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화엄종사상
5. 차정과 표덕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화엄종의 초조인 두순(杜順)스님의 [화엄오교지관(華嚴五敎止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두순스님은 화엄삼매(華嚴三昧)인 대연기법계(大緣起法界)에 들어가는 것이 난해하여 그 방편설로 여러 가지를 시설하였는데, 이 차정(遮情)과 표덕(表德)은 이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차정이라는 것은 곧 쌍차면에서 말하는 것이고, 표덕은 쌍조면에서 말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화엄법계에 인도하는 방편설인 차정과 표덕의 이론도 알고 보면 바로 쌍차와 쌍조를 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 차정(遮情)
법이 말을 떠나고 지해를 끊은 것임을 드러냄에, 이 문(門)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차정(遮情)이요, 둘은 표덕(表德)이라.
顯法離言絶解함에 就此門中하여 亦爲二니 一은 遮情이요 二는 表德이라. [華嚴五敎止觀;大正藏 45 p. 512下)
지금까지 모든 법에 대하여 말로 했지마는, 실제로는 말(言語)도 여의고 알음알이(知解)도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과 지해((言解)가 분명히 서야 합니다. 말을 떠났다(離言)고 하여 말 못하고 벙어리모양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이것도 죽은 송장이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하여 말로 표현될 줄 알면 그것은 외도(外道)입니다. 결국 말을 떠난 언설(言說)이고 언설이 말을 떠난 것임을 확실히 자각해야 됩니다. 차정이라는 것은 쌍차 편에서 말하는 것이요, 표덕은 쌍조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정을 막는다(遮情)고 하는 것은, 연기는 있는 것인가 물으면 아니라고 답한다. 곧 공하기 때문이니, 연기법은 자성이 없어서 곧 공이다. 이 연기는 없는 것인가 물으면 아니라고 답한다. 곧 있기 때문이니, 연기법은 곧 무시(無始)이래로 있기 때문이다. 묻기를,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것인가 물으면 아니라고 답한다. 공과 유가 서로 원융하여 하나로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 연기법은 공과 유가 같은 경우라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금과 장신구와 같으니 생각해 보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하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한다. 양쪽이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니, 연기법은 공과 유가 서로 빼앗으며 동시에 성립하느니라.
言遮情者는 問緣起際油郞아 答不也라 卽空故니 緣起之法은 無性卽空이라 問是無郞아 答不也라 卽油故니 以緣起之法은卽由無始得油故也라 問亦有亦無郞아 答不也라 空有圓融하여 一無二故니 緣起之法은 空有一際하여 無二相故也라 如金與莊嚴具니 思之하라 問非有非無郞아 答不也라 不碍兩存故니 以緣起之法은 空有互奪하여 同時成也라.
'정을 막는다(遮情)고 하는 것'은 부정을 한다는 말입니다. 즉 연기가 있는 것이냐고 물을 때, 아니라고 부정으로 답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그 자성이 공(空)하기 때문에 연기가 있느냐고 물으면, 자성이 없어서 모든 것이 다 공하니 아무리 연기가 있다 해도 유(有)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없는 것인가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겁 이전부터 언제든지 연기법은 존재해 왔으므로 무(無)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위의 두 문답은 서로 부정을 하면서 서로 성립이 되어 없다는 것은 있다는 말이 되고, 있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연기가 아무리 있다 해도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고, 없다고 하지만 연기는 분명히 있으므로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말하자면 위의 두 문답은 서로 부정을 하면서 서로 성립이 되어 없다는 것은 있다는 말이 되고, 있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연기가 아무리 있다 해도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고, 없다고 하지만 연기는 분명히 있으므로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묻기를,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느냐고 하는데, 이말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느냐라는 뜻으로 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공(空)과 유(有)가 서로 원융해서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있다 없다라는 말은 거기에 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공과 유가 한 가지로 동등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기 때문에 어찌 있다 없다로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역유역무(亦有亦無)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역유역무가 아니라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묻기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非有非無)묻자,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서 색공(色空)이 분명히 있어 양쪽이 모두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아 서로 쌍조(雙照)가 되어 양편이 다 존재하기 때문에 비유비무도 아닌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색즉시공이라 할 때는 색이 없어 공만 있는 것 같고, 공즉시색이라 할 때는 공이 없이 색만 있는 것 같지만, 공과 유를 서로 빼앗아서 공과 색이 둘이 아니면서 또한 동시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만 하는 것을 차정(遮情)이라 하는데, 얼핏 보면 부정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용 전체가 긍정에 통하고 있습니다.
(2) 표덕(表德)
덕을 드러낸다(表德)고 하는 것은, 연기는 있는 것인가 물으면 그렇다고 답한다. 환화의 유(幻有)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연기)는 없는 것인가 물으면 그렇다고 답한다. 연기는 자성이 없어 곧 공하기 때문이다.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것인가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한다. 양쪽이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한다. 서로 빼앗아 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二表德者는 問緣起是有郞아 答是也니 幻有不無故라 問是無郞아 答是也니 無性郞空故也라 問亦有亦無郞아 答是也니 不碍兩存故라 問非有非無郞아 答是也니 互奪雙泯故라.
'덕을 드러낸다(表德)고 하는 것'은, 연기법을 앞에서는 전부 부정으로 해명한 것에 반하여 여기서는 전부 긍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연기가 있느냐고 물으니, 앞에서는 없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 까닭은 환화(幻化)의 유가 언제든지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묻기를 연기가 없느냐고 하니, 그렇다고 긍정합니다. 연기는 무성(無性)으로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없다고 대답을 하여 앞의 말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리고 연기라는 것은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는 것이냐고 다시 물으니, 그렇다고 긍정을 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서 서로 걸림이 없이 양편이 다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기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냐고 하니, 또 그렇다고 대답을 합니다. 색즉시공 · 공즉시색으로 서로 빼앗아버리기 때문에 색공(色空)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유역무도 맞고, 비유비무도 맞고, 유라 해도 맞고 무라 해도 맞고 모두 다 들어맞는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는 다 아니라고 부정을 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긍정이 되므로 여기에서 모두 그렇다고 긍정한 것과 그 내용의 본질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3) 차표원융(遮表圓融)
또한 연기하기 때문에 유(有)요, 연기하기 때문에 무(無)요, 연기하기 때문에 유이기도 하고 또한 무이기도 하며, 연기하기 때문에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 이와같이 가림과 드러냄이 원융무애하니 모든 것이 연기가 자재한 까닭이다.
又以緣起故是有요 以緣起故是無요 以緣起故是亦有亦無요 以緣起故是非有非無라. 如是遮表圓融無碍하니 皆有緣起自在故也니라.
이것은 지금까지 해설한 차정과 표덕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본래 연기가 원융자재하고, 이를 논의하는 차(遮)와 표(表)가 또한 원융무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의 표현이 다를 뿐이지 사실은 쌍차. 쌍조를 가지고 논의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망정을 반함에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고, 이치가 드러남에 망정이 저절로 없어지느니라.
反情에 理自顯하고 顯理에 情自亡이라. (華嚴一乘敎義分齊章 券四;大正藏 45, p. 502 下)
'망상을 반함'은 부정을 가리키고 '이치가 나타남'은 긍정을 말합니다. 즉 여기서는 부정을 하니 긍정이 되고, 긍정을 하니 부정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비유하자면 구름이 다 걷히면 해가 드러나고 해가 드러나면 구름이 다 걷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시 말하면 차가 즉 표이고, 표가 즉 차로서 차정 이대로가 표덕이고 표덕 이대로가 차정인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