는 것을 알았다. (269)
그러나 과학 아카데미의 사무총장(비서)이 되면서 그의 시대의 과학 운동에 관하여, 특히 수학과 물리학에 관하여 성찰하는데 익숙해졌으며, 그가 과학아카데미의 사망한 회원들의 찬사들을 쓰면서 역사가 또는 오히려 역사편찬가가 되었다. 그는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유행에서도 지적 엘리트들에게 퍼져 있는 새로운 정신을, 그리고 이 새로운 정신 하에서 형식들 중의 하나일 뿐인 인간 지성의 근본적 특징들을 분간하였다. 이리하여 퐁텐느의 모든 관심은 약간 짧은 호흡으로 쓴 시론들 중에, 로피딸 후작(Guillaume François Antoine de L'Hôpital, 1661-1704)이 쓴 곡선들에 대한 지성의 무한소들의 분석(L'Analyse des infiniment petits pour l'intelligence des lignes courbes, 1696)(처음에 익명으로 출판)에 대한 그의 서문, 자신의 무한의 기하학 원론(Eléments de la géométrie de l’infini, 1727)과 수학과 물리학의 유용성에 관하여(de l'utilité des mathématiques & de la physique, & 1742)의 서문들이 있으며, 또한 소품들로서 역사에 관하여(Sur l’Histoire)(1776출간), 신탁들의 역사(Histoire des oracles, 1687), 우화들의 기원에 관하여(Sur l’origine des fables, 1724)이 있으며, 약간 긴 호흡으로 썼으나 이에 대한 재료 전체는 박학자인 반 달(A. van Dale, 1638-1708)에게서 빌려왔는데, 이것은 인간 정신의 서술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 정신은 17세기가 수학들과 물리학들의 과학들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았던 굉장한 약진을 참조하였다. (269)
여기서 퐁뜨넬에게서, 미래가 예견될 수 없었던 상승하는 운동의 출발점이 있다. 그가 그의 동료들에게 글쓰기를, “과학들은 태어나게만 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허용된다‥… 또한 [과학] 아카데미는 또한 잘 입증된 사실들의 거대한 저장을 할 뿐인가‥… 왜냐하면, 물리학은, 구조물들을 높이기 위해서는, 실험 물리학이 필수적인 재료들을 자기에게 제공할 상태에 있기를 기다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전집, I, 37) 이런 진보의 의미는 어떤 것이 될까? 17세기의 무한에 대한 기하학의 진보들의 예는 전형적이었다. 모든 위대한 기하학자, 데카르트(1596-1650), 페르마(1601-1665), 빠스깔(1623-1662), 배로(Isaac Barrow, 1630-1677), 메르카토르(Mercator, 1620-1687)는 “각각이 그 학문에서 특별난 자기의 길을 따라 가면서, 무한에서 또는 무한의 가장자리 위에서 인도하는 물줄기가 되었다. 각각은 모든 분야에서 돌파하였고, 각각은 도처에서 기하학자들을 추적하였고, 그들에게 회피할 자유를 주지 않았다”(I, 21) 뉴턴(1643-1727)과 라이프니츠(1646-1716)가 도래했으며, 이들은 계산에서 “사람들이 무한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더 이상 면제해줄 수 없는 그 무한을”사용할 수단들을 발견했다. 이리하여 안다는 것은 통일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향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공통원리들의 분석적 발전이 아니다. 그것은 우선은 흩어져 있는 것 같은 노력들의 협주곡(협력) 같은 것이고, 노력들은 천재적 발견들 덕분에 일반 원리로 집중된다. “기하학과 같은 과학이 태어나게 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 유지되지 못하는 흩어진 진리들만을 사로잡을 수 있고, 그리고 사람들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대로, 거의 항상 많은 황당함에 부딪히면서도 그것들을 각각 따로 증거했다. 그러나 통일된 약간의 진리들의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진리들이 무엇에서 일치하는지를 알고서, 그리고 일반 원리들이 무엇에서 스스로 드러내기 시작하는지를 알았다.” (I, 27.) (270)
분명한 것은, 일반 원리라는 표현이 여기서 동일성의 원리와 그 원리의 유비들(ses analogues)과 같은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 원리가 과학에게 연역적 형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마치 모든 적분계산의의 문제에서 무한 계산과 같은, 또는 천문학의 모든 개별적 법칙들에서 인력의 법칙과 같은 원리들이 있다는 것이다. 연역의 형식은 과학의 매우 먼 이상(l’idéal)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과학의 이상이기도 하고, 심지어 역사학의 이상이기도 하다. 퐁뜨넬은 동체의 체계와 소용돌이의 체계 사이의 인접성을 보았다. 동적 체계에 의해 타키투스(Tacite, lat. Tacitus, 58-120)는 로마 황제들의 역사을 설명하였고, 소용돌이 체계에서 데카르트는 현상들의 원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퐁뜨넬은 선천적(a priori) 역사를 극한에서 놀이(par jeu, 게임)로 생각했으며, 그 역사에서 사람들은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이 인간적 자연(la nature humaine)의 원리들로부터, 즉 일단 잘 알려진 원리들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볼 것이다. (II, 429) (270)
원리들을 향한 이런 진보는, 그 진보가 자발적으로 따로 떨어져있는 사상들을 함축함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진보를 규제하는 질서를 갖는다. “각 인식은, 얼마간의 앞선 인식들이 발전된 다음에야, 전개될 뿐이다. 그리고 그때에 알을 부화하는[새로운] 인식의 차례가 온다.”(I, 21.) 그러나 이러한 규칙성은, 동일한 힘이 인간적 발전에서 항상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런 이유에서 지성은 진행하는 두 가지 방식을 갖지 않는다. 항상 지성은 알려지지 않는 것[미시항]을 알려진 것[기지항]에 동화시키면서 미지항을 설명한다. 이는 원시적 인간의 과학들일 뿐인 우화들을 태어나게 하는 것과 동일한 절차이며, 이 우화들은 그러고 나서 과학을 앞으로 나가게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상상과 같은 불확실한 능력에 의하여 우화들을 설명한다(여기서 퐁뜨넬은 아마도 베이컨을 표적으로 삼는다). 실재로 고대로부터 많은 이들이 신화들이 원인론적(étiologique)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현상들을 설명하게하는 숙명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페늘롱은 이런 이론을 정력적으로 제시했다. 그에게 있어서 호머와 헤시오도스는 그리스의 초기 철학자들이다. 심지어 “이 여러 거친 세기들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더 천재 끼가 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보았던 것의 원인(la cause)을 탐구하려는 자연적 경향이 있었다.”만일 그것이 항상 개울에서 물로부터 온다면, 사람들은 요정이 끊임없이 흐르는 물 항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II, 389) 퐁뜨넬은 우화들의 합리적 특성에게 야릇한 증거를 제공한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이처럼 비교 신화학의 서곡과 같은) 그리스인들의 우화들과 아메리카인디언들의 우화들 사이에 동일성이다. 따라서 신들과 여신들은 오늘날 우리의 과학들을 규제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부터 태어난다: 즉 미지수를 기지수에 맞게 끌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퐁뜨넬이 결론 짓기를, “모든 인간들은 서로 매우 닮아서, 바보짓들이 우리들에게 공포에 떨게 해야 하는 인민들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인간의 우수성은 그의 인식의 발전으로부터 오지만, 그러나 원시인의 것과 동일한 지성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271)
퐁뜨넬의 사유는 이보다 훨씬 더 멀리 간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신중함들에 둘러싸여 있어야만 했다. 크리스트교 신앙의 토대들 중의 하나는 역사 속에서 신의 행위이며, 그런데 이 행위는 기적들에 의해 그리고 육화에 의해 번역되고 있었다. 퐁뜨넬 그 자신은 인간 자신에 관해서는 인간이 알려주는 실증적 역사의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볼떼르(1694-1778)의 풍습론(Essai sur les mœurs, 1756)에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La Cité de Dieu, 426)이 대립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역사 속에서 행할 두 부분들이 있다: 즉 한편 원시시대들의 우화적 역사가 인간들에 의해 발명되었고, 다른 한편 우리들과 보다 더 가까운 시대의 진실한 역사가 있다.” 이 두 역사들은 우리에게 “도덕론이 역사를 대충으로 보게 한 이후에, 세부적으로 인간” 보게 한다. 역사들의 유용성은 “이루어진 것들의 영혼”의 발견에 있다. 이런 영혼은 처음에는 오류들 속에 있으나, 다음에는 정열들 속에 있다. (II, 431) 사람들은 더욱 명시적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퐁뜨넬은 자신의 신탁들의 역사(1687)에서 명시적이기를 시도했다. 사람들이 크리스트교의 권능으로부터 부여했던 역사적 증거들 중의 하나, 그것은 악마들(다이몬들)에게 마땅하다는 이방교인의 신탁들이 그[크리스트]의 도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반 달(1638-1708)에 따르면, 퐁뜨넬은 처음에는, 다이몬들에 의한 신탁들의 설명이 얼마나 수상적한지를 제시하는데, 그 이유에는 이런 설명이 크리스트교인들을 위하여 소개되었을 때는 편리함의 때문이었다. 그런데 크리스트교인들이 이방종교의 기적들도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신탁들의 중지라는 사실 자체는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만일 벨(1647-1706)과 결합하면서 퐁뜨넬의 모든 시론들이 역사 속에서 신의 행위의 부정작용을 은연중에 드러냈다면, 그는 반대급부로 자연(la nature) 속에서 그것을 찾아야 하다고 암시한다. “물리학은 지성과 무한한 지혜의 흔적들을 따가라면서 분간해 낸다. 무한한 지혜가 모든 것을 생산하는데 비해, 그 대신에 역사는 인간들의 정열들과 변덕들의 결과들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I, 35) 퐁뜨넬의 신은, 종교들의 비관용적인 종파들에 의해 표출되는 역사의 신이 더 이상 아니다. 고정된 법칙들에 의해 활동하는 것은 자연의 신이며, “일종의 신학이 되기까지 고양된 것은 물리학[자연학]”이다.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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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Bibliographie 272-273.
I.
Bayle(1647-1706), . Nous citons d’après la troisième édition, Rotterdam, 4. vol., 1715, “à laquelle on a ajouté la vie de l’auteur, et mis ses additions et corrections à leur place”. Une réédition photographique des Oeuvres diverses a été procurée par E. Labrousse, Hildesheim, 1964.
F. Puaux(1844-1922), Les précurseurs français de la tolérance au XVIIe siècle, Paris, 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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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Cf. ci-dessus, Delbos(1862-1916) et Lévy-Bruhl(1857-1939).
J-R. Carré(1887-1963), La philosophie de Fontenelle ou le sourire de la raison, Paris,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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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Grégoire(1914-1973), Le dernier défenseur des Tourbillons, Fontenelle, Revue d’histoire de sciences, 1954, p. 22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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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H. Barber, Pierre Bayle: Faith and Reason, The french mind: studies in honour of Gustave Rudler, p. 109-125, Oxord, 1952.
Benito Rateni(?-?), L’interpretazione critica del Bayle alla luce degli sudi piu recenti, Rassegna di Filosofia, I (1952), 239–251; et les observations de A. Deregibus(1922-), Intorno ad una rassegna di studi su Pierre Bayle, Il saggiatore, III, 2-3, 1953, p. 328-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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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7 벨(Pierre Bayle, 1647-1706) 프랑스 철학자, 작가, 사전편찬자. 벨기에 망명자.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3 vol., 1697.
1657 퐁뜨넬(Bernard Le Bouyer de Fontenelle, 1657-1757) 프랑스 작가, 드라마작가, 과학자.
1830 삘롱(François Pillon, 1830-1914), 프랑스 철학자, 라루스(Pierre Athanase Larousse, 1817-1875)의 제자 Nouveau Dictionnaire de la langue française(스승과 공동편집).
1844 쀠오(Jean Alexandre Frank Puaux, 1844-1922) 프랑스 목사, 신학자, 프로테스탄트 역사가. Les précurseurs français de la tolérance au XVIIe siècle, 1881(브레이어 문헌목록에는 18세기로 되어 있다. - 낭뜨 칙령과 연관을 보아 17세기가 맞을 듯 – 18세기이면 볼떼르의 관용을 다루게 될 것인데... 원전 사진판 표지에 17세기가 맞다.)
1857 레비-브륄(Lucien Lévy-Bruhl, 1857-1939),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1862 델보(Victor Delbos, 1862-1916) 프랑스 철학사가. La philosophie française(유고, 1919)
1872 델볼베(Jean Delvolvé, 1872–1948), 철학교수, 툴루즈 철학학회 회원. 델볼베-까이에르(Lisbeth Delvolvé-Carrière, ?-?)의 남편.
1885 로빈슨(Howard Robinson, 1885–1977), A History Of Great Britain, 1927, Bayle, the Sceptic, 1931
1887 까레(Jean-Raoul Carré, 1887-1963), 프랑스 철학자, 쁘와띠에 철학교수.
1913 들로름(Mlle Suzanne Delorme, 1913–2005) 여성철학자. 프랑스 철학회 사무총장, "Revue d'histoire des sciences" 편집위원.
1914 라브루스(Elisabeth Labrousse, née Goguel, 1914-2000) 프랑스 여성철학자, 역사가. 삐에르 벨과 프로테스탄트 망명가들 전공. Inventaire critique de la correspondance de Pierre Bayle, 1961.
1914 그레과르(FrançoisGrégoire1914-1973), 프랑스 문학교수, 수필가.
1915 디봉(Paul Auguste Georges Dibon, 1915-1995) 프랑스 철학사가, 네덜란드에서 활동.
1918 바버(William Henry Barber, 1918-2004), 교육자, 런던대학 교수. Leibniz in France: From Arnauld to Voltaire, 1955)
1922 데레지부스(Arturo Deregibus. 1922-) 이탈리아 철학자. 브루노와 스피노자 전문가.
1923 폽킨(Richard Henry Popkin, 1923-2005), 미국 대학교수, 계몽기 철학사와 근대 반독단주의 전문가.
?-? 라테니(Benito Rateni, s.d.), 이탈리아 철학자? (57MLE)
(12:35, 57M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