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릉(洪裕陵)은 전에는 금곡릉(金谷陵)이라고 불렀었다.
중학교때 기차를 타고 소풍을 가기도 한 곳이다.
당시에는 왕릉(王陵)의 관리가 소홀하여 능에 올라가서 구르기도 하고,
석물(石物)에 올라가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릴 때는 이곳에 잠들은 왕이 어떠한 분인지 알지도 못했고, 알 생각도 없었다.
단지 놀러 왔다는 그런 생각밖에는 없었다.
홍유릉(洪裕陵)은 조선 왕릉(朝鮮王陵)중 가장 여러 계층의 묘(墓)가 있는 곳이다.
홍릉(洪陵), 유릉(裕陵), 영원(英園 : 英親王 夫婦), 회인원(懷仁園 : 李玖), 덕혜옹주묘(德惠翁主墓), 의친왕묘(義親王墓)와
다섯분의 후궁(後宮)이 잠들어 있다.
먼저 유릉(裕陵)으로 간다.
유릉(裕陵)은 조선의 마지막 王인 순종(純宗)의 陵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먼저 보이는 것이 어정(御井)이다.
상당히 크고 배수로까지 만들어 놓은 우물인데 위를 돌로 막아놨다.
오른쪽 끝에는 재실(齋室)이 있는데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크게 지어놨다.
안쪽에 이와같은 건물이 두 동(棟)이 있다.
릉(陵)쪽으로도 작은 문이 나 있다.
릉 아래 왼쪽에 또 하나의 우물이 있는데 이는 제정(祭井)이라고 한단다.
홍살문과 침전(寢殿).
홍살문 안쪽에 또 하나의 돌받침이 있는데 전에 홍살문을 세웠던 자리가 아닐까한다.
조선왕릉((朝鮮王陵)의 침전(寢殿)은 거의가 "丁"자형인데 홍유릉(洪裕陵)은 "一"자형이다.
유릉(裕陵)은 유일하게 순종(純宗)과 순명황후(純明皇后)와 순정황후(純貞皇后) 세 분의 합장릉(合葬陵)이라고 한다.
홍유릉(洪裕陵) 앞의 석물(石物)은 다른 陵과 달리 낙타, 코끼리등 새로운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유릉(裕陵)의 짐승들은 다리사이도 파놓은 실물모양으로 조각해 놓았다.
이는 일본인 조각가를 불러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유릉(裕陵)의 침전(寢殿)은 다른 곳과 달리 일반 궁(宮)의 어좌(御座)와 같은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침전(寢殿)앞에서 본 석물(石物)들.
일본인 조각가가 사실적으로 표현한다고 하여 오히려 조선을 능멸하는 모양새를 만들었다고 한다.
무인석(武人石)도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없는 다른 모양이라고 한다.
유릉(裕陵)은 아래에서는 볼 수가 없어 그곳에 있는 사진을 옮겨왔다.
순정황후(純貞皇后)는 한때는 윤비(尹妃)라고 불렀다.
이분의 아버지 형제는 모두 친일 매국노(親日 賣國奴)들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合倂)하려고 조선의 매국노들이 회의를 했다.
윤비가 병풍뒤에서 이를 엿듣고 옥새(玉璽)를 가지고 와 치마속에 감추었다.
옥쇄를 가지러 온 대신들이 이를 알고도 어쩌지 못하는데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이 조카딸인 윤비의
치마속의 옥새(玉璽)를 강제로 빼앗아 간 악질중의 악질 매국노(賣國奴)다.
그는 그 공(功)으로 여러곳에 땅을 하사받고 공주 계룡산 갑사 계곡에 간성장(艮成莊)이란 자신의 별장을 짓고
갑사구곡(甲寺 九曲)이란 글자를 써놓고 떵떵거리며 살기도 했다.
1966년 순정황후(純貞皇后)가 돌아가셨을 때 나도 저 운구행렬(運柩行列)에 참석했었다.
이제 홍릉(洪陵)쪽으로 간다.
홍릉(洪陵)쪽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큰 연못이 있다.
이름이 홍릉(洪陵) 연지(蓮池)란다.
연지(蓮池)를 지나 왼쪽으로 보이는 재실(齋室).
유릉(裕陵)의 재실(齋室)보다는 규모가 작다.
재실(齋室)의 앞쪽 건물.
재실(齋室)의 뒤쪽 건물.
홍릉(洪陵)도 앞에서는 능침(陵寢)이 잘 보이지 않아 재실(齋室)쪽에서 찍었다.
재실(齋室)에서 제수(祭需)를 운반하는 길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이곳의 석물(石物)은 다리사이가 막혀있고 유릉(裕陵)의 석물(石物)보다는 사실적이지 못하다.
지당(地塘)의 배수구(排水口)
홍릉(洪陵)의 침전(寢殿)
침전(寢殿)의 어좌(御座)는 유릉(裕陵)의 어좌(御座)보다 조금 작게 만들어졌다.
침전(寢殿)뒤에서 본 릉(陵)
침전(寢殿)뒤 좌측에 있는 용도를 모르는 석물(石物)있는데,
폐백(幣帛)을 묻는 예감(瘞坎)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측에는 상석(床石)같은 석물(石物)은 山神에게 제향을 올리는 산신석(山神石)으로 근래에 만들어진듯하다.
뒤에서 본 비각(碑閣)
이곳에는 능 안쪽에 어정(御井)이 있다.
이제 홍유릉(洪裕陵)밖에 있는 묘(墓)를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