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1980의 추억
천상기 경기대 초빙교수/ 언론학
한국신문방송편집인클럽 고문
전 일간스포츠 편집부국장
일간종합신문 11년차 베테랑 편집기자는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 일간지 일간스포츠에서 4번째 둥지를 튼다.
신아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편집부를 거쳐 한국일보 자매지에서 제4의 편집도정을 시작하게 된다.
1976년 8월 첫 출근을 하자 정한장부장은 사회면 편집을 맡으라고 면 배당을 해주었다. 동아.중앙에서 사회면 편집자로 알려진 탓 이었다. 당시 상황으로 스포츠일간지 편집은 정석스타일 보다 파격적이고 종합지보다 더 시각적 스타일을 강조하는 흐름이었다.
종합지 편집도 이미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의 변화가 시도될 즈음이라 스포츠신문은 더욱 시각적이고 비주얼편집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영상매체에 독자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기존의 편집스타일과 차별화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메이크업을 개발해 나갔다.
사회면 편집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으며 스포츠신문 편집에 적응할 즈음 이준기차장이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때 편집국 진용을 소개하면 편집국장 정종식, 국차장 조동표, 편집부장 이준기, 체육부장 심명보, 연예부장 오도광, 레저부장 박원구, 교정부장 신홍철 등이었다. 편집부 라인업은 기자 김태찬, 김병훈, 김려환, 권성국, 신재기, 최명우, 박준경, 최귀조, 강병목, 원종선 등이다.
이준기 편집부장 체제로 바뀌자 이부장은 나에게 1면 편집을 주문했다.
한국 최초의 스포츠 전문일간지 1면 편집자로서 종합지와는 사뭇 다른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화려한 레이아웃과 튀는 제목을 구사했다. 이부장은 시인이며 정석편집자로 정평이 나있는 당시 편집계의 선두주자 였으며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편집선배 였다. 나의 편집경력과 솜씨를 익히 알고있는 그가 1면 편집을 맡긴 데는 그만한 이유와 더불어 자기 스타일로 지면개혁을 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는지 모른다.
여러 신문사를 옮겨 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데스크는 항상 자기아류를 강행했고 4번째 만난 데스크와도 호흡을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 해야만 했다. 멋진 편집 좋은 신문을 위한 전력투구로 데스크와 일사불란하게 시스템을 구축했다.
1면 편집은 심명보(전 국회의원 작고)체육부장과의 교감도 영향을 미쳤기에 퇴근 후 심부장과 대포 한잔 하는 기회도 많았다. 물론 지면제작에 대한 의견교환의 자리이기도 했다.
1979년…기자 출발 14년 만에 편집부 차장으로 승진했다. 1965년 언론계에 첫 발을 디딘 나와 동년배에 비해 차장승진이 많이 늦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14년간의 기자생활을 통해 4번이나 신문사를 옮겨 다닌 탓이리라. 동아 조선 중앙 한국 등 입사동기들은 10년을 조금 넘길 때 이미 차장 승진을 한 상태였다. 나의 경우 소속신문의 견습출신도 아니고 장기근속자도 아니어서 승진심사 때 마다 제외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당시 동아 중앙은 석간 발행을 했지만 한국 일간스포츠는 조간 발행을 했다. 그래서 이틀에 한번 꼴로 야근을 했다.
1978년 8월 어느날 야근을 할 때 였다. 새벽 3시 폴란드에서 열린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서 한국팀이 결승에 진출 외신보도를 텔레타이프로 직접 받아 1면 사이드로 긴급 편집 처리했다.
야근 편집자의 신속한 보도에 당시 장기영 사주는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 4강에 흥분되어 있던 상태여서 나에게 특종상을 주고 야근자의 새벽 판 갈이를 칭찬했다.
백상 장기영 사주는 ‘25시의 사나이’ ‘왕초’ 등 별명도 많았지만 우리시대 대표적인 정치가(국회의원 부총리) 금융인(한국은행 부총재) 체육인(대한체육회장) 언론인(조선.한국일보 사장)으로 일생을 살아온 분이다. 그는 ‘텔레타이프 고장은 특종의 신호다’ 등 숱한 잠언을 남겼다. ‘17세 노인’…71의 활자가 바뀌어 제목으로 신문이 나와 버렸다. 야근기자에게 새벽에 전화 걸어 근무태도 등을 일일이 독려했다. 이상우 편집선배는 한국일보 편집부장 때 그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술 취해 야근 태만한 기자에게 호통…화이트 호스 한 병… 새벽 2시 요란한 전화 벨 소리가 깊은 잠을 깨웠다. 나는 잠결에도 그것이 우리 왕초의 전화라는 것을 안다. 여보세요, “이봐! 자네는 그래 이 따위 엉터리들이 신문을 만들게 해 놓고 잠이 잘 오는 거야?”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 그 강도로 봐서 지방판 편집에 무슨 잘못이 있는 모양이다. 예?…뭐가 예야? 당장 회사로 나와! 예…하는 수 없이 불을 켜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다시 전화 벨이 울린다, 금방 전화를 끊고 1분도 채 안되었다. “이부장 3면 편집하는 놈이 이름이 뭐야? “이 사람아! 그런 중요한 면을 베테랑을 시켜야지, 어제 오늘 들어온 놈을 시키면 어떻게 해, 자네가 한국일보 망치려고 드는 거야?…일방적으로 전화를 딸깍 끊어버린다. 막 방문을 나서려는데 다시 전화가 요란스레 울린다. “내 차를 보냈으니까 당장 나와” 그리고 또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아간 통금시간 중이니 차가 없으면 갈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편집국에 들어서자마자 사태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외신면 편집자가 편집부 책상 위에 점잖게 누워서 코를 골고 있고 다른 편집자들이 원고를 들고 정신없이 뛰어 다닌다. 외신면 편집자가 동창회 참석했다가 한 두 잔 마신 술이 회사에 들어와서야 효력을 발휘, 충남판 강판 시키는 것을 깜박 잊고 인사불성인 채 영 깨어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외신면 개판을 하지않아 어제 아침에 나간 1단 짜리 기사 한건이 중복되어 다시 나온 것이다. 3면 편집자는 흔들어 봐도 영 꿈쩍도 않는다. 악몽은 지나가고 새벽 5시께 10층(장사주의 사무실 겸 거실)에서 전 편집부원에게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또 죽었구나!…밤을 새워 2층 3층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강판시간을 대기위해 허둥거리던 편집자들은 축 늘어진 채 모래 씹는듯한 입맛을 다시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간다. “이봐, 자네들이 도대체 신문기자야?” 할말이 있을 수 없다. 방금 나온 서울판 신문을 편다. 잉크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때부터 근 1시간 동안 신문에 대한 강평이 시작된다. “1단짜리 기사라고 해서 함부로 취급해선 안돼, 1단짜리 기사가 톱 기사보다 몇 배나 중요하다는 것을 몰라? 1단 짜리! 1단 짜리 부음기사 한 줄, 1단 짜리 단수기사 한 줄, 그것이 어떤 독자에게는 톱기사보다 백배 천 배로 중요한 거야” 이날 새벽의 결론이다. 말씀이 끝나자 두 개의 봉투를 내놓는다. “이부장 이거 하나는 부원들하고 나가서 해장국 먹고 이거 하나는 차비해서 집에 가게.” “우리 부장은 마음이 약해서 자기 차비도 해장국 값으로 내놓을 텐데요” 한 편집기자가 농을 던진 것이 화근이다. “맞았어! 너희들 편집기자가 수 천명의 한국일보 가족 생계를 맡은 사람들이야. 너희들 하나가 잘못하면 신문이 망하고, 신문이 망하면 이 많은 한국일보 가족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정신들 차려” 그날 새벽은 이것으로 끝났지만 그 다음날부터가 문제였다. “이봐! 술 먹고 신문 망친 편집기자 내 방으로 데리고 와.” 불려갔다가는 불벼락을 뒤집어쓰거나 사표를 쓰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가지 않았다. 그러나 1주일이상 매일 보내라는 독촉이다. 하는 수 없이 어느날 밤 편집기자는 일생일대의 단단한 각오를 하고 10층으로 올라갔다. 편집국에서 초조하게 면담결과를 기다리는 나한테 10여분 후 편집기자가 나타났다. “어떻게 됐니”? “예 저어 …딱 한마디만 하시더군요, 나쁜 술은 마시고 다니지 말라, 술을 마시려면 앞으론 이런 술을 먹으라며 한 병 주시던데요.” 그 편집기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화이트 호스 한 병을 내 놓는다. “과연 왕초다” 편집기자들은 탄성을 울렸다.
1983년 부장대우로 승진하면서 편집데스크로 자리매김한다. 기자출발 17년 만에 부장자리에 오른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맞아 나는 한국일보 편집부로 차출되어 올림픽판 데스크로 활약하게 된다. 일간스포츠 전문 편집자에게 한국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올림픽 보도와 편집을 맡긴 것이다.
그때 신문사 마다 지구촌 최대 축제인 올림픽 보도를 위해 올림픽 신문을 본지와 별도로 제작 배포했다.
올림픽 기간동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눈과 귀가 신문과 방송에 쏠렸다. 88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른 정부는 그 해 10월 올림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올림픽 문화훈장을 나에게 수여했다.
1990년 종합편집부장으로 승진, 신문 편집 제작 총 책임자로 추진력있게 일한 결과 다음해 편집부국장겸 종합편집부장으로 위상을 업그레이드 한다. 편집 총괄 데스크로 확고한 입지를 굳히면서 42명의 편집부기자들과 함께 뛰었다. 당시 편집부기자가 42명이나 되었으니 편집의 중요성을 경영주에 일깨워 준 것이다.
그사이 유영종 편집국장 조두흠 편집국장을 거쳐 정달영 편집국장 체제를 맞이하게 된다.
1990년…정달영 국장, 김진동 국차장, 천상기 부국장 등 편집3인방은 시대변화에 발맞춰 신문지면의 획기적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한다. 그것은 창간이래 새로쓰기를 해오던 일간스포츠 지면을 전면 가로쓰기, 가로짜기 편집으로 바꾸는 대개혁 이었다. 지면 대혁신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것이다.
시험판 제작 등 모든 실무작업이 나와 40여명 편집 실무진에 의해 착착 진행되어갔다. 제호부터 컷 제목 본문활자 등 전면 가로쓰기 가로짜기편집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담아 ‘제2의 탄생’을 독자들에게 선포한 것이다.
일간스포츠는 이 같은 지면 혁신을 통해 당시 3개의 스포츠신문 중에서 최고의 발행부수를 달성하였고 가판도 단연 1위를 달리게 되었다. 이후 3년 가까이 편집부국장겸 종합편집부장으로 일간스포츠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성공적인 지면개혁으로 판매부수 부동의 1위를 굳히자 장재국 한국일보 대표이사는 어느날 나를 회장실로 불렀다.
장재국 대표이사는 지면 대혁신에 편집부 기자들의 노고가 크고 천국장이 앞장섰다고 공로를 치하하면서 금일봉을 건네 주었다.
1990년 5월 29일 편집부는 가로쓰기 지면 대 혁신으로 백상 신문대상을 받게 된다. “창의력 발휘로 획기적 지면개선”…일간스포츠 편집부. 나 자신의 영광, 편집부 전체의 사기를 북돋워 준 보람된 순간이었다. 함께 일하던 편집부 가족을 소개 하면…
부장대우 이건섭 차장 박상훈 차장 홍석중 차장 김용래 기자 이성덕 박재철 김경환 최효극 금교돈 정재환 노영필 서영도 김홍부 안덕기 이혁찬 김형택 박철 정철욱 조용준 강인형 김영은 김제동 전국제 서기찬 이원기 정삼환 이건 박준원 조병환 이석희 구자겸 홍덕기 정미경 김철진 김형빈 최수학 김천구 최국환 이용현 임학섭 정재웅 박상언 임승연 김만배 김상현 이직 등이다.
sk1025@empal.com
첫댓글 긴박한 순간을 함께 느끼고
또 흐뭇한 마음도 함께 하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