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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기억에 남는 동역자(2044.2020.9.6.교역자보건주일 설교)
롬16:1-4
할렐루야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이미 광고를 하여서 여러분들이 잘 아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교역자 보건 주일은 우리 감리교에서 교단적으로 1년에 1번 지키는 주일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목회자에 대하여 평소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한 주간을 정하여서 담임목사와 사모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특별 헌금도 하여서 주의 종을 돕는 주일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매년 정기 건강검진을 하여서 미리 질병에 대한 예방을 합니다. 목사의 건강은 교회의 건강이고 교회의 건강은 성도들의 건강입니다. 내가 은혜로운 설교를 듣기 위해서라도 목회자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불편하면 불편한 설교가 나오기 때문에 내가 그 불편한 설교를 듣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내가 좋은 은혜로운 설교를 듣기 원해서 목회자를 평안하게 해드리면 좋은 설교가 나온다는 믿음을 갖고 잘 해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내가 좋은 설교를 듣기 윈해서 목회자를 잘 섬깁니다.--
1.목회자도 스트레스를 받아 병에 걸리므로 스트레스를 없애야 합니다.
목회자도 스트레스를 받아 병에 걸려 죽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한 세대 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지도자를 세워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세운바 지도력이 잘 행사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지도자로 세워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지도자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만만치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를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 안보입니다. 지도자를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다가 멸망 당했습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와 교회의 모습은 어떨까? 지도자들에 대한 태도가 어떻습니까? 세워놓고 값지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우지 않습니다. 지도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하지를 않습니다. 사사건건 비난입니다. 비난이 해결책이 아님에도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가 세워지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엉망이 됩니다. 흔들리는 사회가 되고 맙니다. 마귀의 공격은 집요하게 지도자입니다. 지도자 넘어지면 그 이하는 자동으로 무너집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하수인으로 지도력을 파괴해서 교회를 약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역자들의 건강 대부분 그리 좋지 않습니다. 육체와 함께 정신적으로 더 취약합니다.
옛말에 어려서부터 딸 들을 귀하게 키워야 좋은 가정으로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달을 귀하게 여기셔야 시집가서도 귀하게 여김받는 것입니다. 교회도 목사를 귀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모여야 은헤로운 교회가 됩니다. 남의 집에서 들어온 며느리를 귀하게 여기는 시부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들을 가장 괴롭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는 것은 대부분 첫째는 지도자에 대한 불신이고 둘째는 뒤에서 말로서 비난하는 것, 불평하는 일입니다. 상습적으로 입만 열면 비난 불평 원망하는 12지파 중 단 지파 같은 부류들입니다. 이스라엘 생명 공동체를 좀 먹는 존재들이지요. 까닭 없는 불평을 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도력을 약화시키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해치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비난을 받게 되면 자신이 없어질 뿐 아니라 역심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히13:17절‘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유익이 없느니라’돕지는 못 할망정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긴 돕는 사람이면 비난 안하겠지요. 사랑받는 사람은 얼굴에서 윤기가 납니다. 목회자도 부족하지만 목회자를 귀하게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으로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목회 할 수 있도록 탄식하며 목회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예쁜 사람만 보고 설교한다고 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예쁜 마음을 가지고 목회자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쁜 마음을 가지고 목회자를 바라보면 목회자가 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목회자를 귀하게 여기면 여러분에게는 큰 유익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배가 고파야 된다고 말하지 말고 목사도 배가 불러야 된다고 말해 보시고 이 뜨거운 여름철에 수박한덩어리라도 사드려 보세요. 맛있는 것으로 대접도 해 드려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제공해도 아깝지가 않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까?
감리교 교단에서 발행하는 기관지를 보면 까만 테를 두른 사진이 자주 실립니다. 그 목사님의 경력을 보면 70이 넘어 은퇴하신 분들도 있지만 근래에 와서는 40대 50대의 목사님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분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과거에는 폐결핵이 그렇게도 많이 퍼져서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또 죽게 하였는데 교역자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한국 교회의 상징적인 인물과도 같은 목사님들이 폐결핵을 많이 앓았습니다. 그것은 폐결핵의 특성이 못 먹고 영양실조가 되었을 때 많이 발생되고 전염이 되는 병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목사님들은 배고픈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에 결핵을 많이 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폐결핵은 거의 사라졌는데 그 대신 폐결핵보다 더 무서운 간 질환과 암 때문에 많은 교역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는데 왜 간 질환이 생기고 암에 걸리느냐?’고 말합니다. 암의 발생 원인은 스트레스입니다. 목회자는 24시간 대기 중입니다. 그러므로 긴장과 스트레스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밤늦은 시간이나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오면 교인들에게 또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목회자의 일상생활은 ‘스트레스 제조 공장’ 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때에 어떤 경우에 목회자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가 살펴보겠습니다.
목회자가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은 성도들이 목사의 마음을 몰라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목회자가 그 가정을 위하여 얼마나 기도해주고 이끌어 주고 있는지 알아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목사의 마음을 알고 그리고 목사가 인도하는 대로 또 지도하는 대로 순종하면서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목사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성도들이 각각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아니면 담임목사의 어떤 의견에도 무관심하고 무시하는 일들이 그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당하는 목사에게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성도들이 자기의 고집만을 부리면서 목회자에게 도전해 올 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목사는 교인들보다 세상적인 지식이나 또는 세상사는 지혜는 부족할지 몰라도 그러나 목회 즉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에는 그 어떤 교인들보다 월등합니다. 목회자는 목회에 대해서는 전문직입니다. 마치 목사가 의술에 대하여는 의사를 따를 수 없고, 법에 대해서는 법관을 따를 수 없는 것처럼 교회를 위한 일에는 목사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한 번 무슨 안건을 임원회에 내 놓을 때나, 무슨 일을 추진하고자 할 때에, 충분히 기도하고 또 가능성이 있을 때에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안 된다느니, 어렵다느니, 내 생각에는 안 될 것 같다느니, 좀 더 두고 생각해 보자 느니, 아니면 전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무시하든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공공연하게 목회자에게 도전하고, 목회자를 업신여기고, 싸우려고 달려드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또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험담이나 하고, 불신자들에게까지 목회자의 흉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럴 때 같이 멱살 잡고 싸울 수가 있습니까? 어쩌다 해명하느라고 말 한마디만 해도 또 그것을 트집을 잡습니다. 이러니 목사가 스트레스가 안 생길리가 없지요.
세 번째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무리 말씀으로 가르치고 깨우쳐도 나 몰라라 하고 전혀 변화가 없을 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목사는 설교 한편을 준비하는데도 일주일 내내 기도하며 고민하며 생까해 냅니다. 때로는 밤을 새울 때도 있습니다. 가정주부가 항상 반찬 걱정하는 것처럼 목사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설교에 대한 중압감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자려고 누웠다가도 영감이 떠오르면 뻘떡 일어나서 한 줄이라도 써놓아야 합니다. 운전을 하고 다니면서 보이는 모든 경관이나 또는 사건 사고, 모든 것이 설교의 소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온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설교를 강단에서 선포할 때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아멘 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병든 병아리들처럼 꼬박 꼬박 졸고 있기나 하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이나 하고, 딴청이나 부리고 하면 정말로 스트레스 받습니다. 요즘 말로 열 받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변화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여야 하는데 제멋대로 합니다. 아무리 깨우치고 가르쳐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면 잘 몰라서 그랬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한두번 가르쳐 드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씀으로 가르쳐도 깨달음이 없고 돌이킴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종으로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케 한 교역자를 멸시하는 죄악입니다. 그럴 때 어떡합니까? 목사야 무슨 일만 있으면 강대상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뿐인데 그래도 목사도 인간인지라 감정의 치유가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면 협심증이나, 동맥경화, 또는 고혈압, 만성 위장병, 신경성 두통, 등이 발생을 하게 됩니다.
2.목회자를 괴롭히는 것 중에 간 질환과 암이 있습니다.
목사가 큰 질병에 걸려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는 아프지도 않는 줄 아는데 그렇치 않습니다. 몇년전 서울의 ‘하나 한방 병원’의 최서영 원장은 최근 한국 교회 중진 목회자 40명을 대상으로 정밀 간장 질환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간장 수치 지표’에는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어깨가 무겁고, 눈이 피로하며, 소화불량도 뒤따르고, 전신 피로가 계속된다고 호소하여 병원 측에서는 ‘생체 기능 경락 측정 검사’(EAV검사)를 해 본 결과 간에 피로 물질이 축적되어 있고, 대사 기능의 장애와, 독소 기능이 침착 되어 있으며, 영양 기능 저하 등 간장의 생리적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술이나 담배와 거리가 먼 목회자들에게 왜 이런 간장 질환의 증후군이 번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목회자만이 갖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라고 최서영 박사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생체리듬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생활이 목회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에 의해서 하루하루가 진행되고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요구에 의해서 생활의 패턴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무리한 일정의 생활을 하면서도 축적된 피로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면 부족입니다. 목회자의 대부분이 교인들보다 평균 1-2시간은 일찍 기상을 합니다. 그리고 취침 시간도 교인들보다 늦게 자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루의 수면 시간은 3-4시간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항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됩니다.
영양의 불균형입니다. 목회자는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섭취하기보다는 오히려 간장에 부담스러운 음식을 섭취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은 교회의 인식도 많이 향상되었고 또 목회자들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의례히 목회자는 가난하게 살고 못 먹고 못살아야 한다는 잘못된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영양의 균형이 깨지고 그러면 질병의 감염이 더 위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불규칙과 식사시간의 불규칙으로 인하여 신경성 위장 장애 증상이 많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하다가도 누가 아프다면 달려가야 하고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고 그러므로 인해서 목회자의 생활은 무질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장 장애는 다른 병을 우발시키는 합병 증세까지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모든 질병에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우선 교인들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목사의 기도를 원합니다. 이는 참으로 좋은 현상입니다. 고통 중에서도 목사의 기도로 위안을 받고 또 소망을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선 목회자는 교인이 전염성 질병이든지 아니면 비 전염성 질병이든지 간에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목사도 때로는 신체의 기능이 약해졌을 때 전염성의 질병이 전염될 우려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감감기 환자에게 심방을 갔다 와서 독감감기에 걸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목회자의 마음을 알아주어야 스트레스를 덜 받습니다.
3.목사에게만 아니라 사모님과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모님의 건강을 해치는 요인들은 무엇입니까? 대개의 교회가 목회자의 건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모에게까지 관심을 갖는 교회와 교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모의 건강은 목회에 직접 영향을 미쳐 교회 성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모는 일반 여성들과는 달리 그 환경과 행동 양식이 비교적 특수하기 때문에 건강에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모는 감정의 분출구가 막혀있습니다. 사모는 자신의 감정을 어디에다가 풀 데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응어리진 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자칫하면 정신적인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석 대학 한의학 교수인 이상용 박사는 말하기를 오늘의 ‘사모들은 고민과 갈등 그리고 풀어야 할 숙제 등을 마음의 문을 열고 상의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사모들은 자신만이 앓는 고독의 병을 매일 앓고 있다’고 합니다. 사모에 대한 정당한 위치가 교회에서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모는 목회자도 아니고 성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 사역 연구 소장 송길원 목사는 사모는 행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항상 목사의 그늘에 가리워 조연의 역할만 감당을 하고 또 교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등 행동의 객체로서 심판대에 오르는 경우가 많으며 이로 인하여 사모는 교인들의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하여 몸부림 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들로부터 완벽한 인간상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입니다. 모든 면에서 일반 주부들과 비슷하지만 교인들은 사모의 일 거수 일동을 주시해 보고 있다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가차 없이 입방아를 찧어대기 시작합니다. 자녀 교육 문제, 또는 목회자의 내조, 그리고 새벽기도 등에서 초인적인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심지어는 화장까지 교인들의 말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모는 교인들의 완벽 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매일 매일 계속되는 생활이 반복되는 동안 사모들은 감정을 정화시키지 못하고 억눌러야 하는 생활이 계속되면 간장의 화(火)가 누적되어 협심증, 위궤양, 노이로제, 두통, 피부 질환 등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계속적인 억압을 할 경우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며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 되고 특히 성인병의 기초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빨리 억압된 것을 분출 시켜야 합니다.
아울러 목회자의 자녀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삽니다. 같은 처지에 있더라도 목사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목회자의 자녀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그동안 비밀이지만 오늘 밝히면 우리 아이들에게 용돈 주시고 맛있는 것 사주시고 관심갖고 기도해 주신분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관심갖고 용돈 주신분들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목회자의 자녀에게도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목회자의 자녀가 잘못되면 덕이 되지 않는데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우리 집에 두 아이가 잘 성장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큰애는 대학을 두 군데나 나오고, 작은애는 카이스트 대학원을 나와서 엘지전자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다 여러분이 관심갖고 기도해주신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자녀들에게도 깊은 관심과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사모의 건강을 위하여 좀 더 관심을 갖자는 의미에서 이 보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교회에서는 목회자에 대하여 어느 교회보다도 잘 해주고 있다라고 해도 되겠습니까?(아---멘) 때가 되면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시라고 수박이라도 한덩어리사주시고 하면 좋겠지요. 이번에는 제 생일이 지나갔는데 벌써 나이가 들어서 회갑이었습니다. 회갑 기념으로 여러분이 승용차 한 대를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지금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위해서 항상 기도로 도와주시고, 또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면 더욱 건강한 몸으로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이 할 일이 있습니다.
4.바울의 동역자 처럼 목회자의 동역자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시민교회 정위영집사님이 계시는데 역전파출소 치안센타장님이시기도 하고, 경찰서 선교회 회장이시기도 하셨던 분인데, 시민교회 목사님 하고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데 목사님이 그분을 얼마나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자세한 것은 다 말씀 드릴수가 없고 목사님이 자산을 갔으면 했더니 등산장비를 준비해주신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자랑하시는데 부럽기도 했는데, 우리교회도 있기 때문에 공감을 했습니다.
우리교회도 이번에 기획위원회에서 당회에서 여러분과 장로님들이 결정 해주셨는데 사모님 아파트 32평 사드리고 2019년 기획위원회와 당회에서 저에게는 회갑선물(2020.8.30.일 회갑)로 제네시스 타시라고 해 주시면서 빨리 차 계약하시라고 하시면서 차량헌금을 해주시는 분들 다 말 할 수 없이 감사한 일들입니다. 아직 차령 계약하지 않았습니다. 죄송한 일이기는 한데 여러분이 작년 당회 때 해주시기로 결정해주셨지만 올해 10월말이면 교회 건축 빚을 다 갚고 난 다음에 사겠습니다. 11월 초에 차가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네시스 사시라고 하는데 죄송한데 여러분이 양보하셔서 그 밑에 그랜져로 사면 안되겠습니다. 제네시스가 한 2천만원 더 비싼데 그 밑에급인 그랜져 타도 무방합니다. 장로님들도 그렇게 해주세요. 제가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헌금하는 분들의 마음도 감사하고 모두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동역자의 역할을 합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보시면 훌륭한 동역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더 임하기를 바랬습니다. 목사에게도 잊어지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결론 부분으로서 문안을 하는 부분입니다. 로마에는 많은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많은 성도들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교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안부를 전합니다. 누가 내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이 끝까지 기억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한사람씩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잊혀지지 않은 24명은 바울의 뇌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교회의 목사는 그 교회의 교인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기억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교인들 중에서도 교회에 충성하는 성도라면 아무리 교인이 많아도 담임목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충성을 하고, 빠지지 않고 열심히 출석을 하며, 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려서, 매주 주보에 그 이름이 올라가는 사람은 담임목사가 그 이름을 잊지 않습니다. 그것은 헌금을 많이 하는 교인을 편애해서가 아닙니다. 그만큼 충성하는 사람은 목사의 관심과 시선을 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목사의 기억 속에 깊이깊이 기억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 충성하여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충성도 안하고, 예배에도 잘 빠지고, 십일조 헌금도 하지 않고, 감사 예물도 하지 않고, 교회 일에 사사건건 불평과 원망이나 하고, 신앙생활은 자기 편한대로 제 맘대로 하고, 교역자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은, 목사가 그 교회를 떠난 뒤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에게 기억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비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20:15절‘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고 하였습니다. 행10장의 고넬료는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이 기억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24명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문안 인사를 하고 있는데 그 중에 오늘 본문 말씀은 특별히 뵈뵈 집사를 천거하는 내용의 말씀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전하는 문안의 인사말입니다.
1) 뵈뵈는 어떤 사람입니까?
롬16:1-2절‘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바울은 고린도에서 머물 때에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가지고 갈 사람을 물색하던 중에 겐그리아 교회의 충성스러운 여자 집사 뵈뵈를 택하여 그에게 편지를 들려 보내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뵈뵈 집사가 이 글을 가지고 가면 어떻게 할 것을 두 가지를 당부하였습니다.
주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서 영접을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것을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는 저가 바울의 보호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자 집사가 바울의 보호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위기를 당했을 때 목숨을 걸고 바울을 보호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이 목사를 보호해 주는 교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목회 이외에 다른 것에 신경을 많이 쓰면 목회하기가 어렵습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또 목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아픔을 함께 하며 지켜주는 그런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2)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황제인 글라우디오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을 때(AD 49년)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왔다가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이 하던 일과 같은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바울과 친숙해지고 이때부터 바울의 신실한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에도 이들 부부는 항상 따라 다니면서 바울의 사역을 도와주었습니다(행 18:18,26) 후에 바울은 로마서 16:4절에서 이들 부부를 소개하며‘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갈 6:6절‘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는데, 사도 바울은 이들 부부가 좋은 것을 함께 할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무의미하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그 만남을 소중한 기회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바로 만남을 소중한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의 만남을 의미있게 받아들였으며, 바울 사도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서 바울의 사역을 동역하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습니다. 이들 부부의 이름이 행 18:18절과 행 18:26절, 롬 16:3절과 고전 16:19절 네 곳에 등장하는데, 대부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재미있는 것은 그중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고전 16:19절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전 16:19절에서 남편의 이름이 먼저 기록된 것은 아마도 처음에는 남편 아굴라의 신앙이 아내인 브리스길라만 못하였으나, 후에 바울의 사역을 돕는 중에 신앙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개인도 아니고 부부가 목회의 동역자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이들 부부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자신들이 아니라 바울 사도를 돕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은 신실한 믿음의 부부들이 우리 교회에도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3)실라가 있습니다.
실라는 바울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빌립보 성에서 점쟁이의 여종을 구원시키자 그 주인이 고소를 하여 바울이 투옥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실라도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습니다. 익히 아시는 대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감옥에서 벌어졌는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끌러졌습니다.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도망하지 않고 두려워하고 있는 간수장이에게 전도해서 간수장이의 온 가족을 구원하였던 것입니다. 실라는 긍정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바울은 실라로 인해서 마음에 큰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4)디모데가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 사도의 영의 아들입니다. 바울이 매우 아끼는 제자였습니다. 이들은 바울 사도와 함께 마케도니아 지방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반대와 핍박을 하자 우선 바울만 아덴 지방으로 급히 피신시켰습니다. 바울은 아덴을 거쳐 고린도까지 왔지만 두고 온 실라와 디모데 때문에 매우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사히 고린도에 도착하자 바울은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에게 든든한 동역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디 바울 사도 뿐이겠습니까? 이 땅의 목회자들도 정말 좋은 동역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실라와 디모데처럼 목회자로 하여금 목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 줄 수 있는 든든한 동역자들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5)유스도와 그리스보가 있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성경에서 이곳에만 단 한번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는 회당 옆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던 바울을 유대인들이 해치려고 할 때 그를 가장 안전하게 피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 그리스보는 회당장이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복음을 듣고 주를 영접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훗날 바울은 고린도 서신을 쓰면서 자신은 이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고전 1:14절). 회당장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제 아무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반대가 심한 고린도에서 무려 1년 6개월 동안이나 머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회당장 그리스보와 회당 옆집에 살던 디도 유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했습니다. 이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사도 바울을 도왔습니다.
이 세상에는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더불어 함께 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도 마찬 가지입니다. 아무리 목회자가 날고 기는 사람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주의 일을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행6장을 보면 그래서 사도들을 도와줄 일곱집사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의 원래 정신은 사도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입니다. 즉 목회자의 목회를 도와줄 동역자로 직분자를 세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협력자와 방해꾼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어떤 사람은 방해꾼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방해꾼은 좋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가는 곳마다 고마운 분들이 있었으며, 바울 사도는 그분들의 도움과 협력 그리고 기도와 위로에 힘을 입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 드린 사람들 말고도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로 바나바, 누가, 디도, 마가, 뵈뵈 집사, 두기고, 에바브로 혹은 에바브로 디도 등이 있습니다. 이 분도 한결같이 사도 바울을 물심양면으로 협력하였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협력이 부족한 저로 하여금 위로와 용기를 갖게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저를 잘 도와주신 교우 여러분들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통해서 모든 분들이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6)끝으로, 목회자를 위하여 협력하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목회자를 위하여 매일 매일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부탁하기를 엡6:19절‘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목사의 심정은 언제나 성도들을 만나고 싶고 또 여러분의 사정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일일이 찾아갈 수가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때는 어떠한 사정이나 의논할 일이 있으면 시간에 구애 없이 찾아주시고 전화를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가정에 무슨 애경사나 우환이나 어려운 일등 특별한 일이 있으므로 기도가 요청될 때 지체 없이 미리 연락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들 다 알고 있고 목사만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성도가 물으면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목사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실수를 할 때도 있고 잘못을 할 때도 있습니다. 때는 뒤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말하지 말고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문제를 비난이나 악평하는 말을 하지 말고 반드시 먼저 담임목사와 상담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를 돕는 것입니다.
수일간 출타를 해야 할 경우에는 꼭 알려주고 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목사는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목사는 평생 배우는 사람입니다. 목사가 많이 배울 수 있도록 협조를 해 주어야 합니다. 목사가 배워서 돈 모으고 땅 사는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지 교회를 위해서 교인들을 위해서 더 좋은 설교와 더 좋은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와 좋은 관계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목사와 교인의 관계가 아닌 목자와 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관계가 파괴되어 서먹서먹해지면 성도 개인의 커다란 영적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목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영적 양식이 그를 통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축복권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권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자신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목회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말씀을 전하여 영적 양식을 먹이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양은 목사에 대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목양의 사역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목사가 목회를 근심으로 하지 않고 기쁨으로 할 수 있도록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적, 물질적 대접은 목사가 목회의 보람을 느끼며 일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지치고 상처받아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랑하는 양들의 눈물어린 기도는 샘솟는 힘을 줍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합니다. 즐거움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영육 간에 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이 합심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켜서,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상주감리교회 목사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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