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탐구] 정지용 문학에 대한 새로운 성찰1- 정지용의 성장가(成長家)에 대하여'정확하게 출생지를 특정할 수 없는 이유는 안타깝게도 옥천군 호적의 일부가 6·25 때 소실(燒失)되어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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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충북 옥천의 옛 ‘하계리 40번지’의 지적도 원형이 고스란히 유지된 채, 그 위에 정지용의 생가(生家)가 잘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번지에 많은 가족이 옥천을 떠날 때까지 살았으니, 지용의 연구자들은 집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 ‘하계리 40번지’의 아랫집 ‘41-1번지’에는 정운석이 살고 있었다. 1926년 3월 17일 정지용의 부친 태국이 이 땅을 정운석에게 소유권을 넘긴 후 토지는 합병되어 ‘하계리 40-1번지’가 되었다. 그리고 ‘하계리 40번지’는 자동 말소되었다.
그러나 태국이 집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가족이 옥천을 떠날 때까지 ‘하계리 40번지’가 호적 내지는 주소지가 된다. 대지가 팔리던 그해 5월 29일 지용과 송재숙이 ‘하계리 40번지’에 혼인 신고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번지에 지용의 가족 아홉 명이 어떻게 살았을까?
다섯 집(戶)을 1통으로 묶는 조선시대의 오가작통(五家作統)이 당시 일제강점기에도 통용되었다. 태국은 주변을 합병하여 대지 120평을 매입할 때 1호에서 4호까지 이미 집이 있었다. 그러니 한약방을 1통 5호에 설계하여 신축한 것이다. 그리고 상계전 7통 4호에 살면서 하계리 한약방을 10년 가까이 운영하던 1916년 4월 1일 주소개칭(변경) 하였다.
1통 4호에는 진작에 태국의 작은 부인 유정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곳을 떠날 때까지 아들 계용, 화용과 함께 기거하였다. 그 중간에 상계전, 하계전은 상계리(里), 하계리(里)로 바뀐다. 태국의 ‘하계리 1통 5호’ 호적에는 지용 부부와 아들 구관, 그리고 유정이 낳은 아들 화용까지도 입적되었다. 그러니까 모든 상황은 하계리 40번지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다.
1913년 일제토지임시조사국에서 측량한 지적도이다. 당시 정태국의 40대지는 정태국이 소유하고 있었고, 41, 42대지를 병합한 41-1 대지는 정운석이 소유하고 있다. 후에 이 대지는 모두 40-1로 병합되고 40번지는 말소된다.
왜 연구자들은 지용의 생가에 혼란을 겪었을까?
지용에 대한 기록은 1910년 4월 6일 옥천 사립 창명학교 입학 당시의 학적부의 주소‘옥천군 내면 상계전 7통 4호’가 최초이고, 두 번째 기록은 휘문고보 입학 당시의 원적(原籍)인 ‘옥천군 내면 하계리 1통 5호’이다. 여기에서 착오가 일어났다. 원적을 출생지로 해석하면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오류를 수정한다 해도, 지용의 출생지가 ‘하계리 1통 5호’가 아닌 사실은 명백해지지만, 생가(生家)는 ‘상계리 7통 4호’일 개인성이 크다고 정리할 수밖에 없다.
지용 생가를 ‘상계리 7통 4호’ 확정할 수 없다면 가능성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두말한 것도 없이 수북리(화계마을)이다. 지용의 부친 태국(鄭泰國, 1873)은 영일정씨 군남파(郡南派)가 55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지양리 현동(玄洞)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장기를 보낸 곳은 일명 가문(玄洞)골이다. 1895년 선친 구택이 사망하여 현암리 종산에 모셨는데, 그때 2대 독자 태국의 나이 22살이었으며 지용이 태어나기 7년 전이었다.
부친 사망 후 태국은 외부 세계를 지향하는 성격이었으나 곧바로 옥천 상계리에 터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친척이 살고 있는 수북리 화계(花溪)마을을 외부로 나갈 징검다리로 삼아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을 것이다. 자신과 어머니의 산소가 자신이 장만한 수북리 산지에 있다는 점이 이런 정황을 시사해 준다.
복원된 옥천 정지용 생가
또 하나는 지용이 옥천에 들르면 어김없이 화계마을을 찾아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집안의 아래 사람들에게는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친가들이 증언한다. 이곳 영일 정씨의 600년간 집성촌인 수북리 화계(꽃계리, 꾀꼬리) 마을은 구읍의 ‘상계리 7통 4호’와 불과 3㎞니까 옛 걸음으로는 30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이 근거리는 그의 출생과의 거리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수북리와 현암리의 토지조사부를 열람했으나 아버지 구택과 본인 태국의 토지 소유 흔적을 찾지 못했다. 빈한한 2대 독자 집안 사정이 재산을 남길 여지에 미치지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화계리에서 결혼이나 출산의 흔적을 살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사망 후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지용이 세 살 정도 되었을 때 돌아와 정착하였고, 그때 번 돈으로 하계리에 한약방을 열었으며 상계리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지만, 아들 지용을 수북리나 상계리 중 어디라고 출생을 확정하기에는 좀 더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였다. 이것은 옥천문화원과 군청 그리고 지용 문학관이 나서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일이다.
정확하게 출생지를 특정할 수 없는 이유는 안타깝게도 옥천군 호적의 일부가 6·25 때 소실(燒失)되어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데 있다. 현실적인 상황이 이렇다면 지용 생가(生家)를 지용의 생장가(生長家)로 넓게 특정하고 지용의 문학공원을 조금 확대하면 될듯하다.
지용은 들과 산을 마음껏 휘돌던 감수성 충만한 천재 소년이었다. 풀꽃이나 나무가 되어 바람에 흔들리거나 구름으로 떠돌기도 하였다. 그 누군가의 옥천의 ‘산수가 지용에게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꿈을 심어 주었다.’라고 하는 표현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지용의 삶과 문학이 태동하여 성장한 곳을 굳이 한 지점으로 한정할 이유는 없다. 수북리 화계마을을 포함한들 무슨 문제가 있을까?
지용의 생장가(生長家)라고 이름하여 그야말로 마성산을 타고 흐르는 실개천과 구름 끝에 앉아 있는 수북리의 뫼(山) 끝이나 덩기미의 물고기 뛰어오름까지도 지용의 꿈을 키워준 성장가라 해도 방해할 사람은 없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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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지용 시인은 우리 시의 원형을 찾아가는 길이지요.
옥천의 자랑이며, 충북의 자랑인 정지용 시인을 조금 더 깊에 알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