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김무룡
강변길을 따라 걷는다. 피부에 닿는 바람이 상큼하다.
시선을 위로 보내니 탁 트인 창공에 까마득히 뜬 연이 하나 보인다. 연줄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둔치에서 한 아이가 얼레를 들고 있다. 소년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나는 어느새 향수에 젖어 어린 시절의 고향 집 하늘을 날고 있었다.
기찻길이 보이고 그 옆에 동네 공터가 나타난다. 내 유년의 놀이터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큰형님으로서의 위엄을 떨며 손에 연을 든 채 세발자전거에 앉아 있다.
드디어 첫째 동생이 자전거를 밀며 세차게 앞으로 돌진한다. 바람이 느껴지는 순간 나는 연을 공중에 띄운다. 그러나 연은 연방 땅에 곤두박질칠 듯 요동을 치며 불안스레 흔들린다.
땅만 쳐다보며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든 채 열심히 내달리는 동생에게 "더 빨리! 더 빨리!"하며 독촉한다. 마침내 첫째가 지쳐 나가떨어지자 재빨리 둘째가 달라붙는다. 그리고 둘째의 기력마저 소진하면 셋째 동생이 이어받는다.
글는 사이 연은 차츰차츰 떠올라 마침내 하늘 높이에서 뭄 만난 물고기처럼 유유히 꼬리를 치며 유영을 시작한다. 우리는 기어이 해내고야 말았다는 성취감에 도취하여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지른다.
그 사이를 놓칠세라 나는 얼른 준비해 온 쪽지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연줄에 매단다. 쪽지는 바람을 타고 연줄을 따라 조금씩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하늘 높이 뜬 연에 닿아 까만 점으로 아물아물 할 때쯤이면 동생들 몰래 살그머니 눈을 감고 그 쪽지에 적은 나의 소망이 꼭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제 먼 먼 날의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린 그 시절, 그 쪽지에 적어 띄웠던 절절한 사연마저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렸지만, '제발, 저를 걷게 해 주세요!'라고 쓴 내용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너댓 살이 되었을 즈음, 척추에 이상이 생겨 차츰 걷기에 어려움을 느끼던 나는 끝내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후 나와 내 부모의 삶은 말 그대로 끝없는 가시밭길, 그것이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 끼니를 걱정하는 형편에도 부모님은 어떻게든 나를 걷게 하려고 유명하다는 의사, 한의사 침구사 심지어 점술가까지 찾았으며 신약도 한약도 하물며 갖가지의 민간처방까지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어느 날은 용한 침구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었다. 그는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하루에 백 군데씩 백일 정도 침을 맞으면 혹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침을 맞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지만 '걸을 수도 있다'는 그 한마디에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그 고통을 참아나갔다. 그러기를 한달쯤, 침을 맞고 집에 돌아와 엄마가 등에 업힌 나를 내려놓기 위해 요대기를 풀었을 때였다. 침을 맞은 곳에서 조금씩 배어 나온 피들이 둘렀던 요대기에 말라붙어 몸이 떨어지질 않았다. 놀란 엄마는 나를 감싸 안으며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내 죄가 너무 커서 네가 이 고생을 하는구나. 이제 침은 그만 맞자꾸나."
"엄마 나는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미안해 엄마!"
"사람들이 영영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그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너는 반드시 걸을 수 있다. 그때가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이 엄마 말은 믿지?"
"응"
그즈음의 어느 날 아버지는 세발자전거 한 대를 사 주셨다. 내 생애에 받은 선물 중 가장 귀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묵묵히 나의 발이 되어주었으며 끝내는 걸음마를 배우게 한 은인이었다.
집 근처의 둔덕은 기찻길이었고 그 너머의 동네에는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었다. 그 친척은 무속인이었다. 그 집 대문에는 언제나 푸른 대나무가 꽂혀있었고 법당이라 불리던 큰방에는 돌미륵이 모셔져 있었다. 나는 틈만 나면 동생들을 재촉하여 자전거에 의지해 그곳을 찾아가 마륵불 앞에 엎드려 빌고 빌었다.
"엄마가 사 놓은 검정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가고 싶어요. 제발, 걷게 해주세요."
그것은 소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절규라 해야 옳을 듯 싶다.
열 살 때 쯤이었던 어느 해의 저물녘이었다. 서쪽 하늘을 곱게 물들이며 지고 있는 해를 놓치지 않으려고 목을 빼고 쫓다가 무심결에 대청마루의 기둥을 붙들고 일어섯다.
자비하신 부처님의 가피 때문인지, 연줄을 타고 올라간 나의 기원이 하늘에 닿았음인지, 아니면 엄마가 내 가슴에 심어놓은 믿음이 실형되어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기적은 일어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걸음마를 다시금 시작한 나는 서툰 걸음걸이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꿈을 그리지 않고서 꿈을 이룬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꿈은 굳은 믿음이 있을 때 현실이 된다.
'기회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리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것이다. 기회가 기회로 보이는 것은 그 소망이 너무도 간절하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위인의 말이 생각난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것은 아마도 간절한 꿈은 그대로 진실한 기도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과 마주서야만 뜨는 연, 나에게 시련은 바람이었고 나는 마침내 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