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장정순
끝없는 길을 따라 열매는 맺히고 떨어지고 으깨어지지요
솔향 머금은 산딸기의 상큼한 즙이 미각을 자극했어요
최후의 빵 한 조각을 기다리던 식욕은 점점 번데기가 되었어요
몸 안에 침전된 즙은 고통스럽게 녹았어요
아하, 무지개 나비가 되어 꼬불꼬불 길을 그립니다
미지를 향한 자유의 날개를 활짝 펼칩니다
호기심 눈동자는 양떼구름을 닮아 경이로운 환호를 공중으로 띄웁니다
비행하는 지구본도 빠른 속도를 늦추고 산소와 입맞춤합니다
저 하늘을 줍는 자그마한 섬은
날숨과 들숨이 교차하는 푸른 배낭이지요
웨딩드레스에 로맨스 무늬가 찍혀요
바위채송화 꽃술에도 노란 윙크가 보이네요
드디어 맑음
장정순
그날 축 늘어뜨렸던 상념과
정리하지 못해 고였던 눈물이
떠났나 보다
이런 무겁게 억눌린 시간을 툭 툭 털어버리니
온 뜰은 손님으로 가득하다
지체할 수 없다
가볍고 탄탄한 신을 골라 마중 채비를 차리자
하얀 원피스에 라일락 빛이 화사하다
화폭을 드나들던 샛노란 나비도 날개를 펴고 있다
한 움큼의 기억으로 남는 오늘이
설령 바람 같을지라도
허수아비처럼 마비되지 않으려면
사랑 앵무새와 연붉은 갈대도 맞이해야 한다
나는 드디어
사랑스러운 눈 맞춤을 배우며
벤치에서 벌떡 일어난다
에델바이스
장정순
설렘이 되었던 알프스 산자락
우연히 마주친 너와의 재회는
현실 밖이었던가 보다
에델바이스의 보송보송한 눈물을
지천으로 만나리라 기대했었는데
밑그림 없이 그려진 이미지는
하얀 무더기 꽃밭을 이루었는데
설산이 보이는 산자락
*그뤼에르 소품 가게의 유일한 진열대에서
하늘거리며 아름드리 바람을 맞는
단 한 컷의 수줍은 엽서 사진이었다
이 길로 가면 안 되는가 보다
공식을 맞추면 안 되는가 보다
시들지 않는 추억만 붙잡아야 하나 보다
* 그뤼에르 : 스위스 프리부르주의 치즈가 유명한 산골 마을.
그곳에 가면
장정순
그곳에는 고독한 연주자가 있다
나는 쓰다만 편지를 손끝으로 전해주는
속삭임이 되고 싶어 그곳에 간다
음표를 넣은
포도(鋪道) 위의 그리움으로
격정의 파도를 잠재울 수 있다
가로수 잎 사이로 스며드는 자유로운 바람
젊음의 광장은 늘 붐빈다
한때 화법에 서툴러서 첫 음마저
흔들렸지만
지식을 갈구하는 책을 고르며 사색을 배우는
서점 옆
그곳에 가면
굽 높은 구두의 도도한 소리마저 조율할 수 있다
이별을 도려낸 긴 편지를 쓸 수 있다
목말랐던 그리움을 넉넉히 담을 수 있다
메모하다
장정순
달력만큼 스쳐 간 물의 시간이 맴돈다
손안에 움켜잡아도 절대 잡히지 않는다
내가 닿지 못하는 공중을 밟으려고 했던 지친 발걸음도
들어와 있다
달빛마저 볼 수 없는 근시안이 된 지 오래다
몸을 둘러싼 문명은 얼마나 편리한 계산인가
지워지고 잊히고 상실해가는 시점을 메모하지 않았다
바다가 작아지고 별의 노래가 들리지 않을 때
깨달았다
둥근 세상이 각진 것을
즉시 희망이라고 메모를 했다
달력만큼 스쳐 간 물의 시간이 존재하기에
서로 손을 마주 잡으면
너를 향하는 나의 노래가 되겠지
애틋하고도 다감한 체온으로 변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