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금촌으로 이사온 지 두 달이 넘어섭니다.
들어올 때부터 말썽이 많았던 아파트라서 그런지 들어와서도 일이 참 많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하자보수한데서 또 물이 들어와 물어보니 샷시공사 때문에 새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원래 계약할 때는 아파트 완공 후에 샷시를 달면 샷시와 벽체 사이에 밀봉이 잘 안되고 그 공사 시 충격 때문에 벽체에 금이 갈 우려가 있어서 완공 전에 같이 공사가 들어간다고해서 계약을 했더니만 나중에 들어보니 완공후에 샷시공사가 들어갔더군요. 다른데 하구 똑같이 말입니다. 또 당시 게약된 업체가 00창호였었는데 공사 시작 전에 발주업체하고 짜고 이행보증증권을 떼라고 턱없이 요구하면서 그 업체를 밀어내고 자기네가 직접 시공을 했답니다. 시간에 쫒기면서 원래 계약한 독일식(전면), LG(후면)을 한마디 연락 없이 임의로 그보다 싼 한화 것으로 바꿔치기하고서는 잔금 달라고 떼를 쓰는 겁니다. 하자보수와 교체사유를 대라니깐 그건 한마디 대꾸 없이 잔금요구만 하길래 아파트 입주민들이 연대해서 그 회사와 하자보수와 감액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베란다 마루재는 입주전에 가보니 공사시작도 하지않아서 얘기했더니 입주직전 공사를 마쳤더군요.
근데 웃기는 건 베란다 사잇문은 달았는데 유리도 안달아놓고 벽체와 문사이는 베니어 판을 대놓고 마무리 공사를 안해주더라구요. 한번인가 돈 얘기를 하길래 마무리 하라고 했더니 언젠가 유리 달아놓고 가곤 여태까지 벽체 베니어판 마무리도 안하고 돈 얘기도 없습니다. 샷시하고 같은 회산데 부도난 뒤 벌써 이름만 두 번 바꿔서 운영하고 있다는군요. 그리고 샷시와 마루재(베란다 확장) 공사는 아파트공사 완공 전엔 불법이라더군요. 실사용 평수가 변경이되는 것이라서요. 그런데 대부분은 그냥 눈감고 넘어간다더군요.
다른 평수 아파트는 부실공사로 인한 한자가 많이 발생하고 그 사후처리도 잘 안해줘서 말썽이 많습니다.
근데 저희 집은 샷시공사로 인해 작은 방 베란다 벽체에 금이가고 작은 방 측면 벽에 곰팡이가 약간 슬은 것을 빼고는 큰 하자가 없더라구요. 곰팡이가 슬은 것도 도배공사를 다시 해서 지금은 괜찮습니다.
벽체는 실리콘을 주입해서 밑으로 금간데는 물이 안새고 샷시와 벽체 사이에서만 새는 것 같더군요. 그건 샷시문제가 마무리될 때 한꺼번에 처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지난 2월말-3월초에 입주키로 에정된 아파트였는데 부실시공과 공기연장으로 4월에 임시사용승인신청을 냈다가 거부당하고 다시 5월말에 승인을 받아 입주를 했습니다. 저는 7월31일에 입주했고요.
전 3월 31일에 집을 나와 짐을 이사짐센터에 맡기고 대전 어머님댁으로 내려가 있고 서울로 왔다갔다했었죠.
입주시 잔금치룰 때 입주지연에 대한 보상을 해주더군요. 그리고 입주후에 입주지연에 따른 위로금이 다로 나오더군요. 단 4월 임시사용승인신청시에 입주 예정일을 명기해서 서류로 제출한 사람에 한해서요.
비입주자(싸우는 사람들)들과 분리해서 골탕먹이려는 수작이죠. 하여튼 전 받았습니다.
내용은 이사짐 운송료, 보관료, 임시거주료, 정신 피해료등등을 계산해서 1일당 12만원씩 보상지급했답니다.
추석 직전에 준공검사를 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오늘 등기신청을 하라는 통지가 왔습니다.
오전에 동사무소에 들러 주소이전하고 형이 운영하는 회사에 나왔습니다.
아파트 입주자. 비입주자들이 의견을 달리해서 2개로 협의체가 나뉘어 서로 헐뜯고 싸우며 지금까지 왔었는데 지난달 말쯤에 화해하고 하나로 뭉쳤습니다.
부녀회도 이권이 많은 자리라서 그런지 설립총회에서 말썽이 많다가 노인회하고 같이 무사히(?) 만들어졌습니다.
초등학교도 말썽은 많지만 가을학기부터 개원했구요.
입주자는 2,900세대 중 700세대정도 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람사는 곳이라서 하나하나씩 해결되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황량한 것 같더니 이제는 좀 사람들이 사는 곳 같습니다. 얼마전엔 부녀회 창립기념으로 떠들썩하게 바자회도 하고요. 그날이 극단 사람들을 모아 놓고 두 번째 집들이를 했는데 올라오는 길어 바자회 주막집이 그렇게 아쉽게 보이더군요. 술 끊은 지가 벌써 일년하고도 반년이 지나고 있네요. 담배는 7년째로 접어들고 있구요.
사기분양(온천문제)과 부실공사, 정신적 피해부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도 집단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등록세금 등하고 샷시문제, 손해배상청구한 것 기다리면 될 것 같네요.
내집 마련하는게 보기보다 쉽지가 않아서 혹시나 도움이라도 될까해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어봅니다.
저는 집문제하고 지난 7월부터 준비한 극단 창립 10주년 기념공연관계(근로자연극제 참가작:9월초 공연)로 항암제 후유증과 더불어 바쁘게 지냈고 단원 아이들이 도와줘서 대상도 받았습니다. 뿌듯한 일도 생기더군요.
지금은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고(AFKN/CNN 청취) 11월 경엔 되도 않겠지만 한국예술종합대학 영화이론 전공 대학원을 도전할 생각입니다. 너무 짧은 기간이라 잘 안되겠지만 해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 말부터 형님회사에 화수목 3일간 나와 내부 관리일을 맡아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틀전엔 거래처에서 받은 돈 일부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대출금을 갚았습니다. 압류도 다 해지하구요.
그놈들 참 잔인하더군요. 회사일하면서 직원이 보증을 섰는데 회사가 부도났다고 보증인에게 상환요구를 하고 재산일부가 딴 데로 이전되었다는 것을 채무면탈이라고 형사소송까지 걸었습니다. 같이 시골에서 한동네살면서 가는처지에 말이죠. 저보다는 공장장님이 맘 고생이 많았었는데 좀 여유가 생겼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농협하고 서울보증인데 농협은 사장님 오피스텔에 1순위 저당을 잡아놓고 경매신청을 해서그런지 그런 식을 악랄하지는 않더군요. 경매가 나가면 모자란 부분 약간만 처리해주면 그것도 떨어져 나갈 것 같습니다.사장님 차 보증인 건 때문에 생긴 서울보증은 일부 갚고 나머지는 단데서 들어오는 수금액으로 처리가 가능할 것 같구요. 거의 이문제로 1년을 끌었군요.
그걸로 지난 94년부터 인연을 맺었던 모든 문제가 마무리됩니다.
파란만장했던 기간이었고 많은 사건들이 스쳐갔던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촉망받던 자연과학자인 막내형이 죽었고 뛰어난 정치가연한 큰누나가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투병중이고 작은 형까지 투병 중입니다.
그 쓰레기 같은 큰누나 애들의 아비라는 것은 사망보험료와 딸년 적금을 털어 입을 싹 씻은 것도 모자라 회사정리하면서 보푸라기 떼먹고 마지막 남은 아이들 전세금을 벌써 반이나 털어 먹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누나가 잘못 키우는 바람에 귀가 얇아가지고 삼촌말들을 안듣고 지 애비말만 믿다가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어제 막내 조카애가 몇 달만에 저와 형님을 찾아와서 고기 사주고 길게 얘기했습니다.
혼자 살아보라고요.
나중에 기회가 닿고 저희들도 세상의 쓴맛단맛 다 느껴본 뒤에는 누구말이 옳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판단이 서면 대화하고 도와줄 날이 있겠지요. 세월이 약이 아닌가요?
다음 주 월요일엔 어머님하고 큰이모님 모시고 일본에 갑니다. 일주일정도로요. 원래는 형님하고 같이 가기로 했는데 일정도 그렇고 돈도 넉넉지 못해서 저만 가기로 했습니다.
그놈에 테러전쟁 때문에 여행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죠.
항암제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난번처럼 물집이나 두드러기 같은 것은 별로 없는데 자외선 영향이 계속 있고 피부를 긁게 되면 금방 빨갛게 부어오릅니다. 어디 부위든지요.
그리고 아이스크립이나 쵸코렛, 고기류를 먹으면 온 몸이 가렵고 두드러기가 생깁니다.
현재 운동은 아직 시작 못했고 3주전부터 차를 놓고 다닙니다. 웬만한 거리는 무작정 걷고 전철과 버스를 이용합니다. 만보기를 다시 재기 시작했는데 하루에 거의 10,000보정도 걷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부터 운동을 시작하고(아침 뜀박질 1-2km) 앞으론 자전거를 주로 이용할 생각입니다.(자전거 수리는 마쳐놨고요) 일본 갔다와서 월말쯤에 가을 산행을 해볼 참입니다.
이번 주말엔 냉장고하고 압력밥솥을 들입니다. 냉장고가 작아 녹즙용 야채를 놓을 데가 없어서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잡곡밥을 하는데 일반 전기밥솥에다가 하니까 죽이 되더군요.
그래서 압력밥솥을 산 후 집에 해먹기로 하고 지금은 주로 사먹고 있습니다.
혼자라서 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병이 나면 가족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지나 봅니다.
아가씨도 나이가 어려선 지 잘 모르는 것 같구 섭섭하기보단 그 짐까지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앞섭니다.
요즘은 죽은 형 생각이 많이 납니다.
어려서부터 유학시절, 국내에 다시 돌아왔을 때, 발병했던 날, 수술 받던 날, 투병하던 모습들이 생생해집니다.
너무나 아쉬웠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
다음달 초엔 세 번째 중간 검사입니다. 가끔씩은 불안에 떨기도 합니다. 지난 번에 CT촬영 결과가 계속 맘에 걸렸기 때문이죠. 항상 머리 한쪽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려있습니다.
임파선이 부어 있던 원인을 밝혀내진 못하고 한달후 피검사에선 정상이었지만 이번 CT촬영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맘만으론 정상으로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앞으로의 인생이 매번 3개월 시한부 생명연장 허가서를 병원에서 받고 사는 느낌을 갖습니다.
허가서를 받으러 가서 의사의 입 모양을 쳐다보는 심정은 경험하지 않고는 잘 모를테죠.
꼭 그렇게 살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어떤 일을 정력적으로 시작하다가도 중간에 한두 번씩 꼭 한 템포를 늦추게되는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하고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삶이 그대를 버릴지라도 결코 절망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이 말처럼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