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의 가치는 나눔에 있고 나눔은 두 배의 힘을 발휘한다” | ||||||||||||
인터뷰… 김오현 (주)에코아텍 회장 / (주)보경 회장 | ||||||||||||
| ||||||||||||
-성공을 위해서는 ‘반복’을 즐겨야 하고, ‘일’을 즐겨야 한다.
고향 나주에 대한 자부심을 품고 사는 출향 나주인 인터뷰가 그것이다. ‘고향을 빛낸 나주인들’을 찾아 이들의 실패와 성공, 애환을 지면에 옮긴다. 이번호 인터뷰 대상으로 나주 금천면 출신 김오현 (주)에코아텍 회장을 만나 김오현 회장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비전을 들여다보았다. 비록 고향을 떠나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사는 나주인. 특별한 주제 없이 <나주>를 매개로 김오현 회장과 인터뷰를 했다. 다음은 김오현 회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1957년 금천면 석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6남 4녀 중 9째로 태어나 나주에서 11살까지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저희 집이 과수원과 정미소를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편이었지요. 어린 시절 쌀독에 쌀을 어머니 몰래 퍼서 친구에게 주고, 감자로 만든 수제비죽이 맛있어 모여 바꿔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쌀독에 쌀이 없어진 것을 아신 어머니에게 혼난 기억들도 새롭군요. 어린 시절 김필곤, 김석현, 정호영 등 깨복쟁이 친구들과 ‘삐비’를 뽑아먹고, 냇가에서 목욕하며, 개구리 잡아먹던 기억도 납니다. 또 초등학교 2학년 농번기에 막걸리를 받아 집에 가져가는 길에 무거워서 조금씩 먹다가 술에 취해 논두렁에 넘어져 죽을뻔한 기억도 나네요.
광주사례지오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입학했다가 농구부가 있는 홍익사범대부속고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18살에 서울에 상경했지요. 농구선수로써 동국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기대주였는데, 학생운동을 하면서 학교를 그만 두고 건설 현장에 취업한 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성공하기 전까지 21개의 직업을 가졌었습니다. 포장마차, 대리운전, 구두닦이, 농산물직거래 등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입니다.
(주)에코아텍은 지난 2006년 처치 곤란한 음식물쓰레기를 가장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 가정용음식물쓰레기 처리기 ‘이플’의 개발을 시작으로 국내 바이오환경산업을 이끌고 있습니다. (주)에코아텍은 버려지고 오염되는 자원의 친환경 재활용을 위해 설립됐습니다. 이는 가정에서 배출되는 음식물쓰레기를 발효 및 건조, 처리하여 투입시량의 약 1/20로 줄이고 발생되는 부산물도 퇴비로 재활용할 수 있도록 한 혁신적인 처리방식으로, 건조 상태로 배출된 부산물을 취급이 쉽고 부피 및 무게가 획기적으로 감소하여 처리비용 또한 대폭 감소시켜줍니다. (주)보경은 1997년 하조 토건 주식회사로 설립되어 지난 2000년 6월 상호를 변경했습니다. (주)보경은 자체 개발사업의 완성과 재건축, 재개발 사업을 통해 고객만족과 신뢰를 최우선으로 우수한 개발인력을 육성합니다. 급변하는 부동산 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행복한 미래, 신주거문화의 실현을 위해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주요사업으로는 ‘재건축, 재재발 사업’으로 기획 제안형, 테마형 시설물, 레저 스포츠타운 개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건설사업의 아웃소싱시대를 맞아 부지매입에서부터 상품, 사업기획, 광고, 모델하우스축조, 마감재선정, 분양에 이르기까지 전 사업 분야를 일괄 대행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BMC’라는 의료기기와 생명공학사업을 하는 업체와 나주 중앙동에 있는 ‘빛그린토건’이라는 업체도 경영하고 있습니다.
상생과 나눔입니다. 마음을 나누는 것도 물질과 권력을 나누는 것도 모두 나눔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 것을 가져와 성공을 이룬다 해도 멀리 가지 못합니다. 또 봉사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봉사와 희생이 기업의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저는 30년이 넘게 4시간 이상 잠을 자 본적이 없습니다. 4시간이면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3시에 자면 7시 일어나고, 9시에 자면 1시에 일어납니다. 주로 10시~11시에 자는데 새벽 2~3시면 일어납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반복’을 즐겨야 하고, ‘일’을 즐겨야 합니다. 아울러, 많은 사람들은 양지를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조건이 좋으면 옮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경영철학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사불이(家社不二)’입니다. 즉, ‘가정과 회사가 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버릴 수 없듯이 직장도 버릴 수 없는 곳입니다. 저희 회사는 지금도 기족과 함께 1박2일 워크샵을 매년 갑니다. 1인당 2명이 가족을 모시고 와서 가족당 3명 이상이 가사불이(家社不二) 정신으로 워크샵을 함께 합니다.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던 나에게도 33세 되던 해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건설한 건물이 분양되지 않아 도와준 모든 사람들의 부채까지 떠안게 된 것입니다. 다시 재기하겠노라며 친구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고 남들이 퇴근한 후에도 일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시장에 나가 일을 하고 또 다시 출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5년의 시간을 보낸 후, 4시간 이상 취침하지 않은 부지런한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아침에 일어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혼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임직원도 함께 참여하며 잠재한 무한의 능력을 계발하고 있습니다. 조용한 새벽,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잘못된 습관을 반성하고 긍정적 행동은 칭찬을 하면서 희망찬 하루를 시작하는 ‘혼전쟁’. 이는 자신을 뛰어 넘어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생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해줍니다. 또 지극정성을 들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쉽게 이뤄지는 일보다는 남들이 안 된다고 했던 일이 성공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우선 ‘상생’의 관계로 인연을 맺고, 남을 하나 더 주는 ‘배려’를 하고, 조금 부족하더라도 ‘포용’하며, ‘용서’를 한번정도는 하고, 마지막으로 ‘융화 결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남의 것을 뺏으려 하면 궁극적으로 이기지 못합니다.
많은 분들이 생각납니다만, ‘아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못난 저를 만나 힘들게 살아오면서 자식들을 잘 키우고 가정을 반듯하게 세웠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범대 체육교육학과 대학에 들어갈 때, 한문과 영문으로 제 이름도 제대로 못 썼던 저를 공부하도록 재촉해 사회복지사 1급자격증과 박사학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늦둥이 아들을 포함해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자식들을 가정에서 잘 양육했습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친구들에게 쌀과 음식을 가져다주는 게 좋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사회복지사 1급자격증을 따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살기좋은나라 아름다운 손길’을 통해 독고어르신 돕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인재양성 등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40세, 어머니가 35세에 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20대에 두 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해드린 것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어르신을 돕는데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돈을 벌 때 희열을 느끼는 것이 10%이라면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어르신을 돕는 기쁨은 90%이상인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방분권화를 위해 만든 것이 혁신도시입니다. 혁신도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육시스템이 빨리 정착되어야 합니다. 국제학교나 특목고라든지 우수학교가 먼저 설립되고 양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혁신도시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는 기틀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역의 지도자들이 하나가 되어 고향 나주가 옛 ‘목사고을’의 명성을 되살릴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모든 나주 향우와 나주인들이 모여 나주발전에 대한 결의대회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혁신도시로부터 다시 불고 있는 계발과 발전의 절호의 찬스를 놓치면 안됩니다.
고향을 지키고, 고향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참 어렵습니다. 경제의 흐름이 대도시로 몰려있기 때문에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재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존경심을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고향발전에 한 알의 밀알이라도 되고 싶은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고향을 지키시는 분들, 항상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